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양의 고사(古史)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조선 고문화의 원류를 탐색치 않고는 도저히 사(史)의 근거와 사의 진수와 사의 체계와 통지(統志)를 작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고문화를 강구(講究)함에는 먼저 조선 구강(舊疆) 판도 범위부터 획정(劃定)하여야 되리니, 고대 문헌의 고증을 어디서 찾아낼 것이냐.
3
신지(神誌)의 구변진단도(九變震壇圖)가 전하지 못하고 단군(檀君) 계통의 부여(扶餘)가 조업(祖業)을 계승하여 만몽대륙에서 혁혁문화(赫赫文化) 1천년을 발양(發揚)하여 오다가 춘추(春秋) 열국(列國) 시대에 미쳐서 한족(漢族)과 전쟁을 일으켜 혹승혹패(或勝或敗)하며, 장기간에 걸친 전운(戰雲)이 식녕(息寧)의 날이 없더니, 제 환공(齊桓公) 때에 와서는 조선족의 쇠운기라 패적(敗蹟)이 날로 많으매, 만몽(滿蒙) 서남부에 사는 조선족의 근거가 심히 동요하여 영평부(永平府) 이동까지 국역(國域)이 축소되었으며, 그후 진시황(秦始皇)의 동남전쟁(東南戰爭)은 전혀 조선족을 동북으로 구축함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조선·중국의 국계(國界)로 하고, 대공사를 일으켜 만여리로 연장한 것이다.
4
그런 고로 고조선의 문헌 고증은 누십백년 병분(兵焚)에 소실(消失)되고, 또한 조선의 국도(國都)가 적화(敵禍)로 인하여 자주 천사(遷徙)되었으니, 강역의 변축(變縮)함이 더욱 많을지니, 중고에 이르러 우유배(愚儒輩)의 곡해억단(曲解抑斷)이 존화주의(尊華主義)에 맹광(盲狂)하여 단군 강역을 마음대로 줄이고, ‘부여 국도(扶餘國都)’를 되는 대로 천사하여, 심지어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을 백두산(白頭山)이라 하고, 아사달(阿斯達)을 황해도라 하며, 기자(箕子)를 대동강에까지 갖다 묻어놓았으니, 어찌 통한할 바 아니리요.
5
소위 사가(史家)들이 적어놓은 국사(國史)를 보면 붓끝마다 다르며 말끝마다 맞지 아니하여, 비유컨대 군맹(群盲)이 종야(終夜) 길에 헤매며 목적지의 소재를 찾지 못함과 같도다. 만리장성이 우리 조선과 숙명(宿命)이 깊으니만큼 ‘만리장성고(萬里長城考)’는 곧 우리 고강(古疆)을 찾는 데 한 증거가 훌륭하다 하노라.
6
『회남자(淮南子)』가로되, 만리장성을 “北擊遼水[북격요수] 東結朝鮮[동결조선]” 이라 하였으니, 회남자 당시에도 만리장성이 조선과 중국의 국방계(國防界)로 쌓은 것이 명백하니, 장성(長城)을 아는 자는 반드시 고조선을 알 것이다.
7
고구려 개소문(蓋蘇文)이 가로되 “자부여(自扶餘)로 축장성(築長城)하여 남지해(南至海)하니 장천여리(長千餘里)라(此國史上之最長城[차국사상지최장성] ─ 原註[원주]) 하였고, 로마 카이사르(該撒)가 가로되 “因北寇頻逼[인북구빈핍] 築城於萊因河北[축성어래인하북] 其長至數百里[기장지수백리]”라 하니, 이는 서양사상 성지최장자야(城之最長者也)라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북으로 장성을 쌓아 임조(臨洮에 기(起)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니 장(長)이 만여리라 하였으니, 이 곧 세상이 말하는 만리장성이다. 동서 사상(史上)의 최장성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유성이래(有城以來)로 오직 시조 되는 장성의 거벽(巨擘)일 것이다.
