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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의 개관(槪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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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6
안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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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조선사]의 槪觀[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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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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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학(史學)에 취미를 들이기는 자못 오랜 시간을 지나온바 10년 전 에이미 몇종 책을 발행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문헌보다 정적(情的)에 치중하니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논단(論端)이 오해된 바도 있는 줄로 생각 한다. 아직까지도 불분명한 점이 많아 확변(確辨)을 하기가 불능하나 일반 문헌에 의거하여 개괄적으로 소고(溯考)해본 가운데 적이 망발되지 아니하겠다 자신한 점에 한하여 이제 그 대강의 요지를 진술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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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말할 것은 역대 시절의 변천된 단락을 정함이 필요하다. 곧 유사(有史) 이래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시대 구별을 세우는 것이 강령(綱領) 이 될 것이다. 이 시대 구별에 있어서는 사실에 따라 다르고 또한 어떤 방계(方計)에 의하여 다 각기 다른 소견이 있을 것이나 보통 역사라 하면 정치의 변천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상례이니, 이 상례를 표준하여 분간하면 아래 표와 같이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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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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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성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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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기 ……………… 열국(列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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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기 ……………… 삼국(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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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시대 ……………… 대신라(大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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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고구려 시대 ………… 왕조(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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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조선 시대 …………… 이조(李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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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5기로 분별하여지는데 이래 국가의 의사를 실현하여 온 내용은 한 대왕국으로서 자치적 정신을 기초로 함에 있다. 그러므로 국가적 보충으로 된 봉건의 제도 같은 일은 매우 미약한 것이다. 그런데 동양에 있어서 가장 자립적인 옛왕국이라 할 것은 첫째 조선(朝鮮)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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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大弓族[대궁족] 列國[열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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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민족 명칭에 대하여 나는 대궁족(大弓族)이라 한다. 대궁족은 동방 대족으로서 의리심(義理心)이 윤부(潤富)한 무사(武士)이다. 옛날부터 동방에 반거(盤居)하되 그 분파는 3방으로 별러 있을새 하나는 북방에 산 이른바 부여(夫餘)라 별명한 자요, 하나는 요하(遼河) 부근에 산 이른바 우이(嵎夷)라 별명한 자요, 또 하나는 반도에 산 이른바 한(韓)이라 별명 한자이다. 