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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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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1
신채호
1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2
우리가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를 읽을 때에 따라서 생기는 문제가, 제(1)은 언제부터 전설 시대를 지나 기록이 있었던가 하며, 제(2)는 기록이 있었다면 무슨 문자로 되었던가?라.
 
3
어떤 이들은 수두(蘇塗[소도])시대에 우리 글이 있었다 하나, 이는 아직 일종의 의문뿐이요, 아무 증거가 없으니, 그 유무를 억단(臆斷)할 수 없거니와 사책(史册)에 보인 바로서 말하자면, 우리의 쓰는 문자의 변천을 3시기에 나눌 수 있으니, 제1기의 이두문, 제2기의 구결문, 제3기의 언문이라. 3기 문자의 자형이 아래와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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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두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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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賜[진사] 白是[백시] 爲良結[위양결] 望良白去乎[망양백거호] 敎是臥乎在亦[교시와호재역] 岐等如使內如乎[기등여사내여호]”의 등이니, 이는 〈유서필지 이두휘편(儒胥必知吏讀彙編)〉에 게재한 바, 그 독법은 이러하저 ‘(1) 나아리 (2) 삷이 (3) 하올아저 (4) 바라올거온 (5) 이시누온견이여 (6) 가로려 바라다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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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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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〇〇〇〇”의 등이니, “〇”는 ‘위야(爲也)’, “〇”는 ‘위며(爲㫆)’ “〇〇〇”는 ‘이노다(伊奴多)’, “〇〇〇”은 ‘이애비(伊厓飛)’, “〇〇〇〇”는 ‘호은등을노(乎隱等乙奴)’, “〇〇〇〇”은 ‘이애마은(伊厓馬隱)’의 감획(減畫)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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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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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의 등이니, 상 11자는 모음이오. 하 14자는 자음이라. 언문은 이조 세종대왕의 저작으로 금일에 쓰는 글이라, 본편의 범위가 아니므로, 이는 후일에 양(讓)하고 이제 이두와 구결을 논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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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자가 이같이 3기의 변천이 있으나, 그러나 국문이 난 뒤에 구결이 폐지되고, 구결이 난 뒤에 이두문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거금(距今) 불과 30년 전까지 이두와 구결이 병존하여, 논어나 맹자나 기타 한문책에 토를 달려면 구결을 쓰고, 관부(官府)에 올리는 정소(呈訴) 문자에는 또한 이두를 섞던 바라. 금인(今人)이 설총이 이두문을 지었다 하나 이는 완전한 망설(妄說)이라. 양주 북한산 위에 선 진흥대왕 순수비에 이두문으로 쓴 글월이 있으니, 진흥대왕은 설총보다 100여 년 이전의 사람인즉, 이두문이 설총에서 비롯하지 않음을 가증(可證)할지라.
 
11
《삼국사기》 설총전에 가로되, “聰以方言讀音(音[음] 두)[총이방언독]九經訓導後生至今學者宗之[구경훈도후생지금학자종지]”라 하고, 박세채(朴世采)가 가로되, “經書口訣釋義[경서구결석의]……始發於薛總[시발어설총] 成於鄭夢周·權近[성어정몽주·권근]”이라 하니, 설총은 구결(口訣)로써 구경(九經)을 독(讀)한 자요, 이두로써 한 자가 아니니라.
 
12
그러나 구결(口訣)을 곧 설총의 작이라 함은 마치 광개토대왕비의 ‘躬率水軍[궁솔수군]’에 거(據)하여 수군이 곧 ‘광개토왕 창설이라’하며, 개로태왕(蓋鹵太王) 본기의 ‘作稻田[작도전]’에 거하여 도전(稻田)이 곧 ‘개로왕의 시작이라’함과 같은 속단이라. 설총이 구결로써 구경을 독(讀)함이요, 구결을 작(作)함이 아니나, 여하간 구결이 설총의 때에 이미 존재함은 확증할지니라.
 
13
그러면 이두와 구결의 작자가 하시(何時) 하인(何人)이뇨? 대개 무슨 창작이든지 후인이 그 이(利)를 향(享)하고 그 본(本)을 망(忘)하여 작자의 성명을 전치 않은 것이 고사상에 허다하니, 금일 이두와 구결의 작자가 누구임을 알 길이 없으나, 그러나 이두문은 한자의 음 혹 의를 빌려서 국자(國字)로 만들어 쓴 것이니, 이것이 신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삼한과 삼국이 다 행용(行用)한 자라.
 
