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新羅[신라] 眞興王[진흥왕]의 在來[재래] 三碑[삼비] 와 新出現[신 출현] 의 磨雲嶺碑[마운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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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域[진역] 의 碑版[비판]은 龍岡[용강] 秥蟬神祠碑[점선신사비]로써 最古[최고] 로 삼는다(西紀[서기] 第一世紀頃[제일세기경]). 그러나 이것은 漢民族[한민족] 의 것이다. 海東[해동]의 民族[민족]에 의하여 西紀[서기] 四一四[사일사] 년에 세워진 것에 永樂好太王[영락호태왕]의 碑[비]가 있으나, 그 所在[소재]가 시방은 半島[반도]의 域外[역외]에 속한다. 震人[진인]에의 하여 震土[진토]에 세워지고, 그러면서도 시방까지 傳[전]하는 것은 現在[현재] 로서는 新羅[신라] 中興[중흥]의 英主[영주] 眞興王[진흥왕]의 紀績碑[기적비] 보다 더 오래 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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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從來[종래] 알려져 있는 것만 해도 昌寧[창녕] ㆍ北漢山[북한산] ㆍ黃草嶺[황초령] 의 三石[삼석]이 있다. 眞興王[진흥왕]의 偉勳鴻業[위훈 홍업] 이 이 정도를 가지고 大端[대단]하다고 할 것은 못되지마는, 이만한 古碑[고비] 가 다 같이 永壽[영수]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오히려 奇異[기이] 하다고 할 만하다. 특히 半島[반도]에 있어서 그렇다 할 것이다.
6
眞興王[진흥왕]의 前記[전기] 三碑中[삼비중] 예로부터 이름이 알려진 것은 黃草嶺[황초령]의 것으로서, 韓百謙[한백겸](明宗[명종] 丁未生[정미생], 仁祖[인조] 己巳卒[기사졸] 西紀[서기] 一五四七[일오사칠] 〜 一六二九[일육이구]) 의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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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沃沮[동옥저], 今咸鏡南道[금함경남도], 新羅眞興王[신라진흥왕], 以今安邊爲比列州[이금 안변 위 비열주], 高原爲井泉郡[고원위정천군], 咸興黃草嶺及端川[함흥 황초령급 단천], 亦有巡狩碑[역유순수비], 則東沃沮亦有時爲新羅所奪有矣[즉 동옥저 역 유시 위신라 소탈 유의].
8
라고 적혀 있다. 韓氏[한씨]의 敍述[서술]이 무엇에 依據[의거]한 것인지는 시방 상고할 수 없으나, 그의 平直[평직]한 文意[문의]로 보아 確乎[확호] 한 依據[의거]가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9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와 거의 同時[동시]의 것인 車天輅[차천로] (明宗[명종] 丙辰生[병진생], 光海[광해] 乙卯卒[을묘졸] 西紀[서기] 一五五六[일오오육] 〜 一六一五[일육일오])의 〈五山說林[오산설림]〉 草藁[초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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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春嶺[선춘령], 去甲山五日程[거갑산오일정], 近白頭山下[근 백두산하], 有短碑隱草中[유단비은초중], 申公砬爲南兵使[신공립위남병사], 打而來[타이래], 余得見之[여득견지], 高僅五尺[고근오척], 廣二尺許[광이척허], 字如筆陣圖而小[자여필 진도이소], 太半缺落[태반결락], 其曰皇帝者[기왈 황제자], 高句麗王也[고구려왕야], 有喙部某者六七人[유훼부모자육칠인], 余不解喙部爲何官[여 불해 훼 부위 하관], 其後許荷谷篈曰[기후허하곡봉왈], 曾見古史[증견고사], 喙不猶今大夫云[훼부유금대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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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 것은 역시 黃草嶺碑[황초령비]를 말한 것으로서, 宣春嶺[선춘령]이라는 것은 지금의 黃草嶺[황초령]을 가리키고, 高句麗王[고구려왕]이란 것은 이 땅이 高句麗[고구려] 舊疆[구강]임에 因[인]한 臆測[억측]에 不外[불외] 하다. 南兵使[남병사]란 것은 鏡城[경성]의 北兵使[북병사]에 대하여 世祖十一[세조십일] 년 鎭[진]을 北靑[북청]에 두었던 南道兵馬節度使[남도 병마절도사]라고 불리운 것으로서, 申砬[신립]은 宣祖[선조] 癸未[계미] (西紀[서기] 一五八三[일오팔삼])에는 穩城府使[온성부사]로 가 있어 尼湯介[니탕개] 의 難[난]을 平定[평정]했고, 同[동] 丁亥[정해]의 損竹島[손죽도] 倭變[왜변]에는 邊協[변협]과 함께 全羅左右防禦使[전라좌우방어사]로 派遣[파견] 되었고, 壬辰[임진](西紀[서기] 一五九二[일오구이])의 亂[란]에는 都巡邊使[도 순변사] 로서 忠州[충주]에서 戰死[전사]한 사람이므로, 그가 南兵使[남병사] 로서 眞興王碑[진흥왕비]를 拓出[척출]한 것은 癸未[계미] ㆍ丁亥年間[정해년간] 일 것이요, 만일 下記[하기]의 洪良浩[홍양호] 所傳[소전] 과 같이 申砬[신립]이 南兵使[남병사]가 아니고 北兵使[북병사]였을 때 에이 碑[비]를 拓來[척래]했다고 하면, 그것은 明宗[명종] 十六[십육] 년 (西紀[서기] 一五六一[일오육일]) 前後[전후]의 일일 것이므로 (文獻備考[문헌비고] 卷八二[권팔이] 禮考禮臣條[예고예신조] 參照[참조]) 碑[비]의 出現[출현] 年代[연대]는 오히려 이보다 二○[이○]년쯤 빠른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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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韓百謙[한백겸]이 보았다는 拓本[척본]이 果然[과연] 車天輅[차천로] 의 것과 同一[동일]한 根源[근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는 갑자기 斷言[단언] 하기 어려우나, 아뭏든 明宗[명종]의 末年[말년] 또는 宣祖[선조] 의 第十二王子[제십이왕자] 仁興君[인흥군] 瑛[영]의 아들 朗善君[낭선군] 俣[오] (仁祖[인조] 丁丑生[정축생], 西紀[서기] 一六三七[일육삼칠]〜?)와 朗原君[낭원군] 偘[간](仁祖[인조] 庚辰生[경진생], 肅宗[숙종] 庚辰卒[경진졸] 西紀[서기] 一六四○[일육사○] 〜 一七○○[일칠○○])은 다같이 文史[문사] 를 좋아하고, 특히 俣[오]는 어려서부터 書[서]를 잘 하여 〈臨池設林[임지설림]〉〈大東金石帖[대동 금석첩]〉 등을 編纂[편찬]하였는데, 〈金石帖[금석첩]〉에는 三韓[삼한]의 古石[고석]을 收錄[수록]하여 眞興王碑[진흥왕비] 등도 그 중에 넣었기 때문에 一般[일반]의 寓目[우목]할 기회를 넓혔으며, 그래서 漸次[점차]로 學者[학자]들의 評隲[평척]의 資料[자료] 로되 기에 이르렀다. 李瀷[이익](肅宗[숙종] 辛酉生[신유생], 英祖[영조] 癸未卒[계미졸] 西紀[서기] 一六八一[일육팔일] 〜 一七六三[일칠육삼])의 〈星湖僿說[성호사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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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方石刻[동방석각]. 我東方[아동방], 石刻古墳亦多[석각고분역다], 三韓以前無所考[삼한이전무소고], 近世王孫郎原ㆍ所輯大東金石錄[근세왕손낭원ㆍ소집대동금석록] 殆無遺漏[태무유루], 慶州有太宗武烈王陵碑[경주유 태종무열왕릉비], 又有大角干金庾信墓碑[우유대각간김유신묘비], 三水縣有草芳院碑[삼수현 유초방원 비], 即新羅眞興王巡狩記[즉신라진흥왕순수기], 意者悉直始屬於新羅[의자 실직 시속어 신라], 則嶺東之地[즉영동지지], 皆古所有[개고소유], 而鐵嶺之外[이철령지외], 亦其巡狩所及也[역기순수소급야], 後句麗拓地傳海[후구려척지전해], 則不復有此矣[즉불복유차의].(類選[유선] 卷之五下[권지오 하], 技藝門[기예문], 書法[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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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 것이 그 一例[일례]로서, 文中[문중]의 郎原[낭원]은 생각컨대 朗善[낭선] 의 잘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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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碑[비]는 申砬[신립] 이후, 때에 따라서 晦顯[회현]이 있어 洪良浩[홍양호] (景宗[경종] 甲辰生[갑진생], 純祖[순조] 壬戌卒[임술졸], 西紀[서기] 一七二四[일칠이사] 〜 一八○二[일팔○이])의 〈耳溪集[이계집]〉의 卷[권] 十六[십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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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少時見野史[여소시견야사], 云新羅眞興王[운신라진흥왕], 北巡過鐵嶺至沃沮[북순 과철령 지옥저], 定界立石[정계입석], 我穆陵時[아목릉시], 申將軍砬爲北兵使[신장군립위북병사], 印來傳世[인래전세], 余於是偏問申氏之後[여어시편문신씨지후], 無有知者[무유지자], 其槪然[기개연], 每逢北伯新赴者[매봉북백신부자], 勸云[권운], 朝廷新設長津府[조선신설장진부], 在咸興甲山之間[재 함흥 갑산지간], 中有黃草嶺[중유황초령], 距咸幾二百里[거 함기 이백리], 有碑在嶺上[유비재령상], 顚仆山底[전부산저], 上下皆折[상하개절], 只存半腰[지존반요], 見其文[견기문], 乃眞興王北巡碑也[내 진흥왕 북순비야], 印送一本[인송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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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 것과, 金正喜[김정희](正祖[정조] 丙午生[병오생], 哲宗[철종] 丁巳卒[정사졸] 西紀[서기] 一七八六[일칠팔육] 〜 一八五六[일팔오육]) 의 〈阮堂尺牘[완당척독]〉 卷[권] 一[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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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碑[진흥비], 一顯於郎善之世[일현어낭선지세], 一顯於俞文翼公之世[일현어유 문익공 지세], 遂無問津者[수무문진자], 尹咸興光濩略拓幾本[윤함흥광호략적기본], 其後因官拓而民遂埋之[기후인관척이민수매지], 無形影于今四十餘年[무형영 우금 사십여 년], 第於此碑有苦心[제어차비유고심], 每因北行者[매인 북행자], 廣要搜覓[광요수멱], 而竟無一人應之者[이경무일인지자], 彼烏足以知此[피오족이지차], 朗善之世[낭선지세], 此碑有二段[차비유 이단], 俞文翼之世[유문 익지세], 此碑只此一段[차비지차일단], 而下一段則更無以得之矣[이하일단즉갱무이득지의], 若復更得下一段[약부갱득하일단], 恐不可必[공불가필]…………. (又[우] 阮堂集[완당집] 卷一[권일], 新羅管境碑答彛齋問[신라관경비답이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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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한 것으로써 槩畧[개략]을 알 수 있다. 碑[비]의 再發見者[재 발견자] 를 耳溪[이계]는 俞漢敦[유한돈]이라 한 데 대하여, 阮堂[완당]은 굳이 俞文翼公[유문익공] 拓基[척기]를 標出[표출]한 것은 어떠한 理由[이유]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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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拓基[척기]의 官位[관위]가 높고 名聞[명문]이 넓어 俞氏[유씨] 一門[일문] 의 尊長[존장]이었던 때문이 아닐까? 拓基[척기]는 당시 領相[영상] 이었고, 漢敦[한돈]은 拓基[척기]와 같은 行列[행렬]인 偉基[위기]의 孫子[손자]인즉, 行列[행렬]로써 본다면 그의 卑屬[비속], 官[관]은 府使[부사]에 그친 사람이었다(杞溪[기계] 〈俞氏世譜[유씨세보]〉에 依[의]함). 