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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이 생업이고 보니 종이를 먹어 없애는 것이 일이기야 하지만 나같은 사람은 원고용지 하나만 하더라도 손복(損福)을 할 만큼 낭비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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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안서(岸曙)를 만나 차를 마시면서 들은 이야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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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東仁)은 집필을 하려면 50매면 50매, 백 매면 백 매, 예정한 분량만큼 원고용지에다가 미리 넘버를 매겨놓고서 쓰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단 한 장도 슬럼프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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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 한 장도 슬럼프를 내지 않는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미리서 원고용지에다가 넘버를 매겨놓고는 새끼줄이나 뽑아내듯 술술 써내려가고 앉았을 동인의 집필광경이 그만 밉광스러울 만큼 마음에 부러움을 어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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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동인 같은 예야 차라리 특이한 예외의 재주라고 치더라도 춘원은 처음 이삼 매 가량은 슬럼프를 내곤 하지만 그 고패만 넘어서면 이내 끝까지 거침새 없이 붓이 미끄러져 내려간다고 하고, 또 나의 동배들도 더러 물어보면 첫머리 시작이 몇장쯤 그러하고 중간에서도 오다가다 슬럼프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별반 대단치는 않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변 나를 생각하면 때로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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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하나의 첫장에 (초고 것은 말고라도) 항용 이삼십 매쯤 버리기는 예사요, 최근에는 1백 30매짜리「패배자의 무덤」에서 3백 20매의 슬럼프를 내어본 기록을 가졌다. 단 단면(單面) 1백 30매짜린데 양면(兩面) 3백 20매의 원고용지니 6백 40매인 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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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거짓말을 보태면 원고료가 원고용지 값보다 적어서 밑지는 장사를 하는 적도 있을 지경이요, 사실 그 정갈한 원고용지가 보기에 부끄러울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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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소설 쓰는’ 공부도 공부려니와 아직은 ‘원고 쓰는’ 공부도 나같은 사람에게는 긴한 게 아닌가 싶다. 계제에 누구 슬럼프 많이 내지 않고 원고 잘 쓰는 비결이 있거든 제발 공개해 주면 솜버선이라도 한 켤레 선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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