이 대궁족의 묘근(苗根)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부터 동방의 주족(主族)으로서 앞에 말한 대로 3방에 분포하였는데, 그중 서대궁족(西大弓族) 곧 우이(嵎夷)라 하는 일파는 중국과 연경(連境)하여 있음에 따라 한족(漢族)과 접촉되는 일이 많았으니, 곧 요(堯)임금 때로부터 그 땅 청주(靑州)를 공취(攻取)하고 하후(夏侯) 태강(太康) 때에는 대전을 일으켜 무릇 7개년 시간을 끈 일이 있었다. 그후 300년간에 있어서는 혹은 공격 하고 혹은 지키면서 서로 싸우다가 마침내 저들 땅에 깊이 들어가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에는 중원(中原)의 북반부를 점령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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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궁족이 그렇듯 외적과 전투를 베푼 뒤로 그 대항적 사상에 의하여 혈족적 관념이 강고(强固)해지고, 그 관념이 인간 고유한 사회성의 결과와 안동(眼同) 하여 국가를 건설하게 되니, 최초의 군주는 왕검 대왕(王儉大王) 이요(檀君[단군]은 후세 佛家[불가]의 追尊[추존]한 칭호), 국명은 조선(朝鮮) 이라 한 것이다. 도읍을 평양(平壤)에 개설하고 제반 시설을 행하니, 이 때 이 행정과 입법(立法)은 조선 숭배(祖先崇拜)와 혈족 애호의 사상이 근저가 됨으로써 습관과 전례를 위주함이 절대의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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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래(爾來)의 전쟁으로부터는 또한 필연적으로 중원의 문화를 수입 하여 열국 가운데 제일 앞서 문명국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국은 중국 역대의 망명객의 입적자(入籍者)를 다수 수용하더니, 말경 곧 나라를 세운 지 1천년 후에는 은(殷)나라의 기자(箕子)가 와서 세력을 잡게 되자 필경 기자가 국조(國祚)를 인천(引踐)함에 이르니, 왕실은 달아나 압록강 북남에 이르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또한 그후 800년에 연인(燕人)의 침입을 받아서 기자의 41대 준왕(準王)은 남쪽으로 옮겨 마한(馬韓)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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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부여(夫餘)는 혹은 예(濊)라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때인지 일찍부터 부여국을 건설하니, 지방은 2천리요, 호구는 8만리에 달하였다. 이 나라는 각개의 사회군이 그 생계의 자(資)로써 정치사상이 발달되어 각 부락의 일치된 의사로써 나라를 세우고 통치를 찬정(撰定)한 것이니 『 사기(史記) 』에 "부여의 풍속은, 비가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여물지 못하면 문득 그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혹은 마땅히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또는 마땅히 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고 나와 있다. 이를 보면 농사가 부등(不登)한 즉 나라 사람들은 그를 국왕의 죄라 하여 왕을 죽이자거나 또는 바꾸자는 여론이 일어나는 풍속이 있다. 이것이 곧 경제사상에 기인한 바의 타산적 행위가 국가 조직의 기초를 지은 것이다. 그 경제적 활동은 농업뿐 아니라 목축업이 발달하니, 그러므로 『삼국지(三國志)』에도 말하되, 그 풍속이 짐승을 잘 기른다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소뼈로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도 있고 동물의 이름을 따서 관명(官名)을 지은 일이 있으니,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의 칭호는 4대신의 관명이다. 제도는 가족적 규모를 증장 확대함에 있으니, 전국을 4부에 나누어 각기 장관이 있을새 그 장관은 자립하여 반봉건(半封建)의 성질로 되었다. 그 밖에 동방에 숙신(肅愼)·옥저(沃沮)의 두 대부락이 있었다. 인민의 계급은 귀족과 노예의 2종으로 되니, 이 신분 조직은 당시 사회의 중요한 기강이다. 이것이 가족 제도의 확장한 것인바 그로써 국민의 도덕적 존재의 기본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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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의 대궁족 일파는 진(辰)이란 국가를 건설하고 정사를 평화로이 베풀었다. 그러나 습관의 권능에 따라 편리한 단위의 정부를 분설(分設)하게 되니, 이에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3국으로 될새 행정의 방법은 곧 봉건(封建)으로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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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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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馬韓) ……… 54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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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辰韓) ……… 12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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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한(弁韓) ……… 12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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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한의 봉건제는 다른 나라 고제(古制)와 같지 않다. 