阮堂[완당] 의 〈金石過眼錄[금석과안록]〉에 〈俞文翼公家藏金石錄[유문익공가장금석록] 即詮次碑目者[즉 전차비 목자]) 〉 를 引用[인용]하여, 草芳院[초방원] 의 所屬[소속]을 論說[노설]한 一節[일절]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阮堂[완당] 이 처음으로 眞興王碑[진흥왕비]를 본 것은, 漢敦[한돈]이 族長[족장]에게 贈呈[증정]한 拓本[척본]에 依據[의거]한 것으로 짐작되는 點[점] 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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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是新羅眞興王殘碑[차시 신라 진흥왕 잔비], 碑在咸鏡道咸興黃草嶺[비재 함경도 함흥 황초령], 碑久亡禿[비구망독], 彛齋尙書觀察是道[이재상서 관찰 시도], 宣揚仁風[선양인풍], 百度俱興[백도구흥], 潛光幽懿無不闡發[잠광유의무불천발], 乃至蒐訪古蹟[내지수방고적], 得此碑於土中[득차비어토중], 此碑即我東金石之祖[차비 즉아 동 금석 지조], 二千餘年舊蹟復大明於世[이 천여 년 구적복대명어세], 不啻如黃龍嘉禾木蓮甘露之瑞而已[불시여 황룡 가화 목련 감로 지서이이], 甚盛事也[심성사야], 余嘗得舊拓本[여상득구척본], 證定年月地理人名職官[증정 년월 지리 인명 직관], 著爲碑考[저위비고], 以正海東金石錄文獻備考之誤[이 정해 동 금석록 문헌비고 지오], 較今殘石[교금잔석], 尙多五十五字[상다오십오자], 而其泐損[이기늑손], 又爲十六字矣[우위십육자의], 眞興二十九年[진흥 이십구년], 在中國爲陳光大二年[재중국위진광대이년] 北薺天統四年後周天和三年後梁天保七年[북제 천통 사년 후주 천화 삼년 후량 천보 칠년], 碑之字體[비지자체], 恰與齊梁間殘碑造像記相似[흡 여 제량간 잔비조상기 상사], 蓋歐陽黑水碑東來以後[개구양 흑수비 동래 이후], 東國碑版書募歐體[동국 비판서모구체], 其夙慕中華[기숙모중화], 自眞興時已然耳[자진흥시이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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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 것과 같이 眞興王碑[진흥왕비]가 다시 世上[세상]에 알려지고, 그 聲價[성가] 와 함께 拓本[척본] 流布[유포]의 勢[세]를 드높인 것은, 純祖末[순조말] 憲宗[헌종] 初年[초년](西紀[서기] 一八三五[일팔삼오] 前後[전후]) 咸鏡道[함경도] 觀察使[관찰사]가 된 彛齋[이재] 權敦仁[권돈인]이 阮堂[완당] 과 素誼[소의]가 깊었으며, 또한 두 사람의 好尙[호상]이 같았 음으로 해서, 兩者間[양자간]에 이 碑[비]에 관한 頻繁[빈번]한 提擧[제거] 가있었음에 基因[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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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哲宗[철종] 三[삼]년(西紀[서기] 一八五二[일팔오이]), 阮堂[완당]과는 問學[문학] 의 緣[연]을 가진 梣溪[침계] 尹定鉉[윤정현]이 北伯[북백]이 되자, 碑[비]를 保護[보호]하기 爲[위]하여 이것을 嶺上[영상]의 原位置[원 위치] 로부터 嶺下[영하]인 舊[구] 中嶺[중령] 附近[부근](現[현] 咸州郡[함주군] 下岐川面[하기천면] 鎭興里[진흥리])로 옮기고, 閣[각]을 세워 碑[비] 의 殘片[잔편]을 그 壁[벽]에 박고 그 위에 또 阮堂[완당]에게 「眞興北狩古竟[진흥 북수 고경]」이라는 額[액]을 쓰게 하여 이것을 碑[비] 위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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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草嶺[황초령]의 碑[비]에 대하여 처음으로 鑑賞[감상] 以上[이상]의 史眼[사안]을 돌린 사람은 星湖[성호]보다 조금 뒤인 申景濬[신경준] (肅宗[숙종] 壬辰生[임진생], 正祖[정조] 辛丑卒[신축졸] 西紀[서기] 一七一二[일칠일이] 〜 一七八二[일칠팔이])으로서, 朝鮮歷史地理書[조선 역사 지리서] 의 白眉[백미]라고 할 만한 그의 著[저]〈疆域志[강역지]〉 卷四[권사]에 「草芳院[초 방원」이라는 題[제]하여 眞興王[진흥왕]의 「巡狩定界碑[순수 정계비]」 文略[문략]을 紹介[소개]하고,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의 文[문]을 引用[인용]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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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按[우안], 草芳院[초방원], 在今咸興府北百餘理黃草嶺下[재금 함흥부 북 백여리 황초령하], 坊與地勝覽作黃[방여지승람작황], 坊黃音相近[방황음상근], 海東集古錄[해동 집고록], 碑十二行[비십이행], 行三十五字[행삼십오자], 全碑爲四百二十字而滅泐不可辨[전 비위 사백이십자 이 멸륵 불가변], 可辨者僅二百七十八字[가변자 근 이백칠십팔자], 今考新羅本紀[금고신라본기], 眞興王十六年戊子冬十月[진흥왕십육년무자동십월], 巡北漢山[순북한산], 拓定封疆[척정봉강], 十二月至自北漢山[십이월지자북한산], 所經州郡復一年租[소 경주군 복일년조], [則戊子果眞興巡狩咸興之年[즉무자과진흥순수함흥지면], 而八月定界[이 팔월 정계], 十月至北漢[십월지북한], 十二月還都[십이월환도], 八月事特逸於史耳[팔월사특일어사이], 當三國鼎峙之時[당삼국정치지시], 新羅之地[신라지지], 不得過比列忽[부득과비열홀], 今之安邊府也[금지 안변부야], 三國統合之後[삼국 통합 지후], 及不能過泉井[급불능과천정], 泉井今之德源 府也[천정금지덕원부야], 咸興在安邊之北二百餘里[함흥재안변지북이백여리], 端川在咸興之北三百六十里[단천재함흥지북삼백육십리], 而以巡狩碑觀之[이이 순수비 관지], 端川以南[단천이남], 甞折入於新羅者可知[상절입어 신라자가지], 此國史野乘所不著[차국사야승소부저], 而荒裔片石[이황예편석], 留作千古故事[유작천고고사], 奇哉[기재], 太史公之抽金櫃石室之藏[태사공지추금궤석실지장], 新羅一國放佚舊聞者[신라일국방일구문자], 誠得史家之體也[성득 사가 지체야], 端川碑文[단천비문], 今未及考[금미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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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景濬[신경준]은 博學多識[박학다식] 특히 輿地[여지]의 學[학]에 밝아서, 英祖[영조] 命撰[명찬] (西紀[서기] 一七七○[일칠칠○])의 〈文獻備考[문헌비고]〉 는 實[실]은 景濬[경준]의 〈輿地考[여지고]〉를 權輿[권여] 로 하여 推廣[추광]한 것으로, 이 眞興王碑[진흥왕비]에 관한 文[문]은 거의 同文[동문]을 〈備考[비고]〉의 「歷代國界[역대국계]」에 揭出[게출] 하였다 (增補文獻備[증보 문헌비] 考卷十四[고권십사]). 또 이 글은 安鼎福[안정복] 의 〈東史綱目[동사강목]〉, 韓鎭書[한진서]의 〈海東繹史[해동역사] 地理考[지리고]〉 등에 引用[인용]되어서 新羅[신라] 北疆論考[북강논고] 의 左券[좌권] 이 되었는데, 丁若鏞[정약용]의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 는 그 沃沮考[옥저고]에서 이에 言及[언급]은 하였으나 正史[정사]에 記錄[기록] 이 없음으로 해서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金正浩[김정호]의 方輿總志[방여총지] 卷二[권이], 歷代志新羅條[역대지신라조]와, 李裕元[이유원] 의 玉磬觚賸記下[옥경고승기하]에 다 三碑[삼비]의 사적을 擧似[거사] 하였으나 異聞[이문] 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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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碑[진흥왕비]에 관한 最古[최고]의 文獻[문헌]인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에 이미 黃草嶺[황초령]과 함께 端川[단천]의 碑[비]를 載錄[재록] 하였지마는, 實物[실물]에 대한 근거가 없었음인지 端川[단천]의 碑[비] 는 거의 問題[문제]삼지 않았고, 黃草嶺碑[황초령비]에 관한 論議[논의] 도 申景濬[신경준] 이후 이렇다 할 만한 發展[발전]을 보지 못하였었는, 金正喜[김정희] 가 나서 北漢山碑[북한산비]를 發見[발견]함에 미쳐 이에 對[대] 한 見解[견해]에 一大進境[일대진경]을 보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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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碑[북한산비]라 함은 三角山[삼각산]의 一南麓[일남록] 僧伽寺[승가사] 의 西南[서남]쪽 巉巖[참암]한 峭峰[초봉]의 頂上[정상]에 있는 것으로, 京城[경성] 의 南山[남산] 또는 景福宮[경복궁]의 前街[전가]에서 彰義門[창의문] 의 맞은편인 山嶺[산령]의 위에 그 兀然[올연]한 立相[입상]을 알아볼수 있다. 이 碑[비]가 있음으로 해서 이 石峰[석봉]에 碑峰[비봉]이라는 이름이 있다. 聖能[성능]의 〈北漢志[북한지]〉(西紀[서기] 七四五[칠사오] 撰[찬])에 「香林寺在碑峰南[향림사재비봉남]」 「僧伽寺在碑峰東[승가사 재비봉 동]」 등으로 적혔음이 이것이다. 僧伽寺[승가사]는 新羅[신라] 以來[이래] 의 名刹[명찰]로서 高麗朝[고려조]에는 國中[국중]에 이름난 靈場[영장] 이었으니 (高麗史[고려사] 肅睿毅宗世家[숙예의종세가] 및 輿地[여지] 勝覽[승람] 卷三[권삼] 漢城府[한성부] 佛宇條[불우조] 參照[참조]), 理致[이치] 로 따지면 이 碑[비]도 당연히 사람의 注意[주의]를 끌었을 터 이지마는, 진작부터 文字[문자]가 刓缺[완결]했음으로 因[인]함인지 古籍[고적]에는 전연 보이지 않는다. 李朝[이조]가 일어나자 漢陽[한양]의 奠都[전도]에 많은 圖讖[도참]이 附會[부회]시킨 俗說[속설]을 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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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博雅[박아] 李德懋[이덕무](英祖[영조] 辛酉生[신유생], 正祖[정조] 癸丑卒[계축졸] 西紀[서기] 一七四一[일칠사일] 〜 一七九三[일칠구삼]) 와 같은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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携同人五六輩[휴 동인 오륙배], 遊三角之西僧伽寺[유삼각지서승가사], 寺北有石室天斵[사 북유석실천착], 中有白佛趺坐[중유백불부좌], 觀癯而口開[관구이구개]. 老婆如也[노파여야], 背有石障刻大蓮花剝落纔辨文曰太平四年甲子[배유석 장각대 연화 박락 재변문왈 태평사년 갑자], 蓋高麗顯宗時[고려 현종시], 契丹主聖宗太平四年[거란주성종태평사년], 距今乙酉八百二年[거금 을유 팔백이년] (西紀[서기] 一七六五[일칠육오]), 西巖有峰亘星[서암 유봉 긍성], 荒碑獨竪[황비독수], 道詵鐫符讖[도선전부참], 曰妖僧無學誤尋龍到此[왈 요승 무학 오심 룡도 차], 德懋咄曰[덕무돌왈], 安得一雙翅[안득일쌍시], 揷吾心溪之腋[삽 오심계지액], 一翥東北向[일저동북향], 拍手狂叫[박수광규], 贊此古物乎[찬차고물호], (雅亭遺稿[아정유고] 卷六[권육] 與族姪光錫書[여 족질 광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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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다. 이제 이 글에 依[의]하여 考古的[고고적] 異聞[이문]을 넓힌다는 것도 문제려니와, 妖僧[요승] 無學[무학] 云云[운운]의 俗傳[속전]을 마치 實見[실견]한 것처러 敍述[서술]한 것은 雅亭[아정]인 연고로 해서 섭섭한 感[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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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 鄭東愈[정동유]의 〈晝永編[주영편]〉(西紀[서기] 一八○五[일팔 ○ 오] 撰[찬]) 一[일]에,
39
世言[세언], 國初定都之日[국초정도지일], 僧無學登三角山[승무학등 삼각산], 循脈而下[순맥이하], 至梁徹坪後龍[지양철평후룡], 則有道詵石碑[즉유 도선석비], 刻無學誤尋到此六字[각무학오심도차육자], 故棄之[고기지], 復循他岡而下[복순타강이하], 至木覔東麓[지목멱동록], 則又有道詵所記[즉 우유 도선 소기], 稱枉尋里[칭왕심리], 故狼貝而歸[고낭패이귀], 定基于仁王山下[정기 우 인왕산하], 末內鄭道傳占景福宮[말내정도전점경복궁], 遂從鄭說云[수종 정설 운], 此乃村師杜撰無據之說而妄言之[차내 촌사 두찬 무거지 설이 망언지], 流行已久[유행이구], 往往有信而傳述者[왕왕유신이전술자], 如車天輅之素善妄言者[여 차천로지소선망언자], 固不足道[고부족도], 象村申公亦有此說[상촌 신공 역 유차설], 良可恠爾[양가괴이], … 高麗之稱京漢陽三百年[고려지칭 경 한양 삼백년], 議欲遷都者亦屢矣[의욕천도자역누의], 豈到我國之初[기도 아국지초], 使無學東走西趲茫昧不知向方之理乎[사 무학 동주 서찬 망매 부지 향방지리호], 風水之家最善說謊[풍수지가최선설황], 其言之不可信類此[기언지불가 신류 차].
40
라 하여 縷縷[누누]히 道詵刻讖說[도선각참설]의 근거 없음을 辨破[변파] 한 것은 적이 마음 든든한 일이라 하겠다.
42
北漢山碑[북한산비]가 眞興王碑[진흥왕비]임을 發見[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徐有榘[서유구](英祖[영조] 甲申生[갑신생] 憲宗[헌종] 乙巳卒[을사졸] 一七六四[일칠육사] 〜 一八四五[일팔사오])의 〈林園十六志[임원십육지]〉 中[중], 怡雲志[이운지] 卷[권] 第五[제오] 「東國金石[동국금석]」 의 條[조]에는 黃草嶺碑[황초령비]를 「眞興巡狩定界碑[진흥 순수 정계비」 로 내세우고, 이어서 「眞興王北巡碑[진흥왕북순비]」라 하여, 【問菴綠】 碑峰在都城彰義門外[비봉재도성창의문외], 有新羅眞興王北巡碑[유신라 진흥왕 북순비], 字皆漫滅[자개만멸], 猶餘十餘字可辨[유여 십여자 가변].
43
이라 한 것을 引用[인용]하였는데, 이것은 金正喜[김정희]와 거의 同時[동시] 일 것이나 혹시 一步[일보] 앞선 것은 아닐까?
44
金正喜[김정희]가 北漢山碑[북한산비]를 읽게 된 것은 純祖[순조] 十六[십육] 년 丙子[병자](西紀[서기] 一八一六[일팔일육]) 七[칠]월의 일로서,
45
〈金石過眼錄[금석과안록]〉에 그 緣起[연기]를 설명하여,
46
此碑人無知者[차비인 무지자], 誤稱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오칭 요승 무학 왕심도 차지비], 嘉慶丙子秋余與金君敬淵[가경병자추여여김군경연], 遊僧伽寺[유승가사], 仍觀此碑[잉관차비], 碑面苔厚[비면태후], 若無字然[약무자연], 以手捫之[이수문지], 似有字形[사유자형], 不止漫缺之痕也[부지만결지흔야], 且其時日[차기시일], 薄苔面映而視之[박태면영이시지], 苔隨字人[태수자인], 折波漫撇依稀得之[절파만별의희득지], 試以紙拓出[시이지척출], 字體與黃草碑酷相似[자체여 황초비혹 상사], 第一行眞興之眞字稍漫[제일행 진흥지진자초만], 而屢拓視之[이누척시지], 其爲眞字無疑也[기위진자무의야], 遂定爲眞興古碑[수정위 진흥고비], 千二百年占蹟一朝大明[천이백년 점적 일조대명], 辨破無學碑吊詭之說[변파무학비적궤지설], 金石之學有補於也[금석지학 유보어야], 乃如是也[내여시야], 是豈吾輩一金石因緣而止也哉[시기 오배 일금석 인연 이지야재], 其翌年丁丑夏[기익년정축하], 又與趙君寅永同上[우 여조군 인영동상] 審定六十八字而歸[심정육십팔자이귀], 其後又得二字[기후 우 득 이자], 合爲[합위]
47
라 하였다. 趙寅永[조인영] 〈雲石集[운석집]〉 卷一〇 [권일 〇] 의 〈僧伽寺訪碑記[승가사방비기]〉와, 〈阮堂尺牘[완당척독]〉卷一[권일] (又[우] 阮堂[완당] 集[집] 卷三[권삼])의 〈與趙雲石寅永[여 조운석인영] 一[일]〉과 아울러 참고할 것이다.