8
이제 만리장성의 전기(傳記)를 고찰하건데, 만리장성이 진시황의 창축(創築)한 것이 아니요, 진시황 때에 이르러 고유한 장성을 확대 연장하여 가축(加築)함이며, 또한 장성을 가축함이 진시황뿐 아니라 진시황 이후에도 장성을 수축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대공사를 가져 확축(擴築)하기는 진시황 이상에 출한 자가 없으므로 마침내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되어 만고에 독웅(獨雄)한 것이다.
9
장성의 역사가 심히 회색(晦塞)하여 조(朝)·한(漢) 양국 당시의 국경의 분계임을 명백히 분명키는 어렵도다. 이제 갑·을·병 삼자를 거하건대
10
(갑) 진시황 이전의 장성이니, 『사기(史記)』흉노전(匈奴傳)에 왈 “趙武靈王[조무령왕]……北破林胡[북파림호]·樓煩[누번] 築長城[축장성] 自代幷陰山[자대병음산] 至高闕[지고궐] 爲塞[위새] 而置雲中[이치운중] 鴈門代郡[안문대군]”이라 하였으니 이는 조(趙)의 장성이요, 또 왈 “燕有賢將秦開[연유현장진개] 爲質於胡胡甚信之[위질어호호심신지] 歸而襲破東胡[귀이습파동호] 胡却千餘里[호각천여리]……燕亦築長城[연역축장성] 自造陽[자조양] 至襄平[지양평] 置上谷[치상곡]·漁陽[어양]·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遼東郡[요동군] 以拒胡[이거호]”라 하였으니, 이는 연(燕)의 장성이요, “秦昭王時[진소왕시] 殺義渠戎王[살의거융왕]…… 秦有隴西北地上郡[진유롱서북지상군] 築長城[축장성] 以拒胡[이거호]”라 하였으니, 이는 진시황 이전의 장성이라 한다.
11
(을) 진시황 이후의 장성을 말하건대, 『북제서(北齊書)』에 왈 “顯祖[현조]〔文宣帝[문선제]〕……天保六年[천보육년]……發夫一百八十萬人[발부일백팔십만인] 築長城[축장성] 自幽州北夏口[자유주북하구] 西至恒州[서지항주] 九百餘里[구백여리]”, “七年[칠년]……自西河總秦戍[자서하총진수] 築長城[축장성] 東至於海[동지어해]”, “後主大統六年[후주대통육년] 自庫堆[자고퇴] 東距海[동거해] 隨山屈曲二千餘里[수산굴곡이천여리] 塹山築城 [참산축성]”이라 하였으니 이는 고제(高齊)의 장성이요, 『수서(隋書)』에 왈 “文帝[문제] 開皇六年二月[개황육년이월]……發丁男十一萬[발정남십일만] 修築長城[수축장성]”, “七年二月[칠년이월]……發丁男十萬餘[발정남십만여] 修築長城[수축장성]”이라 하였으니 이는 수(隋)의 장성이요, 『열하일기(熱河日記)』에 “同徐中山[동서중산] 築長城[축장성]”이라 하였으니 이는 명(明)의 장성이니, 진시황 이후의 장성이 또한 이러하다.