14
《삼한전(三韓傳)》이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인 인명·관명·지명을 보면 이두의 사용함이 오래됨을 볼지니, ‘毘處[비처]’‘壬乞[임걸]’‘異斯夫[이사부]’‘居柒夫[거칠부]’등은 한자의 음역(音譯)이거니와, ‘炤智[소지]’‘王斤[왕근]’‘苔宗[태종]’‘荒宗[황종]’등은 그 이두이니, 현 언문으로 쓰면 ‘비치’‘님건’‘잇우’‘거칠우’이며, ‘舒發翰[서발한](舒弗邯[서불감])’‘臣遣智[신견지]’‘破彌干[파미간]’ 등은 한자의 음역이거니와 ‘角干[각간]’‘太太兄[태태형](鎭大兄[진대형] 頭大兄[두대형] 등 同[동])’‘波珍干[파진간]’등은 그 이두이니, 현 언문으로 쓰면 ‘쇠불한’‘신건치’‘바며한’이며, 지명의 ‘達[달]’은 ‘대’니 산(山)의 칭이요, ‘達乙[달을]’은 ‘달’이니 고(高)의 칭이요, ‘波衣[파의]’는 ‘바위’니 암(巖)의 칭이요, ‘耶[야]’‘那[나]’‘壤[양]’‘良[양]’‘奴[노]’‘羅[라]’는 다 ‘래’니 천(川)의 칭이요, ‘伐[벌]’‘火[화]’‘卑離[비리]’‘夫里[부리]’‘不[불]’‘發[발]’ 혹은 ‘벌’이니 야(野)의 칭이니, 삼국 초엽·중엽에 이두문으로 온갖 것을 다 기록할 수 있게 된 증거라.
 
15
이두문은 후세에 서리(胥吏)들이 씀으로 칭한 자니, 신라에서는 향서라 하고, 백제에서는 혹 가명(假名)이라 칭하였던 듯 하도다. 일인(본년 북경대학에서 구연한 금서용(今西龍) 같은 자)이 혹 ‘한자에서 가차(假借)하여 지은 일본의 가명이 원래 여진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오고,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왔다’하나,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옴’은 확실하거니와,
 
16
‘여진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왔다’함은 그 조손(祖孫)을 도환(倒換)하는 자라.
 
17
여진자(女眞字)는 《금사열전(金史列傳)》에 가로되, “女眞初無文字[여진초무문자] 及破遼獲契丹[급파요획계단] 漢人始通契丹漢字[한인시통계단한자]……完諺希尹[완언희윤] 乃倣契丹字[내방계단자] 製女眞字[제여진자]” 라 하니, 완언희윤(完諺希尹)은 금태종 때의 사람인즉, 여진자의 제작이 설총의 구결 석의 보다도 3, 4백 년 후인즉, 이두보다 더욱 뒤 됨을 알지니, 어찌 ‘여진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왔다’하리요?
 
18
《책부통략(策府統略)》에 따르면 ‘역대(중국만을 가리킴) 제왕이 한자 이외에 따로 문자를 지은 자가 遼[요]·金[금]·元[원]·淸[청] 4대니, 청은 원에 방(倣)하고, 원은 금에 방하고, 금은 요에 방하였다’하니, 그러나 이것이 일계(一系)가 아니요 양계니, (갑) 요(遼)의 거란자와 금(金)의 여진자가 일계(一系)요, (을) 원의 몽고자(고려사에 외오아자(畏吾兒字))와 청의 만주자가 또 일계니, 청의 만주자는 원의 몽고자에 의방(依倣)하였거니와, 몽고자는 원세조 홀필열(忽必烈)의 제사(帝師) 팔사파(八思巴)가 서장자(西藏字)를 의방하여 지은 것이요, 금의 여진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여진자는 전술한 금사(金史)에 보인 바같이 거란자를 의방한 것인데, 서장자(西藏字)는 범자(梵字)에서 나온 것이요, 거란자는 한자의 음을 가차한 것이니, 갑·을 양계의 자가 다 음자이나, 그 출처의 연원(淵源)이 이같이 현수(懸殊)하니라.
 
19
당시 거란과 여진은 목축의 만족(蠻族)이었나니, 여진은 거란의 음자를 보고 그 자형의 대략이나 개변하여 여진의 어음에 맞추어 쓰기가 좀 용이하였으려니와, 거란은 어떻게 그리고 신속하게 중국의 형자(形字)를 거란의 음자(音字)로 만들었느뇨.
 
20
명인 도종의(明人陶宗儀)의 《서사요회(書史要會)》에는, 거란이 한인(漢人)을 많이 취용하며 한인이 예서(隸書)의 자의 반편(半片)을 떼어 거란자를 제하였다 하나, 이는 후인이 거란의 자형을 보고 상상으로 추단(推斷)함이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라.
 