주(周)의 봉건제는 봉급을 위한 것이요, 일이만국(日耳曼國)의 봉건제는 국가적 복종을 보충키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삼한의 봉건제는 곧 원시적 단위에 기초하여 민의에 순응함으로써 편리한 자치를 위하여 된 것이다. 삼한 지방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또한 지역이 해중(海中)에 원출(遠出)하매 외족은 이를 선향(仙鄕)으로 알고 옛날부터 환난과 불평을 피하여 귀탁 내화(歸託來化)한 자가 많았다. 그 다른 인종의 의사와 본래의 자치적 사상은 자연히 개인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어 법률 문제 및 소송 판결은 매우 자유를 서로 가져서 흡사 옛 로마의 외무봉행관(外務奉行官)을 특설한 원인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마한의 법계(法界)에는 소송자를 제어키 곤란한 문제가 왕왕 발생한 모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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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열국 시대의 사적(史的) 성질은 물론 태고 홍몽(鴻濛) 시대에 가까우나 그 가운데에는 민족 심상(心像)의 표현으로서의 특별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치의 시설(施設)이다. 이 자치제는 민족성의 작용 또는 고대 지리상 영향으로 발생했는데 그것이 뒷날 정치사에 미쳐서도 특질로 되니, 근일 지방의 면·동 제도의 발달한 것은 태고로부터 내려온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치적 정신은 장점이 되는 동시에 또한 단점도 되니, 곧 태고 시대에 있어 자치적 작용이 강함으로써 대통일의 국가 및 그 대경략(大經略)이 없었고 또한 각기 자기 구역의 일만 위주함으로써 스스로 각방(各邦) 전체에 대한 의무심이 약하고 동시에 민족 전체의 역사가 전하지 못하며 전체사가 전하지 못할뿐더러 피차 서로 돕는 애정이 없는 결과 부분의 사적(事蹟)까지도 전함이 없으니, 이것이 고대사의 한 결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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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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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 시대의 제2기 곧 삼국시대는 제1기 말엽에 이르러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남에 따라 산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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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이동은 두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조선국(朝鮮國)의 동란이다. 연인(燕人) 위만(衞滿)의 일파가 조선에 도망하여 들어와서 조선 왕위를 빼앗으매 기준왕(箕準王)이 부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마한(馬韓)에 침범 하여 들어갔다. 위만은 그 3세에 미쳐서 한(漢)과 큰 싸움을 벌인 결과 드디어 멸망을 당하고 조선국은 한의 사군(四郡)이 되었다. 그 동란으로 인하여 조선 국민은 남쪽 두 방면으로 이전하니, 그렇듯 조선민족의 두 차례 이동함에 따라 삼한 인민은 파생적인 이동을 지었다. 둘째는 이때를 전후 하여 부여의 이동이 구기(驅起)하니, 부여에는 어떤 망인(亡人)의 일대가 왕궁에 침입하여 들어가매 부여왕은 부하를 거느리고 동해빈(東海濱)에 도망 하니 이에 부여는 둘로 분열했다. 동부여에서는 왕족 일파가 남쪽으로 나가 졸본(卒本)에서 고구려(高句麗)를 건설했다. 졸본인 일파는 주몽 파(朱蒙派)에게 쫓겨나 마한(馬韓) 부근에 와서 백제국(百濟國)을 건설하였다. 이렇듯 대궁 족의 전체가 대이동을 지은 일은 전고 미증유의 일일새 전민족의 사상은 이로 인하여 큰 변동을 나타내었다. 곧 한편으로 한(漢)에 대한 민족적 자각이 생겨 구조직의 국가를 파괴하고 신형식의 정치 개조를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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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으로는 이동의 형세에 따라서 개인간에도 격렬한 작용이 생겨서 정력 및 재간이 있는 무리는 입신(立身)의 기회가 매우 많아지게 되었다. 이 신사상의 작용이 필경 삼국의 신시대를 산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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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는 주몽왕이 건설했다. 주몽왕은 본시 동부여왕의 서자(庶子) 로서 만강(滿腔)의 불평을 품고 도망쳐서 졸본(卒本)에 이르러 신 국가를 건설할 새 그의 정치는 귀족제로서 전혀 무덕(武德)을 길러 대경략(大經略)을 달성코자 하였다. 그 활동이 일취월장하여 마침내 동북부여를 겸병(兼倂) 하고 또한 한(漢)과 격전을 벌여 조선의 구강(舊疆)을 회복하니, 북방 일대는 마침내 고구려가 통일을 이루었다. 백제(百濟)는 졸본왕족의 일파가 마한 부근에 와서 신국가를 건설하고 점차 세력을 진흥하여 마한 전토를 영유 하니, 백제의 정치주의는 무덕을 기르는 가운데 한편으로 문화를 일으켜 힘을 해외에 펼칠새 남해의 제도(諸島)를 복속시키고 일본 섬나라에 들어가 그의 문화를 개척하니, 당시 남해 제도 민족은 백제의 덕화(德化)를 입어서 비로소 문명세계에 나아감을 얻었다. 신라(新羅)는 진한(辰韓) 국민이 자각적으로 국민대회를 열고 구제도를 개혁하여 신정치를 베풀어서 건설된 것이니, 그 신정치는 봉건제를 타파하고 군현제(郡縣制)로 통일하며 정치 주의는 무력보다 문화를 위주하여 실력을 양성한 것이다. 