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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정고 장편(未定稿 長篇)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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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2
나도향
작가 사후 발견되어 1940년 《문장》에 게제된 작품으로 연재 지면에《미정고 장편未定稿 長篇》이라 표기되어 있다.
1
미정고 장편(유고)
2
1
 
 
3
가을의 洗劍亭(세검정)은 더한층 사람을 쓸쓸하게 함이 있다. 세검정의 역사적 내력을 말할 것은 없으나 우리로서 그 자리에 서서 옛일을 돌아보는 이의 마음 가운데 물들듯이 스며드는 감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마음속에 속살거려 주는 세검정의 말일 것이니 그것을 듣는 이에 따라서 그 말의 빛이 엷고 진함이 다르기는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 말이 그 말일 것은 다시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4
날이 아직 더웁지는 아니하였으나 높다라니 개인 벽옥색 하늘에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저녁해가 장엄한 오색빛을 서편 산 위에서 하늘을 향하여 흠뻑 퍼뜨리었다. 그 빛을 다시 이쪽 산이 가리어 산은 산 그림자를 넓지 못한 산골짜기 위에 검은 포장을 눌러 놓듯이 높은데 얕은데 나뭇가지 시내속 틈틈 사이사이 남겨놓지 않고 가려 놓았는데 우뚝 바위 위에 말없이 서 있는 세검정의 그림자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늘여서 기름하게 가로 놓았다.
 
5
꽃이 봄에 아름다운 것이라 하면 단풍이 가을에 귀한 것이니 먼 산 가까운 언덕에 누르고 붉게 피어 있는 단풍은 돌아가는 여름이 선지를 물었다가 흠뻑 내뿜은 듯이 처참하기도 하고 겨울을 맞는 가을이 여름 한 겹을 두고 봄을 뒤집어 複寫(복사)한 듯이 알 수 없는 감회를 일으키기도 한다.
 
6
바람은 분다. 을씨년스러운 생각이 난다. 단풍은 바람에 떨 때 바위 틈을 기어나고 모래로 숨어들어 은방울 울리듯이 흐르는 가을 물은 그것을 비쳐서 마치 뜨거운 붉은 피가 모였다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7
벌거벗은 산에는 울퉁불퉁 내어밀은 바위가 멀리서 와서 멀리 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서늘한 느낌에 소름이 돋는 듯 하다.
 
8
그 위 小林寺(소림사)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고요한 산골에서 퍼질대로 퍼지는 종소리는 혹은 이었다 끊어지는 듯 끊겼다 이어지는 듯하기도 하였다.
 
9
하나씩 둘씩 떨어지는 갈잎이 종소리에 묻어서 다시 한번 재주를 넘고 한 구석으로 모여든다.
 
10
彰義門(창의문) 쪽에서 여승 하나가 옥양목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배낭을 지고서 이쪽까지 오더니 다시 길을 왼쪽으로 돌이켜 海水觀音(해수관음)으로 향하여 내려간다.
 
11
여승은 나이가 근 육십 되어 보이는데 허리가 아프든지 뒷짐을 지고 서서,
 
12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13
을 부르며 다시 시내를 건너 저쪽 산 그림자 속으로 구부러져 들어가 버렸다.
 
14
그 뒤를 이어서 昌善(창선)과 珠榮(주영)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쪽을 향하여 왔다. 그들은 아까 여승이 물 건너던 데 와서 여승이 가던 저쪽 길을 내어놓고 다시 이쪽 길로 발을 내놓았다.
 
15
『조금 일찍 올 걸 그리 하였어요. 너무 늦어서 안 되었어요.』
 
16
주영은 조금 가무스름하나 틀이 잘 잡힌 이마 위에서 하느적거리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젖히며 늦게 온 것이 불안하다는 듯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의 입술은 연지를 바르고 혀를 내밀어 한번 핥은 듯이 윤이 흐르고 진하게 빨갰다.
 