21
안(按)컨대 설총은 신라 문무 양대왕의 때인데, 이때가 발해 태조 대조영(大祚榮)과 동시대이니, 신라가 이때에 이두가 변하여 구결이 되었은 즉, 발해도 또한 동일한 단계에 있을지라. 대조영 이후 2백여 년 발해의 문명이 날로 진보하여 그 문물 제도가 찬란하였으므로, 거란 태조가 발해를 멸하고, 이를 세수(世讐)로 배척하였으나, 그 관제를 모방하여 오경관제가 거의 발해의 것을 모본(模本)하였은즉, 그 소위 거란자도 또한 발해의 구결을 의방함이 무의(無疑)하도다.
 
22
거란자와 여진자가 다 멸망하였으나, 청의 살영액(薩英額)의 《길림외기(吉林外紀)》에 보인 득승타송(得勝陀頌)의 여진자가 125자요, 《요사습유(遼史拾遺)》에 보인 거란자가 5자니, 아래에 게재하노라.
 
 
23
「원문내용참조」
 
 
24
우리의 구결은 오직 근세에 한문책에 달아 온, 토만 남고 독립으로 쓰던 글은 하나도 후세에 전한 것이 없으나, 전술한 “〇〇〇”등이 그 유형(遺型)됨이 명백하니, 삼국·동북국시대에 이것으로 문화의 이기를 삼아 동으로 일본을 이끌며, 서로 거란에 전하여 여진에까지 상속됨을 상상할지니라.
 
25
이두와 구결의 발달 및 전포(傳布)된 역사는 전기와 같거니와, 이것으로써 저술한 것이 무엇 무엇이뇨?
 
26
《삼국유사》에 신라의 시가(이두로 기록한 자)를 찬(贊)하여 가로되,
 
27
“영재가 노래를 지어 적(賊)을 교화하며, 맹아(盲兒)가 노래를 지어 안(眼)을 뜨며, 신충이 가를 붙여 백수(栢樹)를 마르게 하며, 처용이 노래를 주(奏)하여 역신을 물리었다”, “왕왕(往往) 천지와 귀신을 감동하였다”
 
28
하여, 그 시가에 대한 찬탄은 이 같으나, 다만 그 적은 시가가 겨우 10여 수(《삼국유사》를 본 지가 오래이므로, 그 실수(實數)를 기억하지 못함)뿐이요, 10여 수도 수백 년래 이두문(《유서필지(儒胥必知)》에 보인 한문토로 쓴 이두문은 제하고)의 해독자가 없어 그 시가의 의의를 모르는 동시에, 그 내용의 가치 여하를 거의 알길이 끊어졌으니, 어찌 천만유감(千萬遺憾)이 아니뇨.
 
29
저자가 《삼국유사》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참고하여 해석한 이두문으로 기록한 처용가의 일 수를 여기(玆[자])에 소개하리라.
 
30
《삼국유사》에 처용의 사적과 그 가(歌)를 기록하여 가로되, 신라 제49세 헌강대왕 때에 경사(京師)로부터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담장과 집이 이어졌으며, 한 집도 초가가 없었으며, 생가(笙歌)가 도로에 끊이지 않고 풍우가 사시에 조순(調順)한지라. 이에 대왕이 개운포(울산군에 있음)에 유행(遊幸)하여 장차 환가(還駕)하려 할새, 홀연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대왕이 경괴(驚怪)하여 일관(日官)에게 물은즉, “이는 동해용의 짓이니 승사(勝事)를 행함이 가하다”하거늘, 이에 영(令)을 위하여 불사를 창(創)하니, 운무(雲霧)가 개제(開霽)하며 용의 칠자(七子)가 가전(駕前)에 나타나 덕을 찬하며 악을 연주하더라. 대왕이 그 일자(一子)를 데리고 경사에 들어와 왕정을 보좌케 하고 이름을 처용이라 사(賜)하며 미녀로써 처를 삼게 하더니, 역신이 그 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인형(人形)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들어가 동숙하거늘, 처용이 들어와 보고 춤추며 노래하고 나오는데, 그 노래가 아래와 같으니
 
 
31
東京明期月良[동경명기월량]
32
夜入遊行如可[야입유행여가]
33
入良沙寢矣見昆[입량사침의견곤]
34
脚烏伊四是良羅[각오이사시량라]
35
二肹隱吾下於叱古[이힐은어하어질고]
36
二肹隱誰支下焉古[이힐은수지하언고]
37
本矣吾下是如馬隱[본의오하시여마은]
38
奪叱良乙何如爲理古[탈질양을하여위이고]
 