변한(弁韓)은 진한과 같이 귀족회의(貴族會議)의 결과 가야(加耶)라는 신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가야의 제도는 신정치도덕을 취하지 않고 구식의 봉건제를 변치 못 하다가 오래잖아 신라에 겸병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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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삼국시대는 전대 시절에 비하여 큰 진화의 세계를 배설하였다. 전대의 정치는 혹은 봉건적 혹은 부락적인 무수한 소왕국으로서 습관적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떨어져 공정성을 얻기 어렵고 일이 몽롱에 묻혀서 역사의 기술도 희미하게 되더니, 그 말엽에 이르러 민족의 대이동이 인습을 깨뜨리고 개인적 독창력을 발휘하는 신사상을 촉진한 것이다. 그 신사상의 활동이 삼국을 건설하게 될새 삼국시대의 제도는 어느 곳을 물론하고 소방가(小邦家)를 집합하여 군현제로 조직하였다. 이 신제도의 시정(施政)을 추구 하는 운동은 구습에 안일한 노장인(老壯人)이 아니라 모두 청년 계급의 작용에서나 오니, 그러므로 삼국의 건설주는 다 20세 안의 묘묘한 소년이다. 그 신청년· 신사상의 활동은 만사에 발전할새 외국 문화를 수입하여 자가 문명을 개량 발달시킴에 이르니, 이 청년의 신활동과 외국 문화 수입과의 2대 사실이 이 삼국시대의 특질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역사적 경로를 말하면, 실상 전대의 풍부한 경험과 정치적 단련을 경과한 결과 그 폐해를 자각 하고 개조를 먼저 실행한 용단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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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大新羅[대신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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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 정립한 이래 각기 자국의 세력을 확장키 위하여 서로 전쟁을 맺을새 피차의 관계는 갈수록 험악하여 끝내는 편안한 해가 없다시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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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불안의 형세를 지은 것을 역사상 과정으로 두고 보면 정치 발달의 경연(境緣) 이라 하기 좋으니, 전대의 다수 분립한 국가가 3국으로 합성 되었으나 민족 단결상으로는 삼국의 구성도 역시 분립에 불과하여 그의 진보적 요구는 다시 3국을 통일하는 희망이 없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은 각기 서로 자기 세력으로써 천하를 통일코자 한 활동은 드디어 전쟁이 그치지 않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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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 서로 국가적 활동을 행함에는 가장 신라가 약하여 다른 두 나라의 위압을 받음이 심하매 신라는 은인자중(隱忍自重)으로 실력을 양성하고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본시 강대치 못한 가운데 중기 이래의 고전(苦戰)이 국세를 스스로 축소함에 이르고, 고구려는 가장 강대하나 외적인 선비(鮮卑) 및 수(隋)·당(唐) 등의 침입을 방어키 위하여 쇠경(衰境)에 이른 꼴이 되었다. 이 양국의 부진한 기회를 타서 신라는 크게 분발 하여 일대 격전을 개시한 것이다. 그 결과 백제·고구려 두 나라가 드디어 망하고 신라가 통일의 업을 달성함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여 서는 동방 한모퉁이에 치우쳐 있던 숙신(肅愼)이 돌기(突起)하여 고구려의 구지(舊地)를 점령하고 발해(渤海) 대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의 사업은 백제 전부와 고구려의 일부에 한하여 반도를 통일함에 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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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신라가 통일의 업적을 달성함은 2대 원인에서 나온 것이다. 첫째는 왕위 계승의 특색이다. 그 왕위는 세습제로 되었으나 3가 곧 박(朴)· 석(昔)· 김(金) 3성(姓)이 있어 자격자가 차례로 서로 이으니, 일국 주권 자가대대로 능력이 있으면 그 정치는 결코 퇴보될 리가 만무하다. 만약 일가(一家) 상속의 항구제가 될 때는 영국 조지왕족같이 독창력이 없고 서반아 필립 2세 이후같이 선왕(善王)이 없이 단조(單調)와 응체(凝滯)의 위험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신라 왕위는 이상하게 3가를 베풀고 그중 능력이 있는 자가 교대로 잇게 되어 나라의 운명은 진보에 진보를 더한 것이다. 어떤 때는 내각 수석의 상대등(上大等)이란 관원이 되어 평소에 정치적 지식을 닦고 사물을 정확히 판단할 능력을 기른 뒤에 즉위한 자도 간간이 있었으니, 그런 자격의 군주가 있을 때는 집정(執政) 관리는 모두 충실하고 수단 있는 자가 되었을 것이니, 그리 되고야 국정이 어찌 발달치 아니하겠으리요. 이 사실이 신라 국운과 큰 관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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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위로는 유명한 정치가가 끊인 일이 없고 동시에 밑으로는 국민 일동의 원기가 왕장(旺壯)하였다. 곧 화랑(花郞)이란 청년단이 있어 무사의 기질을 크게 발휘하니, 이것이 둘째 원인이다. 신라에는 최초부터 관리 택용 법이 이상하다. 15, 6세의 묘소년을 택정하여 사방에 주유(周遊) 하면서 도의를 강연하고 가무를 흥행하여 그를 방청하는 민중에서 인격자를 뽑아서 관리에 채용한 일이 있다. 추후에는 그 화랑이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단체를 이루어 의용(義勇)의 도덕을 배양한 일이 있으매 전시에는 화랑도가 많이 자원 출진하여 큰 공을 세우매 가야(加耶)를 정벌 합병할 때부터도 전혀 화랑도의 활동함에 있었다. 