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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陽德) 온천의 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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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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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陽德) 온천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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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사람 없는 절간을 찾아 1, 2개월을 그 곳에 묻혀서 장편소설 천매를 써 가지고 돌아오리라 생각하였다. 신문도 잡지도 보지 않고 전념하여 나의 최초의 장편소설을 이루어보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작년 5월 중순 석 달을 작정하고 서울을 떠나 나는 나의 고양으로 갔다. 그러나 가깝고 편리한 절간을 찾아낼 수가 없어서 그 다음에 생각한 것이 양덕 온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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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이 내 고향서 불과 백 리 자동차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고장이건만 나는 여태껏 그 곳의 흙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의 양덕 내왕은 잦았고 내 가족 중에도 더구나 부인들은 한두 차례씩 다녀오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고을 안에서도 일년에 한두 번 친척집에 대사가 있을 때마다 외출하시는 내 어머니(그러니까 아직 평양 구경도 하시지 못하였는데) 양덕 온천엔 벌써 4, 5차 다녀오셨고 내 누이들도 한두 번은 거의 다녀왔다. 어머니는 소화불량 신경통 등 신환(身患)으로 다녔었지만 누이들은 대개가 이의 수행으로 다녔다. 비교적 건강하신 가친이나 나 같은 청소년은 한 번도 덕양 온천을 구경하지는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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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짐작이 가겠지만 양덕 온천은 여태껏 유흥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철로가 놓이고 앞으로 평원선이 개통이 되면 주을(朱乙)보다 못지 않은 아름다운 경개로 하여 단연 눈부시는 고급 유흥처가 될 것을 추상키 힘들지 않으나 아직 것은 어느 편인가 하면 병을 고치는 온천이지 결코 배천[白川]이나 온양이나 해운대와 같은 놀이터는 아니다. 그러니까 시설 같은 것은 아무런 보잘 것이 없다. 욕탕도 남녀의 공중탕이 있을 뿐, 대탕지에 구룡각이라는 호텔이 있으나 설비에 비해서 숙박료만 비싸고 또 지나치게 음탕하다. 하녀가 기분금(幾分金)에 의하여 유녀(遊女)로 변하리만큼 공공연하게 비천하다. 그래서 점잖은 부부는 약간 투숙에 곤란을 느낄 정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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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적이 원고 집필이라 양덕역에서 10분 동안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들어가서 앞뒤에 푸른 산을 병풍처럼 돌려친 가운데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대탕지 온천을 택할 수는 없었다. 양덕 고을엔 사돈이 살아서 날마다 숙사에 출입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여기는 고향 사람들의 내왕도 잦을 뿐더러 간혹 평양이나 성천 등지에서 부녀자들이 찾아오는 중엔 색채에 굶주린 젊은 청년의 눈을 어지럽게 할 위험성도 없지 않아서 나는 이 곳을 집필 장소로 골라집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사돈 한 분과 처음 대탕지 온천을 찾아갔을 때, 활짝 열어 놓은 여탕의 탈의장의 창전(窓前)을 지나치다가 섣불리 두면 있는 부인네의 붉은 몽뚱아리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국 오래간만의 해후를 그대로 보내기 서운하다 하여 백주에 산정에서 무릎을 마주하고 맥주를 나누게까지 되었었는데 이런 상태로 밤이 오고 밤이 가고 하는 동안 내 머리가 평정한 상태에서 집필을 계속할 수 있을런가는 심히 의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본시 전장에 향하는 듯한 각오를 가지고 떠난 길이라 부녀자의 앞에서 도학자적인 태도를 견지할 만한 뱃심은 준비되어 있었으나 궤도를 벗어나서 때로 분마(奔馬)처럼 내달리는 방분(放奔)한 청성(靑星)의 마음을 뉘라서 보장할 수 있을 것이냐. 군자는 위태로운 데 가까이 가지 않음의 의당(宜當)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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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리하여 그 곳서 버스틀 타고 60리를 더 원산 쪽으로 들어간 석탕지 온천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을 붙여 두거니와 양덕 온천이라면 대탕지 온천을 가리킨다. 평원서부선 양덕에서 약 10분 간 산보허(許[허])에 있다. 