17
『허지만 어디 오늘 생각이나 했었소. 갑자기 오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18
창선은 고꾸라 양복이 조금 으스스해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면서 자기가 미안함을 참지 못한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19
주영은 그것도 그렇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20
『그러나 댁에서 무엇이라고 편지가 왔어요? 내년에는 학교에 입학하실 수가 있게 됩니까? 댁에서도 너무 과히 하시지 않으세요?』
 
21
창선이는 이맛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여지며 입을 뗄듯뗄듯 하다가 다시 시뻘건 주먹이 두 주머니에서 쑥 나왔다. 그는 무엇을 저주할 듯이 입을 다물고 전신에 힘을 주고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다시 맥을 홱 풀면서 힘있는 입김을 내어 쉰 후,
 
22
『에, 자식을 모르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지요. 우리 아버지가 날더러 자식의 할 본분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자식에게 할 직책이 있지 않소.』
 
23
주영은 따라서 근심하는 빛이 얼굴과 그의 눈과 그의 온몸 속에 스며든 듯이 말소리까지 흐려지며
 
24
『그렇고 말고요. 댁에서는 너무 심하게 하세요. 창선 씨가 단 한 분이 아니십니까. 누님도 안 계시고 형님 동생 다 안 계시고…』
 
25
둘이서는 다시 세검정 옆까지 와서 오던 길을 돌아다 보고 서 있다가 창선이가,
 
26
『우리 저리로 올라갑시다』
 
27
하고 고개를 돌이켜 소림사를 가리켰다.
 
28
세검정을 내어놓고 발을 다시 그리로 옮길 때 창선은 다시 말을 이어서,
 
29
『세상에서는 우리 집이 비천하다고 멸시하고 천대하지 않소? 주영이도 아다시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백정이었지요. 우리 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가 손에 칼을 쥐고 짐승의 생명을 끊는 것을 나도 보았소』
 
30
할 때 창선의 목소리는 화살이 떠나간 활과 같이 떨리었다. 주영이도 인습적 관념에서 일어나는 면구하고 부끄러움을 억지로 가리려고 고개를 땅으로 향하였다.
 
31
창선은 말을 끊지 않고,
 
32
『생명을 끊는 것이 죄악이라면 죄악이겠지요. 다만 우리 발바닥 밑으로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착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나 우리 할아버지나 우리 몇 대조 할아버지가 그것을 모른 바가 아니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죄악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썻으나 그들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소. 그들은 자기네 먹고 입을 것을 거기서 얻는 수밖에 없었소. 그들은 잔인한 행위를 아니하려 하였으나 그때의 사회제도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도록 꼭 얽어매어 놓았었기 때문에 자연히 아버지가 하던 일을 자식이 하게 되고 자식이 하던 일을 손자가 하게 되는 동안에 지금 말로 하면 유한계급(有閑階級) 특수계급(特殊階級)의 노예가 되어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게 된 것이 아니오. 그러는 동안에 그들에게는 어찌 피가 없고 열이 없었겠소. 그들 가슴 가운데서 터져나올 것 같은 원한은 소극적 행위로 나타나서 자기네의 종족은 자기네의 종족끼리 결합하고 단결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그리하여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지요. 그러나 그까짓 이야기는 지나간 이야기니까 여기서 길게 말할 것은 되지 못하지마는 오늘 우리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놓고 보면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지 알 수 없어요. 우리 집은 아니라 우리 종족은 그러한 학대를 받아 내려오는 동안에 무식할 대로 무식하여졌고 어리석을 대로 어리석어져서 참으로 짐승이 되어 버렸지요. 그들은 자기의 뼈속에 사무친 원한을 적극적 행위로 풀어볼 수 있는 시기가 이른 줄을 모릅니다. 자 이것을 보시오!』
 
33
하고 창선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어 주영이에게 보이려 할 때 어느덧 절에 다 올라옴을 깨달았다.
 