그의 무사적 정신이 일반 청년계에 보급되매 민간에는 이른바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③ 교우이신(交友以信),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오계명(五戒命)이 유행하여 국민 일치로 충용심(忠勇心)을 가졌으니, 이렇고야 어찌 통일의 대업을 달성치 못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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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통일 이후 200여 년간에는 지방 자치제를 완성하여 정치가 이상적으로 조직되었고 선·불(仙佛) 2도(道)가 홍포(弘布)되어 사상계도 더욱 전실(典實) 하여지고 각 항목의 예술도 매우 발달하여 문화가 점차로 찬란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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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新高句麗[신고구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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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라의 사상은 문무 겸전의 의용심(義勇心)이 발발하여 강대한 국위(國威)를 선양하더니, 불·선의 도가 전파함으로부터는 점점 쇠약에 흘러 드디어 말엽에 이르러서는 민지(民志)가 매우 게을러졌다. 이 시절을 맞이하여 일패 도지의 역사적 유한(遺恨)을 품은 고구려·백제 구민(舊民)은 고국을 회복 코자 하는 마음과 뜻을 가졌다. 그 양방의 회고적 사상이 농후함에 미쳐서 쌍방의 폭동이 아울러 일어나니, 이로부터 30년간은 천하가 난마의 상태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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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도 세력이 강한 자는 고구려 당(黨)에서 활동한 군중이다. 이 군중의 제2세주는 절세 위인 왕건(王建)이다. 왕건이 출동하여 맹렬히 활약 하는 서슬에 천하는 그만 그의 산하에 병유(併有)함이 되었다. 그런즉 왕건은 제2의 주몽왕으로서 고구려를 재건함인 까닭으로 국호도 역시 고려(高麗) 라하고 시정(施政)의 정신도 고구려의 본성인 무기(武氣)를 쓰니, 이것이 곧 고려조 수립의 기초인바 고려조는 곧 고구려가 재생한 신고구려(新高句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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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태조가 고구려 재건의 숙망을 완성한 후에 소위 10조의 훈요(訓要)를 반포하여 그로써 신국헌(新國憲)을 지으니, 그 10훈요는 실로 4대 강령으로 된 것이다. ① 종교 문제다. 전대의 사상은 불교의 폐단이 심하여 그를 당연히 개혁할 것이나 인민 뇌수에 젖어든 바를 하루에 갑자기 변경키 어려워 인세적(因勢的)으로 부처를 받들되 부처에 대한 정책을 다소 제한하여 앞서의 폐해를 구하며, 한편 조국의 배천(拜天) 제도를 복설(復設)할새 부처의 대제일 연등회(燃燈會)와 천신(天神)의 대제일 팔관회(八關會)를 병설(竝設) 하여 이로써 민국의 정신을 공고케 하였다. ② 왕위 계승법이다. 전대의 3성 교승제(三姓交承制)는 왕씨 일가의 세습제로 정했다. ③ 관리의 제한이다. 관리는 정치의 중추라 마땅히 귀족계급을 특설하여 세습케 하고 그 봉록은 일정하여 국가 재정의 허비를 금하였다. ④ 외국 문화 수입의 제한이다. 국가의 근본과 정무의 진행은 국민의 정신을 유지 또는 발달함에 있을새 그를 무우(無虞)에 경계함에는 외문화 유입을 크게 단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거란(契丹) 같은 저급국의 문물은 행여 효칙(效則)치 말고 당(唐)의 제도는 구규(舊規)에 의하여 참작 채용할 것이다. 이 4대 강령이 실상 고려조 일대의 국가 생활을 지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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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려 일대의 정치는 귀족정치로 되었다. 이는 옛 고구려의 유풍(遺風)에도 암합(暗合)된 것이거니와 훈요 제3강에 이미 특수 계급으로 관리를 임용하매 그 귀족 일파는 정권을 전집(專執)함에 이르러 군왕은 한 시위(尸位)에 불과하였다. 귀족 중에도 무신 일반(一班)이 세세 상습(世世相襲) 하여 정권을 총람하니, 그러므로 상무적(尙武的) 정신은 상하에 충만하여 민기(民氣)가 웅건 호방(雄健豪放)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귀족정치로 인하여 두 가지 영향이 일어났다. 첫째는 무신은 과학적 두뇌가 약하였다. 그러므로 일반 문화는 질을 취하지 않고 양을 취하여 외양의 번화만 성함이있었다. 둘째는 귀족 전횡으로 인하여 반동적 요구가 발생하니, 이는 노예 운동이다. 그 운동은 제4대 광종(光宗) 때로부터 발생하다가 최씨 집정 시절에 이르러 노예당 수령 만적(萬積)이 강개의 언론으로써 일당을 조직 하고 계급 전쟁을 시작하더니, 그후 33년에 대운동을 다시 일으켜 귀족 일가에 대참극을 가하여 졸연 살풍경(殺風景) 대란을 지은 것이다. 이것이 인권 운동으로서 고려사의 한 특색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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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조사(麗朝史)에 있어 한가지 더 말할 것은 몽고(蒙古)의 입구(入寇)다. 원나라가 일어나 중원을 통일한 때에 그 여봉(餘鋒)이 고려에 미칠새 그로 인하여 국정은 크게 문란하고 왕실은 저와 혼혈(混血)됨도 있으며, 민지(民志)는 일시 타락의 풍기를 일으켜 무정부 상태에 떨어짐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더니 일조에 유교도(儒敎徒)가 분기하여 대의명분을 높이 부르짖고 사상 혁명의 운동을 행하니, 여조 말기에 있어 이 유교도의 활동은 다시 신시대를 안출(案出)함의 산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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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新朝鮮[신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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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는 한 장군으로서 군공(軍功)을 여러 차례 세운 위인이다. 