48
金正喜[김정희]는 二四[이사]에 燕都[연도]에 가서 阮元[완원] 翁方綱[옹방강] 등의 知遇[지우]를 받아 그의 號阮堂[호완당]도 阮藝臺[완예대]를 사모 하는 나머지 생긴 것이라 말할 정도로 깊이 實事求是[실사구시]의 學風[학풍]에 感到[감도]한 바 있었고, 兼[겸]하여 小學[소학]을 연구하고, 海東金石學[해동 금석학] 의 祖[조]로 불리운 사람인데, 眞興[진흥]의 二碑[이비] 를 얻게 되자 反覆[반복] 比量[비량], 字[자]를 辨[변]하고 史[사]를 상고 하여, 드디어 훌륭히 그 幽光[유광]을 闡發[천발]하고야 말았다. 一部[일부] 〈金石過眼錄[금석과안록]〉이 곧 그것이다. 이제 와서 본다면 間或[간혹] 失考[실고]도 없지 않지마는, 大體[대체]에 있어서 精敏雅洽[정민아흡] 하여 敬服[경복]하고도 남음이 있다. 眞興[진흥]의 碑[비]에 不刊[불간] 의 功[공]을 남겼다 할 것이다.
49
다만 金正喜[김정희]에게는 旣知[기지]의 것에 깊이 傾倒[경도]하는 反面[반면]에 未見[미견]의 것에는 오히려 沒却[몰각]도 不辭[불사]하는 風[풍] 이 있다. 〈金石過眼錄[금석과안록]〉에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의 文[문]을 引用[인용] 하고서는,
50
正喜按[정희안], 井泉郡今之德源[정천군금지덕원], 非高原也[비고원야], 端川之有巡狩碑[단천 지유 순수비], 亦無明據[역무명거].
51
라고 疑問[의문]을 집어넣고, 다시 〈文獻備考[문헌비고]〉의 文[문]을 引用[인용] 하고서는,
52
正喜按[정희안], 眞興王元年爲庚申[진흥왕원년위경신], 十六年爲乙亥[십육년 위 을해], 二十九年爲戊子[이십구년위무자], 而今云十六年戊子誤也[이금운 십육년 무자 오야], 十六年果有北漢之巡狩[십육년과유북한지순수], 然此無與於咸興之定界[연차 무여어 함흥지정계], 史非有逸而何如是縷縷也[사 비유 일이하여 시 누누야], 又誤也[우오야], 今自安邊至咸興爲三百一十百一十里[금자 안변지 함흥 위 삼백일십 리], 自咸興至端川爲三百八十里[자 함흥 지단천 위 삼백팔십 리], 則所論道里亦誤也[즉소론도리역오야], 端川之有眞興碑不見明遽[단천 지유 진흥 비불견명거], 則端川以南折入新羅者亦未然也[즉 단천 이남 절입 신라자 역미연야].
53
라 하여 端川碑[단천비]에 대하여 시방까지 例[예]를 볼 수 없는 積極的[적극적] 否認[부인]을 加[가]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생각컨대 〈三國史記[삼국사기]〉 의 記載[기재]에 準[준]하여, 新羅北境[신라북경]의 지나친 듯한 擴大[확대]를 容認[용인]하지 않으려는 配慮[배려]에서 나온 것으로서 無理[무리] 가 아닌 점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55
昌寧[창녕]의 碑[비]란 것은 慶尙南道[경상남도] 昌寧邑[창녕읍] 東[동] 의 牧馬山[목마산] 西麓下[서록하]에 있는 것으로서, 一九一四[일구일사]년 烏居龍藏[오거 용장] 씨에 依[의]하여 비로소 世上[세상]에 紹介[소개]되었다. 昌寧[창녕]은 옛날에 比斯伐[비사벌](北自炑[북자목])이라 하여 新羅[신라] 對[대] 伽倻[가야]의 一要衝[일요충]으로, 眞興王[진흥왕] 十六[십육] 년에는 이곳에 下州[하주]를 두어 한 方面[방면]의 策源地[책원지]로 삼은 일이 있었다.
56
昌寧碑[창녕비]가 나타난 뒤 黃草嶺[황초령]ㆍ北漢山[북한산]의 兩碑[양비] 와 合[합]하여 世間[세간]에서 眞興王[진흥왕] 三碑[삼비]라고 일컫는다. 年代[년대]의 빠름과 記事[기사]의 確實[확실]함으로써 昌寧[창녕] 의 碑[비] 는 가장 많은 歷史的[역사적] 價値[가치]가 附與[부여]되는데, 北境[북경] 의 二碑[이비]에는 疑問[의문]되는 點[점]이 얽혀 있음으로 해서 더욱 그렇다 하지 않을 수 없다.
58
黃草嶺[황초령]과 北漢山[북한산]의 碑[비]에 관해서는,
59
淸[청] 劉喜海[유희해] 著錄[저록] 〈海東金石苑[해동금석원]〉 卷第一[권제일] (北漢山[북한산])
60
中華民國[중화민국] 劉承幹[유승간] 著錄[저록] 〈海東金石苑補遺[해동 금 석 원 보유 〉 卷第一[권제일](黃草嶺[황초령] 及[급] 昌寧[창녕])
61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編纂[편찬] 〈朝鮮金石總覽[조선금석총람]〉 上卷[상권]에 各其[각기] 釋讀[석독]이 있고, 또 이것을 考說[고설]한 것으로는 金正喜[김정희] 〈金石過眼錄[금석과안록]〉을 爲始[위시] 하여,
62
內藤虎次郞氏[내등호차랑씨] 〈新羅眞興王巡境碑考[신라진흥왕순경비고]〉 (藝文[예문] 第二年[제이년] 第四號[제사호], 明治四四年[명치사사년] 四月[사월], 後[후]에 改訂[개정]되어 讀史叢錄[독사총록]에 收錄[수록]됨. 七一頁[칠일엽] 以下[이하]) 今西龍氏[금서룡씨]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신라 진흥왕 순수관 경비고]〉 (考古學[고고학] 雜誌[잡지] 第十二卷[제십이권] 第一號[제일호]에 黃草嶺[황초령], 同[동] 第三號[제삼호]에 北漢山[북한산], 同[동] 第十一號[제십 일호]에 昌寧[창녕], 大正[대정] 一○年[일○년] 九月[구월] ㆍ十一月[십일월] 乃至[내지] 十一年[십일년] 七月[칠월]) 同[동] 氏[씨] 〈新羅眞興王巡狩碑[신라진흥왕순수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大正[대정] 五年度[오년도] 古蹟調査報告[고적조사보고] 五四頁以下[오사엽 이하]) 同[동] 氏[씨] 〈新羅眞興王巡狩碑[신라진흥왕순수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大正[대정] 五六度[육년도] 古蹟調査報告[고적조사보고] 三七五頁以下[삼칠오엽 이하]) 등에 詳細[상세]한 記述[기술]과 아울러 各方面[각방면]에서의 考覈[고핵]이 있어서 前人[전인]의 記述[기술]이 極[극]에 이른 觀[관] 이 있으므로, 碑[비]의 內容[내용]에 對[대]해서는 여기에 架疊[가첩] 의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또 약간 字句[자구]의 審討[심토]를 要[요] 하는 점이 없지 않으나 이 또한 따로 機會[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後文[후문]과의 對照上[대조상] 各碑[각비]의 文[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三碑[삼비] 다같이 主[주]로 今西氏[금서씨]의 判讀[판독]에 依據[의거] 하며 碑[비] 크기의 測定[측정]은 朝鮮金石總覽[조선금석총람]에 依據함).
64
(全[전] 二七行[이칠행], 行[행] 二七乃至[이칠내지] 十八字[십팔자], 循石幅不齊[순석폭부제], 高五尺四寸[고오척사촌], 幅五尺五寸[폭오척오촌], 厚一尺[후일척], 字徑一寸三分[자경일촌삼분], 楷書[해서])
65
(1) 辛巳年二月一日立[신사년이월일일립] 寡人幼年承基政委輔弼後[과인 유년 승기 정위 보필후] ▣▣▣▣▣
66
(2) 末[말] ▣▣立羍[입달] ▣▣▣赦[사] ▣▣▣▣▣▣▣校[교] ▣▣後地土[후지토] ▣狹( )[협( )]
67
(3) ▣▣▣▣不[불] ▣▣▣▣▣▣▣▣▣▣▣▣山[산] ▣▣及普捨山海[급보사산해] ▣谷[곡]
68
(4) 野( ) 除村模[야( )제촌모]▣▣▣▣▣▣▣▣▣▣▣▣▣▣▣▣此[차]▣▣▣▣
69
(5) 而已土地疆域山林戶封[이이토지강역산림호봉] ▣▣▣▣▣▣▣也大等( ) 軍主幢主道[야 대등( )군주당주도
70
(6) 使( )外村主審煦故[사( ) 외촌 주심 후고] ▣▣▣▣▣▣▣仕[사] ▣▣海州白田畓▣▣( )
71
(7) 山鹽河川師敎以[산염하천사교이] ▣▣▣▣▣▣▣▣▣▣▣▣▣▣▣▣▣道人[도인]
72
(8) ▣煦之雖不[후지수불] ▣▣▣圭[규] ▣▣▣▣▣▣心[심] ▣▣阿[아] ▣▣▣▣▣于之[우지]
73
(9) 其餘少小[기여소소] ▣知士[지사] ▣湌[찬] ▣▣▣▣▣者[자] ▣▣▣上大等( ) 古奈末典 [상대등( )고나말전]
74
(10) 法慈▣人( )上[인( ) 상] ▣▣▣▣▣▣▣▣▣▣▣▣▣▣▣▣看其身受[간기신수]
75
(11) 爵[작] 于詩會[우시회] ▣▣▣▣▣▣▣▣▣˙˙ ˙葛文王[갈문왕] ▣▣▣▣未漢[미한] ▣▣▣
76
(12) 屈珎智大一伐干沙喙[굴진지대 ˙˙ 일벌 간사 훼] ▣▣智一尺干[지일척간] ▣▣折[절] ▣智一尺干[지일척간] ▣▣▣˙
77
(13) ▣智一尺干喙[지일척간훼] ▣▣夫智迊干沙喙武力智迊干喙[부지 잡 간사 훼 ˙˙ 무력지 잡간 훼] ▣里夫智[리부지] ▣▣
78
(14) 干沙喙都言智[간사훼도언지] ▣▣干˙沙喙[간사훼] ▣( )智一吉干沙喙忽( )智一[( )지일길간사훼홀( ) 지 일] ▣干喙
79
(15) 珎( )[진( )] ▣次公沙尺干喙[차공사척간훼] ▣▣智沙尺喙[지사척훼] ▣述˙智沙尺干喙[술지사척간훼] ▣▣▣智[지]
80
(16) 沙尺干喙比叶[사척간훼비협] ▣˙˙˙▣智沙尺本( )末[지사척본( ) 말] ▣智及尺干喙[지급척간훼] ▣▣智[지] ▣▣干[간]
81
(17) 沙喙刀下智及尺干沙喙[사 훼 도하 지급 척 간사 훼 ▣▣智及尺干喙鳳安智˙˙˙ ˙[지급척간훼봉안지] ▣▣干[간] ▣大[대]
82
(18) 等喙居七夫智一尺干喙[등훼거칠 ˙˙ 부지 일 척간 훼] ▣▣智一尺干沙喙子力智[지일척간사훼자력지] ▣▣干[간] ▣˙˙
83
(19) 大等喙未得智[대등훼미득지] ▣尺干沙喙智聰智及尺干四方軍主比自伐[척 ˙ 간사 훼지 총 지급 척간 사방군 주 비자 벌]
84
(20) 軍主沙喙登[군주사훼등] ▣▣智沙尺干漢城軍主喙竹夫智沙尺干碑( )[지사척간한성군주훼죽부지사척간비( )]
85
(21) 城軍主喙登福智沙尺干甘文軍主沙喙心麥夫智及尺干[성군주훼등복지사척간갑문군주사훼심맥부지급척간]
86
(22) 上州行( )大等沙喙宿[상주행( ) 대 등사 훼숙] ▣智及尺干喙次叱智奈末下州行[지급척간훼차질지나말하주행]
87
(23) 使大等沙喙春夫智大奈末喙就[사대등사훼춘부지대나말훼취] ▣智大舍干抽( ナ) 可[지 대사간 추실( )가]
88
(24) 西阿郡使大等喙此戶智大奈末沙喙湏[서 아군 사대 등훼차호 ˙ 지대나 말 사 훼수] ▣夫智奈末[부지나말] ▣
89
(25) 爲人喙德文( ) 奈末比子伐停助人喙覔薩智大[위인 훼 덕문( )나말비자벌정조인훼멱살지대]
90
(26) 奈末書人沙喙等智大舍村主奕聰智迊干麻叱[나말서인사훼등지대사촌주혁총지잡간마질]
92
(字側[자측]에 ˙을 붙인 것은 用語上[용어상]으로 推定[추정]한 文字[문자] 다.)