12
(병) 진시황의 장성은, 『사기』진본기(秦本紀)에 “始皇[시황]……三十二年[삼십이년]……燕人盧生[연인노생] 使入海[사입해] 還[환]……夷天錄圖書[이천록도서] 日亡秦者[일망진자] 胡也[호야]……三十三年[삼십삼년]…… 又使蒙恬[우사몽염] 渡河[도하] 取高闕[취고궐] 陶山北假中[도산북가중] 築亭障[축정장]”, “三十四年[삼십사년] 適治獄吏不直者[적치옥리불직자] 築長城[축장성]”, 흉노전(匈奴傳)에 왈 “秦滅六國[진멸육국] 而始皇帝[이시황제] 使蒙恬[사몽념] 將十萬之衆[장십만지중] 北擊胡[북격호] 悉收河[실수하](白羊河[백양하])南地[남지] 因河爲塞[인하위새] 築四十四城[축사십사성] 臨河[임하] 徙適戍以充之[사적수이충지] 以通直道[이통직도] 自九原[자구원] 至雲陽[지운양] 因邊山險[인변산험] 壍谿谷[참계곡] 可繕者治之[가선자치지] 起臨洮기임조] 至遼東[지요동] 萬餘里[만여리]”라 하고, 몽념전에 왈 “起臨洮기임조] 至遼東[지요동] 延袤萬餘里[연무만여리]”라 하였으니 이는 곧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니라.
13
이상의 소술(所述)은 중국 연대의 장성의 약사(略史)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3개 문제가 복유(復有)하니, ① 진시황의 장성과 연(燕)·조(趙)와 및 소왕(昭王)의 구지(舊址)를 기인하여 계수(繼修)·증축·확대함이냐, 또한 척지(拓地)를 광원(廣遠)히 하고 더욱이 북역(北域)에 이축(移築)함이냐, ② 진시황 이후의 장성은 다 진의 구지를 수축할 뿐이었느냐, 혹 내퇴외진(內退外進)하여 진의 성기(城基)를 변천한 것이냐, ③ 그 서계(西界)는 본래 임조(臨洮嘉裕關[가유관] ─ 原註[원주])에서 기점하였으나 그 동계는 다못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요동은 어떤 지계(地界)까지를 지칭함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14
『위서(魏書』장손진전(長孫陳傳)을 의거하건대 진(陳)의 “爲羽林郞[위우림랑] 征和龍[정화룡] 賊自西門出[적자서문출] 將犯外圍[장범외위] 陳擊退之[진격퇴지] 追至長城下[추지장성하]”라 하니, 이는 장성이 용성(龍城) 밖에 있는 것이 명료하고, 두우(杜佑) 『통전(通典)』에 왈 “蘇州[소주] 北至廢長城塞[북지폐장성새] 二百五十里[이백오십리]”라 하고, 박연암(朴燕巖)이 가로되 “산해관(山海關)의 장성(長城)은 명시(明時) 서달(徐達)의 소축(所築)” 이라 하니 가히 탁견이 되나니, 이는 제1 문제가 해결됨이오. 진황 이후의 장성이 만일 진황의 건축의 구지를 잉용(仍用)치 아니하였다면 진황의 장성이 한번 다시 연·조 구허(舊墟)만을 한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15
대개 국가의 성쇠 강약을 따라 가히 외지를 원척(遠拓)할 수도 있고 가히 국방을 축단(縮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니, 그런 고로 흉노전에 가로되, “可繕者[가선자] 治之[치지] 不可繕者[불가선자] 別築之[별축지]”라 함이 장성 변이의 특증(特證)될 것이니, 제2 의 문제가 해명되었고, 제3 문제는 요동 문제로 인한 곤란이니, 요동 문제를 말하려 함은 반드시 2개 문제가 제출될 것이다. ① 당시 조선의 국정과 국경 범위 여하요, ② 연(燕)의 척지(拓地)의 원근 여하이다.
16
『기년아람(紀年兒覽)』『서곽잡록(西郭雜錄)』등서로 보건대 모용외(慕容廆)의 부여 침입과 이적(李勣)의 평양 입구가 조선 고사를 일거(一炬)에 회신(灰燼)하였다 하였고, 마사(馬史)에 고(考)하면 『육국사기(六國史記)』가 “燕史[연사] 在內[재내] 皆爲秦始皇燒之[개위진시황소지]”라 하니, 조선과 연의 고사를 고거할 처가 없어 제2 문제의 해결이 심히 곤란하도다.
