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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년 전 - 작가생활의 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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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0.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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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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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생활을 의식하고 해 온 지는 불과 2, 3년래의 일이니까, 이 이야기는 작가생활의 회고라고 말할 수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예술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일이고, 단체생활에 관계한 처음이고 보니, 그것이 나의 문학생활에 있던 아무래도 하나의 기념할 만한 시기일 것 같다. 열아홉살 때니까 소화 4년이다. 중학 시대 『월역』동인인 한재덕 씨가(현재 조선 일보 특파원으로 평양에 있다) 동경 시외 구택(駒澤)에 있던 나를 찾아와서, 와세다 교내에서 안막 군(최승희의 부군이래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을 사귀어 가지고 함께 ‘예맹’ 동경지부에 가맹했는데, 이번 하계 휴가에 동경부 소속의 극단이 조선 공연을 나가는데 동행하면 어떤가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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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참동안 덤덤이 앉아서 생각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일 극단에의 가맹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온(安穩)한 학창생활을 뒤흔들어 새로운 사회적 권내에 나서게 하는 하나의 전환점을 지을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의 적은 조직의 관계가 장차 나의 생애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당시의 정세를 막연히 추측하면서, 무사시노(武藏野[무장야])의 적막한 여사(旅舍)에서 초조한 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똑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리라고 생각한 것이 너무 돌연스럽게 찾아온 것도 같고, 또 막연히 고대하던 것이 너무 쉽사리 찾아온 것도 같고, 어쨌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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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 대답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였던지, 창밖에 대숲을 지나가는 취우의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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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애인도 서울 있고 한데, 이왕 서울 들를 바엔 겸사 겸사 해서 좀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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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의 의견을 재촉하였다. 한씨의 말에는, 애인에게 뻐길 만도 하다는 뜻이 은연중에 나타나 있는 것을 나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씨는 다시 안막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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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회에 문단 사람을 알아두면 이모저모로 해롭진 않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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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다른 방면으로 나의 결심을 촉(促)하고 있었다. 나는 실인즉, 이러한 이해타산보다도 좀더 근본적인 기점 위에서 주저하고 있던 것이나, 어쨌든 나는 씨에게 곧 승락의 회답을 주었고, 씨와 동행하여 고원사(高圓寺)로 동극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엔, 서울 있는 여학생(한씨의 이른바 ‘애인’이요, 후일 나의 선처로 된 분이다)에게 방학 뒤에도 귀성하지 말라고 기별의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 속에 “금번 재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극단에 관계하여 전조선을 순회케 될 것인바, 경성 체류는 약 10일간으로 예상된다, 운운”의 사연이 씌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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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막 씨의 한씨와 함께 나는 서울에 내려서 팔판동(八判洞)에 있던 안씨네 집에 묵었다. 안씨의 말로는 예맹 본부에는 임화 씨가 연극을 주로 맡아 보는데 그와 경성역에서 시간을 작정하여 만나기로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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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세 사람은 임화 씨를 만나러 시간을 맞추어 역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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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이 생소한 뿐더러 예맹의 인원이나 사정에 대해서는 판무식이었고, 또 그 때에 내가 차지한 지위도 그저 한 개의 학생에 불과하였으므로 나는 매사에 추종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에는 학생들이 바바리의 레인코트를 입는 것이 유행해서, 나도 그 더운 때에 보고 졸업 기념으로 얻어 입은 ‘후라노’의 염색 교복에 치렁치렁한 코트를 입고 나섰다. 안씨는 서울 오더니 곧 흑세루 신사양복을 내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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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나가면서 안씨는 임화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인사는 없지만 본 적이 있다 한다. 영화배우로 두 번이나 주연을 하였는데, 생긴 것이 아이노꼬 같다고 말하였다. 나는 임화 씨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그의 말에 경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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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적엔 면도만 밴들밴들하게 하고 휘파람만 불고 다니더니 배우 노릇을 하고, 다다 미술론을 쓰고, 지금은 시를 쓴다”고 하였다. 뒤에 알았지만 그 때 임씨는 「우리 오빠와 화로」라는 시를 『조선문예』에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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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임씨는 불그레한 헌팅을 쓰고 비로도 저고리에 회색 바지를 입고 앞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었다. 펀뜻 보아 모양은 내려는 편인데, 요즘의 임화 씨처럼 세련된 신사풍보다도 배우식인 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안막씨하고 몇 마디 수작하고, 나하고는 통성만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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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 극단의 선행 부대와 함께 예맹 사람들을 만났는데, 박영희, 윤기정, 김유영, 송영 등 제씨와 일개의 소년학생인 필자와는 겨우 이름만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박영희 씨는 그 때도 단장을 들고 다녔고, 윤기정 씨는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었다. 윤씨가 요즘은 하이칼라 양복신사지만 씨가 양복을 입은 지는 2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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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씨를 안 것은 그 이듬해였고,김기진 씨를 안 것은 다시 1년이 지난 뒤였다. 『조선지광』사에서 이씨를 만났는데, 셔츠 위에 닌넬 양복을 기운없이 걸치고 앉았던 이씨와 비가 내리는 날 나는 배갈을 마셨다. 이래 십수 년의 연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씨의 주붕의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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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5년에 나는 ‘김효식’이라는 본명으로 중외일보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라는 최초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화 6년 1월 1일 남천이란 펜네임을 지어 붙였는데, 그 때에 비로소 나는 소설과 희곡에 붓을 대어 보았다. 그리고 그 해 8월호에는 벌써 제1기의 나이 작가생활은 종언을 하고 고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내가 쓴 것은 논문이 2, 3편에 소설 희곡이 2,3편이었다. 내가 없을 때에 발표된「공우회」라는 작품을 유진오 씨가 칭찬하였다는 말을 들은 것도, 그리고 「조정안」등이 카프 문학부에서 추장(推獎)되었다는 것을 안 것도, 모두 2년 뒤의 일이었다. 이 때부터 나의 작가 생활의 제2기가 시작되는 것이나, 그것은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이것이 소화 12년 고발정신 제창으로부터 시작되는 제3기까지 지리하게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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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 1939년 10, ‘작가생활의 회고’ 특집)
【원문】십년 전 - 작가생활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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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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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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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년 전 - 작가생활의 회고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