 
39
《악학궤범》에 게재된 〈처용가〉는 이와 다를 뿐더러 그 구절도 이보다 많아 아래와 같으니,
 
 
40
(前腔[전강]) 신라 성대(新羅盛代) 밝은 성대의 천하태평(天下太平)은 나후(羅候)의 덕(德) 처용(處容)아비여 이로써 인생에 늘 말씀 안 하실 것 같으면 이로써 인생에 늘 말씀 안 하실 것 같으면
41
(附葉[부엽])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일시 소멸하도다
42
(中葉[중엽]) 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43
(부엽) 머리에 가득 꽃을 꽂아 기울어진 머리에
44
(小葉[소엽]) 아아 수명(壽命) 장원(長遠)하시어 넓으신 이마에
45
(後腔[후강]) 산 모양 비슷한 무성하신 눈썹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시어 원만하신 눈에
46
(부엽) 뜰에 가득한 풍악소리에 우글어진 귀에
47
(중엽) 홍도화(紅桃花)같이 붉으신 뺨에
48
(부엽) 오향(五香) 맡으시어 우묵한 코에
49
(소엽) 아! 천금(千金) 먹으시어 넓으신 입에
50
(大葉[대엽]) 백옥유리(白玉琉璃)같이 흰 잇빨에 인찬복성(人讚福盛)하시어 내미신 턱에 칠보(七寶) 장식 겨워서 숙어진 어깨에 길경(吉慶)자락 겨워서 늘어진 소매자락에
51
(부엽) 슬기를 모아 유덕(有德)하신 가슴에
52
(중엽) 복과 지혜가 다 넉넉하여 불룩한 배에 홍정(紅鞓) 겨워서 굽어진 허리에
53
(부엽) 태평성대하여 길어진 다리에
54
(소엽) 아, 계면(界面) 도시어 넓은 발에
55
(전강) 누가 지어 세웠느뇨? 누가 지어 세웠느뇨?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56
(부엽) 처용 아비를 누가 지어 세웠느뇨?
57
(중엽) 많고도 많은 사람들이여
58
(부엽) 십이제국(十二諸國) 모이어 지어 세운
59
(소엽) 아! 처용 아비를 많고도 많은 사람들이여
60
(후강) 버찌야, 오얏아, 녹리(綠李)야 빨리 나와 내 신코를 매어라
61
(부엽) 아니 곧 매면 나올 것이, 궂은 말
62
(중엽) 동경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63
(부엽)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64
(소엽) 아!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65
(대엽) 이런 때에 처용 아비가 보시면 열병신(熱病神)이야 횟감이로다 천금을 주랴, 처용 아비야 칠보를 주랴, 처용(處容) 아비야
66
(부엽)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신 잡아 날 주소서
67
(중엽) 산이여 들이여 천 리 밖에
68
(부엽) 처용아비를 피하여 갈지어다
69
(소엽) 아! 열병대신(熱病大神)의 발원(發願)이로다
 
 
70
상술한 《삼국유사》와 《악학궤범》에 보인 두 〈처용가〉가 〈처용가〉란 가명은 같으나 그 내용은 같지 않으니, 전자는 처용이 그 처가 간부와 간통함을 목격하고 지은 노래니, 그 역신이라 함은 간부(奸夫)의 사장(詐裝)이거나 혹 후인의 전회담(傳會談)이니, 본가와는 관계가 없는 자이요, 후자는 곧 처용의 장엄한 꼴과 위대한 힘을 찬탄하여 역신을 쫓는 무가(巫歌)이니, 전자는 처용의 자작(自作)이요, 후자는 후인의 연작(演作)이니, 후자가 전자에 비하면 물론 가치가 없으나, 다만 그 가운데 처용의 본가를 번역한 여섯 짝이 있으니, 즉
 
71
‘동경 발근 다래’는 ‘東京明期月良[동경명기월량]’의 역(譯)이요
 
72
‘새도록 노니다가’는 ‘夜入伊遊行如可[야입이유행여가]’의 역이요
 
73
‘가라히 너히세라’는 ‘脚烏伊四是良羅[각오이사시량라]’의 역이요
 
74
‘둘흔 내 해언이와’는 ‘二肹隱吾下於叱古[이힐은어하어질고]’의 역이요
 
75
‘둘흔 뉘 해어니요’는 ‘二肹隱誰支下焉古[이힐은수지하언고]’의 역이라.
 