그리고 왕조를 혁명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니, 이에 미쳐서 대궁 족(大弓族) 의역 사는 다시 일단락을 지었다. 본래 고려조 말기에 있어 여러 가지 적폐가 민국을 위험에 이끈 것이다. 이때 이태조가 출현하여 정치를 혁명하고 만사를 개조함에 달하니, 실상 이태조는 시대가 요구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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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태조가 혁명한 후에는 전대에 비하여 한 신세계를 배설하게 되었다. 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 조선의 명칭은 대궁족의 제부(諸部) 가운데 최초 문명을 개창한 단군(檀君) 때의 국군(國君)이다. 이태 조가이 최초 문명의 개발된 국명을 사용함은 민족의 근본 정신을 창명(倡明)한 것이니, 역사 이래로 민족적 사상을 창명한 것은 이조(李朝) 시대를 뛰어넘은 적이 없다. ② 정치 제도는 극히 주밀하고 정연하여 전대보다 백배의 진보를 드러냈다. ③ 전대는 귀족정치더니 이 시대는 군주 독재정치로 되었다. ④ 전대에는 무사의 전정(專政)이더니 이 시대의 정책은 언무수문책(偃武修文策)을 쓰매 문인(文人) 세계가 되었다. ⑤ 과학이 크게 발달하고 사상이 전대보다는 크게 사색적·진실적으로 흘렀다. ⑥ 전대에는 부처를 숭배 하여 비관(悲觀)에 기울더니, 이 시대에는 유도(儒道)를 오로지 숭상 하여 대의 명분을 지키는 기풍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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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독재라 하나 기실은 행정 및 입법이 모두 회의제로 될새 정부의 최고 간부로 3의정(三議政)이 있어 모든 일을 상의 결행하였다. 입법(立法)은 어전 회의에서 결정할새 그 회의는 일반 관료로 조직한바 매월 9회의 정기회가 있고 또한 3종의 임시회가 있어 대중발락(對衆發落)으로써 집행하였다. 그 밖에 매일 조보(朝報)를 발행하여 정사의 진행을 공중에게 포고하고 각 지방에 있는 유림(儒林)은 국민 대표의 자격으로서 의안(議案)을 군주에게 직접 제출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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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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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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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차대(次對) ………… 고등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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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윤대(輪對) ………… 보통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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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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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빈청(賓廳) ………… 2품 이상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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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대윤차(大輪次) …… 시원임대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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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상참(常參) ………… 관리 전체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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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의 대소사를 물론하고 이상 회의에 의하여 결재하므로 형식은 군주 독재제라 하나 기실은 입헌제(立憲制)로서 국민 전체 의사를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 공명정대를 취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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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후 쇠퇴기에 당해서는 네 가지 폐단이 일어났다. ① 문사의 발호로 인하여 경제와 군무(軍務)는 몰교섭(沒交涉)으로 지내오매 국력은 크게 허갈(虛竭) 하였다. ② 사색당쟁이 격렬하여 각기 시기심으로 따라 국사는 제이로 여겨서 여론은 공정성을 잃고 욕망은 사리(私利)에 그쳤다. ③ 교육이 유도(儒道)의 말류(末流)로 인하여 실사회를 망각하고 오직 고상한 데로 달려가 민심이 일체로 암매(暗昧)하고 단합심·헌신심이 없어졌다. ④ 귀족 전횡의 세도(勢道)라는 것이 생겨나서 국정은 크게 문란하였다. 