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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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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13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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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대구]의 자랑 藥令市[약령시]의 由來[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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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支局[대구지국] 肉瀉生[육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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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자랑이 무엇이냐? 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대구 능금(沙果)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대구 능금은 최근 한 명산물(名産物)로서 완전한 자랑의 지위를 점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학교 지리교과서에도 있는 대구의 유명한 약령시(藥令市)를 자랑으로 들어놓고 그에 대한 역사적 유래를 먼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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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令市[약령시]의 史的[사적] 由來[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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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약령시는 1년 1차의 정기시장으로 그 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마치 터키나 코카스(高加索[고가색])나 중앙아시아 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1년 1차 혹 2차씩 열리는 모피물(毛皮物)의 시장과같이 대성황을 이루나 이상에 말한 각지의 시장은 인류사회의 생활형태가 차차 복잡함을 따라 필요한 물품을 서로서로 바꾸고자 일정한 장소와 시일에 모이는 말하자면 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 교통의 관계라든지 기후관계라든지 또는 일반 사회생활의 형태가 오히려 아직까지 옛날의 그것을 면치 못하고 현대 자본주의 국제간의 무역관계(貿易關係)가 극도로 발달된 오늘까지에 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재료로가 되는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 약령시는 물품의 집산과 교환의 양식이 그와 방불 하여도 이름부터 약시(藥市)가 아니고 약령시(藥令市)란 령(令)자에 대하여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시장의 기원은 어떤 권력의 지배 밑에 열게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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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약령시가 처음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 중학교 교과서에 까지 ‘고래(古來)로 유명’이라고만 씌어 있고 적확한 연대를 쓰지 않았으므로 대담하게 그 연대를 내어놓을 수는 없으나 비교적 정확한 숫자를 조사한 대로 쓰면 서력(西曆) 1658(李朝開國[이조개국] 268年[년] 孝宗朝[효종조]), 거금 274년 전부터 개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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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야말로 조선을 팔도(八道)에 나누어놓고 다시 칠십일 주로 나누어놓은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首府)도 대구려니와 경상도를 둘러 남부 조선 각지는 산수명랑하고 기후 온화하여 각색 약초의 배양에 지질이 알맞기도 하고 교통도 편의하여(그때로 보아서는) 물산의 집산에 최적의 지대도 대구였으며그때야말로 임진병란(壬辰兵亂)이 끝을 맺고 모든 물화와 시설이 차차 정돈되고 발전을 보이며 따라서 황실(皇室) 중심으로 끌려는 당시의 위정자(爲政者)들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관계 있는 물품이면 무엇이나 물론하고 먼저 진상(進上)이란 이름 아래 최상의 생산품을 골라 서울로 보내고 일반 백성이 먹고 입고 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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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떤 제품을 물론하고 병 없이 일생을 살 수도 없는 것은 생리상 자연의 이치이므로 일국의 지존(至尊)인 왕도 병마의 무서움은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황실에서 일 년 동안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고자 국가의 명령으로 개시케 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약령시의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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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약령이 서면 감사(監司, 現[현] 道知事[도지사])가 약재를 골라 봉하여 중앙정부 사약원(中央政府 司藥院)에 보낸 후에 팔도에서 모여든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사서 온 조선 안의 병든 사람들이 그해 그해의 치료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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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약령시는 다른 상품시장에서 볼 수 없는 특수한 유래를 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 정청에서도 일년 춘추 두 차례에 정기적으로 모여드는 지방 생산자들을 위하여 지방 경제발달을 조장하고 저 계획을 세우고 제도의 개선과 개시 기간의 연장 등 모든 방면으로 힘을 써보았으나 모두 뜻과 같지 못하고 서구 열국의 동양 침입으로 의학(醫學), 약학(藥學)등 학문이 발달됨에 침은 주사(注射)로 변하고 ‘바시’는 ‘메 - 스’로 화하는 바람에 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 그 권위를 잃게 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 차차 위미하여 매매되는 약재료도 줄어지기만 하던 중 ‘후 - 버’경기가 세계의 주식시장을 혼란케 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 한때가 지나가게 되었으니 