94
(全[전] 十二行[십이행], 行[행] 三二字[삼이자], 上部缺[상부결], 縱[종] 五尺一寸[오척일촌], 橫[횡] 二尺[이척] 三寸[삼촌], 厚[후] 五寸[오촌] 五分[오분], 字徑[자경] 一寸[일촌], 楷書[해서]) ˙
95
(1) ▣▣▣▣▣▣▣▣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진흥태왕급 중신 등 순수관경지시기]
96
(2) ▣▣▣▣▣▣▣▣▣▣▣令甲兵之德[령갑병지덕] ▣▣▣▣▣▣▣覇主說示賞方[패주설시상방] ▣▣▣
97
(3) ▣▣▣▣▣▣▣▣▣▣▣所用高祀[소용고사] ▣▣▣▣▣▣相戰之時新羅太王[상전지시신라태왕] ▣▣▣
98
(4) ▣▣▣▣▣▣▣▣▣▣德不[덕불] ▣兵故[병고] ▣▣▣▣▣强建文大淂人民[강건 문 대 득 ˙ ˙ ˙ ˙ ˙ ˙ 인민] ▣▣▣▣▣
99
(5) ▣▣▣▣▣▣▣▣▣▣是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勞[시 순수 ˙ ˙ ˙ 관 경방 채 민심 이욕 로] ▣如有忠信精誠[여유충신정성] ▣▣▣
100
(6) ▣▣▣▣國盡節˙ ˙ ˙有功之徒可加賞爵物以[국진절유공지도가가상작물이] ▣▣心引[심인] ▣▣衆路過[중로과] ▣城陟[성척] ▣▣▣
101
(7) ▣▣▣▣▣▣▣▣▣▣▣見道人[견도인] ▣˙ ˙居石窟[거석굴] ▣▣▣▣刻石詠辞[각석영사]
102
(8) ▣▣▣▣▣▣▣▣智一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지일척간내부지일척간 사훼] ▣▣智迊干南川軍主沙喙[지잡간남천군주사훼] ▣
103
(9) ▣▣▣▣▣▣▣▣▣▣未智及干未智大奈末[미지급간미지대나말] ▣▣▣沙喙屈丁次奈[사훼굴정차내]
104
(10) ▣▣▣▣▣▣▣▣▣▣天( )[천( )] ▣▣空幽則[공유즉] ▣▣▣▣▣刼初立所造非[겁초립소조비] ▣▣▣▣˙ ˙ ˙
105
(11) ▣▣▣▣▣▣▣▣▣▣▣▣▣▣▣▣▣▣▣▣▣▣▣▣歲記我万代名[세기아만대명]
107
(字側[자측]에 ˙을 붙인 것은 推定[추정] 또는 黃草嶺碑[황초령비]에 依[의] 해 補入[보입]한 文字[문자]다.)
109
全十二行[전십이행], 行三五字[행삼오자], 上部[상부] 及[급] 左下部[조하부] 缺[결], 高三尺八寸[고삼척팔촌], 幅一尺五寸[폭일척오촌], 字徑八分[자경팔분], 楷書[해서]) ˙ ˙ ˙ ˙ ˙ ˙ ˙ ˙ ˙
110
(1) ▣▣▣▣▣▣▣▣八月二十一日癸未眞興太王巡狩管境刊石銘記也[팔월이십일일 계미 진흥 태왕 순수관경간석명기야]
111
(2) ▣▣▣▣▣▣世道乖眞玄化不敷則耶˙ ˙ ˙ ˙ ˙ ˙ ˙ ˙ ˙ ˙ ˙ ˙ ˙ ˙ ˙ ˙爲交竸早以帝王建號莫不脩己以安百姓然朕[세도괴진현화불부즉야위교경조이제왕건호막불수기이안백성연짐]
112
(3) ▣▣▣▣▣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愼恐˙ ˙ ˙ ˙ ˙ ˙ ˙ ˙ ˙ ˙ ˙ ˙ ˙違[소태조지기찬승왕위긍신자신공위] ▣▣又蒙天恩開示運記冥感神祗應[우몽천은개시운기명감신지응]
113
(4) ▣▣▣▣▣四方託境廣獲民土隣國誓信和使交通府˙ ˙ ˙ ˙ ˙ ˙ ˙ ˙ ˙ ˙ ˙[사방탁경광획민토인국서신화사교통부] ▣▣忖撫育新古黍上犭謂道化[촌무육신고서상견위도화]
114
(5) ▣▣▣▣美有於是歲次戊子秋八月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 ˙ ˙ ˙ ˙勞[미유어시세차무자추팔월순수관경방채민심이욕로] ▣▣有忠信精誠[유충신정성] ▣▣
115
(6) ▣▣▣▣▣▣▣国盡節有功之徒可加賞爵物以章勳效[국진 절 유공 ˙ 지도 가가상 작물 이장훈 효] 廻駕頋行[회가와행]▣▣▣▣四[사]▣▣
116
(7) ▣▣▣▣▣▣▣▣▣▣▣▣者矣[자의] 于時隨駕沙門道人法藏慧忍[우시수가사 문도인 ˙ ˙ ˙ ˙ ˙ ˙ 법장 혜인] 大等喙部居柒夫[대동훼부 거칠부]
117
(8) ▣▣▣▣▣▣▣▣▣▣▣▣▣ 知迊干喙部服冬知大阿干比知夫知及干未知[지 잡간 훼 부복 동 지 대아간 비지 부지' 급간미지]▣奈末
118
(9) ▣▣▣▣▣▣▣▣▣▣▣▣▣▣▣▣( )大舍沙喙部另知大 舍裏內從人喙部[( )대사사훼부령지대사리내종인훼부]▣( )次[( ) 차]
119
(10) ▣▣▣▣▣▣▣▣▣▣▣▣▣▣▣▣▣▣喙部( )難大舍藥師沙喙部篤兄小 [훼부( )난대사약사사훼부독형소]▣奈夫[내부]
120
(11) ▣▣▣▣▣▣▣▣▣▣▣▣▣▣▣典喙部分知吉之[전훼부분지길지] 公欣平小舍[공흔평소사]▣ 末買[말매]
121
(12) ▣▣▣▣▣▣▣▣▣▣▣▣▣▣▣▣▣▣▣▣喙部非知沙 干助人沙喙部尹知奈末[훼부비지사간조인사훼부윤지나말]
122
(´을 붙인 것은 現存[현존] 第二石中[제이석중]의 文字[문자]이고, ˙을 붙인 것은 〈金石過眼錄[금석과안록]〉 所載[소재] 古拓本[고척본]으로 補充[보충] 한, 지금은 없어진 第三石中[제삼석중]의 文字[문자]다. 이 글도 今西[금서] 씨에 依[의]했으나 行[행]의 字數[자수]를 訂正[정정]하고 또 判明[판명] 된 若干字[약간자]를 補充[보충]했다.)
124
이른바 眞興王[진흥왕] 三碑中[삼비중] 昌寧碑[창녕비]에는 問題[문제] 될것이 없고 北漢山碑[북한산비]에도 大體[대체]로 異議[이의]가 없지마는, 黃草嶺碑[황초령비]에 이르러서는 그 所在地[소재지]가 在來[재래]로 新羅[신라] 의 東北境[동북경]으로 일러온 地點[지점]에 比[비]하여 훨씬 前方[전방] 임으로 해서, 이 牴牾[저오]을 解釋[해석]함에 있어 紛議[분의]가 생기고, 蒡證[방증]이 적은 관계로 해서 判定[판정]이 容易[용이]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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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삼국사기]〉의 記載[기재]에 依[의]하여 〈眞興王征服地理考[진흥왕정복지리고]〉 를 著述[저술]하여, 信憑[신빙]할만한 理由[이유] 있는 〈三國史記[삼국사기]〉 眞興王[진흥왕] 以來[이래]의 記述[기술]과 矛盾[모순] 되는 黃草嶺[황초령]의 碑[비]는 根本[근본]부터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그 碑文[비문] 自體[자체]에도 많은 疑點[의점]이 있고 建碑[건비] 의 目的[목적]에도 奇怪[기괴]한 점이 있어서, 당시의 大勢[대세]에도 齟齬[저어] 하는 所以[소이]를 지적하여, 이 碑[비]가 믿을 만할 것이 못 된다고 斷言[단언]한 이는 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씨의 〈朝鮮歷史地理[조선역사지리]〉이다 (第一卷[제일권] 一二四[일이사] 頁[엽] 以下[이하]) 이 否認說[부인설]에 대하여 今西龍[금서룡]씨는 碑[비] 自體[자체]의 臨場審定[임장심정]에 依[의]하여 碑[비]에 아무런 疑心[의심]을 둘 여지가 없고, 高句麗[고구려]가 半島[반도]의 西面[서면]에 있어서는 鴨綠江口[압록강구] 조차 完全[완전]히 領有[영유]할 수 없었던 時節[시절]에, 東面[동면]에 있어서는 能[능]히 江原[강원] 및 慶尙[경상] 沿岸[연안]의 穢貊[예맥]을 從屬[종속]시킨 例[예]도 있는 것처럼, 新羅[신라]도 海上交通[해상 교통] 의 自由[자유]를 利用[이용]해서 從來[종래] 高句麗[고구려]에 從屬[종속] 해 있던 穢種族[예종족]을 自己[자기]네에게 歸附[귀부]시키고, 더 나아가 咸興[함흥]의 平野[평야]에 들어가서 沃沮[옥저]를 服屬[복속] 시켰을 것으로 推定[추정]함에 있어서 특히 귀중한 자료인 所以[소이]를 强調[강조] 하고, 특히 氏[씨] 自身[자신]도 처음에는 碑[비]가 近代[근대]의 僞作[위작] 이 아닌가 疑心[의심]했었지마는, 數年[수년]을 경과하여 碑[비] 의 來歷[내력]을 알고 朝鮮[조선]의 文藝[문예] 情勢[정세]를 仔細[자세]히 살펴본 後[후]에, 高麗[고려] 以後[이후]의 朝鮮人[조선인]으로서 이렇게까지 新羅[신라] 의 事情[사정]에 精通[정통]하여 만들어 세울 만한 이가 없고, 또 書風[서풍]이 絶對[절대]로 後代[후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碑[비]에 대한 疑念[의념]을 완전히 抛棄[포기]했고, 그 다음에는 黃草嶺[황초령] 의 位置[위치]의 해석에 고민하여, 때로는 생각하기를, 이 碑[비] 는 高麗末[고려말]이나 李朝[이조] 初[초]에 政府[정부]가 明[명]에 대하여 半島[반도] 의 舊疆域[구강역]을 주장하는 證左[증좌]로서 黃草嶺[황초령]에 移置[이치] 한 것이 아닐까 하는 想像[상상]이 幼稚[유치]하여 一笑[일소]에 붙일 거리도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것은 注意[주의]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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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金石學[금석학]이나 史學[사학]의 觀點[관점]에서 碑[비]의 事實性[사실성] 은 설사 인정된다하더라도, 〈三國史記[삼국사기]〉의 文[문] 과 거기에서 생기는 傳統的[전통적] 大勢觀[대세관]에는 아직도 상당한 彈力[탄력] 이 있은즉, 碑[비]의 위치 문제는 쉽사리 歸結[귀결]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여기에서 地內宏[지내굉]씨의, 碑[비]를 是認[시인] 하면서 位置[위치]에 先在點[선재점]이 있고, 또한 그것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 依[의]해 指示[지시]되어 있는 新羅[신라]의 東北境[동북경]이라는 一說[일설] 이 나오게 된 것이다. 氏[씨]의 說[설]은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서 發刊[발간]한 〈古蹟調査特別報告[고적조사특별보고]〉 第六册[제육책] 〈眞興王戊子巡境碑[진흥왕무자순경비]와 新羅[신라]의 東北境[동북경]〉이라는 論文[논문]에 揭載[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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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要點[요점]은 氏[씨]가 前年[전년]에 提唱[제창]한 尹瓘[윤관] 九城[구성] 의 咸興平野[함흥평야] 排當說[배당설]에 관련시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大正八年度[대정팔년도] 古蹟調査報告[고적조사보고] 第一册[제일책] 咸鏡南道[함경남도] 咸興郡[함흥군]에서의 高麗時代[고려시대] 古城趾[고성지] 參照[참조]),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記事[기사]에 依[의]하여 眞興王[진흥왕] 當時[당시]의 新羅[신라] 東北境[동북경]을 安邊[안변]의 南大川[남대천] 流域[유역]으로 하고, 그 附近[부근]인 鐵嶺[철령] 고개 (高峴[고현]) 근처에다가 北漢山[북한산]의 碑[비]와 서로 對峙[대치]하는 巡境碑[순경비] 를 세웠던 것을, 高麗[고려] 睿宗代[예종대]에 尹瓘[윤관]이 遼[요] 의 勢力[세력]이 미쳤던 咸興平野[함흥평야]의 女眞[여진]을 정복하고, 英州[영주] 以下[이하]의 九成[구성]을 쌓았을 때, 그 占有[점유]를 歷史的[역사적]으로 理由[이유]를 붙이는 手段[수단]으로 鐵嶺[철령]의 碑[비] 를 占領地[점령지] 北界[북계]의 要衝[요충]인 黃草嶺[황초령]에 옮겨다 세운것으로서, 文士[문사] 林彦[임언]으로 하여금 英州廳[영주청]의 壁[벽]에 써 붙이게 한 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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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女眞之頑愚[오호여진지완우], 不量其强弱衆寡之勢[불량기강약중과 지세], 而自於滅亡如是[이자취어멸망여시], 其地方三百里[기지방삼백리], 東至于大海[동지우대해], 西北介于蓋馬山[서북개우개마산], 南接于長定二州[남접우장정이주], 山川之秀麗[산천지수려], 土地之膏腴[토지유고유], 可以˙ ˙ ˙ ˙ ˙居吾民[가이거오민], 而本高句麗之所有也[이본고구려지소유야], 其古碑遺跡˙ ˙ ˙ ˙尙有存焉[기고비유적상유존언], 夫高句麗失之於前[부고구려실지어전], 今上宗[금상종] 睿得之於後[예득지어후], 豈非天歟[기비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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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 高句麗[고구려]의 古碑[고비]도 實[실]은 이 碑[비]의 誤傳[오전]으로서, 古來[고래] 聚訟[취송]의 題[제]이었던 公嶮鎭碑[고험진비]의 正體[정체] 도 이것에 不外[불외]하다는 것이다. 氏[씨]의 所說[소설]은 命意[명의] 高邁[고매]하고 行論[행론] 巧緻[교치]하지 못하다고 할 것은 아니나, 그의 眼目[안목]인 徙碑[사비]의 一段[일단]은 혹 一片[일편]의 想像[상상]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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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草嶺[황초령]의 碑[비]는 果然[과연] 眞[진]일까 僞[위]일까? 眞[진]이라고 한다면 그 位置[위치]는 原地[원지]일까 徒地[도지]일까? 