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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막(寂寞)한 예원(藝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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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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寂寞[적막]한 藝苑[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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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藝術[조선예술]에 생각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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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寂寞[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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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지 9월호를 들추어 내어 보았다. 9월호에 실린 창작 단회 소설을 비평이라도 하여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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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론 여의 수중에 있는 잡지는 조선 안에서 발행되는 월간 잡지 전부가 아니었다. 여의 수중에는 불행히 전부를 갖지 못하였다. 여의 수중에 있는 잡지를 나열하자면, 〈第一線[제일선]〉, 〈新女性[신여성]〉, 〈東光[동광]〉, 〈新東亞[신동아]〉, 〈三千里[삼천리]〉, 〈新生[신생]〉, 〈新朝鮮[신조선]〉 등 數種[수종]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상은 물론 조선문 잡지의 전부는 못 된다. 그러나 대부분이 된다고 넉넉히 豪語[호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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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일곱 잡지를 읽어 보면서 소설 비평이라도 하여보려던 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였나? 여는 거기서 실망과 적막 밖에는 발견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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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다지도 적막한 소설단이냐. 잡지 일곱 가지 중에서 세 가지는 창작 단회 소설이라고는 그림자부터 없었으며 나머지 네 가지 가운데 10편 내외의 소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 열 편 내외라는 것도(부족하나마) 비평의 창 끝에 오를 만한 것은 겨우 한두 편에 지나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습작이라는 명색조차 붙이기가 부끄러운 유치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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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작품이 왜 이다지도 없느냐? 이지의 산물인 이런 의문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적막을 한없이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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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직후에 한때 작가 배출의 찬란한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것도 지나간 꿈이요, 그때부터 꾸준히 계속해 오는 수삼 기성 작가 외에는 모두가 혹은 死去[사거] 혹은 직업 전환의 은퇴로 없어지고 볼 만한 새로운 작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적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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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가가 없느냐? 혹은 작가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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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류에 속하는 잡지의 소위 ‘문예 특집’이 이렇듯 빈약할진대 현재 조선에 있는 작가나 혹은 작가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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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없는 땅 혹은 작가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 없는 땅 ― 이것은 문예를 애호하는 여 등에게는 얼마나 한스럽고 적적한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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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막한 문단을 바라볼 때에 여 등은 문득 우리의 과거의 예술단을 찬란히 장식하여 준 몇몇 천재를 추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은 사거 혹은 은퇴하기 때문에 다시 찾아 보지 못한 그들의 남긴 업적 ― 소설에 있어서 늘봄, 稻香[도향], 曙海[서해], 憑虛[빙허], 望洋草[망양초]의 몇 사람, 시에 있어서 素月[소월], 화단에서는 金觀鎬[김관호], 金讚永[김찬영] 그 밖에 尹心悳[윤심덕], 裴龜子[배귀자] 외 몇몇 사람의 남긴 업적은 오늘날의 쓸쓸한 예술단을 돌아볼 때에 그립기가 짝이 없다. 그들이 좀더 살았더면 ― 혹은 그들이 은퇴를 안하였더면 ― 이런 가정 아래 우리의 적막함은 더욱 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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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늘봄 田榮澤[전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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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은 왜 은퇴하였느냐. 늘봄의 은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적적함을 느끼기보다 먼저 너무도 예술가를 구박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憤懣[분만]이 더욱 크게 가슴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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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은 東京[동경] 靑山學院[청산학원] 중학부를 마치고 同[동] 학원 신학부를 마친 신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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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은 조선 문단을 건설한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創造[창조]〉에서 〈朝鮮文壇[조선문단]〉에서 〈靈臺[영대]〉에서 그 독특한 간결한 필치와 기지 있는 결구로서 조선에 있어서 지금 말하는 ‘콩트’를 처음으로 보여준 작가다. 독특한 간결한 글로써 힘있게 인도주의의 문을 열어 젖히는 드문 천재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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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성은 마치 입속에 밤알이라도 놓고 말하는 것같이 똑똑하고도 불명료하다. 그런지라 그는 결코 단상의 인이 될 자격은 없는 사람이다. 그는 부끄럼을 몹시 타는 사람으로서 누구와 대화를 하는 때는 눈을 들어서 상대인의 얼굴조차 정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지라 그는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에는 절대로 종사를 못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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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과 마음이 아울러 약한 사람이다. 그런지라 그는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지위에는 견디지 못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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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거늘 그는 지금 어떤 山邑[산읍]에서 예수교의 목사 노릇을 하고 있다. 얼른 알아듣기 힘든 음성으로써 단상에서 講道[강도]를 하고 숱한 교인을 거느리고 지휘하고 대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월급은 산읍이니만치 50원 내외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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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그의 마음이 괴롭고 아프랴. 자기의 소질에 맞는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고(약소한 돈에 팔려서) 소질에 反[반]한 직업에 종사하는 그의 심경은 얼마나 적적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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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문단에서 은퇴를 하였나? 글은 그에게 밥을 안 주었다. 소설가 전영택이 밥을 굶을 때 어떤 여자 신학교에서 신학사 전영택을 교사로 데려간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은퇴를 하였다. 신학사 전영택은 몇 해를 여자 신학교에서 視務[시무]를 하였다. 그런 뒤에 조선 예수교의 발상지 아메리카로 파견을 당하여 거기 가서 또 다시 신학의 연구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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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더 신학에 대한 연구를 쌓은 뒤에 그는 환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돈’을 미끼삼아 전영택을 문단에서 끌어온 예수교는 다시 그를 미국까지 유학을 시킨 뒤에 이 일대의 신학자(東京[동경]서 신학을 전공하고 또 다시 미국까지 가서 연구를 하였으며 그는 조선인 중에서 최고의 신학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를 황해도 鳳山[봉산]이라는 산읍에 50원 내외의 박봉으로써 정배를 보냈다.