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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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십이 년 전(辛亥年[신해년])에 중산 손문(中山 孫文)씨 혁명으로 대청황실(大淸皇室)을 넘어트리면서는 청 황실이 조선 정부에 의뢰하여 사갔던 약품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으나 전부 그 매도의 길이 막히게 된 여러 가지 조선 밑에 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 반도 못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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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최근에는 전주(全州), 대전(大田), 진주(晉州), 원산(元山)등지에 군소시장이 개설되어 이를 약령시로 말미암아 대구에 떨어지는 돈은 매우 감소되었으나 아직도 영시가 개설되면 동성정(東城町) 입구로부터 남성정 입구까지 십여 정에 뻗쳐 당재(唐材), 초재(草材) 등 삼백여 종의 약품도 많으려니와 그 근처에 임시 여인숙이 무수히 설치되고 포백 기타 일용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면 평상시의 몇 배나 잘 팔리는 호경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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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촌 양반들의 낯설은 돈을 좀 얻어먹어 보겠다는 술집 색시들까지 헐찍한 인조견으로 몸을 싸고 도사리고 앉아서 엷은 애교를 술 한잔에 담아보내는 것도 ‘넌센스’의 한 장면인지는 모르겠다마는 흡객술이 졸렬하다기보다 시대에 뒤쳐진 기생들은 본바닥에 거주하는 손님들을 ‘카페’ 붉은 여급들의 자주(紫)빛 유혹에다 띄우고 음력 과세를 앞서 초조하던 중 때마침 시재(時哉) 시재(時哉)를 불러 시내 각 요리집, 극장 할 것 없이 대만원의 성황을 이루는 것은 그럴 듯도 한 일이지마는 여기에는 순진한 산간에서 새 노래, 물소리에 거친 세상일은 꿈도 꾸지 못할 산 아이와도같이 힘들여 장만한 약재를 도시 구경 겸하여 판 돈은 ‘메리 픽포드’ 아닐망정 어여쁜 여자를 만나 있는 대로 다 쓴 후에 明年[명년]의 약령시 개설되기를 손꼽아 기다려서 와보면 그 여자는 어느 하늘 밑에서 어떤 남자와 단꿈을 꾸는지 알 길조차 바이없고 작년 굳은 맹세가 찬바람처럼 사라질 때 홧김에 한잔 부어라, 먹자하는 연기 같은 경기는 견양경기(見樣景氣)이상으로 흥청거린다. 그러기에 여기에 최근 오개년간의 매매료와 출동 인원수와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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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시 기간(開市期間)   출시(出市)인원    약근수    매매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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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2년 60일     10,000인    1,178,450근    275,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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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2년 56일     10,128인    962,588근    672,81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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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2년 68일    100,400인    978,225근    410,96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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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2년 41일     66,000인    801,865근    353,2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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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6년 65일     60,130인    801,891근    38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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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令市[약령시]의 現在[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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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의 미치는 바 경제관계는 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 인솔하여 발달하여 오는만큼 옛날에는 조선 안에서 생산하는 재료가 매매되는 이외에 당재(唐材)라고 하여 중국으로부터 금석지재(金石之材)가 많이 수입되는 외에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으나 교통의 발달로 국제무역이 빈번하여지게 된 오늘에는 일본, 중국, 몽고 등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부 아프리카의 찌는 듯한 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蘇鐵)을 비롯하여 황막한 시베리아의 천지를 내집같이 돌아다니는 웅담(熊膽)까지 모여들게 되는 것은 약령시를 통해본 인류문화사의 한 토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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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약령시에 모여드는 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 입어 거의 파멸에 가까운 약령시가 새로이 왕성하게 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양입구에 마천루(摩天樓)같은 ‘리딩(誘導塔[유도탑])’을 세우고 ‘일미네이션(大雷飾[대뢰식])’ 사이에 홍기, 청기가 나부끼며 지방으로부터 모여드는 생산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확실히 일반 상업 전술의 발달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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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 이 시장은 약을 재료 그대로 가지고 와서 매매케 되는 것이 특질이었으나 지금은 전일 영신환, 조고약, 어을빈 만병수 까지 시장 복판에서 인기를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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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변천 가운데에도 특기하여 둘 것은 영시의 개설 이래 장구한 연월을 지남에 따라 그 본래의 성질에 배반하여 부업적 상인계급을 영시의 주요 구성요소로 하게 되고부터는 경상도내 지방에 미치는 약령시의 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 커다란 파문을 그리게 