17
그러나 이제 단란여신(斷爛餘燼)한 중에서 고사의 편린을 채습(採拾)하리라. 『문헌비고』왈, “孤竹[고죽](今[금] 永平府[영평부]) 春秋時[춘추시] 爲朝鮮所有[위조선소유]”라 하였으니, 이는 어환(魚豢 『위략(魏略)』의 말한 바라. 『위략』에 왈 “朝鮮[조선] 見燕僭稱王欲與伐燕[견연참칭왕욕여벌연](中略[중략]) 燕長秦開[연장진개] 詐而爲質於朝鮮[사이위질어조선] 朝鮮甚信之[조선심신지] 秦開歸言於燕[진개귀언어연] 伐朝鮮拓地二千餘里[벌조선척지이천여리] 至滿潘汗爲界[지만반한위계] 朝鮮遂弱[조선수약]”(大要[대요] ─ 原註[원주]), 사마씨 『사기』에 왈, “秦東胡[진동호] 拓地千餘里[척지천여리]”라 하였으니, 어환이 그때 누백년 후의 사람으로서 무엇을 고거하여 ‘동호(東胡)’를 고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천리를 고쳐서 이천리라 하며, 또한 어찌하여 그 소척(所拓)의 땅이 만반한(滿潘汗)에 이른 것을 알았는가. 가로되 이 무리는 위의 관구검의 일류라 하리니, 『삼국사기』와 『삼국지』를 안(按)하면 『삼국사기』는 우리 사(史)요, 『삼국지』는 곧 중국의 촉(蜀)·오(吳)·위(魏) 삼국사이다.
18
“曹魏[조위] 大將毌丘儉[대장관구검] 侵高句麗[침고구려] 入丸都城[입환도성]” 운운은, 대개 환도성(丸都城)의 소장한 고구려 사책이 관구검의 손에 들어가 중국에 유전(遺傳)함이 많은 고로 중국 고인이 조선의 사사(史를 안다는 事) 자는 위의 사관에 지날 자가 없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이름을 『위략』에서 시견(始見)함이 아니냐. 진수(陳壽)가 위에 사(仕)할 때의 소작(所作)을 가져 『삼국유사』가 많이 인용한 고로 기부(箕否)·기준(箕準)의 일을 또한 『위략』에서 보게 되었고, 부여의 풍속과 삼한 78국의 명칭을 『삼국지』에서 시견케 되었나니, 이는 진수가 또한 진(晋)에 사(仕)하여 저작한 바라. 『후한서』에 비록 삼한 78국(三韓七十八國)의 명칭을 기록하였으나, 그러한 『후한서』는 범엽(范曄)의 소작이니, 곧 진수의 후인(後人)이다. 진개(秦開)가 조선의 토지를 침탈한 사실은 또한 『위략』을 근거한 것일 것이다.
19
선유들이 영평(永平) 이서는 연(燕)이요, 영평 이동은 조선이라 하여 왔다. 진개의 소척한 지계 2천여리라 할진대 그 족적이 반드시 압록강을 지났을지니, 이율곡(李栗谷)은 태원(太遠)하게 2천여리를 1천여리로 고치고, 정다산(丁茶山)은 태근(太近)하게 2천여리로 바르다 하여, 만반한(滿潘汗)이 대동강 이남에 있다고 망증(妄證)하였으니, 오호라. 어찌 그리 편견의 고집(考執)을 전하였는가. 고구려 당시에도 항상 봉천(奉天)을 거할(據割)하고 직례(直隷)의 북반부와 몽고 동부를 영유한 고로, 사책에 자주 태원(太原: 今[금] 山西省[산서성] ─ 原註[운주])을 침입하였은즉 이는 동몽고로부터 치병남하(馳兵南下)하던 형세를 말함이다.