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를 거듭한 그의 학문이 겨우 매달 50원 내외에 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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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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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비참한 이름이냐. 예수교 내에서나마 좀더 후한 대우를 못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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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운 소질이 헛되이 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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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틈틈이 익명으로나마 그 경쾌하고도 무게 있는 소설을 못 보여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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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비참한 조선의 현실이로다. 늘봄은 왜 은퇴를 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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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羅稻香[나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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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早天[조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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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은 단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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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비참한 말이냐. 또한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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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에 부릴 재능은 모두 일정하다. 그 재능의 양을 가령 백이라 하면 80세까지 사는 사람도 백의 재능밖에 못 쓰고 20세까지 사는 사람도 백의 재능은 다 쓰고야 만다. 그러므로 천재는 조천한다는 말은 역설이요, 조천하는 사람은 천재가 된다는 말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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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론가는 이렇게 詭辯[궤변]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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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천재들이 얼마나 많이 조천을 하였는가 설명하여 준다. 이것은 얼마나 아쉬운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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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은 왜 그다지도 일찍 죽었느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천재를 몰라주는 조선 사회에 대한 분노가 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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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은 직접 원인은 혹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죽음에 이끈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영양불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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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로 보아서 탄탄하게 생긴 도향이었다. 그러나 탄탄하게 생긴 그의 근력은 ‘貧[빈]’ 때문에 죄 소모되고 그 위에 그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만과 적막 때문에 한 無媒[무매]한 음주는 그의 체질로 하여금 ‘생’에 저항치 못하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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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도 없는 冷酒[냉주]를 대접으로 들이키는 도향,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자기의 적막함을 호소하던 도향, 고독을 즐겨하면서도 또한 그 고독 때문에 울던 도향, 조선이 가진 작가 가운데 가장 재분이 나은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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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兄[김형]. 왜 세상은 이다지도 외롭소? 종로 네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내 앞으로 무수한 사람이 휙휙 지나갑니다. 그렇소, 많이 지나는 갑니다. 그러나 왜 얼굴을 내게 향하고 미소라도 아니 던져 줍니까. 왜 서로 꼭 그렇게 무관심하나이까. 서로 꼭 그렇게 무관심히 살아야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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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고적을 느끼는 사람의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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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있었으나 차디찬 집이었다. 그의 애인은 그를 버렸다. 사회는 문필업이라는 것을 무시(무시는 천시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하였다. 이런 가운데 가뜩이 영양불량으로 쇠약한 그의 胃[위]에는 연하여 데우지도 않은 술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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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그의 적적함을 위로하여 줄 만한 한 사람의 애인이라도 있었고 그의 불량한 영양을 도와 줄 만한 생활의 여유라도 있었더면 그는 그다지 일찌기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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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그의 문필 생애 중에 커다랗게 남겨 놓은 업적을 생각할 때에 ‘왜 하늘은 그에게 좀더 긴 목숨을 주지 않았는가’고 원망하기 전에 먼저 ‘왜 조선은 그에게 좀더 보신할 만한 영양을 주지 않았더냐’는 분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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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재가 나타나지 않는 조선에서 과거의 많은 천재들이 일변 은퇴하고 일변 죽어 없어지는 것은 너무도 쓰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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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한 우리의 소설단을 바라볼 때마다 다작의 천재 도향을 그리는 생각은 더욱 절실하다. 그는 왜 그다지도 일찍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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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崔曙海[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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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을 잃은 조선문단은 그보다 또 여러 해를 지나서 금년 여름에 서해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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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목숨을 직접 빼앗은 것은 소위 幽門[유문]협착증이라나 하는 병이다. 그러나 그 병이 왜 생겼느냐 하면 거기 또한 서해의 ‘貧[빈]’을 그 원인으로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난한 그는 사람의 위가 능히 소화치 못할 粗食[조식]을 흔히 하였다. 이틀 사흘을 굶는 때도 흔히 있었다. 굶었다가 어떻게 음식을 만나면 그 새의 벌충을 하기 위하여 과식도 흔히 하였다. 초근목피도 흔히 하였다. 위에 대하여 이런 난폭한 일을 늘 하여오기 때문에 그의 위는 어느덧 순조로운 기능을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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胃散[위산]을 상복하던 그이였다. 위산을 먹고도 배가 편치 않다고 배를 쓰다듬던 그였다. 그리고 위통을 누르기 위하여 아편제의 약을 거의 상복하다시피 하던 그이였다. 이러한 일이 거듭되어 마침내 유문협착증이 되었으며 유문협착증이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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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관찰과 힘있는 붓과 능란한 말 만들기와 인류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동정심을 풍부히 가진 그는 조선의 문사 중에 가장 촉망이 크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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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그의 이미 지나온 쓰라린 과거 ― 빈곤·죄악·방랑·폭행·고역·주림·타락 등은 조선 문인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지 못할 귀중한 체험으로서, 말하자면 조선 문단의 한 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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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기에 무수한 작품을 내었다. 