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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崔晳)으로부터 최후의 편지가 온 지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는 바이칼 호수에 몸을 던져 버렸는가. 또는 시베리아 어느 으슥한 곳에 숨어서 세상을 잊고 있는가. 또 최석의 뒤를 따라간다고 북으로 한정 없이 가 버린 남정임(南貞妊)도 어찌 되었는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이 때까지에는 아직 소식이 없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일을 알아보려고 하얼빈, 치치하얼, 치타, 이르쿠츠크에 있는 친구들한테 편지를 부쳐 탐문도 해 보았으나 그 회답은 다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모스크바에도 두어 번 편지를 띄워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모른다는 회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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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나는 이 사람들(그들은 둘이 다 아까운 사람들이다.)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설사 이 세상에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시는 조선에 들어오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친구의 정에 남과 자별하게 친함을 가졌던 나로는 어디든지 살아 있기를 아니 바랄 수 없다. 그 두 사람이 죽어 버렸다고 어떻게 차마 생각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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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다 쓰고 나서는 바이칼 호숫 가에 최석과 남정임 두 사람의 자취를 찾아서 떠나 보려고 한다.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못 찾더라도 나만은 그들을, 남달리 알아 주고 사랑하는 나만은 꼭 그들의 자취를 찾아낼 것만 같다. 만일 그들의 무덤이 있다고 하면 비록 패를 써 박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것이 최석의 무덤, 이것이 남정임의 무덤이라고 알아 낼 것만 같다. 설사 그들이 시체가 되어 바이칼 호수의 물 밑에 잠겨 있더라도 내가 가서 그들의 혼을 부르면 반드시 그 시체가 떠올라서 내가 서서 목멘 소리로 부르짖고 있는 곳으로 모여들리라고 믿는다. 아아 세상에 저를 알아 주는 벗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서로 믿고 사랑하는 벗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내가 부를 때에 그들의 몸이나 혼이 우주 어느 구석에 있기로 아니 나타날 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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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들의 자취를 찾기 전에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이 글을 쓰는 일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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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최석과 남정임에 대하여 갖은 험구와 갖은 모욕을 가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말에 의지하건대 최석은 나이가 십여 년이나 틀리는, 그러고도 제가 아버지 모양으로, 선생 모양으로 감독하고 지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어린 여자를 농락해서 버려 준 위선자요, 죽일 놈이요, 남정임은 남의 아내 있는 남자, 아버지 같은 남자와 추악한 관계를 맺은 음탕한 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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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남녀는 도덕상 추호도 용서할 점이 없는 죄인이라고 세상은 판정하고 있다. 최*남 두 사람의 친구들조차 이제는 이 잘못 판단되는, 모욕되는 두 사람을 위하여 한 마디도 변명하려고 아니하고 도리어 나간 며느리 흉보는 모양으로 있는 흉, 없는 흉을 하나씩 둘씩 더 만들어 내어 최석, 남정임 두 사람을 궁흉 극악한 그야말로 더럽고도 죽일 연놈을 만들고야 말려 한다. 만일 최석, 남정임 두 사람이 금시에 조선에 나타난다고 하면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최석, 남정임 두 사람을 대하여서는 세상은 다 무에라고 하든지, 저만은 두 사람의 깨끗함을 아노라 하여 두 사람을 시비하는 세상을 책망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나타나리라고 믿는다. 도무지 이 세상이 이렇게 무정하고 반복 무상한 세상인가보다. 더구나 최석의 은혜를 받고 최석의 손에 길러졌다고 할 만한 무리들까지도 최석이, 최석이 하고 마치 살인 강도 죄인이나 부르듯 하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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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찌하면 이 변명을 하여 주나 하고 퍽 애를 썼지마는 도무지 어찌할 길이 없었다. 몇 번 변명하는 말도 해 보았으나 그러할 때마다 핀잔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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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때다. 작년 이맘때 초추의 바람이 아침 저녁이면 쌀쌀한 때에 나는 최석의 편지를 받았고 그 후 한 달쯤 뒤에 최석을 따라서 떠났던 남정임에게로부터 또한 편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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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쓰려는 글은 이 두 사람의 편지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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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편지는 이름이 편지지마는 일종의 자서전이었다. 특히 최석, 남정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두 사람이 다 극히 담대하게 극히 자세하게 죽으려는 사람의 유서가 아니고는 쓸 수 없으리만큼 솔직하고 열렬하게 자백이 되어 있다. 나는 최석의 편지를 보고 어떻게나 슬펐고 어떻게나 분개하였던고. 더구나 남정임의 편지를 볼 때 어떻게 불쌍하고 어떻게 가슴이 아팠던고. 나는 이 사람의 편지를 다만 정리하는 의미에 다소의 철자법적 수정을 가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본문을 상하지 아니하도록 옮겨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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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다.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라도 양심의 뿌리가 바늘 끝만치만 붙어 있는 이면, 반드시 지금 여기 옮겨 베끼는 두 사람의 편지 사연을 보고는 다시 두 사람의 시비를 하지 못하리라고, 반드시 동정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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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고 하면, 사람이 세상에서 동정할 만한 곳에 동정의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게 되면 그 세상은 망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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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질없는 내 말을 많이 쓰고자 아니 한다. 곧 최석의 편지를 옮겨 베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최석의 편지는 물론 봉투에 넣은 것이 아니라 소포로 싸온 것인데 겉봉에는 `바이칼리스코에'라는 일부인이 맞고 다시 `이르쿠츠크'라는 일부인이 맞은 것을 보니 이르쿠추크 내에 있는 바이칼 호반에 있는 어떤 동네에서 이것을 부친 것은 얼른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이칼리스코에'라는 중성의 형용사는 `셀로'라는 아라사말에 붙은 것은 내 부족한 아라사말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최석은 이 소포를 바이칼리스코에라는 동네의 우편소에서 부치고 나서는 어디로 가 버린 모양인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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