76
‘月良[월량]’ ‘다래’등은 다 고인이 상음(上音)이 하몽(下蒙)한 자를 구분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다만 본가의 ‘明期[명기]’와 ‘月良[월량]’의 간에 ‘은(隱)’자가 빠진 듯하며, 《악학궤범》의 ‘새도록’이 ‘夜入伊[야입이]’의 직역이 아니며, ‘너히세라’가 ‘四是良羅[사시양라]’의 직역이 아니며, ‘내해어니와’와 ‘뉘해어니오’가 ‘吾下於叱古[오하어질고]’나 ‘誰支下焉古[수지하언고]’의 직역이 아니요, 최후 2구의 ‘本矣吾下是如馬隱[본의오하시여마은]’과 ‘奪叱良乙何如爲理古[탈질양을하여위이고]’는 역이 없으니, 이는 원래 후가, 곧 《악학궤범》의 처용가가 본가, 곧 《삼국유사》의 처용가를 역한 것이 아니요, 다만 처용을 찬송(讚頌)하는 동시에 우연히 본가의 위 6구를 연술(演述)한 고로 동이(同異)와 가감(加減)이 있음이라. 이제 비의(鄙意)로서 본가를 직역하며, 그 아래 2 구까지 첨역(添譯)한 것이 아래와 같으니,
 
 
77
동경 밝은 달에
78
밤들이 노니다가
79
들어서 자리에 보니
80
가라이 너이러라.
81
둘은 내 해였고
82
둘은 뉘 해언고.
83
본디 내 해언만
84
빼앗긴 것을 어찌할꼬.
 
 
85
‘奪叱[탈질]’과 ‘良乙[양을]’의 간에 한두 자가 있어야 ‘빼앗긴 것을’이 될지나, 이는 고금 언어의 변천이거나 혹 본문의 궐자(闕字)가 있음이니라. 여하간 본가 1수의 의의는 완전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또한 기행(奇幸)이라 할지로다. 만일 더 연구할 가극(暇隙)이 있으면 다른 이두 기술의 시가도 그 의의를 안출하여 고조선 사상의 일반(一斑)을 소개할까 하노라.
 
86
《삼국유사》는 불교의 원류를 적은 글월인 고로 겨우 불교에 관계있는 시가만 적은 것인즉, 그 10여 수는 구우(九牛)의 일모일지며, 또는 신라의 것만 적고 고구려와 발해의 것은 1수도 없고, 백제의 것은 서동(署童)(武王[무왕]의 小名[소명]) 대왕의 단가 1수가 전하였으나 이는 신라 선화공주의 관계로 쓴 것이요, 백제의 것으로 쓴 것이 아니로다. 그러나 《고려사악지(樂志)》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가는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洲)〉3수가 있고, 백제는 〈선운산(禪雲山)〉〈무등산(無等山)〉〈지리산(智異山)〉3수가 있으나, 그 사를 이어라 하여 게재하지 않았으니 또한 가석(可惜)하거니와, 내원성(來遠城)은 본주(本註)에 ‘정주靜州(義州[의주]) 수중의 지(地)인데 적인(狄人)이 래투(來投)하므로 이 성(此城[차성])을 건축하고 노래를 지었다’하나, 정주로 내원성의 유허(遺墟)라 함은 羅[나]·麗[여] 문약 시대에 북방의 고적을 옮길 때에 위작(僞作)한 바라.
 
87
고구려가 수와 당과 대치할 때에, 수와 당은 광녕현(廣寧縣) 혹 산해관(山海關) 내에 회원진(懷遠鎭)을 두어 고구려인을 초항하며, 고구려는 요동 혹 요서 등지에 내원성을 두어 수·당인을 초항하였으니, 《요사(遼史)》 동경 도내의 내원성이 곧 유허(遺墟)라. 만일 〈내원성가(來遠城歌)〉가 유전하였으면 문예의 방면 뿐 아니라 곧 역사상 다른 사실에도 참조가 될지어늘, 이제 《고려사》에는 그 사(詞)를 빼고, 《삼국유사》에는 그 명까지 뺐으니 더욱 가석(可惜)하도다.
 
88
백제 성충(成忠)과 고구려 을파소(乙巴素)의 시 각 1수가 《대동풍아》에 게재된 바, 이는 근세의 언문으로 적히고, 그 책자의 내역이 명백하지 아니하여 본인의 시인지 확증이 부족하나 또한 버리기도 아까우므로 졸저 《조선사》에 채입(採入)하니라.
 