眞興王[진흥왕] 三碑中[삼비중] 問題的[문제적] 興味[흥미]는 이 碑[비]에 集中[집중] 되어 있는데, 黃草嶺[황초령]의 問題[문제]는 바로 新羅[신라] 東北境[동북경] 問題[문제]이기 때문에 그 朝鮮[조선] 古代史[고대사]에 對[대]한 關係[관계] 는 實[실]로 重大[중대]한 바 있으니, 여기에 있어서 黃草嶺[황초령] 의 眞興王碑[진흥왕비]는 마침내 金石的[금석적] 興味[흥미]를 超越[초월] 해서 歷史的[역사적] 大論題[대논제]로 化[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朝鮮[조선] 의 文藝的[문예적] 事實[사실]로나 同時代的[동시대적] 金石眼[금석안]으로나 이 碑[비]의 六朝[육조] 臭味[취미]의 것임을 否定[부정]할 수 없으므로, 問題[문제]는 드디어, 位置[위치]의 一點[일점]에 限定[한정] 하게 되었지마는, 現在[현재]대로는 兩者[양자]의 虛實[허실]이 相半[상반] 하여 다른 有力[유력]한 旁證[방증]을 얻지 못하는 限[한], 是非皂白[시비조백] 은 결국 成果[성과] 없는 論難[논란]에 그치고 말 形勢[형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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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草嶺碑[황초령비]조차 이러한 형편이었으므로, 이른바 端川[단천]의 碑[비]라는 것은 당초부터 近代學者[근대학자]의 配慮圈[배려권] 밖에 밀려나있어서, 〈文獻備考[문헌비고]〉의 文[문]이 자주 引用[인용]되면서도 이 一句[일구] 는 거의 贅句衍文視[체구연문시]되어서 敢[감]히 論爼[논조]에 올려 놓으려는 이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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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여]도 또한 그중의 한 사람으로서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 以下[이하] 諸書[제서]에서 「端川亦有碑[단천역유비]」의 句[구]를 閱過[열과] 한적이 몇 번인지는 모르지마는 이에 對[대]해 注意[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고, 黃草嶺碑[황초령비]와 아울러 眞興王[진흥왕] 拓境[척경]의 北限[북한]에 관한 문제 해결의 關鍵[관건]이 여기에 있을 自明[자명]한 事理[사리] 에조차 想及[상급]해 본 일이 없었음은, 생각하면 慙愧[참괴]하기 限[한] 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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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昨年[작년] 九月[구월], 咸鏡道[함경도]에 訪書[방서]의 旅行[여행]을 할 때, 利原[이원]에서 姜栗溪[강율계]의 賢[현]과 그의 遺宅[유택]에 史籍[사적]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달 十八[십팔]일 遮湖赤壁[차호적벽]으로부터 學士臺[학사대]를 歷遊[역유]하고, 咸鏡線[함경선] 谷口驛[곡구역]을 거쳐 途中[도중] 福興寺[복흥사]의 壯[장]함을 들었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많은 古城[고성] ・ 古墳[고분]을 指點[지점]하면서 淸洞[청동]을 經由[경유], 東面[동면] 孝友里[효유리]의 姜氏宅[강씨댁]을 尋訪[심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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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溪[율계]의 名[명]은 必東[필동](正祖[정조]] 丑癸生[축계생], 哲宗[철종] 丁巳卒[정사졸] 西紀[서기] 一七九三[일칠구함] ∼ 一八五七[일팔오칠]), 金正喜[김정희]보다 七[칠]년 뒤에 出生[출생]하여, 一[일]년 늦게 逝去[서거] 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困窮[곤궁]하여 失學[실학]하였으나 力穡[역색] 하는 한편 獨學[독학]으로 글을 배우고, 자라서는 關北流寓[관북유우] 의 여러 氏族[씨족]이 대개 系圖[계도]를 잃었음을 慨嘆[개탄]하여, 오로지 이 方面[방면] 자료를 蒐集[수집]하는 데 注力[주력]하고, 그 根原[근원]을 찾기 위하여 畿甸[기전]을 비롯하여 南方[남방] 諸道[제도]를 跋涉[발섭], 오랫동안 譜牒[보첩]의 涉獵[섭렵]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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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純祖[순조] 甲午[갑오](西紀[서기] 一八三四[일팔삼사]) 四二歲[사이세] 때로부터 哲宗[철종] 辛亥[신해](西紀[서기] 一八五一[일팔오일]) 五九歲[오구세]에 이르는 前後[전후] 十八年間[십팔년간]에 各姓[각성] 系譜[계보]의 抄錄[초록]을 作成[작성]하고, 한편 關北[관북]의 沿革[연혁]에 關[관]한 文史[문사]를 求得[구득]하는 대로 箚記[차기]하여 大小[대소] 百餘册[백여책]을 남겨 놓았는데, 近年[근년]에 그이 後孫[후손] 이 이 것을 〈諸姓譜[제성보]〉라는 表題[표제]를 붙였다. 地方[지방]의 人士[인사] 들이 傳[전]하기를 古今[고금]의 史籍[사적]으로 具備[구비]치 않은것이 없다 함은 아마도 이것을 誇大[과대]하게 傳稱[전칭]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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由來[유래]로 關北[관북]은 弓馬[궁마]의 鄕[향]으로서 文籍[문적]이 缺乏[결핍] 하고, 南方[남방]에서의 流移民[유이민]은 거의가 公私刧禍[공사겁화] 의 餘生[여생]을 遐陬[하추]에 託[탁]한 이들이므로, 그 家系[가계] 圖錄[도록]을 保有[보유]한 者[자]가 적어서, 近年[근년] 姜氏[강씨]의 이 抄記[초기]에 依[의]하여 先祖[선조]의 瑩域[영역], 氏族[씨족] 本支[본지] 의관계가 밝혀진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一部人[일부인]의 姜氏[강씨]에 대한 尊慕[존모]가 갑작스레 높아져서 尊崇[존숭]하여 栗溪[율계] 先生[선생] 이라 일컫고, 子孫[자손]이 그 餘蔭[여음]을 힘입어 生計[생계]가 豊足[풍족] 하여지고, 마침내 栗溪[율계]의 牲石[생석]과 祀宇[사우]를 設[설] 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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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家[강가] 當主[당주]의 好意[호의]에 의하여 遺著[유저]의 거의 全部[전부] 를 提示[제시]받고 徹夜[철야]해서 一閱[일열]했는데, 〈姓譜[성보]〉 중에는 出處[출처]가 未詳[미상]하기는 하지마는 異聞[이문]이라 할 만 한 것이 많으니, 例[예]를 들면, 麻衣太子[마의태자]의 일컬음을 얻은 新羅[신라] 敬順王[경순왕]의 王子[왕자]의 名[명]을 鎰[일]이라 했고, 그이 아우 湟[황] 이 海印寺[해인사]에 出家[출가]하여 釋名[석명]을 ( )空[( ) 공] 이라 했다는 등 枚擧[매거]할 겨를이 없다. 그 중의 一册[일책]에 〈利城古記[이성고기]〉라 題[제]한 것이 있는데, 利城[이성] 곧 시방의 利原[이원]의 故事[고사] 를 雜然[자연]히 桾摭[군척]한 中[중], 宣祖[선조] 壬辰[임진] 의 役[역]에 倭將[왜장] 鍋島加賀守[과도가하수]가 本城[본성]을 占據[점거] 했다가 未幾[미기]에 撤去[철거]한 사실을 기록한 鼇頭[오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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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諺傳則天康三年戊子[안언전즉 천강 삼년 무자] (陣[진] 臨海王[임해왕] 年號[연호], 止一[지일] 年[년], 戊子乃光大[무자내광대] 二年也[이년야]), 眞興王巡狩碑界[진흥왕순수비계], 至縣東雲霧峰上[지현동운무봉상], 乃建定界碑[내건 정계비], 即泰昌之年號云[즉태창지년호운], 此設其或有疑也[차설기혹유의야], 愚按野史則此地句麗之疆土也[우안야사즉차지구려지강토야], 眞興句麗平原王時君則[진흥 구려 평원왕 시군즉], 豈以外國之主巡狩他國能建定界碑者乎[기이 외국지 주순수 타국 능건 정계비 자호], 今引古老傳設[금인고로전설], 倭將登此峰讀此碑[왜장등차봉독차비], 乃拔投而棄之云[내발투이기지운], 羅史無眞興之巡狩[나사무진흥지순수]. 考錄[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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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한 一節[일절]이 있기에 더욱 細心[세심]히 諸軸[제축]을 살펴보매, 表紙[표지]에 〈栗溪浪人徵錄[율계랑인징록]〉이라題[제]하고, 卷內[권내]에 〈北域建置沿革考[북역건치연혁고]〉라 標題[표제]한 一卷[일권]이 있는데, 그 가운데 英州[영주]를 北靑[북청], 雄州[웅주]를 端川[단천]에 比擬[비의] 하고, 尹瓘[윤관] 九城[구성]의 役[역]을 叙述[서술]한 대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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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野史[안야사], 則女眞設柵圍雄州城而兼雲施城築之[즉여진설책위웅주성이겸운시성축지], 即英州雄州之間山[즉영주웅주지간산], 今名雲霧峰[금명 운무봉], 五月女眞功雄州城[오월여진공웅주성], 凡二十八日[범이십팔일], 兵馬鈴轄林彦都巡檢使崔弘正等率諸將[병마령할림언도순검사최홍정등솔제장], 分兵固守與戰[분병고수여전]……, 於是謂此地爲新羅舊疆[어시위차지위신라구강], 乃建眞興王之巡狩定界碑[내건진흥왕지순수정계비], 以脅女眞[이협여진]. 即立石[즉입석] 雲施城[운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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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적혀 있는 部分[부분]을 발견하였다. 姜必東[강필동]에 依[의] 하여 採錄[채록] 된 野使[야사]라는 것의 性質[성질]과 의 設[설]의 當否[당부] 如何[여하] 는 姑捨[고사]하고, 위선 眞興王碑[진흥왕비]라는 것의 存在[존재] 가 매우 興味[흥미]를 끌었으므로 그 現存[현존] 如何[여하]를 主人[주인]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福興寺[복흥사]의 背嶂[배장]을 雲霧峰[운무봉], 俗稱[속칭] 「우물」(井[정]의 뜻인 듯)峰[봉]이라 부르는데, 그 곳에 한 古碑[고비]가 있어서 俗[속]에 南怡將軍碑[남이장군비]라고 傳[전] 하여오는 것을, 隣村[인촌]인 淸洞[청동]에 金演翼[김연익]이란 望士[망사] 가있어서, 栗溪[율계]의 이 文[문]에 依[의]하여 今年[금년] 봄에 自身[자신] 이 踏査[답사]하여 碑[비]가 完存[완존]함을 보았고, 또 그 拓本[탁본]을 떠서 그것이 果然[과연] 黃草嶺[황초령]의 碑文[비문]과 一致[일치]하는 眞興王碑[진흥왕비] 임을 確認[확인]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곧 그날 밤에 사람을 羣仙港[군선항]으로 보내서 寫眞師[사진사]를 불러 오고 이튿날 金演翼[김연익] 씨를 그의 집으로 尋訪[심방]하였는데, 金氏[김씨]가 크게 기뻐하면서 올봄에 이 碑[비]가 眞興王碑[진흥왕비]임을 確認[확인]하자, 그 眞否[진부] 의 審定[심정]을 청하기 위해 人便[인편]에 付托[부탁]하여 拓本[탁본] 과 發見[발견] 始末[시말]과를 내게 보내고, 日夜[일야] 그 回答[회답]을 苦待[고대]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洪喬[홍교]의 浮沈[부침] 이 모처럼의 好意[호의]를 無[무]로 돌아가게 한 것이 애석한 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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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氏[김씨]로부터 碑[비]의 所在地[소재지]는 山下[산하]의 住民[주민] 도알 사람이 없으니, 곧장 福興寺[복흥사]의 뒷山[산]으로 올라가 山頂[산정] 가까이의 火田民[화전민]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指導[지도]를 받고 龍山[용산]을 經由[경유] 福興寺[복흥사]로 向[향]하니, 沿道[연도]의 靑年[청년] 이 이것을 전해 듣고 八[팔], 九人[구인]의 追從者[추종자]가 생겼다. 福興寺[복흥사]에서 절의 事蹟[사적]을 빌어보고, 절의 뒷山[산]인 磨雲嶺[마운령] 의 一峰[일봉]을 萬德山[만덕산]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곧장 개울을 따라 언덕을 타면서 「구새동」(舊寺洞[구사동], 別麓[별록]에 新寺洞[신사동] 이 있다)에 있는 火田民[화전민]의 조그만 部落[부락]에 이르러 南怡將軍碑[남이장군비] 의 所在[소재]를 물으니, 淳樸[순박]하기 葛天氏[갈천씨] 의 백성을 연상케 하는 朱榮魯[주영로]라는 한 老農[노농]이 自進[자진] 하여 東道[동도]의 수고를 맡아, 한 陵脊[능척]을 넘어 쉽사리 雲霧峰[운무봉] 바로 아래의 鷄頭[계두]인 碑[비]의 所在點[소재점]에 到達[도달]할 수 있었다. 福興寺[복흥사]에서 碑[비]까지 山[산]길로 一○里[일○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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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비]는 峰頂[봉정]에서 두어 町[정] 아래인 急斜面[급사면]의 黍粟[서속] 밭 가운데 넘어져 있는데, 俗[속]에 「깨돌」Gai-dol이라는 단단한 花崗石[화강석]을, 高[고] 約[약] 五尺[오척] 五寸[오촌], 幅[폭] 約[약] 一尺[일척] 五寸[오촌], 두께 約[약] 一尺[일척]으로 자른 것으로서, 碑身[비신] 뿐이요 蓋趺[개부]는 다없기에 老人[노인]에게 물으니, 예로부터 傳[전] 해 오기를, 이 碑[비]는 본래 雲霧峰上[운무봉상]에 있었는데 雨水[우수] 때문에 밀려내려 現位置[현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前引[전인] 姜氏[강씨]의 〈利城古記[이성고기]〉에 倭將[왜장] 云云[운운]의 設[설] 이 記載[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橫仆[횡부]는 오랜 以前[이전] 의 일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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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온 靑年[청년]들의 助力[조력]을 얻어 곧 碑[비]를 泥礰中[이력중]에서 일으켜 兩面[양면]을 다 撮影[촬영]하고, 또한 臨碑[임비] 判讀[판독]을 試[시] 하고, 이것을 錄記[녹기]하였으나, 光線[광선]이 마땅치 못하여 다만 碑文[비문] 이 黃草嶺碑[황초령비]와 같을 뿐 아니라 刓缺[완결]이 거의 없고, 太昌[태창] 年號[연호]를 爲始[위시]하여 從來[종래]의 疑難[의난]을 冰釋[빙석] 하기에 足[족]한 많은 重要文句[중요문구]를 알아볼 수 있는 것만 하여도 기쁨을 이길 수 없다. 설령 姜必東[강필동] 所傳[소전]과 같이 尹瓘[윤관] 의 模立[모립]이라 하더라도, 母碑[모비]의 泐處[늑처]를 補充[보충] 할 資料[자료]로서 極[극]히 貴重[귀중]한 것임을 생각하매 愉快[유쾌] 함을 禁[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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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간 햇발이 차차 西[서]으로 기울어지므로 그 原位置[원위치]라는 地點[지점]을 찾아보고, 또한 四圍[사위]의 形勢[형세]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으로 雲霧峰頂[운무봉정]을 向[향]하여 攀登[반등]을 서둘렀는데, 하필 공교 롭게 도 嶺外[영외]로부터 密雲[밀운]이 갑자기 덮여 와서 순식간에 峰帳[봉장] 이 아주 가려졌으나, 구름을 헤치며 峰頂[봉정] 가까이 올라가니 石築[석축] 의 한 城壁[성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른바 雲施城[운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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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城[성]을 올라가 넘어서면 둘레가 돌로 에워싸인 우묵한 곳이 보이는데, 雲霧峰[운무봉] 의 原語[원어]인 「우물」의 名稱[명칭]이 이로 因[인]해 나왔 음을 알겠다. 地圖[지도]에 依[의]하면 標高[표고] 七五○[칠오 ○] 미터이다. 대개 이 雲霧峰[운무봉]은 咸鏡道[함경도]를 東西[동서] 二部[이부]로 나누는 妙香山脈[모향산맥]이, 다시 磨天嶺[마천령]과 함께 咸鏡道[함경도] 를 南北[남북] 兩區[양구]로 나누는 磨雲嶺山脈[마운령산맥]의 要地[요지] 로서, 西北[서북]과 또는 西南西[서남서]로 厚峙嶺[후치령] ・ 赴戰嶺[부전령] ・ 黃草嶺[황초령]에 接續[접속]하여 멀리 薛列罕[설렬한] (雪寒[설한]) 嶺[령]을 넘어서 鴨綠江[압록강] 中流域[중류역]에도 連絡[연락]을 갖는 一大天塹[일대천참]인데, 〈餘地勝覽[여지승람]〉(卷之[권지] 四丸[사환]) 利城縣[이성현]에,
