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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지의 임무와 그 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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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9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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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지의 임무와 그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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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은 조선 문단에 현세에 있어서는 문학적 동인 잡지의 간행의 의의는 그의 본래의 차지할 바 역활이나 임무보다는 더 한층 중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조선 문학’이라는 이 애매한 개념이 대외적으로 비상한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 객관적인 조건과 한편으론 ‘조선 문단’이 현재 한 개의 순조롭게 발간되는 월간 문예 잡지나마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주관적인 조건이 함께 합쳐서 본시는 한 개의 적은 신인 작가의 발표 기관, 또는 무명 작가의 문단 등용의 수단이었을는지도 모르는 동인지의 앞에 실로 엄청나게 큰 새로운 사회적 문학적 임무를 부과케 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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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조선 문단’이라는 개념은 순수 예술, 다시 말하면 예술은 정치나 사회나 이런 것에서 전연 자유롭고 또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시민적 술어이었고 이러기 때문에 예술을 생활과의 일원적 입장에서 주창하던 프로 문학에 의하여는 한 개의 길항과 배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었다. 이렇게 ‘조선 문단’이 정치에서의 결백과 자유를 내세우며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절대적인 구분을 지키려고 하는 시기에 있어서는 동인지가 이러한 문단에 ‘출세’하는 등용의 수단이나 혹은 수삼 인으로 된 문학 청년의 자기도취적인 활자적 휴의에 시종한다고 하여도 별반 그 이상의 심오한 의의를 붙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원체 예술을 이러한 것과 전연 무관한 것이라고 주창하던 순수 예술의 ‘문단 제씨’의 교설이란 것이 그것 자체가 한 개의 정치적 입장을 고집하는 태도이어서 그 뒤의 소위 예술지상주의자들이 한번 정치와 마주 설 때 얼마나 자신의 무력과 그리고 자설(自說)의 기만성을 폭로하였는가를 살펴본다면 대단히 흥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한때의 예술 지상주의자였던 양주동, 김억, 김동인, 이춘원 등 제씨가 책임 있는 답변으로써 씨 등이 현재 씨 등의 예술을 얼마나 ‘순수’하게 지키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공포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이상 더 순수예술론자들의 최근의 ‘순수한’ 예술적 활동에 대하여 기록할 겨를이 없거니와 이런 것은 비단 이 땅에서 뿐 아니라 동경 같은 데서도 여태껏 순수예파(純粹藝派)의 서정시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좌등춘부(佐藤春夫)나 적원삭태랑(萩原朔太郞)이나 실생서성(室生犀星) 등이 최근에 눈부실 듯한 정론적 언설과 행동에 의하여 자설의 기만성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아 한 개의 역사적인 풍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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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제 현상에 대하여는 이 땅에 아직도 수많이 남아 있는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 그 예술적인 근거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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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선 문단’이란 개념이 그 시민성을 폭로하고 일층의 혼란을 초래케 된 것은 이것의 지주였던 순수 예술의 배임(背任)에 의하여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실로 과거에는 이것과의 대립의 상태에 있던 프로파의 대부분이 자기의 진영을 해산하고 이 가운데로 흥클되어 들어온 것에 의하여 더한층도를 가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이 허세의 개념은 현재에 있어서는 하나의 습속의 형해로 남아 있고 그러므로 문학적 행동은 이것에 의존하야 행하여질 하등의 근거도 없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곳에 주의를 요하는 것은 이 허세이고 실질 없는 개념과 그 속에 남아 있는 습속을 미끼로 하려는 다분히 사회적인 혹은 보다 정략적인 책동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소(小)는 문단인들의 양명(揚名)책동으로부터 대(大)는 예술가의 배임의 일층의 강화 등등이 이것이다. 