89
발해 일대(一代)에는 예악문물의 빈빈(彬彬)함이 외인(外人)의 흠모를 받았을 뿐더러
 
90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중경(中京) 경박호(鏡泊湖)를 기록하여 가로되,
 
91
“장백산(長白山)에서 내려오는 군류(群流)가 주집(注集)하여 경백호가 되니 넓이(廣[광])이 5~6리요 길이(長[장])이 70여리라. 호(湖)의 중앙에 우록(牛彔)·아극선(阿克善)·아막가면아(俄莫賀帛阿)의 3산이 있으며, 우록 아극선의 양산 사이에 백암(白巖)이 있으며, 호의 서남에 호객토(呼客兎)의 고애(高崖)가 있어, 그 고애로부터 호아합하(虎兒哈河)가 호로 들어올새, 비폭(飛瀑)이 공중에 쇄(灑)하며 분랑(奔浪)이 거뢰(巨雷)를 작하여, 그 소리가 수십 리밖에까지 들리므로 향수(響水)라 명하며, 매양 3,4월경이면 조일(朝日)이 처음 돋을 때에 일색(日色)의 홍과 수색(水色)의 녹(綠)이 서로 비추어 오색의 하채(霞彩)를 이루며, 애하(崖下)의 기화(奇花)와 이초(異草)가 난만하여 그 곳을 발고(發庫)라 명한다”하고,
 
92
“그 부근 석두전자(石頭甸子)의 만산 심암중(萬山深岩中)에 ‘해안(海眼)’이라 명하는 호(湖)가 있으니, 방원(方圓)이 80여리요, 매일 삼차의 호수가 분출하여 바다와 상응하는 고로 해면의 명을 득한 바라. 중하(仲夏)에 일난(日暖)하면 장여(丈餘)의 거어(巨魚)가 출몰하여 비조(飛鳥)가 그 위로 지나지 못한다”하며,
 
93
《송막기문(松漠記聞)》에 발해인의 생활의 일반을 기록하여 가로되,
 
94
“부후(富厚)의 집에는 모란(牧丹)을 300~400본을 심는데, 다 연지(燕地)에는 없는 귀종(貴種)이라.”
 
95
하였으니, 이같이 동서남북에서 주어온 한두 기록으로도 발해 성시(盛時) 시인문사(詩人文士)의 풍류(風流)를 상상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국시와 한시의 일수가 후세에 전한 것이 없도다.
 
96
《옥진총담(玉塵叢談)》에나 《금고기관(今古奇觀)》에 동일한 기록이 있으되, 그 대략이 아래와 같으니,
 
97
“당(唐)의 천보년간에 발해의 국서가 당에 이르매, 당의 거조(擧朝)에 그 문자를 푸는 이 없어 당현종(唐玄宗)이 매우 걱정하다가, 비서감(秘書監) 하지장(賀知章)이 이태백을 추천하여 금만전(金蠻殿)에 들어와 이 글을 해독하고 그 답서를 초할새, 고력사(高力士)가 신발을 벗고 양귀비가 먹을 갈았다.”하니, 이는 아마 발해의 국서가 이두 혹 구결의 발해로 되었으므로 당인이 이를 해독하지 못함이요, 이태백의 답서도 발해자로 한 것인 고로, 그 글월이 이태백집에 게재되지 못함이라.
 
98
혹 왈 “위의 사실이 신·구(新舊) 두 《당서(唐書)》에 보이지 않고 오직 소설 중에 보일 뿐이니 어찌 존신(尊信)하리요?”하나, 어느 때는 소설이 혹 사책(史册)보다 존신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
 
99
《이태백전집》에 따르면, 《악사(樂史)》의 이한림별집(李翰林別集)의 서(序)에 가로되,
 
100
“당현종이 이태백을 소(召)하여 화번서(和蕃書)를 초할새 사현하(思懸河)와 같았다”하며,
 
101
주건(奏建)의 《이군갈기(李君碣記)》에는
 
102
“현종이 이백을 한림대조(翰林待詔)로 소하여 화번서를 초하였다”하며, 범○정(范○正)의 서문에도
 
103
“이태백이 답번서(答蕃書)를 초할새, 변(辯)이 현하(懸河)와 같았다.”
 
104
하였으니, 그 칭한 바 〈화번서〉와 〈답번서〉는 다 발해에 답한 국서를 지(指)한 것이라.
 