그리하자 신풍조가 유입하면서 청년의 행색은 모두 회의(懷疑)로 흐르고 입심만 강하여 투쟁으로 지내다가 마지막에는 구복(口腹)의 제재로 인하여 스스로 나는 모르겠다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은 성쇠의 율동에 있으니 오늘 이후는 다시 성세(盛世)가 돌아올 것은 역사적 증명에 의하여 믿을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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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歷史[역사]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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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로 부터 현대까지 수천년을 지나온 역사는 허다한 사적(事蹟)이 가득 찼으나 그중에는 한가닥 선이 연통(連通)하여 있을 것이요, 또 그만한 역사를 지어온 내면에는 다른 것에 비하여 자별한 본질이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2천만 동포는 다른 인종과 다름없는 전형(典型)이라 할 것이나 그 세포 조직은 연지(連枝)요 동기(同氣)다. 또는 원방(元方)·계방(季方)으로 연벽(聯壁)한 혈육이다. 그러므로 우리 뇌수에는 태고 조상에서 시작되어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뱃속으로 묵시적으로 서로 전한 줄기가 있을 것이니, 역사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줄기로 관통한 정신이란 것은 항구적으로 감추어 있다. 이 정신은 곧 대궁족의 근본이니, 그러므로 역사와 행위는 곧그 정신의 반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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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정신은 어떤 특질로 되었느냐 하면, 이는 역사의 실증에 의하여 발견할 것이다. 우리 대궁족은 먼 옛날에 출현한 당시부터 군인의 기풍이 있으니, 『산해경(山海經)』에 "군자국은 북쪽에 있는데 옷과 모자를 쓰고 칼을 찼으며 짐승을 사냥해 먹고 문무(文武) 두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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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조선을 군자국이라 하고 그 사람은 칼을 차고 호양(好讓)의 덕이 있다 한 것이다. 또 『예기(禮記)』 『한서(漢書)』 등에는 조선인을 이(夷)라 한바 이(夷)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대궁인(大弓人)이라 하니, 내가 대궁족이라 함은 이에 따른 바이다. 이런 역사 기록의 말을 종합해 보면 곧 대궁족은 군인의 무사(武士) 됨이 분명하다. 더욱 『 삼국지 』『 후한서 』『 진서(晉書) 』 등에 보면, 부여인(夫餘人)은 궁· 시· 모· 도(弓矢矛刀)를 집집에 스스로 갖추어 두었다 하고 예인(濊人)은 3장(丈) 되는 장모(長矛)를 쓰고 유명한 단궁(檀弓)이 생산된다 하며, 마한· 진한인(辰韓人)은 다 궁술(弓術)이 뛰어나고 보전(步戰)에 능하다 하니, 이런 기사도 다대 궁족의 무사됨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성질은 오직 강포(强暴)한 무부(武夫)가 아니라 한편에는 군자의 자격으로서 호양의 덕이 있다 한바 무기(武氣)에 문덕(文德)을 겸한 사람이다. 그 문덕이 있는 것은 어떠한 소질로 된 것이냐 하면, 그는 강산 풍기(風氣)의 감명을 받은 것이니, 곧 무궁화의 미취(美趣)와 화려한 산수의 미(美)에 순화하여 강유(强柔) 겸전의 원만한 성격을 이루었다. 다시 말하면, 태고인의 흉중은 흡사 태극(太極)의 양파(兩巴) 같이 양(陽)과 음(陰), 강(强)과 유(柔) 곧 문무의 두 정기(精氣)로 합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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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는 큰 알이 껍데기를 깨고 황백이 분해함같이 고인의 문무의 혼합 성은 양분하여 북방인은 상무(尙武), 남방인은 상문(尙文)으로 되니, 고구려는 무사적 정신에 기울고 신라인은 문사적 정신에 기울어진 것이 곧 그것이다. 다시 대신라인에 미쳐서는 북방·남방의 정신을 합하여 문무 합일(文武合一)의 사상 작용을 발휘하니, 그 청년단인 화랑도의 행색은 바로 그의 상징으로 간주할 것이다. 화랑도는 비록 군기(軍器)를 늘상 휴대한 무사의 의표(儀表)가 없었으나 그 심사(心事)는 무사의 기풍이다. 의리(義理)를 태산같이 높이고 목숨을 홍모(鴻毛)같이 버리며 우레와 번개를 질타하고 흰 칼날을 밟을 수 있는 성품이 있어 반도 통일은 거의 이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이들은 한편 가시(歌詩)로 일과를 삼아 풍류랑(風流郞)의 패호를 차니, 이것이 문무의 두 정신을 한몸에 지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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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에 와서는 전부 무인의 활동 시대이다. 의종왕(毅宗王) 때에 시작 하여 무인은 문인을 모두 죽이고 또한 정부 권리를 전횡(專橫)하니, 이로부터 문인들은 산속에 피하거나 쫓겨가서 안치(安置) 생활을 스스로 짓고 그렇지 않으면 무사 집에 투탁(投託)하여 호구(糊口)를 구걸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사들은 의기가 양양하여 팔힘만 세어도 하루아침에 대신이 되고 마희(馬戱)만 잘해도 삽시간에 대부(大夫)가 되는 계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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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에 와서는 고려조와 정반대로 되어 무사라고는 성명도 없었다. 문인 앞에서 소인(小人)을 개올리고 벼슬은 겨우 대장(大將)이 고작이다. 그리고 일반 정권은 문사(文士)가 전장(專掌)하여 시 1구만 읊어도 갑자기 병조판서요, 학행(學行)의 명토(名吐)만 붙여도 백의정승(白衣政丞)이 오늘내일로 된 것이다. 