한때 다작으로 도향에 지지 않을이만치 많이 썼다. 그러나 그때의 작품에는 문예로서의 부족한 점이 많았다. 아직껏 지내 온 쓰라린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때는 하층 생활자가 고등 생활자에게 대한 분노만 그때는 가졌었다. 그런지라 터져 나오는 분노가 그의 붓끝에서 날뛸 뿐이었다. 그 분노 때문에 예술가가 가질 냉정을 흔히 잃던 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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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노를 객관시할 만한 평정을 얻은 뒤에야 그것이 비로소 예술화한 것 이었다. 분노가 분노에 지나지 못할 동안은 거기는 과격한 ‘문구’ 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서해는 차차 어느덧 그 분노를 객관시할 냉정을 얻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는 온전히 다른 커다란 문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빈부 문제가 즉 인생의 전 문제가 아니다. 빈부 문제는 한 소부분 문제에 지나지 못한다. 그보다 더욱 큰 인생 문제라 하는 것이 앞에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여기서 서해는 아직껏 일 소국부에 속하는 분노를 너무도 크게 취급하던 게 작품 행동에는 큰 착각이었었던 것을 알았다. 그는 잠시 붓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새 국면을 타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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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 국면을 타개하기 전에 그의 貧病[빈병]은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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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일찍부터 치료를 했더라면 넉넉히 치료를 할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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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의사의 이 말을 들을 때에 여 등은 그가 왜 일찍부터 치료를 못하였는가 그 원인을 생각하고 다시 가슴을 두들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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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憑虛[빙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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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를 ‘과거의 人[인]’ ‘은퇴의 人[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혹은 부당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근년 소설을 붓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문사와는 4촌격 되는 신문 기자로서 꾸준히 활동하는지라 ‘문업’을 내어던졌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여가 여기 빙허를 한몫 끼운 것은 그가 근년 소설을 붓하지 않고(한 번 〈신소설〉엔가 예외가 없지도 않았으나) 其一方[기일방], 신문 기자로선 착착 그 地步[지보]를 든든히 잡는지라 그를 문인으로 보기보다는 저널리스트로 보는 편이 온당하겠으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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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있어서든 현재에 있어서든 그 섬세한 필치와 아기자기한 묘사로서 조선 소설가 가운데 빙허의 域[역]은 따를 자 없다. 더구나 가장 평범한 부에 속하는 인텔리 계급의 가정 묘사에 있어서는 독보였다. 그러던 그가 소설계에서 물러서서 신문 기자가 된 뒤 수년. 지금의 그의 붓은 어떻게 변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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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발표중인 그의 ‘檀君聖蹟[단군성적] 踏査記[답사기]’는 그 좋은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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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는 예술가로서의 관찰이 없는 대신에 저널리스트의 관찰은 놀랄만치 풍부하다. 그가 ‘아아’를 부르짖고 ‘오오’를 부르짖을 때도 우리는 거기서 예술가로서의 감격을 발견하기보다 저널리스트의 감격을 발견한다. 그가 망연히 서서 바라보는 것은 역사적 감격보다도, 예술안에 비친 아름다운 산수보다도 저널리스트의 마음에 비친 현실적 숫자 앞에서다. 말하자면 같은 문업이라 하지만 소설가 현빙허는 없어지고 그대신 저널리스트 玄鎭健[현진건]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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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초기 저널리스트 시대에 발표한 ‘慶州紀行[경주기행]’과 같은 아름다운 예술품은 인제는 다시 그에게서 구하여 볼 수 없을 것인가? 이노코리(ゐのこり ― 주머니에 남은 돈)를 두려워하지 않고 술을 폭음하던 방심가인 그가 지금은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주가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이만치 영리하게 된 대신 이만치 또한 실제가가 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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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그는 소설계를 물러서서 신문 기자가 되었나? 거기도 움직이는 ‘밥문제’의 그림자가 있다. 소설은 밥을 안 준다. 그러나 신문 기자업은 밥을 준다. 그것은 마치 늘봄에 있어서 목사 등이 밥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본시 택하였던 업은 그에게 밥을 안 주기 때문에 밥 주는 데로 돌아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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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어떤 문인이 모대학의 교수로 초빙이 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첫 시간을 교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즉시 사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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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이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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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문이 정업인데 교수 노릇을 하자면 정업에 영향이 생기겠다. 이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로는 자기는 집에서 자기 마누라와 밖에는 이야기를 그리 해보지 못한 사람인데 많은 학생 앞에서 이야기를 하기가 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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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여 등에게 부러운 이야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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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밥이 안되기 때문에 연해 목사나 기자로 전직을 하는 우리 사회에 비기건대 문업을 위하여 대학교수를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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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彈實[탄실] 金明淳[김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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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빈] 때문에 몰락, 타락, 방황을 거듭하다가 그 종적조차 없어진 사람으로 또한 여류의 김명순을 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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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그 소설을 덮는 한 개의 기분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임시적, 혹은 신진의 작가들이 어떤 사람은 그만치 정확한 묘사를 할 줄 알면서도 결국 한 개의 소설 작가로서의 完成員[완성원]의 域[역]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한 가지의 이유 밖에 없다. 그들은 기분이라 하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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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김명순의 자랑이 있다. 조선에 글을 쓰는 여인들이 그 사이 꽤 많이 난 가운데서 기분이라는 것을 파악할 줄 알고 있는 유일인이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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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5,6년 전 〈청춘〉의 현상에 2등인가 당선된 그의 「의문의 小女[소녀]」에도 그 전편을 덮은 신비적 기분이 있었던 붓도 상당히 세련된 솜씨였다. 조리의 기능도 상당하였다. 말하자면 여류로서 어떤 레벨까지 올라갔던 유일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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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姜敬愛[강경애]가 있다. 기분이라 하는 것을 나타낼 줄도 안다. 문장도 상당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리의 기능이 絶無[절무]다. 漫然[만연]히 늘어 놓을 뿐이다. 비평을 받을 만한 권내에도 아직 들었달 수 없다. 그 밖에도 여류 수필가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 어떤 레벨까지 올라갔던 사람은 여류에서는 김명순이 유일인이였다.
 