151
磨雲嶺[마운령], 在縣東四十五里[재현동사십오리], 端川郡界[단천군계], 古之防胡處[고지방호처], 有門基樞石[유문기추석], 亦名門峴[역명문현], (山川條[산천조])
152
城山古城[성산고성], 石築[석축], 周九百九十五尺[주구백구십오척], 今廢[금폐], ○時叱間山城在縣東二十六里[시질간산성재현동이십육리], 石築[석축], 周九百十二尺[주구백십이척], 今廢[금폐]. (古跡條[고적조])
153
라 하고, 同[동] 端川郡[단천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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磨雲嶺長城[마운령장성], 基尾至海[기미지해]. (古跡條[고적조])
155
라 함과 같이, 古來[고래]로 防胡[방호]의 要地[요지]로서 長城[장성]과 및 많은 城砦[성채]를 設置[설치]했던 것이다. 〈高麗史[고려사]〉(卷[권] 九六[구육]) 尹瓘傳[윤관전]에, 「伊位界上甁項之口[이위계상병항지구], 識者謂塞其徑則女眞路絶[식자위색기경즉여진로절]」 이라 한 伊位[이위] ・ 甁項口[병항구] 는 다 같이 이 磨雲嶺[마운령]의 阨險[액험]을 말한다는 이도 있다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 六[육] ・ 北路沿[북로연] 革考[혁고] 九城之役條下[구성지역조하] 其他[기타]). 〈勝覽[승람]〉의 城山[성산]이란 시방의 城嶺[성령] 이란 곳으로서, 咸鏡線[함경선]이 全通[전통]할 때까지는 自動車[자동차] 連絡[연락]의 大路[대로]이던 磨雲嶺山脈[마운령산맥]의 要衝[요충]으로, 長城[장성] 또는 城堡[성보]의 連續[연속]됨에서 얻은 이름일 것이다. 이 地方人[지방인]의 말에 依[의]하면, 磨雲嶺[마운령] 등성이에는 海邊[해변]에서 厚峙嶺[후치령]의 저쪽까지 坦坦大路[탄탄대로]가 숲을 뚫고 通[통]하여, 그 자취가 시방도 歷然[역연]하며 俗[속]에 「萬里城[만리성]」 이라 일컫는 城塹[성참]이 이와 並行[병행]한다고 한다.
156
또 말하기를 磨雲嶺[마운령]은 俗稱[속칭] 「퉁구」Tungu 嶺[령]으로, 「 퉁구」 는 女眞語[여진어]로 城[성]이니, 시방의 城嶺[성령]은 그 譯語[역어] 의 殘影[잔영]이라는 것이다(潭庭遺稿[담정유고] 卷七[권칠] 北遷日錄[북천일록] 第三○葉[제삼○엽]에 「登磨雲嶺[등마운령]」, 嶺陡高[영두고], 高倍鐵門[고배철문], 且博臨海遷[차박임해천], 磴路狹峻[등로협준], 擧足左右[거족좌우], 生死立判[생사입판], 眞險嶺也[진험령야], 世傳尹侍中瓘統軍於此[세전윤시중관통군어차], 故一名統軍山[고일명통군산], 或曰銅口嶺[혹왈동구령]」 이라 한 統軍[통군] ・ 銅口[동구]가 곧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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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안]컨대, 女眞語[여진어]로 城[성]은 「허쳔」hûchûn, 堡[보]는 「 호돈」 hoton이고 보면(同文類解[동문유해] 上[상] 城郭[성곽]), 이 俗傳[속전] 은 맞지 않는다. 차라리 門[문]의 「두카」tuk’a에 해당하는 말로서 (同宮室[동궁실], 〈勝覽[승람]〉의 「亦名門峴[역명문현]」에 관계가 있든가, 或[혹] 은 雲[운]의 「투기」tuki에서 나와(同天文[동천문]) 磨雲[마운] 의 原語[원어]에 脈[맥]이 相通[상통]하는 말은 아닐까. 또 姜氏[강씨] 所錄[소록] 의 〈端川郡沿革志[단천군 연혁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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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之西南[현지서남], 有嶺曰城高嶺[유령왈성고령], 女眞築城此處[여진 축성 차처], 故因以名之[고인이명지], 權菊軒先生[권국헌선생], 一時避禍此地[일시피화차지], 後人稱之曰士隱嶺云[후인칭지왈사은령운], 按此下摩雲嶺有城門樞石[안차하마운령유성문추석], 又有城門熢舊趾[우유성문봉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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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 것을 參照[참조]할 것인데, 다만 城高嶺[성고령]이라는 「城高乙[성고을]」 Sy û ngor 의 語原[어원]은, 이 附近[부근]에 많은 鷹嶺[응령] ・ 鷹峰[응봉] ・ 鷹德士[응덕사]의 例[예]에 暗示[암시]되는 바와 같이, 女眞語[여진어] 海靑[해청]의 shongkon ・ shongoro에서 나온 말로 생각되며, 〈金史[금사]〉 의 이른바 「鷹路[응로]」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何如[하여] 튼 磨雲嶺[마운령]은 그 天險的[천험적] 形勢[형세]가 헛되지 않아, 南北[남북] 兩民族[양민족]의 對抗線上[대항선상]에 重要性[중요성]을 지니고, 蛇走[사주]의 長城[장성], 星散[성산]의 堡砦[보채], 시방에 와서 그 歷史[역사] 를 말하여 주는 곳이 古近[고근] 眞僞[진위]는 어떻든간에 이 地點[지점]에, 重要[중요]한 疆界標示[강계표시]의 古碑[고비]를 봄은 진실로 부질없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것이다. 峰頭[봉두]에 올라서면 磨天嶺[마천령]과의 사이 南大川[남대천] 流域[유역]의 端川[단천]을 비롯하여, 西[서] 의 連嶂[연장], 東[동]의 浩海[호해]가 한눈 아래 들어온다지만, 雲霧[운무] 가 더욱 깊어지고 冥色[명색]이 이에 더해져서, 이름 그대로의 雲霧[운무] 의 峰[봉]을 볼 뿐 약간 구름이 비어지는 사이로 城壁[성벽]의 寫眞[사진] 만 찍고 下山[하산]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참으로 遺憾[유감]이었다. 어두워지는 길을 더듬어 朱老人[주노인] 宅[댁]에 내려와 村人[촌인] 들 로부터 碑[비]에 얽힌 여러 가지 傳說[전설]을 알아보았다. 碑[비]는 원래 세워져있었는데 山[산]바람이 强[강]해서 作物[작물]이 여물지 않아, 그것은 이 碑[비] 의 탓이라는 呪師[주사]의 말에 따라 火田民[화전민]들이 碑石[비석]을 쓰러뜨렸더니 과연 風害[풍해]가 적어졌다고 하는, 앞서 든 姜氏[강씨] 所傳[소전] 以外[이외]으 徒碑一說[도비일설]을 재미있게 듣고, 寫眞師[사진사] 를 머물러 두어 碑蓋[비개] 撮影[촬영]을 부탁하고, 절에 돌아온 것은 밤도 깊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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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경성]에 돌아와서 寫眞[사진]의 送來[송래]를 기다려 一○[일 ○] 월 上旬[상순]에 이것을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에 提出[제출]하였고, 그 달 二七[이칠]일 京城帝國大學[경성제국대학]의 小田省吾[소전성오]씨, 總督府[총독부] 博物館[박물관]의 藤田亮策[등전양책]씨, 編修會[편수회] 의 末松保和[말송보화] 씨 등 一行[일행]의 踏査[답사]가 있게 되어, 學界[학계]에 한 衝動[충동]을 준 것은 이미 一般[일반]에 알려진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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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碑[신비]에 관한 大體[대체]에 대해서는 末松保和[말송보화]씨의 〈咸南[함남] 利原郡[이원군] 萬德山[만덕산]에서 發見[발견]된 新羅[신라] 眞興王[진흥왕] 의 戊子巡狩碑[무자순수비]〉(朝鮮[조선] 第[제] 一七六號[일칠육호] 昭和[소화] 五年[오년] 一月[일월])에 記述[기술]되어 있으므로 이 제 여기에는 例[예]에 依[의]하여 碑[비]의 文面[문면]을 紹介[소개]하는 데 그치겠다. 그러나, 余[여]는 이 碑[비]를 磨雲嶺碑[마운령비]라고 일컫고싶다는 것을 여기에 附記[부기]해 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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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四[제사], 磨雲嶺碑[마운령비] (兩面刻[양면각], 兩面[양면] 一○行[일○행], 行二六字[행이육자], 陰面八行[음면 팔행], 行二五字[행 이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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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太昌元年歲次戊子[태창 원년 세차 무자] ▣▣廿一日[입 일일] ▣▣▣興太王巡狩[흥태왕 순수] ▣▣刊石銘[간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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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夫純風不扇則世道乖眞( ) 化不敷則耶爲交競是以帝王建号莫[부 순풍 불선 즉세 도괴 진( ) 화 불부 즉 야위 교 경시이 제왕 건호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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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不修己以安百姓然朕歷數當躬仰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불수기 이안백 성연 짐혁 수당 궁 앙 소 태조 지기 찬승 왕위 긍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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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愼恐違乾道又蒙天恩開示運記冥感神祗應苻合笇因斯四方託[신 공 위건 도우 몽천은 개시 운기명 감신지 응부 합산 인사 사방 탁]
169
(6) 境廣獲民土隣國誓信和使交通府自惟忖撫育新古黎庶猶謂道[경 광획 민토인 국서 신화사 교통부 자유 촌무 육신 고려서 유위도]
170
(7) 化不周恩施未有於是歲次戊子秋八月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화 불주은 시미 유어 시 세차 무자 추 팔월 순 수관 경방 채 민심 이욕]
171
(8) 勞賷如有忠信精誠才超察厲勇敵强戰爲國盡節有功之徒可加[노재여 유충 신경성 재초 찰려 용적 강전 위국 진절 유공 지도 가가]
172
(9) 賞爵物以章勳効[상 작물 이장훈 효]
173
(10) 引駕日行至十月二日癸亥向涉是達非里[인가 일행지 십월 이일 계해 향 섭시 달 비리] ▣廣[광] ▣因諭邊堺矣[인유 변계의]
175
(1) 于時隨駕沙門道人法藏慧忍[우시수가사문도인법장혜인] 太等喙部居朼夫智伊干內夫[태등훼부거비 부지이가 내부]
176
(2) 智伊干沙喙部叧力智匝干喙部服冬智大阿干比知夫知及干[지 이 간사 훼부괘력지 잡간 훼 부복 동 지 대아간 비 지부 지급간]
177
(3) 未知大奈末及珎夫知奈末執駕人喙部刀( ) 大舍沙喙部叧知[미지대나 말급 진부 지나말 집가인 훼 부도( ) 대 사 사 훼부괘지]
178
(4) 大舍裏內從人喙部沒( )次大舍沙喙部非尸知大舍( ) 人沙喙[대 사리 내 종인 훼부 몰( )차대사사훼부비시지대사( ) 인사 훼]
179
(5) 部爲忠知大舍( )人喙部 難大舍藥師篤之次小舍奈夫通典[부위충지대사( ) 인훼부( ) 난대 사 약 사독지 차 소사 내부 통전]
180
(6) 本( )部加良知小舍[본( )부가량지소사]▣▣本( ) 部莫沙知吉之及伐斬典喙部夫[본( ) 부 막사지 길 지급 벌 참전 훼 부부]
181
(7) 法知吉之裏內[법지 길지리 내] ▣▣▣▣▣▣▣名吉之堂來客裏內客五十外[명 길지당 내객 리 내객 오십 외]
182
(8) 客[객]▣▣▣▣▣▣▣▣▣▣▣▣智沙干( ) 人沙喙部舜知奈末[지사간( ) 인사 훼부순 지나말]
183
(卷首[권수] 圖版[도판] 參照[참조])
185
시방의 利原郡[이원군]은 옛적에 時利[시리]라 稱[칭]하여 端川[단천]에 屬[속]해 있었는데, 世宗[세종] 十八[십팔]년(西紀[서기] 一四三六[일사삼육])에 端川郡[단천군] 磨雲嶺[마운령] 迤南[이남]의 時叱間[시질간] ・ 施利[시리]의 兩社[양사]와, 北靑府[북청부] 東多甫社[동다포사] 迤北[이북], 곧 尹瓘[윤관]의 古蹟[고적]이라 하는 侍中臺[시중대] 와, 後日[후일] 李施愛[이시애]의 叛軍[반군]을 討平[토평] 한 곳임으로 하여 이름난 蔓嶺[만령] 以北[이북]의 盆地[분지]를 떼어 縣[현]을 두고 시방의 이름으로 고친 곳으로서, 땅은 작지마는 域內[역내] 到處[도처]에 「되무덤」(胡墳[호분])이라는 巨形[거형] 古墳[고분] 大小[대소] 許多[허다]한 城堡[성보]가 있어 古代[고대]의 民族生活[민족 생활] 의 一中心地[일중심지]이었다.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 以下[이하]에 端川[단천]에 眞興王碑[진흥왕비]가 있음을 말한 것은, 이 磨雲嶺[마운령] 이 본래 「豆乙外大嶺[두을외대령]」이라 일컬은 端川[단천] 땅 이었기 때문이니 (餘地勝覽[여지승람] 端[단] 川府[천부] 山川條[산천조]), 그 依據[의거] 가 端川[단천] 割地[할지] 以前[이전]의 資料[자료]에 依[의]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이 碑[비]가 예로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뒤에 와서 忘却[망각] 되었음을 推察[추찰]할 것이다.