20
당인(唐人) 번심(樊深)의 고구려성시(高句麗城詩)에 왈 “僻地城門啓[벽지성문계] 空林館堞長[공림관첩장] 居然朝市變[거연조시변] 無復管絃鏘무복관현장]”이라 하여, 조선이 동몽고로부터 남하하여 이땅에 의거하고 축성개도(築城開都)함을 이름이요, 연으로부터 싸우던 자취를 음영함이라, 조선의 당시 용병(用兵)은 영평으로부터 연경 이북에 이르고, 북으로 흉노(匈奴:今[금] 蒙古地[몽고지] ─ 原註[원주])를 접하고 남으로 상위(上爲:今[금] 宣化府[선화부] ─ 原註[원주])에 미쳤다.
21
연의 조선을 반공(反攻)함을 보면 “北攻上谷[북공상곡] 南襲孤竹[남습고죽](今[금] 永平府[영평부]) 而至遼河[이지요하]”, 그러므로 『사기』에 왈 “燕將秦開[연장진개] 伐東胡[벌동호] 拓地[척지]”, “伐胡[벌호] 自造陽[자조양] 至襄平築長城[지양평축장성] 置上谷[치상곡]·漁陽[어양]·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遼東等郡[요동등군]”이라 하였으니, 이를 상고하면 조선이 연과 접경하였던 대개를 볼 것이다. 상위(上爲)는 곧 선화부(宣化府)요, 어양(漁陽)은 지금 순천부(順天府)의 북부요, 우북평(右北平)은 지금 영평부(永平府)의 북부요, 요서(遼西)·요동(遼東)은 지금 봉천의 서반부의 북부이다. 『위량』이 만반한(滿潘汗)이라 함은 곧 한 무제의 분설(分設)한 문(汶)·반한(潘汗) 2현이니, 그 이름을 『한서』요동군지(遼東郡志)에 명재(明載)하니, 즉 지금 개평(蓋平)·해성(海城) 등지다. ‘拓地二千餘里[척지이천여리]’라 함은 상위(上爲:今[금] 宣化府[선화부] ─ 原註[원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 기정(其程)을 재절(再折)하여 남으로 개평·해성까지 그 이수가 2천여리라. 그런즉 연군(燕郡)의 요동과 秦[진]의 장성 소지(所至)한 요동을 가히 알 것이니, 제3의 문제도 해석될 것이다.
22
『진서』태강지지(太康地志)에 가로되 “낙랑(樂浪) 수성현(遂成縣) 갈석산(碣石山)이 장성(長城)이 소기(所起)한 지점”이라 하였으니, 이 일단이 독사자의 의점(疑點)을 일으킬 것이다. 낙랑은 곧 평양이요 수성현은 평양 남에 있으니(廣寧[광영] 金州[금주]의 古平壤[고평양]을 운함이요, 즉 지금 평안도의 平壤[평양]을 말함이 아니다. ─ 原註[원주]), 진의 장성이 멀리 평양을 지나갔다. 문법으로 보면 시점을 기(起)라 하고 종점을 지(至)라 하나니, 진시황 장성의 시기점이 임조(臨洮이었나니, 어찌하여 낙랑으로 소기지(所起地)라 적었는가. 『북사』와 『수서』를 상고하면 위(魏)와 수(隋)가 일찍 상위에 있어서 군(郡)을 두어 낙랑이라 하고, 현을 두어 수성(遂成)이라 이름하였으니, 연의 장성은 상위곡(上爲谷)에 기한 것이 명백하다. 『진서』의 서재(書載)가 이를 가리킴이다. 『진서』작자 당 태종이 수말(隋末)에 생하여 진양(晋陽)에 가(家)하매, 항상 이를 보고 연의 장성을 같이 말함이다.