34
그들은 중에게 밥을 시키고 다시 저쪽으로 객실을 항하여 가서 마루에 걸터 앉았다.
 
35
『자 보시오.』
 
36
하고 창선은 편지를 읽었다.
 
37
「너의 편지는 보았다. 너의 뜻하는 바나 목적이 좋기는 좋다마는 너의 애비는 벌써 늙었다. 나는 너를 내 앞에 두고 집안 일을 맡기고 싶다. 너도 개화한 공부를 삼 년이나 하였으니 세상 글을 다 배웠으리라. 두 말 말고 이 편지 보는 대로 집으로 내려 오너라. 너희 어머니도 네가 보고 싶어 기다린다. 이번에 만일 내려오지 않으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라 애비의 영을 거슬려 큰 사람이 된 자가 만고에 있지 않으니라. 네가 의학을 배운다 하니 너는 너의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는지 알 것이다. 요새 양의는 사람의 껍질을 벗긴다더라. 이 무지한 놈아! 너는 다시 그런 맘을 먹지도 마라! 어서 내려 오너라. 내려 와서 장가를 들고 벼슬을 하여라! 이곳 군수에게 청을 하여 놓았으니까 군 주사 하나는 넉넉히 되리라.」
 
38
창선은 다 읽고 나더니 기가 막혀 하늘을 보고 웃었다.
 
39
『이렇구려! 이런 이하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이요. 나는 죽어도 집에는 돌아가지 않을 터이요』
 
40
하며 일어서서 마당으로 거닐다가 다시 서서,
 
41
『글쎄 이것을 보고 날더러 어떠한 결론을 내리라 하면 이것이 아니오. 옛날에 자기네를 학대한 사람이 누구요. 자기네를 죽이고 때린 사람들이 누구요. 그것은 벼슬하던 자와 그들의 옹호로 살아가던 소위 양반놈들이 아니었소. 그러면 날더러 벼슬을 하라는 그 심정은 무엇이요. 날더러도 자기네를 못살게 굴던 그러한 놈이 되라는 것이 아니요? 자기 원수의 대를 이으라는 것이 아니요? 그렇지요. 사람이 자기보다 힘있는 자에게 반역하고 나설 때 그들은 궁극의 목적은 결국 자기도 그자들과 같이 남을 학대하고 모욕해 보려는 본능적 야심밖에는 없나 봅디다.』
 
42
주영은 창선의 결심 한 번이 자기의 생활을 좌우할 듯이 그의 얼굴빛 말소리를 살피면서,
 
43
『그러면 어떻게 하실 터입니까. 아버님 말씀대로 시골로 가실 터입니까. 그렇지 않고 서울 계시겠읍니까. 어떻게든지 결정을 하셔야 할 것이 아녜요』
 
44
하는 소리는 무슨 남모를 번민을 지내 나오는 것 같이 착 가라앉지 못하고 걱정스러웠다.
 
45
창선은 마루 위에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그 위에 머리를 얹고 드러누우며,
 
46
『결심한 지는 벌써 오래니까요. 그러나 여보 주영. 우리가 우리 고향에서, 安東(안동)서 말요, 재작년 이맘 때 暎湖樓(영호루)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경동하던 理想(이상)은 오늘 와서 얌전하게 깨쳐 버리지 않았소. 나는 의학을 배우고 당신은 간호부로 산파가 되어 같이 업을 하고 함께 지내자 하던 것은 그것만 해도 철모르는 어린애의 세상 모르는 계획이었구려. 당신은 내년이면 산파 면허장을 받겠지만 나의 의학은 동향풍에 날아갔구려,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말할 것은 없지마는…』
 
47
하고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말이 없다.
 
