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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자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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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8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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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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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진리를 밴 알이나 품듯이 그 무엇을 동경하면서 『파우스트』를 품고 깡그리 거기에 정열을 기울이며 침식을 잊은 십팔 세의 소년, 그것이 문학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던 시초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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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소년이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은 모른다. 다만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소학생 적에 보아 오던 잡지인 《학원》은 책상 위에 놓기가 싫어서 《창조》니 《서광》이니《서울》이니 하는 잡지로 바꾸어 놓게 된 것이 그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따름이다. 《창조》의 이동원의 소설에서 (「마음이 약한 자여」라고 기역됨)‘시선과 시선은 마주쳤다’라든가, ‘그들 남녀가 방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다만 구두 두 켤레가 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라든가, 하는 식의 표현이 어떻게나 재미있던지, 나도 이렇게 한번 글을 써 본다고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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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남의 글을 모방하여 이러한 식의 표현에만 치중하면서 두루마리에다 소설이라고 두발 세발 내려 쓰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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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나는 이것을 자랑 삼아 같은 연배인 동리 친구 한 사람에게 보였다. 그랬더니 이 친구는 “네가 이렇게 글을 쓰다니!”하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떻게 이렇게 소설을 짓겠느냐, 이것은 이광수의 「무정」에서 한 대문 베낀 것이라고 능청을 피워 보였더니 “글쎄 그럴 거야. 이 글엔 씨가 들었는데.”하고 이 친구는 다시 이 글에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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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뜻도 없이 해 본 장난에서 나는 나도 소설을 쓰면 쓸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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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나는 《새소리》라는 소년잡지가 창간되면서 작품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동아일보》에서 보았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응모하였던 것이, 이중으로 당선되는 것을 보고 이 소년은 또 시도 쓰면 쓸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까지 생겼다. 당시 글방에서 「대학(大學)」을 읽고 있던 나는 이 글방 공부는 소홀히 하고 훈장의 눈을 피해 가며 잡지를 읽고 시와 소설을 쓰기에 전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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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동안 이 소년에게는 고독이 찰지게 스며들었다. 그 무엇인지를 동경하는 알 수 없는 충동이 이렇게 고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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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뛰어 올라왔다. 이런 충동을 그대로 시골의 글방에서 참고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서(岸曙)의 문을 두드렸다. 시집 『해파리의 노래』 한 권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 겨를엔지 이 소년의 품에는 『파우스트』가 안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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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외가편으로 아저씨 뻘이 되는 분이 한 분 간동(諫洞)에 살고 있었다. 이분이 보성고보와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입학 부탁차 찾아갔다가, 그 집 건너방에 김정식(金廷湜)이라는 배재고보 학생이 하숙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이미 안서의 추천으로 《학생계》에 「먼후일」이라는 시를 발표한 소월(素月)임을 알고 있던 이 소년은 그와 무척 상종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학교로 떠나고 나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할 시일이 없게 되었다. 집에서는 신학문의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이 소년을 추병이 달려 올라와 붙들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 소년이 다시 서울로 도주를 하여 올라왔을 때는 소월은 이미 일본 동경 상과대학의 학생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렇게도 만나고 싶던 소월과 상종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 소월을 만날 수 있으리라던 나는 무슨 큰 의지나 잃은 듯이 마음이 죽어서 가끔 안서의 문만을 찾아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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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추병이 또 따라 올라왔다. 이미 중동학교의 학생모를 썼던 나는 또 붙들려 내려갔다. 나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집에서 혼자 독학을 할 테니 그 비용이 얼마나 들던지 그것은 무조건 당해 주어야 한다는 다짐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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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서재를 한 칸 마련해 놓고 동서고금의 명작이라는 것은 문학 부류의 것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과학의 부문에 이르기까지 구입을 해다 놓고 책 속에 파묻히었다. 실로 나의 문학의 기초는 아니 오늘까지 우려먹는 나의 지식이란 것이 여기서 닦이었던 것이다. 낮에는 독서, 밤에는 집필, 이렇게 규칙적인 서재 생활의 일년 후의 나의 노트에는 무려 백여 편의 시와 칠십팔 편의 소설이 활자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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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석송 주재의 《생장》과 이광수 주재의 《조선문단》이 전후하여 창간됨을 보고 시는 《생장》에 소설은 《조선문단》에 각기 투고를 하여 발표를 보았다. 이 작품의 게재지에 ‘진정(進呈)’이라는 스탬프인이 찍히어 배달되어 왔을 때, 그 ‘진정’이라는 것이 나의 실력을 말해 주는 대우같아서 어떻게나 그것이 기쁘던지, 지금도 그때의 일이 환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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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이 지나는 동안 각국 문화사를 통하여 알게 된 세계명작이라는 유는 거의 한 번 눈을 거치게 되었다. 그리고 나니 알고 싶어지는 욕심이 자꾸만 앞을 서서 붓대를 집어던지고 일본 동경으로 고비원주(高飛遠走)를 하였다. 