76
여자 중에서 나의 유일인의 문인이었던 그는 지금 어디로 가 있나. 그의 거처를 아는 사람조차 없다. 일본 어느 곳에 가 있다는 막연한 풍설만 들려올 뿐이다.
 
77
그러면 그는 왜 자기의 활약 무대인 조선을 버리고 일본으로 가서 방랑적 생활을 하나. 밥! 밥! 조선의 문인들은 왜 그다지도 밥이 없느냐. 명순도 밥이 없었다. 그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그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젊음이 차차 없어지는 것을 기회로 그는 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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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모, 歐洲[구주]를 다녀온 몇 청년이 한때 조선의 희귀한 ‘감각적 여성’이라는 호기심에 끌려 서로 싸움을 해가면서 그에게 밥을 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그는 드디어 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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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더구나 지식 계급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과 ‘밥 문제’가 충돌될 때 그는 얼마나 고민하였던가. “우습지요. 사람의 심리란 참 우스워. 겨울에는 자살도 하기 싫어. 이제 봄철만 되면 자살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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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종적이 사라지기 전 해의 겨울을 李東園[이동원]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면서 그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숱한 고난에 부딪치기 때문에 오히려 남성적 쾌활함과 자포자기를 걸친 그의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자살하였나 하는 때마다 절망적 애수와 고민의 相[상]이 역연히 나타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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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반 70이 된 그다. 미를 팔기에는 너무 늙었다. 화가의 모델로는 너무도 뼈투성이의 빈약한 몸이다. 일본 가서는 지금 어느쯤에서 무엇으로 밥을 벌고 있나? 기생이라도 되겠노라던 그, 배우가 되겠노라던 그, 또 다시 신문 기자가 되어보겠다던 그, 추워서 자살을 못하겠노라던 그, 밥이 없어서 갈팡질팡하던 그의 여러가지 모양을 생각할 때마다 조선의 예원의 장래가 근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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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金素月[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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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한 문인 가운데 천재적 민요 시인에 김소월이 있다.
 