48
주영은 먼 산만 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움직거리는 것이 있었다. 그는 남모를 즐거움이라 하면 즐거움, 또는 걱정이라 하면 걱정이 있었다. 그의 뱃속에서는 창선과 자기 둘을 합하여 다시 둘로 쪼개논 새로운 생명이 꼼지락거리기를 시작한다. 우리 인간에 새 생명을 창조하는 즐거움을 주영이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 겨자씨보다도 적은 생명의 씨가 자기 몸에 머물러 그것이 차차 커지기를 시작하여 그것을 알고 그것을 느끼고 또는 생각할 때 지금까지 자기로서는 깨닫지 못하던 인생의 숭엄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반드시 즐거움뿐이 아니다.
 
49
그는 창조의 즐거움을 느끼었다. 그는 奇蹟(기적)을 보는 것 같이 자기로서는 능히 해석하지 못할 사실을 당할 때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무서웠다.
 
50
자기로서는 하지 못할 일을 한 것 같이 몸이 떨리면서 또 그 하지 못할 것을 자기가 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신기함과 기꺼움이 있었다.
 
51
그는 몇 번이나 이를 창선에게 알리려 하였다.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하는 것이 무서운 것 같았다. 그의 입은 열리려 하다가 다시 다물어 졌었다. 그러나 하루는 마침내 그 말을 창선에게 하였다.
 
52
『창선 씨! 저의 몸은 퍽 이상해졌어요. 평상시와는 퍽 달라졌어요. 이런 것을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말을 하면 姙娠(임신)이라고 해요』
 
53
하고는 이 스무 살 된 애어머니는 감격함과 부끄러움에 창선의 가슴에 엎드렸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었다.
 
54
창선은 바다에 용솟음치는 태산같이 높은 물결이 자기 가슴으로 몰려와 안기듯이 위대한 사실을 당한 것 같이 경건한 맘으로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감사하는 맘으로 좋아하였다.
 
55
그러나 지금 주영은 맘속에는 무서운 파동이 있다. 이 무서운 파동을 보는 이가 없고 듣는 이가 없어 혼자 속을 괴롭게 하는 주영의 마음을 또한 창선이도 알 길이 없었다.
 
56
주영은 먼 산만 바라보다가 다시 창선을 보며,
 
57
『여보세요. 만일 시골댁으로 부득이한 일이 계셔서 내려가신다 하면 내려가셔서 새로운 부인을 얻으시겠지요?』
 
58
하고 얼굴에 근심이 나타난다. 창선은 눈이 뚱그래서 벌떡 일어나며,
 
59
『무엇요? 또 당신은 심심한 모양이구려. 또 싸움을 하여보고 싶소』
 
60
하고 주영의 모양을 자세히 살핀다.
 
61
『아녜요. 당신께서는 아무리 해도 아버님 말씀을 들으시게 되세요. 아버님 말씀을 거역하시면 당신 일생이 좋지 못할 것 같애요.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려 가시기를 권합니다.』
 
62
하고 마룻바닥만 손가락으로 긁고 있다.
 
63
창선은 화를 더럭 내며,
 
64
『가뜩이나 속이 좋지 못한데 공연히 글컹거리는구려. 이건 누구 마음을 떠보는 모양이요?』
 
65
하고 주영을 뚫어지게 흘겨본다.
 
66
『아녜요. 저는 그런 짓은 할 줄 몰라요.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있다하면 말이지요. 저는 어떻게 됩니까. 여자는 남자와 달라요. 더구나 저는 저 혼자몸이 아니니까요.』
 
67
『그러니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여태까지 몇백 번이나 맹세한 것을 당신은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요.』
 
68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요.』
 
69
『그럼』
 
70
『세상 일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서로 떠나게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예요. 저는 창선 씨를 믿어요. 더 의심없어요. 그렇지만 어떠한 불가항력의 사실이 닥칠 때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비참하여질 것 같아요.』
 