이것이 동인잡지를 한 개 문단등용의 수단으로만 용인할 수 없게 하는 객관적인 사회적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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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타방으론 현재 우리가 한 개의 순문학적 월간잡지도 착실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주관적인 조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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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조선문학』은 지금에 있어서 유일의 순문학 잡지인데 재정난으로 가끔 가다는 달을 넘기고 나온다야 또 비참하리만큼 내용이 질적으로 빈약하다. 이런 것은 누구나 입을 씻은 듯이 논위하기를 싫어하는 모양이나 사정은 어쨌든 한 개의 잡지를 기르기 위하여 조선의 문학인들이 이렇게 성의를 아끼는 것은 커다란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혹인은 조선사회가 나쁘다고 꾸짖는 사람도 있으나 대체 조선사회란 무엇이 합하여서 된 것일까. 그 속에는 ‘고귀한’ 문단인은 참여되어 있지 아니할까. 그것은 어쨌든 이것이 지금의 문학적 현상이다. 이 현상이 다시금 동인지에게 본래의 역활 이상의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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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7.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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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한번 ‘문단’이란 것과 문학자들의 상호관계를 상세하게 분석해본다면 이 형해뿐인 개념이 저널리즘을 가운데 두고 그러므로 한 개의 문학본래의 정신이라는 것보다도 출판자본을 에워싸고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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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여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그러타고 완전히 거부해 버릴 수도 없는 이 문단이란 수상한 술어는 사실인즉 예술 지상주의자들의 생각과 같이 고상한 순수한 상아탑도 아무 것도 아니고 한 번 그 공기에 부딪히면 적지 않게 취기가 코를 찌르는 상업적 시장일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문단속에 있어서의 출판자본의 엄연한 세력과 출판기관 당사자들의 이 속에 있어서의 모종의 힘은 이런 것으로밖에 이해할 길이 없다. 평론가와 작가가 타방에 있어서는 문필노동자인 한, 이러한 관계는 理[이]의 당연한 바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작가나 평론가의 직업적 기관이 없는 이상 출판자본에의 문단의 종속도 모면할 수 없는 필연사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관계에서 문인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스스로 개별의 기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나 여하튼 현재의 문단이란 것이 문학적 행동, 다시 말하면 문학정신의 실행을 통하여 유지되어 있지 안타는 것만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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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 있어서는 동인잡지를 통한 문단에의 등용이란, 문학지원자의 아름다운 환상과는 다소 뒤틀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그 본래의 의의가지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인지는 한 개의 고매한 문학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단속에 자극과 파문을 던져주고 문단이란 허울조흔 연막에 싸여서 통속소설과 대중소설로 흘러가 버린 거대한 독자층을 문학의 본도로 끌어올리는 임무를 지녀야 할 것이다. 순수예술의 배임을 고발하고 흐트러진 문학행동을 잡아끌어다 문단적으로가 아니라 실로 문학적으로 그가 가지는 본래의 비판정신을 양성하여야 할 것이다. 동인지는 지금 순문학의 진영을 지키는데 가장 큰 주동력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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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 동인잡지를 가지고 있는 신인 제씨들의 ‘문단’을 비웃는 태도를 ‘일방적으로’ 나는 시인한다. “조선문단! 그까짓 더러운 것, 그곳에 무슨 수준이 있나! 아무나 문사가 될 수 있는걸!” 물론 이러한 폭언까지도 나는 시인한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일방적으로이다. 동인지가 자신 위에 부과되어 있는 이 특수한 사회적 문학적인 임무를 자각하고 그것을 실행하면서만 이러한 건방진 소리는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만일 그러치 못하고 고매한 정신과는 얼토당토않은 고답적 태도라든가 중학생적 교만으로 해서 아니 그것보다도 문학청년특유의 자기 도취에 빠져서 울부짖는 공소에 그친다면 그것은 문학본래의 정신과도 상반되거니와 사회적으론 한 개의 수음행위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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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시각으로써 기성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학잡지보다도 양에 있어서 몇 갑절이나 더 많은 군소 동인잡지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동인지 그 자체로써는 희망하건 안 하건 현재의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현실적 기반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한 