되어 약령시 본래 목적인 약재 생산에 효과가 적게 되고 시장 내의 불량 중개인으로 말미암아 일시 평판이 좋지 못하였으므로 이러한 폐풍을 일소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이십여 년 생긴 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 칠년 전 전주(全州)에 약령시가 처음 되려고 할 때에 대항하기 위하여 생긴 약령시 진흥회가 지금은 약령시 번영회로 변경되어 최선의 노력을 다해오고 감독한 결과 지금은 어느 정도까지 통제가 되어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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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금이야말로 동력의 위력 밑에 거대한 공장들이 날로늘어 남조선의 ‘메트로폴리스’를 만들려는 대구 현대과학의 태반(胎盤) 같은 대구의 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원시시장(原始市場)의 한개가 벌써 오늘날의 경제권내에 발을 딛고 장차 올 내일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흥미 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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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년 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 경과하여 오며 자본주의 경제의 현 단계에서 의연히 그 존재가 필요하게 된 대구 약령시의 발달사는 宛然[완연]히 금일 경제의 발달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 특기할 것은 그 성질상 순박함이 짝이 없는 즉 말하면 매매하는 사람들의 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 같은 것까지도(물론 변천된 것도 많으나) 삼백 년 전의 옛날을 그려볼 말한 순박한 이 시장에도 현 기금을 자본의 붉은 혀(舌)는 내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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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사년 전 어떤 외래 자본벌이 자기 소유의 땅에 시장의 위치를 옮기려고 현 위치는 도시 교통상 불편하다는 구실로써 다방면으로 술책을 써 보았으나 현 장소에서 기십 년간 상권을 잡고 있는 대가들의 맹렬한 반대로 그만 뜻을 이루지 못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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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대구 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서 전 조선의 한약상계에 우위를 잡고있는 이는 누구일까, 여기는 누구보다도 김홍조(金弘租)씨를 안 칠 수가 없다. 씨는 전선적(全鮮的)으로 보아 제2위 가기를 설워할 만하다고 하며 그 다음 순서 없이 치면 신태문(申泰文), 김종수(金宗洙), 지의원(池義元), 이치욱(李致旭), 두병은(杜炳殷), 김내명(金乃明), 방규진(方圭鎭) 제씨를 칠 수 있고 그 중에도 두병은(杜炳殷)씨 같은 이는 여러 대를 내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여 그 문패는 실로 백오십년이란 역사를 가져 대구의 동인당(同仁堂)이란 이름이 있다. (北平[북평]의 同仁堂[동인당]은 八百年[팔백년]의 역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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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구의 약령시 인기는 이들의 손에 좌우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금년의 약가는 김재금(金再禁)에 따르는 제 물가의 폭등과 일중사변(日中事變)영향과 중국 은가(銀價)의 변동으로 인하여 소위 당재(唐材)는 폭등하였고 초재(草材)에 있어서도 변조로 오른 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도 더욱 시세는 오를 모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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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당초재를 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았으면 좋겠으나 약명이 한없이 많고 날로 변동이 많으므로 약령 시세표가 있다는 것만 말한 후에 특수한 고저를 보이는 몇 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 원상산약(元常山藥)은 작년에는 매근에 일 원 육십 전 하던 것이 금년은 단 오십전에 폭락되어 20년래에 처음 보는 헐가라 하며 산수유(山茱萸)는 작년에 매근 사십 전 하던 것이 금년은 십 전에 폭락하고 토사자(兔絲子) 같은 것도 작년 사,오십 전에 매매되던 것이 금년은 십전에 폭락되고 지방 생산자의 저울에 예기치 못한 광란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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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令市[약령시]의 將來[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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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음날의 약령시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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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결코 예언자의 심심풀이와 같은 헛된 소리는 아니다. 적어도 현세계의 경제관계와 그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 현단계의 경제제도가 그냥 존속되는 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 대한 연구가 왕성하여지고 한약의 권위가 나날이 높아가는만큼 약령시의 장래는 앞으로도 세계에 그 이름이 높아진다고 일부 인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그다지 허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시장의 형세가 산만하게 생산자가 중개인을 거쳐 도매상에게 팔게 되어 중간에 착취를 당하게 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 시장의 대재벌들이 주식(株式)이나 혹은 합자(合資)의 형식으로 시장을 상설하고 도매와 개인생산자 사이에 직접 취인하게 되어 지방 시장의윤택과 약초 생산의 장려의 약령시 본래 목적을 소개하려는 것이 당 업자간의 의도인 동시에 매우 현명한 의견인 듯하다. 그래서 참된 대구 자랑을 만들고 조선의 자랑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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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2년 1월 13일, 16일, 20일, 26일
【원문】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 유래(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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