71
『불가항력의 사실이란 무엇이요. 나는 결코 이상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요. 이 현실에 서서 우리 인생사회를 보는 사람이요. 굳세면 되는 것이요. 힘있게 뜨거웁게 나가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소. 너무 당신은 약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 언제든지 걱정이란 말요. 세상에 무엇이 우리를 떼놓는단 말이요. 세상에는 우리 사이를 떼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요. 만일 우리 사이를 떠나게 하는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 자신일 것이지요. 결코 운명 더구나 宿命(숙명)을 나는 믿지 않는 사람이요. 자, 우리는 굳센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 됩시다. 응, 맘을 단단히 좀 먹어요』
 
72
하고 창선은 주영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73
주영은 창선의 힘있는 말에 믿음이 생긴 듯이 겨우 고개를 들어 창선을 쳐다보며,
 
74
『그러면 여보세요. 창선 씨는 또 한 번 나를 위하여 맹세해 주시겠어요. 저는 언제든지 창선 씨를 이렇게 뵈올 때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이 놓였다가도 떨어져 있게만 되면 마음이 놓이지 않고 의심이 나서 못견디겠어요. 언제든지 당신의 맹세를 듣고 싶어요. 천번만번 당신의 맹세만 들었으면 마음이 놓이겠어요. 어떤 때는 공연히 불 같은 의심이 나서 그대로 뛰어가서 맹세를 듣고 오고 싶은 때도 있어요. 어떻든 당신은 다시 고향에 가시더라도 부인을 얻지 않는다는 것만 여기서 맹세하여 주세요.』
 
75
창선은 주영이를 어린애같이 어루만지며 껄껄 웃었다.
 
76
『글세 왜 나를 그렇게도 못 믿우? 내가 당신을 내버리고 다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것 같소. 좀 마음을 굳세게 먹어요. 내가 지금껏 몇백 번이나 맹세 하지 않았소. 그래도 또 맹세를 해야 마음이 놓이겠소. 당신의 마음이 놓인다면 얼마든지 하지요.』
 
77
창선은 주영을 귀여운 어린애를 들여다보듯이 보았다. 철모르는 처녀가 공연한 걱정에 속을 태우는 것 같아서 가증스러웁게도 귀여웠다. 걱정이 가득한 두 눈썹은 초승달이 한조각 구름을 이고서 서산으로 넘어가는 듯 펼듯말듯이 가벼웁게 찡기었다. 그 밑에서 먹수정 같은 두 눈은 서늘한 맛이 드는 것이 시꺼멓게 익은 머루알 같아서 입속에 넣고서 슬슬 굴려 보고 싶었다.
 
78
『글쎄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다. 다시는 주영이 외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79
창선은 정열을 다하여 말을 하여 보았으나 너무 여러번 맹세를 하여서 어째 쑥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80
『그만하면 우리는 그럴 시기는 지나지 않았소』
 
81
하고 조금 멀리 떨어져 앉을 때 저녁상이 들어왔다.
 
82
두 사람은 정다웁게 밥을 먹었다. 주영의 의심도 어느덧 사라져 없어지고 창선의 마음도 저으기 풀어졌다.
 
83
아까까지 개었던 하늘에는 솜뭉치 같은 구름이 얇게 피어서 군데군데 창이 난 구멍으로는 별들이 반짝반짝하는데 한 귀퉁이 잠깐 이지러진 달이 얼굴을 가리었다 내놓았다 한다.
 
84
바람은 하늘에서 무섭게 부는 모양이다. 구름은 가는 것 같아 보이지 않으나 공중에 달린 달이 창랑에 띄워 놓은 銀盤(은반)같이 출렁거리며 떠나가는 것 같다.
 
85
주영이는 달을 쳐다보며 무슨 노래인지 처량한 곡조를 입 속에서 부르고 있다. 달을 쳐다보는 눈 광채는 무엇을 동경하는 듯이 멀고 먼 창공에 닿은 듯 하다. 그의 입 가장자리에는 갓난이가 누워 자는 때같이 평화가 가득 찼었다.
 