105
무릇 이태백 평생의 득의가 이 국서답장의 작이어늘, 어찌하여 신·구 두 《당서》에는 이태백을 불러서 양귀비(楊貴妃)를 찬(讚)한 청평사(淸平詞)를 지었다 할 뿐이요, 발해에 답한 국서의 일건(一件)에는 말도 없으며, 《이태백전집》에는 그 답서한 사실만 기록하고 또한 그 답서는 기록치 않았으며, 《당문원영화(唐文苑英華)》나 《전당문초(全唐文抄)》등 각 책에는 이태백의 심상(尋常)한 시와 문까지 수록하면서, 도리어 그 득의작(得意作)인 발해에 답한 서를 빼었느뇨? 당현종의 천보년간(天寶年間)은 발해 무제(武帝)의 후요, 문종(文宗)의 초라. 무제의 때에 해군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산동성에 들어가 당의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요동 등지에서 당장(唐將) 고품(高偘) 등의 대병을 함락하여 발해의 국위가 당을 압도한 고로, 발해가 드디어 전례를 파하고 발해자로 쓴 구서를 당에 보내매, 당 현종의 군신이 졸연(卒然)히 그 글을 해독할 이가 없어 걱정하다가, 마침 발해자의 학자 이태백을 얻어, 이를 초답(草答)하여 당시에 외교의 난제를 해결하게 되었으나, 그러나 중국 고대에 남의 글로 국제에 왕래(往來)한 일이 없다가, 이제 발해에 대하여 신례(新例)를 연 것이 무한의 수치인 고로 당서에는 그 사실을 빼었으며, 《이태백전집》에는 그 사실을 모호하게 썼으나 그 문자를 게재치 않음인가 하노라.
 
106
고려 470여 년간에 문자와 시가의 발달된 흔적은 문헌의 결핍으로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과정(瓜亭) 정서(鄭敍)의 시가가 다행히 전한 바, 그 글월이 아래와 같으니
 
 
107
(前腔[전강]) 내 님을 그리와 우니다니
108
(中腔[중강]) 산접동새는 이슷하요이다
109
(後腔[후강]) 아니시며 거츠르신들 아으
110
(附葉[부엽]) 殘月曉星[잔월효성]이 아르시리다
111
(大葉[대엽])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저라 아으
112
(附葉[부엽]) 과도 허믈도 천만 업소이다
113
(三葉[삼엽]) 말힛 마러신뎌
114
(四葉[사엽]) 살읏보뎌 아으
115
(附葉[부엽]) 니미 나를 하자 니자시니잇가
116
(五葉[오엽]) 님하 도람 드르사 괴오소서 아으.
 
 
117
(현대역)
 
118
내가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지내더니
119
산 두견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120
옳지 않다 하시고 거칠다 하시더라도
121
진심을 잔월효성이 알으실 것입니다.
122
넋이라도 한데 모시고 지내고자 하는데
123
항거하시는 이 뉘십니까?
124
화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125
뭇 사람들이여, 참소 말으소서.
126
슬프구나
127
임께서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128
그러지 마십시오. 도람(사정 얘기) 들으시어 다시 사랑하소서.
 
 
129
이 글월은 《악학궤범》에는 처용가의 아래에 수록한 고로 세인이 매양이를 처용가로 오인하나, 그러나 《고려사악지》에 실린 이제현의 한시로 역해譯解한 〈과정가(瓜亭歌)〉에 가로되,
 
130
憶君無日不沾衣[억군무일부첨의]
131
正似春山蜀子規[정사춘산촉자규]
132
爲是爲非人莫問[위시위비인막문]
133
曉星殘月也應知[효성잔월야응지]
 
 
134
라 한 바,
 
135
‘憶君無日不沾衣[억군무일부첨의]’는 ‘내님을 그리와 우니다니’의 역이요
 
136
‘正似春山蜀子規[정사춘산촉자규]’는 ‘산접동새는 이슷하요이다’의 역이요
 
137
‘爲是爲非人莫問[위시위비인막문]’은 ‘아니시며 거츠르신들’의 역이요
 
138
‘曉星殘月也應知[효성잔월야응지]’는 ‘殘月曉星[잔월효성]이아르시리다’의 역이요
 
139
‘넉시라도 님은 한 대 녀저라’의 이하는 비록 이씨의 역에 넣지 않았으나, 그 하문(下文)임에 또한 명백하니라.
 
140
《고려사》에 가로되, ‘이 노래를 듣는 자는 눈물을 흘린다’하였으니 당시의 명작됨을 알지로다. 이 노래의 가운데 고어가 많이 유전하였을 뿐더러, 말구의 제오엽에 남(타인)을 ‘람’이라 하였으니, 우리 선조의 언어에는 첫소리에 ‘라’의 발음이 있음을 볼지니라.
 
141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나 《고려사》 저자 정인지가 다 이두문으로 적은 문자를 천대하여, 양사의 악지에 한시만 기재하고 이두로 쓴 국가(國歌)와 국시(國詩)는 산기 하였으니, 이는 조선 기록상에 천고의 유감이 아니라 할 수 없도다.
 
