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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이상(李箱)의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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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6.
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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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상(李箱)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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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러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과 같은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피가 임리(淋漓)한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破船)에서 떨어져 표랑(漂浪)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船體)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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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N, 등의자(藤椅子)에 기대앉아 흐릿한 담배 연기 저편에 반나마 취해서 몽롱한 상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고 '현대의 비극'을 느끼고 소름 쳤다. 약간의 해학과 야유와 독설이 섞여서 더듬더듬 떨어져 나오는 그의 잡담 속에는 오늘의 문명의 깨어진 메커니즘이 엉켜 있었다. 파리에서 문화 옹호를 위한 작가 대회(作家大會)가 있었을 때 내가 만난 작가나 시인 가운데서 가장 흥분한 것도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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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우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는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한(?) 정령(精靈)이었다. 악마더러 울 줄을 모른다고 비웃지 말아라. 그는 울다울다 못해서 인제는 누선(淚腺)이 말라 버려서 더 울지 못하는 것이다. 상이 소속한 20세기의 악마의 종족들은 그러므로 번영하는 위선(僞善)의 문명에 향해서 메마른 찬웃음을 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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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고 어지럽고 게으른 시단(詩壇)의 낡은 풍류에 극도의 증오를 품고 파괴와 부정에서 시작한 그의 시는 드디어 시대의 깊은 상처에 부딪혀서 참담(慘憺)한 신음 소리를 토했다. 그도 또한 세기의 암야(暗夜) 속에서 불타다가 꺼지고 만 한 줄기 첨예(尖銳)한 양심이었다. 그는 그러한 불안 동요 속에서 동(動)하는 정신을 재건하려고 해서 새 출발을 계획한 것이다. 이 방대(尨大)한 설계의 어귀에서 그는 그만 불행이 자빠졌다. 상의 죽음은 한 개인의 생리의 비극이 아니다. 축쇄(縮刷)된 한 시대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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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단과 또 내 우정의 열석(列石) 가운데 채워질 수 없는 영구한 공석을 하나 만들어 놓고 상은 사라졌다. 상을 잃고 나는 오늘 시단이 갑자기 반세기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 내 공허를 표현하기에는 슬픔을 그린 자전(字典) 속의 모든 형용사가 모두 다 사치하다. 고 이상―내 희망과 기대 위에 부정의 낙인(烙印)을 사정없이 찍어 놓은 세 억울한 상형 문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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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만에 상을 만난 지난 3월 스무날 밤, 도쿄 거리는 봄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왔다는 상의 편지를 받고 나는 지난겨울부터 몇 번인가 만나기를 기약했으나 종내(終乃) 센다이를 떠나지 못하다가 이날이야 도쿄로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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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숙소는 구단(九段)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이 날개 돋친 시인과 더불어 도코 거리를 만보(漫步)하면 얼마나 유쾌하랴 하고 그리던 온갖 꿈과는 딴판으로, 상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기거(起居)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을 상아(象牙)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엽이 코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어두운 표정이 가뜩이나 병들어 약해진 벗의 마음을 상해 올까 보아서 나는 애써 명랑을 꾸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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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 얼굴이 아주 피디아스의 제우스 신상(神像) 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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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었더니 상도 예의 정열 빠진 웃음을 껄껄 웃었다. 사실은 나는 듀비에의 〈골고다〉의 예수의 얼굴을 연상했던 것이다. 오늘 와서 생각하면, 상은 실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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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 누우라고 해도 듣지 않고 상은 장장 두 시간이나 앉은 채 거의 혼자서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엘먼을 찬탄하고 정돈(停頓)에 빠진 몇몇 문운(文運)을 걱정하다가 말이 그의 작품에 대한 월평에 미치자 그는 몹시 흥분해서 속견(俗)을 꾸짖는다. 재서(載瑞)의 모더니티를 찬양하고 또 씨의 〈날개〉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이의(異議)가 있다고도 말했다. 나는 벗이 세평(世評)에 대해서 너무 신경과민한 것이 건강을 더욱 해칠까 보아서 시인이면서 왜 혼자 짓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세상이야 알아서 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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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말을 들으면,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 몇 권의 상스러운 책자가 있었고, 본명 김해경(金海卿) 외에 이상이라는 별난 이름이 있고, 그리고 일기 속에 몇 줄 온건하달 수 없는 글귀를 적었다는 일로 해서, 그는 한 달 동안이나 ○○○에 들어가 있다가 아주 건강을 상해 가지고 한 주일 전에야 겨우 자동차에 실려서 숙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상은 그 안에서 다른 ○○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기(手記)를 썼는데 예의 명문(名文)에 계원(係員)도 찬탄하더라고 하면서 웃는다. 니시간다 경찰서원 속에조차 애독자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하고 나도 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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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그 부근에 계신 허남용 씨 내외가 죽을 쑤어다 준다고 하고, 마침 소운(素雲)이 도쿄에 와 있어서 날마다 찾아 주고 주영섭(朱永涉), 한천(韓泉) 여러 친구가 가끔 들려 주어서 과히 적막하지는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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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낮에 다시 찾아가서야 나는 그 방이 완전히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인 것을 알았다. 지난해 7월 그믐께다. 아침에 황금정(黃金町) 뒷골목 상의 신혼 보금자리를 찾았을 때도 방은 역시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캄캄한 방이었다. 그날 오후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벗이 애를 써 장정을 해준 졸저(拙著) 《기상도》(氣象圖)의 발송을 마치고 둘이서 창에 기대서서 갑자기 거리에 몰려오는 소낙비를 바라보는데, 창전(窓前)에 뱉는 상의 침에 빨간 피가 섞였었다. 평소부터도 상은 건강이라는 속된 관념은 완전히 초월한 듯이 보였다. 상의 앞에서 설 적마다 나는 아침이면 정말(丁抹) 체조(體操) 잊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무릇 현대적인 퇴폐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아끼는 까닭에 건강이라는 것을 늘 너무 천대하는 벗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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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은 스스로 형용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하면서 모처럼 도쿄서 만나 가지고도 병으로 해서 뜻대로 함께 놀러 다니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미진(未盡)한 계획은 4월 20일께 도쿄서 다시 만나는 대로 미루고 그때까지는 꼭 맥주를 마실 정도로라도 건강을 회복하겠노라고, 그리고 햇볓이 드는 옆방으로 이사하겠노라고 하는 상의 뼈 뿐인 손을 놓고 나는 도쿄를 떠나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캄캄했다. 상의 부탁을 부인께 아뢰려 했더니, 내가 서울 오기 전날 밤에 벌써 부인께서 도쿄로 떠나셨다는 말을 서울 온 이튿날 전차 안에서 조용만(趙容萬) 씨를 만나서 들었다. 그래 일시 안심하고 집에 돌아와서 잡무에 분주하느라고 다시 벗의 병상을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원망스러운 비보(悲報)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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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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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이 마지막 들려준 말이 기억 속에 너무 선명하게 솟아올라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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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 몇몇 남은 벗들이 상에게 바칠 의무는 상의 피 엉킨 유고(遺稿)를 모아서 상이 그처럼 애써 친하려고 했던 새 시대에 선물하는 일이다. 허무 속에서 감을 줄 모르고 뜨고 있을 두 안공(眼孔)과 영구히 잠들지 못할 상의 괴로운 정신을 위해서 한 암담(暗澹)하나마 그윽한 침실로서 그 유고집(遺稿集)을 만들어 올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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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다. 상은 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오늘도 내일도 새 시대와 함께 동행(同行)하리라고.
【원문】고 이상의 추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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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림(金起林) [저자]
 
  1937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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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