86
바람이 나무 끝에 분다. 다시 낙엽이 땅 위에 떨어진다. 떠나가는 달의 앞 길을 쓸려는 듯이 앞에 우뚝 선 느티나무 가지는 바람이 불 적마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여 뭉게뭉게한 창공의 구름을 헤칠 듯 헤칠 듯하다가도 다시 와스스 바람과 함께 낙엽이 떨어지면 하늘에 구름은 여전히 있고 땅에는 시꺼먼 나무 그림자만 마당의 모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듯 하다.
 
87
창선은 주영의 옆으로 왔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즐거움이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듯이 주영의 어깨를 안았다. 주영은 고개를 돌려 창선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은 힘있는 광채로 서로 부딪쳤다. 사람의 입은 말로
 
 
88
(이하 4백자 원고지 1매 빠짐)
 
 
89
『…려운 感激(감격)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난 것까지 나는 지금 기억하오. 아아 참 좋았지. 우리가 앉아 있던 모래는 가루 같은 모래가 한없이 깔린 그 위에서 멀리서 내려와서 우리 앞을 지나서 멀리 흘러가는 물 위에 달이 비추인 것을 보며 이야기하던 때. 얼마나 우리는 행복스러웠소. 당신은 내 이름을 모래 위에 쓰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래 위에 쓰고, 그것을 누가 지우랴는 문제가 나서 서로 못 지우고 그대로 돌아온 일이 있지 않소. 그러나 그것을 지워 준 사람이 누구요. 그것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물론 하느님도 아니라 그 달을 비추었던 강물이 아니었소.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과 나 두 사람의 사랑을 지워 놓을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않소.』
 
90
주영은 옛날 기억 속에 잠겼다. 창선은 다시 달을 보고,
 
91
『달이 흐리는 것도 달 자체가 흐린 것이 아니라 구름이 앞을 가린 까닭이 아니오. 만일 세상의 모든 불순하고 사악한 것이 우리의 눈을 가릴 때는 그 사람도 빛을 잃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나는 한가지 미쁜 것이 있소. 어떠한 구름이 우리의 사랑을 가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구름 속에서 우리 사랑의 빛을 넉넉히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오.』
 
92
창선은 말을 그치고 주영을 낀 채 하늘만 쳐다보다가 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93
『나는 주영의 마음이 옛날에 낙동강가에서 우리의 이름을 쓰던 때나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이때나 조금도 변함이 없이 순결한 것을 믿소. 그것을 믿음으로써 나는 살아가는데 광영을 본단 말이요.』
 
94
말이 없이 듣기만 하던 주영은 가는 기침을하더니 창선의 그 뜨거운 열이 있고 굳센 힘이 있고 또는 신앙이 가득 찬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을 대답한다는듯이 몸을 창선에게 안기었다. 그들의 눈은 다시 번득거리었다. 다시 영과 영의 속살거림이 있었다.
 
95
별 하나 그 중 큰 별 하나 바로 두 사람 위에서 반짝거리었다. 주영이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 별이 떨어져 주영의 눈이 되었는지 주영의 눈이 그 별이 되었는지 별 반짝 눈 깜빡할 적마다 눈 광채가 별에 가 닿기도 하고 별의 광채가 눈에 와 닿기도 하는 듯하다.
 
96
『에그, 별 크기도 하이. 저 별 이름이 무엇이예요?』
 
97
주영은 별의 눈을 창선에게 옮기었다. 그의눈은 창선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듯하였다.
 
98
『어느 별?』
 
99
창선은 물었으나 그의 마음은 별에 있지 않았고 주영의 눈에 있었다. 창선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정열로 주영의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모두 별을 잊어버렸었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을 때 주영이도 별을 잊어버렸고 창선이도 별을 잊어버렸었다. 그들은 영원히 별을 잊어버렸다.
【원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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