그러나 대학에서 소위 강의라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도 그것이 맹랑하던지 학교에는 나가고 싶지가 않아 학적만을 걸어 두고는 하숙에서 독서로 이삼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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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명작가로서는 문단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 동안에 문단의 정세는 전연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발표 기관이 부족한 데다 신인이 상당수로 배출되어 소위 기성층도 원고뭉치를 들고 돌아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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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잘것없이 카페를 드나들었다. 술이 늘어 갔다. 늘어 가는 만큼 몸의 쇠약을 느끼게 되었다. 드디어 내 몸은 동요가 되었다. 술이 심장을 상하였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의사의 지시대로 나는 또 시골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은 물론 책도 붓도 다 놓고 오직 살기에 전심을 다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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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나는 동안의 또 삼 년인가 흘렀다. 인근에 사는 석인해(石仁海)라는 미지의 문학청년에게서 동인잡지 발간을 종용하는 편지가 왔다. 좋다고 했더니 그해 봄에 정서죽(鄭瑞竹)이라는 미모의 청년(아직 소년이라고함이 적당할 정도의)과 동반하여 석인해가 찾아왔다. 우리 세 사람은 즉석에서 동인지 발간 계획을 세우고, 그 이튿날로 선천읍으로 들어가 인근에 산재해 있는 문학청년 3, 4인을 전보로 불러다 회합을 하였다. 편집 책임은 내가 맡기로 하고, 원고 의뢰까지 다 하였으나 출자 책임자의 배신으로 이 잡지는 창간 준비 도중에서 유산은 되고 말았지마는 이것이 나에게는 몇 해 동안 손을 떼었던 녹쓸은 붓 끝에 기름과 같은 역할이 되었다. 되살아 오른 창작 의욕은 「백치 아다다」를 위시하여 「마부」「청춘도」「마을은 자동차 타고」「심원(心猿)」등 작품을 연달아 쓰게 만들었다. 「백치 아다다」가 《조선문단》에 발표됨으로 김환태의 호평이 있게 되자 해지(該誌)에서는 또 한 편의 창작을 청해 왔다. 「마을은 자동차 타고」을 보냈다. 그러나 월여 후에 이 작품은 검열 불통과로 사백 자 정도의 문면에 삭제라는 주인(朱印)이 찍히어 반환이 되었다. 편집자는 아깝다고 그 부분만의 개작을 의뢰해 왔다. 개작을 하여 다시 보냈다. 웬 까닭인지 이번에는 전문 삭제의 주인이 장마다 찍히어 반환이 되었다. 아까운 일이었다. 지금껏 써 온 나의 작품 중에서는 제일 애착이 가던 작품이었다. 그대로 버릴 수가 없어서 약간 고치면서 정서를 하여 안서에게 주선해 주기를 원하였다. 안서는 《동광》에 주었노라 하면서 다음달에 발표가 약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약속은 기성인의 원고 폭주로 이행이 되지 않았다. 다음달 다음달 하고 기회를 본다는 것이 몇 달을 끌고 가다가 그 원고는 분실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기별을 받았을 때, 무명작가로서의 설움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이와 거의 전후에서 「청춘도」를 《조광》에 투고한 일이 있었으나 3, 4삭이 경과하도록 이 역시 발표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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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잡지로서 무명작가를 홀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유명 무명의 그 이름 석 자가 잡지의 부수를 올리는 데 많은 차질이 생김으로서다. 특수한 관계가 없이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이면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한 사건이 이 무렵에 나와 관련되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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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영이 경영하던 《신인문학》에 나의 작품도 아닌 것이 그 투고자의 이름이 내 이름과 비슷하다 해서, 그리고 내 이름이 그 투고자보다는 다소 좀 알려졌다고 해서 내 이름으로 고쳐서 나왔던 것이다. 「출견(出犬)」이란 작품이 그것이었는데, 나는 여기에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해지 경영자는 곧장 내 이름으로 투고가 되었다고 뻗대었다. 그리하여 필경엔 쌍방간에 반분 욕설인 논쟁까지 벌어진 일이 있었지만 잡지의 부수를 올리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일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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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는 《조선일보》의 출판부에 직을 두게 되면서, 예의 그 「출견」건도 알았고 (노자영 씨가 이미 출판부원으로 있었던 것이므로 거기서 그와 상종이 됨으로써)「청춘도」가 발표 안 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청춘도」는 아직 누구의 눈도 한 번 거쳐짐이 없이 무명의 것이라고 그대로 몰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내가 그 건의 문의를 하게 되자, 그 원고를 뒤적여 내 역량을 저울질하기 위하여 비밀리에서 이운곡(李雲谷)이라는 외부 작가에게 감정을 시켰다. 그로, 그제서야 그 작품은《조광》에 발표를 보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발표 결과가 또 나쁘지 않았으므로 이러구러 나에게도 작품 발표의 기회가 자유롭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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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一路) 나는 창작에 전심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붓끝에는 몇해 지나지도 않아서 또 열이 빠지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으로 숨이 차오는 경무국 도서과는 검열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나 일개인뿐이 아니라, 한창 흥성하던 전 문단은 이리하여 서리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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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일어나는 태평양전쟁은 검열 제도를 일변시키고 말았다. 모두 붓을 놓았다. 나도 놓았다. 그러나 붓을 놓고는 배기는 수가 없었다. 위협의 채찍이 전쟁에 붓으로 협력을 하라고 등어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모두 재주껏 붓을 들었다. 나도 들었다. 나는 근로정신의 고취를 빙자했다. 「시골노파」「블로초(不老草)」「묘예(苗裔)」이 세 편이 이때의 소산이다. 그러나 이런 취재로서는 협력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이상 나는 붓을 놀리는 수는 없었다. 붓대를 집어 던지고 농촌으로 피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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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를 농촌에서 맞고, 재출발을 한다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 첫 작품이 「별을 헨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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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당하고 1·4후퇴로 피난살이를 하게 되는 동안, 나는 인생이라는데 흥미를 잃게 되었다. 흥미 없는 인간을 상대로는 붓끝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우금껏 창작에 붓을 못 대고 있는 소이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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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지〕《신문예》통권 2호 (195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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