개의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성격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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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분한 듯하나 그 실은 하나의 당연한 태도를 가지고 최근에 족출(簇出)하는 동인잡지의 일반적인 동향을 살펴보면 한두 개의 추켜 올릴 만한 것이 없지는 않으면서도 결코 그가 지니어야 할 새로운 사회적 문학적 임무를 자각하고 나오는 것이라는 진실로 고매한 정신을 간취할 수 없음은 적지 않게 유감스런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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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한 개의 동인잡지가 고매한 통일된 문학적 주창을 내세우라고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안는다. 이러한 동인의 구성이란 사상적 문학적 주창이 일치하는 개인들로서 조직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기는 하나 학생시대의 동창이나 혹은 지역 등등의 관계로도 모이어지는 일이 만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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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이 잡지 속에 담은 내용의 의하여보다도 잡지의 형태 같은 것으로 신기를 취하고 문학론이나 작품에 있어서도 어떠한 새로운 기운을 ‘테마’나 내용에 있어서 획책한다느니보다는 문법이나 상식을 무시하는 문장의 무의미한 곡예나 하등의 예술적인 감각도 따르지 안는 기괴한 말의 남용으로 그러므로 진실로 문학적인 언어학적인 변혁보다도 말쇄적인 병리적 재조의 자기도취에서 자기들의 새로움을 표시하려고 하였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경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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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7.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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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문학을 뜻하는 새로운 세대가 기성의 문단에 대하야 반역하고 평속(平俗)과 저조(低調)에 흐르는 문학적 조류를 모멸하는데 성급한 나머지에 이러한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문제로 하는 것을 잡지의 형태나 활자의 배열 같은 데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적지 않은 잘못일 것이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것 - 다시 말하면 동인잡지의 문단에의 반역이 문학적 정신이나 문학적 언어의 진실한 창조에 의하여 기획되어 있지 아니하고 모던보이들의 옷맵시를 따르는 듯한 겉껍질과 지극히 지엽적인 것에 의거하여만 고려되어 잇다는 것에 대하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쫓는 것도 무방하고 상식을 무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그것보다도 그것이 옷맵시나 머리치장에만 유의하고 그 속에 들어 있어야 할 건전한 육체나 사상을 전연 돌아보지 않는 경박한 유행아의 관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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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에는 동인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문학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고 있는 제씨들에게는 하나의 위대한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과연 씨 등은 무엇을 가지고 문단을 받들고 있든 순수예술파의 ‘성직자의 배임’을 고발할 만한 새로운 위대한 문학정신을 가지고 이들의 아성이던 ‘문단’을 거부하고 그들을 따르고 허둥지둥하는 무형의 독자층에게 새로운 ‘어필’을 던질 만한 무슨 아름다운 정열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은 전혀 없고 한 개의 등용책(登龍策)으로 신기(新奇)와 모멸(侮蔑)은 기도(企圖)되어 있지 아니한가. - 이러한 모든 자성(自省)에 대하여 저항할 만한 무게 있는 내용이 준비되어 있기를 나는 무한히 희망한다. 이것은 또한 나 하나만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의 문학을 기르고 있는 현재의 현실적인 제 조건이 한가지로 바라서 마지않는 바이라고 믿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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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文園)』(대구), 『요람(搖籃』(경성) 등은 위선 흥미의 권외(圈外)에 서게 됨이 유감이다. 아무리 희망을 부치고 친절히 읽어보아도 전술한 바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이러한 잡지를 대하게 되면 하나의 저항도 발언할 수는 없다. 나의 이러한 태도를 불친절하다고 생각할는지는 모르나 잡지를 내는 돈으로 책이나 사서 좀더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제씨들의 이 말에 대한 분개를 나는 희망한다. 분개의 뒤에는 일층의 정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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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몇 개의 시잡지 등이 있는 모양이나 지금의 나의 수중에는 없고 또 최근에 나온 것도 적다. 