23
그러면 갈석산(碣石山)은 어찌함이뇨. 우공(禹貢) 기주(冀州)가 ‘來右碣石[내우갈석]’이라 하고 그 아래 또 이르기를 ‘太行王屋[태행왕옥] 至於碣石[지어갈석]’이라 하니, 이는 일시에 두 갈석이 있는 연고라. 『신당서』에 “平州石城[평주석성]에 有碣石山[유갈석산]”이라 하고, “營州柳成[영주유성]에 亦有碣石山[역유갈석산]”이라 하니, 당시에 대개 중석(衆石)이 비갈(碑碣)같이 선 것이면 갈석산이라 이름함도 그럴 듯하나니, 어찌 상곡인들 갈석산이 없으리요. 일인 역사학잡지에 감씨(甘氏)·박씨(博氏)가 『진서』에 낙랑·평양과 장성이 진시황 소축임을 말함은 적확한 참고를 가하지 못하여 전인의 잘못을 그대로 써서 사실과 틀림이 많으니라.
24
연의 장성이 조선과 여하한 관계되었음은 이미 상술하였거니와, 연의 관계는 진번(眞蕃)·낙랑(樂浪) 양조의 일이요 조(趙)의 관계는 부여조선(扶餘朝鮮) 때의 일이니, 부여조선이 삼조선 중에 최대국으로서 지나와 교통을 선개(先開)하였나니, 고로 순본기(舜本紀)에 가로되 ‘北山戎[북산융] 發息愼[발식신]’이라 하니, 발식신(發息愼)은 부여조선의 오음(誤音)이다. 관자(管子) 왈, ‘八千里之[팔천리지] 發朝鮮[발조선]’이라 하고 또 ‘發朝鮮之文皮[발조선지문피]’라 하였으니, 발조선은 또한 부여조선의 촉음(促音)이다. 『사기』에 예(濊)·맥(貊)·조선(朝鮮) 혹은 단칭(但稱) 예라 하며 맥이라 하니, 맥이라 함은 그 문피(文皮)를 의복(衣服)함에 득명함이다. 예는 곧 부여의 촉음이니, 기실은 다 동일하다.
25
조(趙)가 부여조선으로 관계되기는 조양자(趙襄子)로부터서니, 흉노전에 왈 “趙襄子[조양자]가 破幷代[파병대] 臨胡貊[임호맥]”이라 하였으니, 그 후에 부여의 속민 위림(魏林)·누번(樓煩)이 다 강성하여 조의 변경이 다사하였다. 조 무령왕(武靈王)이 복(服)을 변하고 기사(騎射)를 연습하여 부여로 더불어 자주 싸우며 장성을 쌓아서 방어하였으니, 이는 조의 장성은 부여조선을 막기 위하여 쌓은 바이다. 『사기』조세가(趙世家)에 부여를 동호(東胡)라 하였고, 흉노전에는 낙랑(樂浪)을 동호라 하였다. 조의 말엽에 이목(李牧)이 북변의 양장(良將)으로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파하고 달아났다 하였으니, 다못 장성 이내에만 방어하였을 뿐이요 능히 장성 이외에 진출치 못함이니라. 조(趙)가 이미 망하고, 부여 더욱 강성하여지매 흉노·선우(單于)·묵돌(冒頓)이 항상 미인·양마를 부여에 진공(進貢)하였다 하며, 『사기』에 묵돌의 지광(地廣)을 서하여 왈 “自上谷[자상곡]으로 東接濊貊朝鮮[동접예맥조선]”이라 하였으니, 그때는 부여조선이 묵돌에 패한 후임이 명백하다. 그런즉 조의 장성은 전혀 조선을 위하여 쌓음이요, 시황의 장성이 상곡 이래까지는 또한 부여조선을 방어함이니라.