상세사(詳細事)는 관광협회 발행의 여행안내서나 『조선의 온천』을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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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석탕지(돌탕지)는 같은 양덕 온천 속에 포함은 되지만 그것과는 구별을 세워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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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탕지 욕탕도 편창회사에서 경영을 한다지만 시설은 서울 낡은 목욕탕과 대차 없고 오히려 더러우면 더럽지 깨끗하지는 못하다. 계절이 농번가인 탓도 있지만 욕객은 5, 6명, 남녀 도합 10수 명의 한적한 상태였다. 면민은 무료로 출입한다. 그러니까 회사측에선 오히려 채산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수질이나 수원만은 단연 우수하여 돌틈에서 물이 솟는 못가에 나가 나는 날마다 계란을 삶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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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이의 안내도 있고 하여 나는 양덕서 일박하고 석탕지에 도착한 날 2층이 있는 내지인의 여관에 투숙하였는데 식사 같은 것은 보잘 것이 없고 방도 노래기 들끓고 논밭 속에서는 밤이 새도록 개구리와 울고…… 남포등 밑에 책을 펼쳐놓고 나는 때때로 우심(尤甚)한 고독에 붙들려 있었다. 시골인데 닭도 없고 천어(川魚)도 없고 나는 ‘간즈메’에 진물려 시시로 동민을 찾아 구탕(狗湯)을 먹으러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육도 장유(醬油) 맛이 시원치 못해서 고명이랄 고명이 엇고 소주에 일려가며 참말 음식에서 별반 미각을 탓하지 않는 내가 아니면 가희 즐길 수 없을 그런 정도였으나, 그래도 동리의 청년(그 중에서는 이발사 화물자동차의 운전수와 조수, 불량 기운이 있는 나차른 딸을 가진 파락호 등이 있었다)들과 비오는 밤고개를 넘어 개장과 술에 취해가지고 수심을 부르며 숙사로 돌아오던 정취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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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고 있는 여관은 한때 ‘田の月旅館[전월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달 만큼 논 속에 서 있는 함석지붕의 ‘바라크’같은 집인데 탕지에 오르는 연기 같은 김에 서리운 수풀과 논두렁과 벌탕지(野湯[야탕]) 고개 위에서 돋는 달을 바라보며 개구리의 울음을 듣는 맛은 아무런 데서나 맛볼 수 있는 흥취는 아니었다. 이러한 밤 춘정에 들뜬 청년들은 여관의 계집을 쫓아다니며 맥주를 기울이기에 바쁜 모양이었다. 이발소는 동리의 방송국처럼 되어서 머리가 흐리멍텅할 때 낡은 의자에 누워 면도 하면서 구구한 신문과 잡지에 귀를 기울이고 욕탕에 가서 잔등의 신경통을 터는 맛이 역시 그럴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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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고독을 이기기 힘들 때엔 ‘트럭’을 얻어타고 대탕지로 나가 친구를 찾아서 하룻밤을 주연을 베풀거나 운전대에 올라앉아 수해(樹海)를 달리는 맞도 좋았다. 양덕은 온천 외에 송림이 명물이어서 가을이면 송이가 유명하다. 일전 시골 있는 조카 아이와 양덕 송리라고 푸른 솔잎을 덮고 두렝이에 넣어서 소포로 보내주어 하루저녁 가을 향기를 시식하였는데 지금쯤 양덕 온천엔 송이 따기가 한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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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여장을 꾸려가지고 양덕으로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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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온천을 한탕하고 마음맞는 친구와 부인네들과 쌍을 지어 깊숙이 송림을 헤매이며, 송이 사냥을 하다 돌아와서 저녁 녘에 다시 하루 동안의 피곤을 탕에서 씻은 뒤에 송이볶음을 상에 놓고 따끈히 잘 데운 술잔으로 깊어가는 가을밤을 즐겨볼 것을 상상만이라도 하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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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멧도야지, 꿩의 수렵이 명물이니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양덕이 교통의 편(便)을 얻게 되는 날 나는 전 조선에서 일 위를 점하는 온천이 될 것을 믿어서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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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9년 12월호, ‘온천장 순례기’ 특집)
【원문】양덕(陽德) 온천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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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양덕 온천의 회상 [제목]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9년 [발표]
 
  기행문(紀行文)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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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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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