이러한 가운데서 가장 수준이 높고 또 최근에 발간된 것 중에 『단층(斷層)』(평양)과 『창작(創作)』(동경)이 있다. 이 두 개에 대한 분석을 정당히 이해하면 나의 뜻하는 바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새로운 문학의 세대들이 파악하고 있는 문학적 사상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까지의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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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 두 개의 잡지에서는 그것을 통독하고 난 뒤에 막연하고 혼란한 채로 한 개의 의도를 간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인의 몇 작품은 상당한 가작으로써 족히 과학적 비평에도 견딜만하다고 생각한다. 자료로는 최근에 발간된 『단층』제2책과 『창작』제3권이 내게 있을 뿐이므로 전호나 혹은 그 전호에까지 올라가서 언급치 못할 페단도 없지 않으나 이 속에 있는 작품을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과히 어긋나지 안는 독후감을 얻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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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단층』을 보자. 이것은 계간인데 4월에 첫 책이 나오고 이번에 2책이 나왔다. 동인들은 모두 평양 사람으로 양운한(楊雲閑),김조규(金朝奎)의 두 시인 외에는 전부가 새로 나오는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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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책을 통독하고 나서 위선 얻은 느낌은 다소의 굴절은 있으나 이 동인들의 한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가 지식계급의 운명이란 데 있다는 점이다. 씨 등이 작중인물로 설정한 것이 지식인인 때문이 아니라 씨 등이 테마로써 따르고 있는 것이 지식인, 내지는 지성의 역사적 운명이라고 보아지는 때문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성적 문제에 대한 왜곡된 흥분으로(예컨대 최정익씨의 「자극의 전말」) 모호하게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없지 않고 또는 이것과는 전혀 방향을 달리하여 농민의 토지이탈과 도회에의 집중을 다분히 낭만적인 태도로 노래하려는 분(예컨대 양운한 씨)도 없지는 아니하나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역시 이 지성과 지식인의 문제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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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7.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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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단층』동인의 예술적 경향을 소시민문학의 일 형태라고 단정해버린다면 이러한 개괄에 항의를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식계급의 운명에 대한 논의는 ‘구라파 정신의 장래,’ 혹은 ‘현대인의 건설’ 등으로서 우리들에게 소개되는 <지적협력국제협회>의 논의 그 자체가 소시민 지식인의 과제였고, ‘지드’나 ‘로만 로랑’이나 ‘말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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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예술도 그것이 소시민성의 제한을 완전히 떨쳐버린 것인지를 경홀(輕忽)히 단정키 힘든 현세(現勢)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성에 관한 토의 과제는 휴머니즘 등의 논의와 함께 역시 ‘다수자층’의 한 개의 해결할 만한 중요한 제목이 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소시민의 문제이면서 또한 그 이상 현대인 일반의 문제이기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리얼리즘 문학은 작가에게 취재나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절대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므로 『단층』동인들이 지식계급의 모순과 고민을 가지고 그들의 단편의 주제를 삼았다고 해서 이들을 소시민 문학의 일 태(態)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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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의연히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씨 등의 문학이 도달한 문학적 사상적 입장에서 개중에는 ‘지드’의 여행기와 그에 대한 비판을 쳐들고 ‘지드’의 회의적 개인주의를 적발하는 고도의 발전성을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씨 등이 취급한 한에 있어서 지식인과 지성의 문제는 하나도 정당히 해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중 인물의 고민에 해결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 자신이 이들의 혼란에 휩쓸려 들어가서 혹은 감상주의로 또는 혹은 소시민적 허무주의와 페시미즘으로 허둥지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현실은 일방적으로 과장되는 한편 인물의 성격도 보통을 잃은 것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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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행동(실천)의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취직, 연애, 결혼, 개인과 사회의 모순 등등의 문제에서도 작자들은 정당한 형상화의 길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구연묵 씨의 「유령」에 있어 제일 심하여 이곳에서는 실로 문제의 제출로부터 혼란 속으로 들어가 버려 행동의 통일성은 결여되고 지성의 가장 옅은 초보의 문제 앞에서 벌써 무릎을 꿇고 말았다. 