186
그런데, 이 磨雲嶺[마운령]은 黃草嶺[황초령]보다도 더 몇 百里[백리] 밖의 地點[지점]이고 보면(咸興[함흥]에서, 黃草嶺[황초령]까지는 百幾十里[백기십리], 咸興[함흥]에서 磨雲嶺[마운령]까지는 約[약] 三四○里[삼사 ○ 리]이다), 黃草嶺[황초령]의 땅을 眞興王[진흥왕] 拓土[척토]를 許與[허여] 치 않으려는 者[자]에게는 磨雲嶺碑[마운령비]의 出現[출현]은 오히려 驚神駭膽[경신해담] 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姜必東[강필동]의 所傳[소전] 인 尹瓘[윤관] 의 僞作設[위작설]도 이와 같은 小心[소심]의 一發露[일발로]라 볼 것이요, 그리하여 碑[비]를 眞物[진물]이라고 할 때에는 池內[지내] 씨의 黃草嶺碑[황초령비]에 對[대]함과 같은 位置變移論[위치변이론]도 생긴다. 그러나, 그것이 黃草嶺碑[황초령비]만일 때에는 혹은 位置[위치]의 移動[이동]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마는, 이제 또 磨雲嶺碑[마운령비]의 實在[실재] 가 알려지고 보면 이 方便論[방편론]도 支持[지지]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187
或者[혹자]는 말할 것이다. 磨雲嶺碑[마운령비]가 黃草嶺碑[황초령비]에 依[의] 한 尹瓘[윤관]의 作爲[작위]로 된 것이 아님을 어떻게 證明[증명] 할것이냐고. 그러나 黃草嶺[황초령]의 碑[비]는 行 三五字[삼오자]인데 磨雲嶺碑[마운령비] 는 二六字[이육자]에 不過[불과]하며, 따라서 全面[전면] 의 排行[배행]에 큰 差異[차이]를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書體[서체]가 同時代色[동시대색]을 나타내면서 字樣[자양]은 반드시 印板的[인판적]이 아닌 點[점]과 함께, 이것을 黃草嶺碑[황초령비]의 模刻[모각]이라고 보는데있어서 極[극]히 不合理[불합리]한 點[점]이라 하겠고, 또 黃草嶺[황초령] 및 磨雲嶺[마운령] 兩碑間[양비간]에는 些少[사소]하지마는 文句[문구] 와 및 字數[자수]에도 틀리는 點[점]이 있어서, 前者[전자]에 「藥師沙喙部篤兄小舍[약사사훼부독형소사]」라 한 것을 後者[후자]에는 「藥師篤支次小舍[약사독지차소사]」라 하였고, 前者[전자]에 「分知吉之[분지길지]」라 한 것을 後者[후자]에는 「夫法知吉之[부법지길지]」라 하고, 前者[전자]에 「尹知奈末[윤지나말]」 이라 한 것을 後者[후자]에는 「舜知奈末[순지나말]」 이라 한 것 등이 있어서, 全碑[전비]가 全然[전연] 서로 冒襲[모습] 한 것이 아님을 이것으로도 徵驗[징험]되며, 더우기 到底[도저]히 後世人[후세인] 의 갑작스러운 改易[개역]이라 할 수 없는 依據[의거] 있는 名目[명목]이고 보면, 漫然[만연]한 模刻設[모각설]은 더욱 成立[성립]하기 어려움을 알 것이다. 하물며 그 石質[석질] ・ 碑式[비식]에서부터 書體[서체] ・ 排字[배자]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新羅[신라] 以後[이후]의 것이라고 하는 것 이 오히려 無理[무리]임이 分明[분명]함에 있어서랴. 그리고 이것이 萬一[만일]에 尹瓘[윤관]의 策略的[책략적] 冒竪[모수]라고 한다면, 林彦[임언] 의 記[기] 를 비롯하여 當時[당시]의 그 밖의 文牒[문첩]에 이것을 明白[명백] 히 標出[표출]해 두는 것이야말로 그 趣旨[취지]에 符合[부합]할 것이고, 이 것을 隱默藏蔽[은묵장폐]할 아무런 理由[이유]가 없었을 터인데, 앞서서는 女眞[여진]에 대하여 뒤에는 元[원]이며 明[명]에 對[대]하여 護疆[호강] 의 談辦[단판]이 몇차례나 行[행]하여졌지마는, 끝내 한 번도 이것을 疆理[강리] 의 保障[보장]으로 利用[이용]한 例[예]가 없었음은 奇怪[기괴] 하기 짝이 없는 觀[관]이 있음은 어떻게 說明[설명]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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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렇다면 眞興王代[진흥왕대]는 文敎[문교]가 크게 伸張[신장]하여 처음으로 國史編修[국사편수]의 擧措[거조]가 있는 정도였는데, 이만한 大事件[대사건]으로서 史乘[사승]에 漏載[누재]된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또 眞興王[진흥왕] 이 아무리 英武[영무]하였다 하더라도 高句麗[고구려]가 永樂[영락] ・ 長壽[장수]의 雄略[웅략]을 繼承[계승]하여 오히려 强勢[강세] 를 維持[유지] 하고 있었고, 뿐만아니라 江原道[강원도] 沿海地[연해지]의 一部[일부]에까지 그 州縣[주현]이 儼然[엄연]히 存在[존재]하던 때인데, 眞興王[진흥왕] 이 어떻게 해서 이곳을 넘어 他國[타국]의 版圖[판도]에 巡狩[순수]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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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代[진흥왕대]에 國史[국사]를 始修[시수]하여, 이로부터 新羅[신라] 의 事實[사실]이 차차 實錄的歷史期[실록적역사기]에 들어갔고, 그리하여 現存[현존] 〈三國史記[삼국사기]〉가 新羅[신라]의 材料[재료]를 主[주] 로 하여 編纂[편찬]되고, 따라서 新羅側[신라측]의 記載[기재]가 比較的[비교적] 많음은 事實[사실]이지마는, 그 國史[국사]라는 것이 여러 차례 書厄[서액]을 만났으니, 특히 景哀王代[경애왕대] 甄萱[견훤]의 大焚蕩[대분탕]에 거의 全滅[전멸]한 듯하여, 現存[현존] 〈三國史記[삼국사기]〉의 國內[국내] 史料[사료]는 新羅本紀[신라본기]조차 零碎散落[영쇄산락]하여 겨우 公私斷爛[공사단란] 의 나머지를 掇拾[철습]한 것에 不過[불과]함은 容易[용이] 하게 看取[간취]할 수 있는 바로서, 國家的[국가적] 大事件[대사건] 의 漏落[누락] 됨이 比比有之[비비유지]이었으니, 國都[국도]에서 가까운 地方[지방] 의 일로서 더우기 伽倻[가야] ・ 百濟[백제] 내지 日本[일본]에까지 관계 되는 事件[사건]인 二二[이이]년 辛巳[신사] 昌寧大會[창녕대회]와 같은 것조차 史[사]에 記載[기재]됨이 없고, 다행히 記錄[기록]에 오른 北漢山巡狩[북한산 순수] 는 二九[이구]년의 일을 十六[십육]년에 실었으며, 그리고 이것이 北境巡狩[북경순수], 昌寧[창녕] (比斯伐[비사벌]) 大會[대회] 와 完山州[완산주] 를 比斯伐[비사벌]에 둔 일과 超時間的[초시간적]으로 雜糅混同[잡유혼동] 되어 記述[기술]된 듯함을 보면, 〈三國史記[삼국사기]〉 그밖에 記傳[기전]되지 않았음이 본래부터 問題[문제]삼을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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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高句麗[고구려]를 사이에 두고 咸鏡道[함경도] 方面[방면]에 經略[경략]을 행함을 不可能[불가능]하다고 함은 얼핏 보아 그럴 듯한 見解[견해] 인 것 같지마는, 앞에 引用[인용]한 今西[금서]씨의 論文[논문]에도 大略[대략] 論及[논급]했듯이, 시방의 咸鏡道[함경도] 方面[방면]의 高句麗[고구려]에 대한 關係[관계]는 直轄[직할]의 郡縣[군현]과는 달라서, 沃沮[옥저]라 하는 半獨立[반독립] 部屬[부속]이 때에 따라 形勢[형세]에 좇아 離附[이부] 가 無常[무상]하였음과, 그리고 問題[문제]의 比列忽[비열홀]은 一部論者[일부논자] 가 말하는 바와 같이(朝鮮歷史地理[조선역사지리] 第一卷[제일권] 二二頁等[이이엽등]), 京畿[경기] 東邊[동변], 江原道[강원도] 西端[서단]에 局限[국한]될 것이 아니라, 그것이 一般[일반]으로 시방의 咸興地方[함흥 지방]으로 推論[추론]되는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 樂浪郡[낙랑군] 不而縣[불이현] 以下[이하]의 不而[불이] ・ 不耐[불내]와 관계 있는 地名[지명]인 것이 大略疑心[대략의심]할 수 없으며, 그 위에 한편 新羅[신라] 와 濊[예] ・ 沃沮[옥저] 方面[방면]과는 바다에 依[의]한 交通[교통] 의 自由[자유]로왔음을 아울러 較量[교량]한다면, 新羅[신라] 對[대] 高句麗[고구려] 의 觸撥[촉발] ・ 牽制[견제] 過程[과정]에 있어서의 沃沮[옥저] 의 嚮背[향배]는 學者[학자]의 顧慮[고려]를 끌기에 足[족]한 好題目[호 제목] 이 아닐 수 없다. 眞興王[진흥왕]과 같은 北方經略[북방경략]의 英主[영주] 가 沃沮[옥저] 方面[방면]에 招諭綏撫[초유수무]의 손을 뻗치지 않았으리라고 뉘라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볼 때 碑文[비문]에 「四方託境廣獲民土[사방탁경광획민토], 隣國誓信和使交通[인국서신화사교통]」 이라한 一句[일구]가 두드러지게 빛나는 것을 깨닫는다.
192
이러한 見解[견해]는 본래부터 一片[일편]의 想像[상상]으로서 그 必然[필연]을 速斷[속단]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史籍[사적]에 記載[기재]가 없고 大勢[대세]에 齟齬[저어]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不定[부정]할 길이 없는 眞興王碑[진흥왕비] 와 같은 反記錄的[반기록적] 遺物[유물]이 儼存[엄존] 하는 경우에는, 眞相[진상]에의 一步[일보]로서 우선 이 정도의 擬想[의상]을 許容[허용] 함도 구태여 不可[불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94
시험삼아 이 形勢[형세]를 側面[측면]으로부터 揣摩[췌마]하건대, 支那[지나] 의 歷朝[역조]로부터 震域[진역]의 君主[군주]에게 樂浪公[낙랑공]의 爵號[작호] 를 보낸 것은, 後代[후대]의 覊糜的[기미적] 虛名[허명]은 別問題[별문제] 로 하고 그 始初[시초]에는 樂浪[낙랑] 舊土[구토]의 領有者[영유자] 임을 表象[표상]하는 意味[의미]인 듯이 보이는데, 西紀[서기] 三一三[삼일삼] 년에 樂浪郡[낙랑군]의 全滅[전멸]을 보고 그 疆理[강리]의 大部分[대부분] 이 高句麗[고구려]에 돌아가자, 三五五[삼오오]년 燕[연]으로부터 高句麗[고구려] 의 故國原王[고국원왕]에게 樂浪公[낙랑공]의 一部[일부] 를 版圖[판도]에 넣고 支那[지나] 交通[교통]의 便途[편도]를 얻자, 동시에 北齊[북제] 世祖[세조] 河淸[하청] 四[사]년(西紀[서기] 五六五[오육오]) 眞興王[진흥왕]에게 樂浪郡公[낙랑군공]의 號[호]가 보내졌고, 그 以後[이후] 眞平[진평] ・ 善德[선덕] ・ 眞德[진덕] ・ 太宗[태종] ・ 文武[문무]의 諸王[제왕]에게 다 支那[지나]의 隋唐[수당]으로부터 樂浪[낙랑]의 公[공] 혹은 王[왕] 의 號[호]를 보내 오는 것이 例[예]가 되었다. 이와 같이 樂浪[낙랑] 의 爵號[작호]가 新羅王[신라왕]의 專有[전유]로 된 것은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며, 아마도 樂浪[낙랑]의 土地[토지]가 新羅[신라]의 所有[소유] 로 되었다는 識認[식인]에 因[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濫觴[남상] 이 眞興王代[진흥왕대]에 있는 것도 거기에 相應[상응]하는 理由[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濊[예]를 爲始[위시]하여 不而[불이] ・ 華麗[화려] 等[등] 樂浪[낙랑] 東部[동부]의 여러 部族[부족] 내지 玄菟郡[현도군]이 廢止[폐지] 와 함께 樂浪[낙랑]에 遷屬[천속]되었다고 하는(三雲志[삼운지] 沃沮傳[옥저전]) 沃沮地方[옥저지방]이 眞興王代[진흥왕대]의 新羅[신라]와의 사이에 某種[모종]의 關係[관계]가 생긴 投影[투영]으로 볼 것은 아닐까.