84
소월은 본시 岸曙[안서]의 제자였다. 안서의 제자이던 그는 처음 한때는 온갖 것(시풍, 格語句[격어구], 심지어는 몸가짐, 옷, 원고용지의 양식까지)을 안서를 본받은 때가 있었다. 숭배하는 자기의 스승을 본받기에 급급하여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제2 안서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스승을 본받는 詩[시]니만큼 스승보다 떨어졌다. 그러나 용은 언제까지든 池中[지중]의 物[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용인 이상에는 반드시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탈 날이 이를 것이다.
 
85
소월이 새 길을 찾았다. 민요 ― 아직껏 조선의 시인들이 돌아보지 못하던 길이었다. 당시의 기성 시인으로 象牙塔[상아탑]과 요한과 안서 등을 들 수가 있다.
 
86
요한은 평양이라는 도시 태생이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신식 소학교를 다녔다. 열 살이 조금 넘어서는 동경에서 놀았다. 따라서 요한은 민요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컸다. 그 요한이 아직도 조선에 돌아오기 전의 일인지라 요한에게서 민요가 나올 리가 없었다.
 
87
안서는 당시 불란서의 퇴폐적 시인들에게 잔뜩 귀의해 있던 때니만치 조선 민요 같은 것은 너절하다 하여 돌아볼 까닭도 없었다.
 
88
상아탑 역시 자기의 小曲[소곡]의 式[식]을 발명하여 가지고 다른 길을 돌아볼 여유도 없던 때다.
 
89
이런 당시에 있어서 소월이 새로운 想[상]을 가지고 민요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든 시의 발달은 민요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민요라 하는 계단을 건너뛰어서 신시의 길에 들어서려는 조선의 시단은 이 소월의 지적에 낭패하여 뒷걸음질쳤다.
 
90
춘원도 민요시를 썼다. 요한도 민요시를 썼다. 소월의 스승인 안서도 이번에는 물러서서 제자에게 師仕[사사]하였다. 뿐더러 이전 詩[시] 시대에 있어서 소월이 안서를 그대로 흉내내더니 민요에 있어서는 안서가 소월의 제2세가 되었다. 간간 민요의 윗머리에 부치는 緖言[서언]조차 안서는 그대로 흉내내었다. 이리하여 한때 시단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천재 소월은 왜 그만 침묵하여 버렸나.
 
91
소월만치 자기의 글에 대해 결벽을 가진 사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여가 이전 편집을 맡았던 어떤 잡지에 소월의 투고가 있었다. 거기는 ‘글자며 문법이며 말투는 커녕 글 句[구] 떼는 곳까지도 원고와 틀림이 없도록 하여 달라’는 附書[부서]가 있었다.
 
92
자기의 글에 대하여 이만치 자신과 자존심과 결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조선의 사회며 출판계는 너무도 무책임하게 보이고 불만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한 불만과 불안은 그로 하여금 붓을 내어던지게 한 것이다.
 
93
예술을 기박하는 조선이여, 지금 그는 말할 수 없는 술주정꾼이 되어 붓을 잡을 생각도 안하며 붓을 잡는다 하여도 그때의 그 힘이 그냥 남아있을지가 문제라는 것이 어떤 그의 친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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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술! 불평 많은 사회에서 그 불평을 잊으며 분노를 삭히며 태도를 모호히 하려는 유일의 피난처가 이 술이었던가.
 
95
천재가 조선에 생겨난 것은 실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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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金觀鎬[김관호]
 
97
이해하여 주지 뭇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술로써 모호히 하다가 인제는 폐인이 되어 버린 천재 가운데 또 洋畵家[양화가]의 김관호가 있다.
 
98
15,6년 전 東京[동경]의 모든 신문은 김관호 때문에 얼마나 떠들었던가. 東京[동경] 미술학교 개교 이래의 최고점의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의 졸업 작품은 일본 미술계의 최고 관문인 東美展[동미전](帝展[제전]의 전신)을 패스하기는커녕 특선까지 되었다. 그 학생은 조선 사람이다. 이러한 몇 가지의 특수한 일 때문에 김관호의 이름은 얼마나 東京[동경]의 각 신문이며 잡지에 오르내렸는가.
 
99
이런 명예를 짊어지고 돌아온 청년 화가를 위하여 그때 조선 유일의 신문이던 〈매일신보〉는 손바삐 그를 붙들고 그에게 금강산 探勝[탐승]의 문과 화를 촉탁하였다.
 
100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뒤에는 조선에서는 이 천재를 잊었다. 그가 일찌기 졸업한 東京[동경] 明治學院[명치학원] 중학부에는 그의 재학시의 圖畵[도화]가 거의 校寳[교보]가 되다시피 보관되어 있는데 그 천재의 몸을 차지한 조선서는 그를 잊어버린 것이다.
 