태연, 승호, 영식, 윤배 등의 지식계급에 관한 불꽃튀는 듯한 논쟁도 해결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영식이가 마지막에 취직문제를 앞에 놓고 ‘자유’와 ‘신념’과 ‘양심’의 문제를 추궁하며 결국은 “그러나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옳단 말인가” 하는 끝장에 이르러 암연히 밤을 새우고 말 때에 이것은 작자 자신의 혼란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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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교양 - 이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쓰여지기 위하여 배양된 것이었다. 문화를 파괴하고 진리와 상반되는 데 헛되이 이용되기 위하여 자신의 지성은 단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어느 곳에 과연 지식과 기술과 교양을 정당하게 제공할 곳이 남아 있는가? - 이러한 문제를 제출하는 것은 작가 구연묵 씨의 한 개의 거대한 플러스였다. 그러나 그것이 작자 자신까지를 혼란 속에 몰아넣었을 때 이 문제는 영원히 소시민의 제목임에 그칠 것이다. 김화청(金化淸) 씨의 「스텐카라진의 노래」라는 소설에서는 이 문제는 극히 적은 부분에 있어서 단편적으로 제출되었으나 성적(性的) 감동을 추궁하는 데 작자의 붓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테마는 흐려지고 마지막도 일종의 처참한 감상주의로 흘러버리었다. 그러므로 ‘나’라는 주인공이 “치숙이와 갈라져서” ‘남식’이를 찾아갔을 때 “운동에 뛰어들어 감옥에 들어갔다가 폐가 좀먹어” 지금 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여지껏 내가 양심을 놓지 않고 잃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홀로 기뻐한다”고 ‘라진의 노래’를 불러보는 남식의 아름다운 태도가 어딘지 현실성이 희박한 것 같고 파나스틱하게까지 보이는 것은 작자가 이 이야기를 삽화식으로 갖다 붙여 놓은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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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서 유항림 씨의 「구구(區區)」라는 소설은 행동을 잃고 십자가로(十字街路)에서 우왕좌왕하는 소시민 지식인의 문제를 보다 풍부하고 정리된 인물과 정황의 설정에서 제기하고 있다. 지식인의 고민과 회의와 우유부단과 반성을 생경한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또 가장 있음직한 사건의 설정에 의하여 형상화시켜서 한 개의 뼈와 살을 갖춘 작품으로써 만들려는 작가의 뜻이 어느 정도까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중인물이 ‘녹주’라는 기생에게 있어서나 ‘남우’라는 청년에 있어서나 지나치게 자의식을 추궁한 결함이 없지는 아니하나 이것도 그닥 흠이 될 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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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7.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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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구」의 작자 유항림 씨에 대하여는 하나의 경고를 보내는 것이 적당할까 한다. 사실인즉 나도 역시 소시민 지식인의 자기분열의 양태에 흥미를 느끼고 빈약한 작가의 역량을 돌보지 않고 몇 개의 단편으로 시험을 기도한 일이 있었는데 나의 생각으론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었다. 소시민의 유약성과 중도중반단성(中途中半端性)과 시대적 고민상을 고발하려는 것은 물론 소시민의 생활을 끝까지 박탈하는 데서 객관적으로 정당한 가치를 얻어보겠다는 심사였다. 나는 유씨의 작품에 나타난 작자로서의 문학적 사상적 입장이 나와 거진 가까운 곳에 있는 듯 싶어 일층의 흥미를 느끼기는 하면서 그리고 나보다도 문제의 제출된 범위 내에서 퍽 많이 성공하고 있는 것에 감탄을 하면서도 역시 이러한 태도의 앞에 소시민적 허무주의와 유나니즘에의 일탈이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유씨에 대하야 이 경고를 가지는 것이 결코 유씨의 작가적 장래에 대하야 해가 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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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익(崔正翊) 씨의 「자극(刺戟)의 전말(顚末)」은 동경 유학생들의 세번째 나오는 동인잡지 『창작』제3권의 신백수(辛百秀) 씨의 「아름다운 고립의 배열」과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지식인의 사상적 시대적 고민 앞에서 도피하여 작중인물을 육적 감능(肉的感能)의 세계로 몰아 넣었고 특히 전자는 D. H. 론렌스의 속된 현실 도피주의에의 영향이 많은 듯하다. 