195
또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新羅[신라] ・ 百濟[백제]의 古代[고대]에 靺鞨[말갈]과의 交涉[교섭]을 말하는 條項[조항]이 적지 아니하되, 支那[지나] 의 史籍[사적]에 依[의]해 當時[당시] 江原道[강원도]에 居住[거주] 하였음 이 分明[분명]한 濊部族[예부족]의 史籍[사적]이 〈三國史記[삼국사기]〉에 槩見[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이 靺鞨[말갈] 이 實[실]은 濊[예]에 不外[불외] 할 것이라고 推定[추정]한 學者[학자]가 있는 정도 이지마는 (朝鮮歷史地理[조선역사지리] 第一卷[제일권] 五九[오구]∼ 六六[육육], 一一九頁等[일일구엽등] 參照[참조]), 이것은 다른 機會[기회]에 吾人[오인]이 論證[논증]을 試圖[시도]한 바와 같이, 半島[반도]의 住民[주민]은 예로부터 東北方[동북방] 의 異民族[이민족]을 「무자」mucha 라 불렀으니 (後[후] 의 「水尺[수척]」 이 곧 이것으로서, 水尺[수척]의 水[수]를 잘못 音讀[음독] 하여 다시 「禾尺[화척]」이라는 語形[어형]도 낳게 된 듯), 그것의 根本的[근본적] 關係[관계]의 有無[유무]는 何如[하여]튼 우선 그 音[음]이 相通[상통] 함과, 어느 程道[정도]의 事實的[사실적] 合致[합치]가 있 음으로부터 마침내 여기에 支那[지나]에서 말하는 靺鞨[말갈]이라는 글자를 配當[배당] 하기에 이르고, 또 濊[예]와 沃沮[옥저]가 본래 다 같이 이 種屬[종속] 임으로써 〈三國史記[삼국사기]〉 등의 古記錄[고기록]에 있어서의 靺鞨[말갈]이라는 稱號[칭호]는 本來[본래] 假冒代名[가모대명]이 아니라, 實[실] 은 濊[예] ・ 沃沮[옥저]를 包含[포함]하는 意味[의미]로서의 「무자」라 하는 古名[고명] 의 한 吏道[이도]에 不外[불외]한다고 생각되는데, 大體[대체] 로이들 古記錄[고기록]과 靺鞨[말갈]과의 交衝[교충] 事實中[사실중]에는 眞興王[진흥왕] 前後[전후]에 있어서의 沃沮方面[옥저방면] 經略[경략]의 投影[투영]을 認定[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196
〈三國志[삼국지]〉에도 北方部族[북방부족]의 一派[일파]인 挹婁人[읍루인] 이 즐겨 乘船寇秒[승선구초]하여, 南方[남방]의 部族[부족]이 이것을 두려워 했다는 事實[사실]이 보이며, 〈高麗史[고려사]〉에 依[의]하면 女眞族[여진족] 이 배를 가지고 南寇[남구]했다는 例[예]가 枚擧[매거]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때로는 三陟[삼척] ・ 平海[평해] ・ 慶州[경주] 근방까지 遠征[원정] 한 일도 있었다(太祖[태조] 四[사]년 곧 新羅[신라] 景明王[경명왕] 五[오] 면에도 「達故狄[달고적] 百七十一人侵新羅[백칠십일인침신라], 道由登州[도유등주]」云云[운운]이라고 적혀 있고, 顯宗[현종] 二[이] 년에는 「東女眞百餘艘寇慶州[동여진 백여소구 경주]」라는 記事[기사]가 있다. 文宗[문종] 一代[일대]만 보아도 二[이]년 六[육]월, 四[사]년 九[구]월, 六[육] 년 六[육]월, 十八[십팔]년 閏五[윤오]월 ・ 六[육]월 ・ 七[칠]월, 二一 [이일] 년 六[육]월 ・ 七[칠]월 등에 이 海路寇掠[해로구략]의 記事[기사] 가보인다).
197
日本史上[일본사상]에 所謂[소위] 寬仁[관인] 三[삼]년(西紀[서기] 一○一九[일 ○ 일구], 高麗[고려] 顯宗[현종] 一○[일○]년) 刀伊[도이]의 筑紫入寇[축자입구]라 함은 그 가장 活潑[활발]한 一策動[일책동] 이라고 볼 것임에 不外[불외]하지마는, 新羅[신라]에 있어서도 船政[선정] 이 兵部[병부]에 管掌[관장]되었던 것과 같이(三國史記[삼국사기] 職[직] 官志[관지] 船府條[선부조]) 水軍[수군]의 設備[설비]도 있었고,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 十三[십삼]년(西紀[서기] 五一二[오일이])에 배 (水軍[수군]) 를 가지고 于山國[우산국]을 征服[정복]한 事實[사실] 도 있는 程度[정도]이고 보면, 女眞[여진]의 航路[항로]를 逆[역]으로 한 水路北征[수로북정] 의 擧措[거조]가 없었다고 記錄[기록]만 가지고 速斷[속단] 할 수는 없을 것이다. 要[요]컨대, 新羅[신라]와 沃沮[옥저]와의 사이에는 海路[해로]에 의한 特殊[특수] 交涉[교섭]이 可能[가능] 했 음을 認定[인정]할 수 있음으로써, 關北方面[관북방면]의 眞興王碑[진흥왕비]에 관련되는 秘機[비기]가 혹시 여기에 伏在[복재]해 있 음을 設想[설상]하려 하는 것이다.
199
이번에 새로 出現[출현]한 磨雲嶺碑[마운령비]와 이것에 依[의] 하여 缺字[결자] 를 補完[보완]하고, 寃舌[원설]을 斷絶[단절] 하여 (年號[연호] 가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疑難[의난] 따위), 여러 가지로 生命[생명]을 새롭게 한 黃草嶺碑[황초령비]와, 北土[북토]에 있어서의 眞興王[진흥왕] 關係[관계]의 兩石文[양석문]은, 그것이 眞興王代[진흥왕대] 의 新羅[신라] 東北境[동북경] 審定[심정]의 最古證本[최고증본] 됨은 물론이지마는, 또한 一般歷史[일반역사] 乃至[내지] 文化史的[문화사적] 材料[재료]의 一大庫藏[일대고장]으로서, 特[특]히 半島[반도] 一隅[일우]의 君主[군주]가 當時[당시]에 이미 歷數[역수]의 觀念[관념]을 爲始[위시]하여 建元[건원] ・ 稱朕[칭짐] ・ 巡狩[순수] ・ 立石[입석] 등 支那[지나] 그대로의 帝王的[제왕적] 自負[자부]의 實[실]을 實現[실현]한 一大事實[일대사실]로서, 작게는 新羅[신라] 年號[연호] 가 金石文[금석문]에 보이는 最古文憑[최고문빙]으로서 大端 [대단] 히 重要性[중요성]을 지닌 史料[사료]임은 새삼스레 贅辯[췌변]을 要[요]치 않는 바이지마는, 이것을 單純[단순]히 藝術的[예술적]으로 보더라도 그 文[문]은 半島[반도] 最古[최고]의 全豹的[전표적] 文章[문장]으로서, 더우기 相當[상당]히 整齊[정제]한 內容[내용] 外形[외형]을 지녔고, 그 書[서]는 古拙[고졸]한 가운데 오히려 훌륭히 隸楷相交[예해상교] 한 六朝書法[육조서법]의 神髓[신수]를 나타내어, 朝鮮[조선] 은 勿論[물론] 一般[일반] 東方[동방]의 藝術史上[예술사상]에 有數[유수]한 地位[지위]를 차지할 수 있음을 認定[인정]할 것이며 (淸趙之謙[청조지겸] 의 補寰宇[보환우] 訪碑錄[방비록] 卷一[권일]에는 陣代[진대]의 碑[비]라 하여 오직 하나 咸興[함흥]의 眞興王碑[진흥왕비] 를 揭出[게출]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大觀[대관]하면 半島[반도]에 있어서의 支那文化[지나문화]의 流行[유행]이 얼마나 빨랐고 또 旺盛[왕성]하였던가를 證明[증명]할 만한 好箇[호개]의 資料[자료]라고 할 것이다.
200
世間[세간]에는 이 碑[비]의 文[문]과 및 書[서]를 당시의 半島人[반도인] 이 能[능]히 할 수 없었다하여, 그것이 支那[지나] 流寓民[유우민] 의 손에서 나온 것일 것이라고 想念[상념]하는 者[자]가 있다. 그러나 당시 佛敎[불교] 流行[유행]의 狀況[상황]으로 보아, 梁[양] 〈高僧傳[고승전]〉 其他[기타]에서 徵[징]하여지는 것과 같이, 支那[지나] 本土[본토]에 있어서의 半島[반도] 佛敎徒[불교도]의 旺盛[왕성]한 義解演說上[의해연설상] 의 實績[실적]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 정도의 文筆[문필] 은 何等[하등] 當時[당시] 半島人[반도인]의 矜耀[긍요]라 할 것이 못 됨을 알 것이다.
201
더우기 眞興王碑[진흥왕비]의 隨駕人名[수가인명]을 列錄[열록]한 곳에도 大官[대관] 重臣[중신]보다도 이른바 沙門道人[사문도인]을 먼저 記載[기재] 했다는 것은 본래부터 空然[공연]한 일이 아닐 것으로서, 미상불 이들 人物[인물] 이 敎政[교정]을 兼[겸]한 國師[구사]이었던 때문일 것이며, 특히 文史[문사]의 權[권]이 僧人[승인]의 手中[수중]에 있었음은 살피기 어렵지 않은 바로서, 〈三國史記[삼국사기]〉(卷第四○[권제사○ 職官志末[직관지 말])에,
202
大書省一人[대서성 일인], 眞興王以安藏法師爲之[진흥왕 이안장법사위지], 眞德王加一人[진덕왕가일인].
203
이라고 한 것은 여기서 參照[참조]일 만한 事實[사실]일 것이다.
204
徐有榘[서유구]의 〈怡雲志[이운지]〉(卷[권] 第五[제오] 東國金石[동국금석])에 引用[인용] 한, 柳冷齋新蘿眞興王北巡碑注[유냉재신라 진흥왕 북순비주], 曰文多缺[왈문다결], 有曰[유왈], 隨駕沙門道人[수가사문도인] 法藏慧忍[법장혜인], 意即撰書者[의즉찬서자], 라 한 設[설]은, 當時[당시] 文史[문사]의 痛勢[통세] 로 보아 首肯[수긍]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6
대저 眞興王[진흥왕]의 事蹟[사적]은 記傳[기전]과 遺物[유물]과의 사이에 심한 距離[거리]가 있다. 그리하여 이 齟齬牴牾[저어저오]를 合理的[합리적]으로 剖明[부명] 혹은 調和[조화]시키기는 그리 容易[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그 細密[세밀]한 比量[비량]과 明快[명쾌]한 論斷[논단]을 오히려 먼 將來[장래]에 期待[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여기에 言明[언명] 할 수 있는 것은, 最近[최근] 池內[지내]시에 依[의]하여 提唱[제창]된 關北[관북]에 關[관]한 二種[이종]의 新說中[신설중], 黃草嶺碑[황초령비] 의 原位置[원 위치] 如何[여하]는 別問題[별문제]로 하더라도, 尹瓘[윤관]의 九城[구성]을 咸興[함흥]의 平野[평야]에 限定[한정]시키려고 試圖[시도] 한 設[설] 은, 磨雲嶺碑[마운령비]의 出現[출현]에 依[의]하여 氏[씨] 自身[자신] 의 論理上[논리상] 當然[당연]히 저절로 崩壞[붕괴]되었으며, 따라서 公嶮鎭[공험진] ・ 先春嶺[선춘령]과 아울러 그 碑[비]의 正體論[정체론]도 再吟味[재음미] 를 要[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韓百謙[한백겸] 의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 (高麗咸[고려함] 府條[부조] 主都督下[주도독하])에 역시 林彦[임언]의 〈英州壁上記[영주벽상기]〉를 根據[근거]로 해서 形勢[형세]를 揣摩[췌마] 하여,
207
…… 今以三百里及甁項形勢推之[금 이삼백 리급 병항 형세 추지], 先春嶺遠不過摩天摩雲兩嶺之間[선춘령원불과 마천 마운 양령지간], 而摩雲嶺上有石樞舊基[이 마운령상유석추구기], 瓘之後終高麗之世[관지후종고려지세], 未聞有經理此地者[미문 유경리차지자], 吾恐此爲瓘之舊日關防也[오공차위관지 구일 관방야], 姑記之以俟知者[고기지이사지자].
208
라고 推論[추론]한 다음, 申景濬[신경준] ・ 安鼎福[안정복] ・ 丁若鏞[정약용] ・ 韓鎭書[한진서] ・ 金正浩[김정호] 등, 적어도 史地[사지]의 學[학]을 닦은 者[자]로 단 한 사람도 九城[구성] 豆滿江迤及說[두만강이급설]의 妄[망]을 斥破[척파]하지 않은 이가 없고, 遠近精粗[원근정조]의 差[차]는 있 으나 九城[구성]의 北限[북한]을 磨雲嶺[마운령] 안팎으로 한 點[점]에 있어서 大略[대략] 一致[일치]함을 보는데, 磨雲嶺碑[마운령비]에 地內[지내] 시의 論理[논리]를 應用[응용]한다면, 氏[씨] 自身[자신]의 提說[제설]보다도 舊朝鮮史家[구조선사가]의 推定[추정]이 正鵠[정곡]을 얻었음을 奇異[기이] 타 할 것이다. 그렇지마는 磨雲嶺[마운령]의 碑[비]가 반드시 尹瓘[윤관] 의 模造擬立[모조의립]이라고 速斷[속단]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209
앞서 말해 둔 바와 같이 碑體[비체]와 및 碑文[비문]에 대한 解釋[해석] 은 全部[전부] 이것을 先輩[선배]와 他日[타일]에 미루고, 여기에는 다만 舊碑[구비] 討究[토구]의 由來[유래]와 新碑[신비] 出現[출현]의 事情[사정] 과에 대해, 疎漫[소만]한 若干[약간]의 愚見[우견]을 붙여서 우선 大方[대방] 의 示敎[시교]를 冀企[기기]하기로 한다.
211
〈一九三○年[일구삼 ○ 년] 十一月[십일월] 靑丘學叢[청구학총] 第二號[제이호]〉── (金種武[김종무] 譯[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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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의 재래(在來) 삼비(三碑)와 신출현(新出現)의 마운령비(磨雲嶺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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