101
어떤 소학교에서 그를 도화 교사로 초빙하였다. 이것이 천재에 대한 조선의 최고 인식이었다. 간간 자기의 父祖[부조]의 사진을 들고 초상을 그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이 화가에게 대한 민중의 최대 부탁이었다. 친구 혹은 相交者[상교자]들이 그를 부름에 “화백 화백” 하였다. 이것이 그에게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102
모델? 모델대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여자로서는 염도 못낼 일이었다. 돈을 많이 주려면 기녀들 가운데는 혹은 응할 사람은 있겠으나 긴장과 탄력이 풀린 기녀들의 몸은 ‘마른 여인’이라는 한정된 범위의 그림은 그릴 수 있으나 넓은 범위의 모델은 무론 되지 않을 것이다.
 
103
때때로 그가 초상이라도 그리면 群盲[군맹]은 ‘확대 사진’만 못하다고 나무람하였다. 때때로 경치를 그리면 群盲[군맹]은, 거기 초부가 없고 소가 없고 버들이 없다고 비웃었다. 때때로 정물을 그리면 판화보다 선명치 못하다고 불만히 여겼다.
 
104
여기서 이 천재는 술로 달아난 것이다. 세상의 온갖 불평을 술로써 모호히 하고 술로써 잊고 술로 회피할 동안 알콜의 독은 마침내 이 천재의 몸을 버리게 하였다. 차차 술이 안 들어가면 그의 손은 떨려서 붓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자그마한 편지를 쓰려 하여도 손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반드시 술을 먹었다. 술을 먹지를 않으면 젓가락조차 바로 옮기지를 못하여 음식은 코로 눈으로 헤맨다. 그러던 것이 차차 과하여져서 지금은 비록 술을 먹을지라도 도저히 화필을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105
이 일대의 귀재를 이렇듯 폐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누구에게 있느냐.
 
106
술장사? 그렇다. 직접 원인은 이 세상에 술장사가 있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그 책임은 조선의 사회가 마땅히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도향이며 서해의 早死[조사]가 그 직접 원인은 ‘병’에 있지만 ‘병’의 책임을 조선의 사회가 져야 할 것과 같은 의미 아래서….
 
 
107
9. 金瓚永[김찬영]
 
108
이해하여 주는 사회가 없기 때문에 그 불만으로 은퇴하여 버린 사람 가운데 또한 화가요 문인인 김찬영이 있다.
 
109
찬영도 또한 東京[동경] 미술학교를(관호에게 떨어지기 1년인가 2년 뒤에) 쉽지 않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천재였다.
 
110
찬영은 미술계뿐 아니라 다방면에 긍하여 分[분]을 많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첫째로 미술 방면에 있어서도 관호의 화필 전문에 반하여 찬영은 미학이며 이론 방면에도 깊은 사람이다.
 
111
〈창조〉며 〈폐허〉며 〈영대〉를 통하여 문학의 길에 들여 놓은 그의 발자취도 상당한 역에까지 이르렀다.
 
112
손수 희곡을 쓰느니만치 극에 대하여도 관심이 많던 사람이다. 주택 설계에 있어서도 많은 연구를 하느니만치 평양이며 경성에 그가 설계하여 몸소 거처하다가 판 양옥이 여러 개 된다.
 
113
이렇던 그가 왜 조선의 예술계를 떠나서 다시 발을 들여 놓을 생각을 안하니 여기는 예술에 너무도 몰이해인 조선의 사회에 죄가 있다.
 
114
‘내가 풍류를 잡히되 너는 춤추지 아니하고 내가 울되 너는 따라 울지 아니하고….’
 
115
이것은 결코 선각자 예수의 탄성뿐 아닐 것이다. 조선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 전체가 느끼는 고적일 것이다.
 
116
그가 그리되 세상은 보지 않았다. 그가 쓰되 세상은 읽지 않았다. 그가 울리되 세상은 듣지 않았다.
 
117
풍부한 재산을 가진 그가 하는 모든 업적이 세상에 아무런 반향도 주지 못할 때에 그는 반향 없는 혼잣놀이에 싫증이 나서 ‘금전의 향락’으로 발을 돌린 것이었다.
 
118
영화를 즐기던 그는 한때 영화의 배급업도 하여보았다. 총을 메고 산야로 짐승의 발자취도 따라 다녀 보았다. 계집의 뒤도 좇아 보았다. 대동강에 낚시를 던지고 고기가 와서 물기를 기다려도 보았다. 마작에도 한때 취해 보았다.한때는 아편의 쾌미에도 취하여 중독자가 되었다는 소문까지도 내어 본 일이 있다. 그 밖에 금전으로 살 수 있는 향락은 모두 따라 다니며 맛보았다.
 
119
만약 그로서 재산만 없었더라면 어떤 시골 소학교의 도화 교사로라도 갔을 것은 틀림이 없을 예측이었다. 그는 결코 ‘예술’이라는 동산을 그냥 부여잡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120
적막한 조선의 예원이여, ‘내가 풍류를 잡히되 너는 따라 춤추지 아니하고….’
 
121
이리하여 그 적막함에 못이겨서 천분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빠져서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것은 너무도 비참하여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현상이다.
 