어쨌든 현대의 지식청년으로서 지식의 위기, 지성의 패배 앞에도 정면으로 뛰어가서 그곳에서 성의 단맛을 희롱하고 있는 문학은 장래성 있는 문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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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황순원 씨는「거리의 부사(副詞)」라는 소설로써 단편적으로 ‘룸펜’을 취급하였으나 산문정신에 대한 무이해로 인하야 실패하였고 한천(韓泉) 씨는 「산골겨레들」이란 소설로써 농촌을 취급하였으나 역시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한씨는 농촌을 리얼리스틱하게 관찰하려고 하지 않고 다분히 신화적인 향훈(香薰) 속에서 바라다보려고 한 데 어색한 것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씨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의 작은 부스러기 같은 시계 이야기가 결국 마름을 가운데 두고서 어우러지는 소작문제 앞에서 신화성을 포기 당할 때 이것을 작자의 주관적 관심보다도 위대한 갈등이 아이디얼리즘을 굴복시켰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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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농촌에서 취재하여 작자의 눈이 리얼리스틱하였기 때문에 아름다운 한 폭의 생활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는 데 성공한 것으로는 주영섭(朱永燮)씨의 일막극 「벌판」이 있다. 『창작』제3권 중의 백미라 하겠다. 끝가지 현실 위에 발을 붙이고 현대의 농촌이 가지는 무지와 인습과 몽매와 고민에서 작자의 눈을 돌리려고 하지 않으면서 인물의 성격을 간결하게 대조적으로 묘파하여 또한 결코 추잡하지 않은 아름다운 극을 만들어낸 씨의 작가적 수완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전편을 흐르고 있는 어떤 종류의 객관주의적 관조적 태도는 이 작품에서 진박력(眞迫力)을 덜고 그만큼 발랄성(潑剌性)을 멸살하는 듯하다. 이밖에 『창작』에는 한적선(韓笛仙) 씨의 「장벽」이란 삼막극이 있으나 1,2막을 보지 못한 때문에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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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동인잡지에서 공통으로 주의하여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투리’의 문제다. 대화의 사투리는 불가피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이것도 좀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 나는 다행히 평양 부근의 출생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게 읽었는지 모르나 그러나 어떤 곳을 골치가 아픈 적이 많았다. 나는 농민의 대화는 사투리로, 그러나 지식계급 이상의 대화는 서울말이 문학어로 적당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제씨의 생각은 어떨는지. 그 다음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제목이다. 제목들은 모두 신기하게 부친 것이 많은데 어떤 것은 전연 뜻을 모를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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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식(淺識)의 탓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역시 제목 같은 것으로 독자의 머리를 애타게 하는 것은 악취미인 것 같다. 더구나 유항림 씨의 「구구(區區)」란 무엇인지 상상도 못하겠다. 문장도 지나치게 상식과 문법을 무시한 것이 많아 나와 같이 젊은 사람도 좀처럼 그러한 묘사가 그려내는 분위기와 감능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는 곳이 많았다. 문학어의 창조가 이런 곳에 있지 안타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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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있는 지면인지라 이 이상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음이 유감이나 상술한 분석을 주의하여 읽어보면 내가 여러 번 주저하면서도 결국 이 두 동인지의 일반적 경향을 소시민 문학의 일 형태라고 개괄치 않을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소시민적 자유주의 문학이 ‘나치스’ 어용문학으로 흘러가 버리는 악한 일면을 배태하고 있는 한편, ‘말로’와 ‘하인리히만’과 ‘폴 니장’의 문학도 기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결코 모욕적인 명칭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을 초(草)하는 진의를 정당히 이해하여 동인지의 제씨들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사회적 임무의 거대함을 생각하는 데 적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희망하여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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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7. 10. 1)
【원문】동인지의 임무와 그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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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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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문단(朝鮮文壇) [출처]
 
  # 조선문학 [출처]
 
  1937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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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