옛날부터 문무가 교체적으로 유전(遺傳)된 정신은 고려조와 이조에 와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 사실을 볼 것인바 통틀어 수천년 역사는 문무의 두 정신으로 지배하여 온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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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건대, 태초에 배태된 문무의 합성은 시대를 겪어오면서 양분 하였다가 다시 융합되고 또다시 일문일무(一文一武)로 율동적으로 진행한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요 공고한 심적 작용의 본성으로 된 것이니, 이 상태는 서양 헤겔이 말한바 서양 사상사는 육적(肉的)·영적(靈的)의 두 정신이 정반합으로 진행하였다 함과 동감이다. 곧 조선사는 문무의 두 사상이 배경에 있는바 문무의 정반합으로 된 것이니, 다시 말하면 조선의 인문 사(人文史)는 문무의 2대 사상의 소장사(消長史)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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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문무의 상흥(相興)한 시기가 없지 않되 그는 다 일시적이요, 조선같이 문(文)하면 문으로만 수백년, 무(武)하면 무로만 수 백년, 그런 장구한 세월을 지배한 유례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조선에서도 미술이든지 또는 경제든지 그런 일들에 힘씀이 없지아니하나 그는 다 문무의 사상이 주체로 된 아래서 종속적으로 진흥되고 결코 문무 두 사상을 떠나서 다른 생활을 주체로 한 적은 없다. 이런 까닭으로 조선사의 정신은 오직 문무의 정반합 곧 문무 두 사상의 율동적 표현에 있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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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 錄[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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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의 칭호는 옛날부터 정사(正史)에 기대서 고증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에는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지택(王儉之宅)이라 하고, 고려 조연수(趙延壽) 비문(碑文)에는 "평양은 먼저 선인 왕검의 도읍이었는데 지금 유민들이 당당히 사공(司空)이다. 평양은 군자국이 삼한 이전에 있었던 곳이며, 1천여 년이나 누렸다"고 하니, 왕검은 곧 요동(遼東) 지대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왕이 됨을 알 것이다. 그리고 단군이라 부른 것은 『 삼국유사(三國遺事) 』라는 야사(野史)에서 처음 나오고 그전이라도 원천석(元天錫)의 『화동인물총기(華東人物叢記)』에 보면, 고려 예종 때 사람 신성(申晟)의 시에 단기고국 복춘아(檀箕故國復春芽)라 한 것이 있으나, 그는 신라 말기에 나온 어떤 야사에서 인용한 것인 듯하다. 『 삼국유사 』의 기록은 모두 부처를 위한 문적(文蹟)인데, 거기 써 있는 단군설화도 역시 선(仙)· 불(佛) 두 설에 가까운 것이다. 그 어느 곳 주(註)에는 주몽왕의 아버지를 단군이라 하였으니, 후인이 왕검과 단군과를 혼동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단군의 설화가 반불설(半佛說) 됨에 따라 단군 칭호도 역시 불설에 의하여 후인이 추존(追尊)한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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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서 「입세아비담론(立世阿毗曇論)」에는 천제석(天帝釋)이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전단(旃檀)이라 하고 『 불본행경(佛本行經) 』에는 동방수두단왕(東方輸頭檀王)· 열두 단군(悅頭檀君)의 칭호가 있다. 더욱 『 법원주림 전(法苑珠林傳) 』 권30에는 "동방은 곧 단(檀)이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비로소 나온 자가 지혜광을 인연하여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저 동방이라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에 속하고, 만일 중생이 있어 저 단(檀)에 공양을 잘할 것 같으면 수명과 부를 더 늘리게 되고, 남방은 곧 시라(尸羅)인데…… "라 함에 의하면, 동방은 단(檀)에 속한바 동방인이 단을 공양 하면수 명과 재산을 증장한다 하였으니, 불도(佛道)가 융성할 때에 조선은 동방인 고로 마땅히 단을 존숭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이 유행한 결과 왕호를 단군으로 추존한 것인 듯하다. 더욱 고려 묘청(妙淸)이 평양 8성(八聖)을 받들고 왕도를 그리로 옮기면 국명(國命)을 연장한다 한 일이 있으며, 이런 미신에 의하여 8성을 추존 봉안한 일도 있고 정부의 정식(正式)으로도 이래로 산천 신령의 칭호를 여러 차례 변경하여 추존(追尊)한 예가 많다. 이런 사례에 의하면 단군 칭호도 최초의 칭호가 아니라 후세에 불도가 왕성할 때에 있어 국운의 진흥을 달성키 위하여 신앙적 추증(追贈)의 존호 됨이 십상으로 추상(推想)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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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 제176호, 1932. 6 〉
【원문】조선사(朝鮮史)의 개관(槪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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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확(安廓)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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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