 
122
10. 尹心悳[윤심덕]
 
123
윤심덕은 지금 어디 있느냐? 대체 살았느냐 죽었느냐? 현대의 문명을 자랑하는 커다란 배가 下關[하관]을 떠나서 부산으로 행하였다.
 
124
그 배에 윤심덕과 그의 애인이 타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상륙할 때는 그 한 쌍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125
선장이 내어 놓은 유서에는 두 남녀는 이 세상을 버리고 영원의 봄동산인 천국으로 향하여 가노라는 말이 있었다.
 
126
이리하여 윤심덕과 그의 애인은 관부연락선에 몸을 던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127
그러나 그로부터 여러 해 지난 뒤에 괴상한 풍설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윤심덕은 살아 있다. 지금 이태리 어떤 곳에서 악기 장사를 하며 성악을 닦는 중이다. 그때의 자살이라는 것은 그들의 연극에 지나지 못한다. 많은 돈을 선장에게 먹이고 그런 연극을 꾸며낸 것이다. 그 조금 전에 윤심덕은 어떤 유성기 회사의 레코드에 ‘죽음의 찬미’라는 노래를 불렀다. ‘죽음의 찬미’를 레코드에 불어 넣은 다음에 망망한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 하는 것은 얼마나 시적이고 신비로운 일이냐. 그렇게만 되면 ‘죽음의 찬미’ 레코드는 굉장히 팔릴 것이다. 이런 투기심 아래서 레코드 회사와 윤심덕의 사이에 비싼 謝金[사금] 자살극이 연출된 것이다 ─ 이런 풍설이 떠돌았다.
 
128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하간 만약 조선의 사회로서 음악가에 대한 이해만 있었더라면 그는 그런 길을 밟지를 안않을 것이다.
 
129
이리하여 그의 관계자들은 관청의 힘을 빌어서 그 풍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이태리에 알아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배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을 때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 수수께끼는 그대로 풀리지 않았다. 아직 一家[일가]를 이루기에는 앞길이 너무도 멀었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서 소프라노의 성악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는 다만 한 개의 알이 있었다. 그 알이 홀연히 이 넓은 천지에서 그림자를 감추었다.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으면 어디? 소프라노의 알이라도 절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樂園[낙원]에 있어서 그의 실종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커다란 손실이다.
 
130
설사 그때의 그 사건이 한낱 연극에 지나지 못하고 지금도 그가 안재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게서 다시 소프라노 가수로서의 면용을 접하기가 힘들리라는 추측은 그다지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131
연령과 시간으로 보아서 만약 그가 그냥 살아서 소프라노의 수양을 쌓았다하면 제2류 제3류나마 그의 이름(비록 變名[변명]하였다 할지라도)이 우리의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만약 아직껏 연마를 거듭하면서도 제3류의 가수로서도 출세를 못할 그면 나이로 보아서 장래를 촉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 아래서 그때 그가 사실로 자살하였든가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을지라도 성악의 연마를 포기하였든가, 세 가지의 한 가지로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적적한 일이다.
 
 
132
11. 裴龜子[배귀자]
 
133
예원의 아까운 천재 가운데 무용의 배귀자를 또한 꼽지 않을 수가 없다.
 
134
그는 본시 일본 奇術師[기술사] 天勝[천승]의 제자였다. 天勝[천승] 일행이 평양에서 공연할 때에 당시 柳尾[유미] 호텔의 지배인으로 있는 현재 부군과 타협이 생겨서 은신을 한 것이었다. 그때 일본의 신문들은 한때 꽤 덤비었다. 은신 후 한동안 그의 소식은 사라졌다. 경성 어디 있다는 말은 있었으나 그 주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쉽지 않았다.
 
135
여기서 그에게 대한 호기심은 커 갔다. 더구나 흥행사들 가운데는 배귀자를 어떻게 흥행계로 끌어 내기만 하면 일확천금을 하겠다고 꿈꾸며 그 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리하여 그는 한 수수께끼의 인물로 이름이 날리어진 것이다.
 
136
은신 몇 해 뒤에 그는 무용단을 하나 조직하여 가지고 홀연히 뭇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흥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수수께끼의 주인으로의 호기심 때문에 몇몇 사람이 들여다보기는 하였지만 이게 뭐냐는 탄성을 발하며 돌아가는 것이었다. 여기 또한 조선 사람의 몰이해가 있다. 배귀자의 직후에 또한 무용단을 조직하여 가지고 나타난 최승희에 대하여 비교적 찬사를 아끼지 않은 조선의 사회는 배귀자에 대하여는 너무도 냉랭하였다.
 
137
왜? 거기는 몇 가지의 까닭이 있었다.
 