26
부여조선이 연으로 더불어 혐원(嫌怨)을 얽었을 뿐만 아니라, 부여가 자주 연을 정벌하였으므로 관중(管仲)이 구합제후(九合諸侯)의 귀중(歸衆)을 독솔(督率)하여 고죽(孤竹)을 파함이 그것이다. 수백년간에 부여가 삼조선의 맹주가 되어 중국을 침략하다가 연·조가 망한 뒤에 또한 망하였으니, 오호라, 그간에 신지(神誌)·고흥지륜(高興之倫)의 그 전말을 기록한 바 있었나니, 야심 많은 군주와 날완(辣腕)한 장상(將相)이며, 충의강개한 장사와 유악밀물(帷幄密勿)하던 모신(謀臣)들의 가가가무(可歌可舞) 가곡가경(可哭可驚)할 만한 사실이 많았으나, 조선이 이미 판탕(板蕩)되고 고서는 일전(一傳)이 없었으며,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가 있으나 전혀 ‘존화양이(尊華攘夷)’로 배외적 사상을 취하여 사례(史例)를 문란하였으니, 도리어 풀루타크(布魯帶克)의 인방 정형을 상찰(詳察)하고 그 전말을 구재(具載)함만 못하도다. 마사(馬史)는 그 1, 2차 인방과 접촉된 사실을 기록한 외에 다만 자기 지나인의 자존 호기심의 완상물과 같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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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의 이름을 그릇하여 수국(數國)을 만들었으니, 숙신(肅愼) · 조선(朝鮮) · 부여(扶餘) · 예(濊) · 동호(東胡) 등의 국명을 그릇함이며, 혹 ‘갑’국의 사실을 ‘을’국의 일로 기록하니, 호맥(胡貊)의 일을 다 흉노전에 기록한 등이다. 전쟁을 기록하매 승패를 전도하고 풍속을 논한즉 그 미악을 변란하였나니, 국도·인명의 가고할 자료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국제의 교섭 내왕한 일을 일편의 기록이 부존(不存)하였으니, 실로 개탄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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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선 국경 소지(所至)와 연·조·진의 장성을 쌓은 원인이 흉노를 위함보다 흉노 이전에 조(朝)·한(漢) 양족의 관계되었음을 비록 명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만리장성을 연구함에 있어서 조선 고강(古疆)이 얼마나 크며, 조선의 강성함이 어떤 범위까지 발전되었던 것을 반의 반을 알아낼 수 있으며, 만리장성이 동양사 연구상에 있어서 실로 위대한 실물의 참고됨을 확언하리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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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萬里長城)이 동양사의 최중(最重)한 비장(祕藏)의 보고요, 건축 상의 위관(偉觀)만 될 뿐 아니라 동서양에 역사적 영향이 지대하다 하노니, 장성을 쌓기 이전에 감(鑑)하여 부여·흉노 제족이 장궁경노(長弓勁弩)로 편마남하(鞭馬南下)하여 한족(漢族)을 노살(虜殺)하며, 재곡을 약탈하여 심하면 토지를 할거(割據)하고 자립국을 건설하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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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春秋傳)』『사기』에 보인 곤이(昆夷)·서이(徐夷)·내이(萊夷)·적적(赤狄)·중산(中山) 등이 지나의 본토 내에 있어서 건국 칭왕하며 횡행자자(橫行自恣)하였고, 장성을 기축(旣築)한 후로는 동북의 대국인 부여로 고토에 환(還)하여 다시 남하의 형세를 취하지 못하고 몽고의 흉노족도 일지(一枝)로 서구에 찬입(竄入)하여 고트족(峨特族)과 침요(侵擾)를 일으켜 마침내 서양사상의 민족적 대천동(大遷動)을 일으켰나니, 성로마(聖羅馬)의 몰락과 신문예의 발생이 만리장성 유무에 관하여 국제문화 소장(消長)된 영향이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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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일지가 또한 동으로 부여에 쟁항(爭抗)한 지 누십년에, 마침내 부여족도 천동(遷動)되어 동으로 사(徙)하여 옥저(沃沮)·진번(眞蕃)이라 혹 칭하며, 남으로 천(遷)하여 진한육부(辰韓六部)가 되었나니, 그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독사자가 다만 서구의 민족 대천동만 알고 동서에 또한 동일한 현상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함을 개탄하며, 우뚝한 만리장성을 바라볼 때마다 심각한 느낌을 금치 못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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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전성시대(全盛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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