138
최는 무용가 石井[석정] 씨의 손아래서 길러나니 만큼 그 포즈며 동작이 제법 무용과 비슷했다. 최는 미스였다. 최는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최는 선전에 가능한 문필업자들을 끼고 일어섰다. 거기 반하여 배의 무용에는 무용으로서의 세련이 부족하였다. 배는 미세스며 얼굴과 나이도 최에게 손색이 있었다. 배경으로는 그의 남편과 남편의 우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139
이리하여 그는 최에게 압도가 되어 드디어 이 조선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회상되는 그의 무용에서 받은 감격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140
배의 무용은 배가 본시 무용가의 제자가 아니었으니만치 세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동일작에는 관객의 마음에 퍽퍽 들어박히는 ‘힘’이 있다. 그것은 ‘창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힘’이다. 더구나 그의 동생 함나로 하여금 춤추게 한 ‘고적’ 같은 것은 그것을 본 지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 등의 심현을 떨리게 한다. 비록 무용으로서의 세련이 부족했다 할지라도 ‘예술’로서의 감격은 우리는 영구히 잊혀지지 않는 바다.
 
141
최에게는 창조적 소질이 부족하였다. 그는 스승 石井[석정]에게서 본받은 아름다운 포즈를 이리저리 돌려서 보여 줄 뿐이었다. ‘창작’이라는 그의 모든 무용에서 창작적 감흥은 조금도 맛볼 수가 없었다.
 
142
배에게 조금만 더 무용적 세련미만 있었더라면 우리는 능히 세계를 향하여 ‘우리의 무용가를 보라’고 고함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그의 창작을 소화할 줄을 몰랐다. 아름다운 포즈가 부족한 그를(그것을 이유로써) 거부한 것이다.
 
143
그는 지금 일본 시골서 시골로 순회 흥행중이라 한다. 그는 이렇게 적적히 그의 일생을 마칠 것인가.
 
 
144
12. 其他[기타]
 
145
그 밖에도 우리의 예원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많이 있다.
 
146
죽은 退雲[퇴운]도 생각난다.
 
147
역시 죽은 章熙[장희]도 생각난다.
 
148
더구나 소년들을 위하여 분투하다가 일생을 마친 小波[소파]는 더욱 절실히 생각난다. 새로운 사람은 잘 나오지 않는 반면에 재능을 가진 사람은 일변 자꾸 꺼꾸러져 간다. 이렇게 일변 꺼꾸러지는 한편 또한 계속하여 은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도 비참한 일이 아니냐.
 
149
石松[석송]은 왜 은퇴를 하였느냐.
 
150
露雀[노작]은 왜 은퇴를 하였느냐.
 
151
요한과 巴人[파인]도 거의 은퇴에 가까우니 그것은 웬일이냐.
 
152
요섭은 왜 은퇴하였느냐.
 
153
그들로서 만약 글의 값이 ‘은퇴하기 때문에 생기는 수입’에 근사만 할진대 결코 은퇴하지 않을 것이다. 수입은 둘째치고 인식과 격려만 있을지라도 결코 은퇴는 안할 것이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카프계의 작가들이 은퇴하는 것은 웬일이냐.
 
154
李孝石[이효석]이 은퇴하였다. 붓을 놓은 지 겨우 반 년에 벌써 은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너무도 조급스러운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한때 붓을 놓고 이후 다시 붓을 잡을 때는 前記[전기]와 완전히 다른 그를 예상할 수 있으므로 은퇴라는 말을 여는 감히 한 것이다.
 
155
예술의 길은 넓다. 거기는 아무런 구속이며 제한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객기에 뛰어 카프계의 작가라고 출세를 하였다가 차차 그의 예술적 지위가 굳어 가며 따라서 시야가 넓어 갈 때에는 그들은 아직껏 자기네가 걸어온 바의 제한된 圈域[권역]에 대한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여기서 국면 타개의 필요를 느낄 때에 그들은 어떤 길을 취할까.
 
156
최서해와 같이 나는 ‘작가이지 프로 작가가 아니다’고 내뿜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껏 걸어온 길에 대한 체면상 舊衣[구의]를 한 번에 벗어 버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은퇴(임시적이나마)의 길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프계 작가의 귀재 이효석의 은퇴는 이렇게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다.
 
157
이리하여 카프계 사실로 재분이 있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은퇴의 길을 밟게 된다. 새로운 천재의 출현은 엉성하고 그 대신 사거와 은퇴는 놀랄만치 많으니 이러다가는 조선의 예원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158
‘한심하다’고 간단히 한 마디로 퉁겨 버리기에는 너무도 큰 문제다.
 
159
‘예술을 못 가진 민족’ ‘예술이 없는 민족’ 이러한 불명예한 관사가 우리의 머리에 씌워질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벗어 버릴 수는 없는가?
 
160
연하여 줄어들어 가는 우리의 예원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그 너무도 비참함에 통곡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161
(〈每日申報[매일신보]〉, 1932.9.21∼10.6)
【원문】적막(寂寞)한 예원(藝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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