142
그러나 삼국 시대의 국가와 국시는 다행히 《삼국유사》의 수집한 신라시가가 있어 그 결루(缺漏)의 만일(萬一)을 보(補)하였거니와, 고려의 시가는 이미 《고려사》에 빠지고, 그 모든 재료되는 기록은 모두 임진난의 병화에 소실하여 아무 참고할 곳이 없이 되었으니, 상술한 〈정과정(鄭瓜亭)〉시가 같은 것은 곧 고고자(考古者)의 난득(難得)할 비보(秘寶)가 아니냐?
 
143
고려와 이조의 교체 시대의 저자인 목은(牧隱)·야은(冶隱)·포은(圃隱)의 모자(母子)·이조 태종 등의 시조 몇 마디가 《대동풍아록》에 보인 바, 그 중에 포은의
 
 
144
죽어죽어 일백번(一百番) 다시 죽어
145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고 넋이야 있던 없던
146
님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 가실 줄 있으랴.
 
 
147
의 1수는 사의(辭意)가 격앙하고, 태종의
 
 
148
이러하면 어떠하며 저러하면 어떠하리
149
천왕당(天王堂) 앞뒤 뜰이 무너진들 어떠하며
150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엉켜진들 어떠하리
151
우리도 이와 같이 태평장취(太平長醉)
 
 
152
는 기기(奇氣)가 횡일(橫溢)하여 비록 두 수의 단시가나, 전자는 단심이 철석 같은 고려 충신 일파의 심리를 대표하며, 후자는 시세를 추월하여 부귀를 도득(圖得)하려는 이조 창업 제신 일파의 심리를 대표한 자니라.
 
153
대개 이두문은 삼국·동북국·고려 등 역대의 국문이라. 당시에 이로써 인명·지명·관명과 각종 시가를 기술할 뿐 아니라, 역사나 소설이나 기타 각종 문예의 작품도 거의 이두문의 기술이 많았을지나, 하나도 유전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기괴한 일이 아니냐.
 
154
전설에 따르면 조선문헌이 (1) 북부여가 모용괴(慕容傀)에게 망할 때, (2) 고구려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함락할 때, (3) 견씨(甄氏)가 완산(完山)에서 패망할 때, (4) 이조의 한양 궁궐이 임진왜란에 피소(被燒)할 때에 소진하여 고찰할 재료가 없어졌다 하니, 이것이 사실적 전설이라.
 
155
그러나 나(余[여])는 유·불 두 사상의 교체 시대가 가장 문헌잔결(文獻殘缺)의 대액회(大厄會)라 하노라. 불(佛)의 수입(輸入)에도 일차 조선 수두의 고유사상과 충돌된 적이 있으나, 다만 불은 배타성이 적으므로 머잖아 서로 융화되었고, 유(儒)는 정주(程朱) 이래로 배타가 격렬한데, 조선이 고려말부터 정주의 영향을 받아 불(佛)과 수두를 일제히 배척하므로, 이조 태종이 즉위 후에 고대의 비사·비록 등을 많이 소화(燒火)하며, 그 여존(餘存)한 것도 민간에 전포(全布)함을 불허하고, 오직 내각(內閣)에 장치하였다가 임진란에 다 소멸하매, 이로부터 조선 고문헌이 아주 몰자비(沒字碑)가 되니라.
 
156
세종대왕의 정음 자모는 이두에 비하면, 그 음과 형이 완미(完美)할 뿐더러 그 학습이 더욱 편리하여 우리 문학의 발흥할 이기(利器)를 주었으나, 다만 한문학의 정복을 받아 각종 글월을 모두 한문으로 기록하고 한문만 문자로 알아 국문학 발달의 전로(前路)를 막았었으며, 원호·정철·윤선도 제공(諸公)이 간혹 시조의 명작이 있으나, 그러나 그 재력을 모두 한시의 저작에 팔아먹고, 시조는 여사(餘事)로 지었으므로 모두 작가라 칭하기 부족하며, 소설은 언문으로 저한 자가 많으나, 그러나 문학 명사들은 이들의 언문소설을 저술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독서하지도 안 하므로 다만 무뢰(無賴)의 한인(閑人)이 이를 지으며, 책사(册肆)의 상인이 이를 박아, 여항의 농인(農人)에게나 규중의 부인에게 팔아 몇 푼의 박리(薄利)를 얻었을 뿐이라. 그러므로 발달이라 칭할 것이 없도다.
 
157
이를테면 5,6백 년래의 언문소설 중 좀 나은 저작물을 〈춘향전〉〈놀보전〉〈토끼전〉등을 헤아리나, 그러나 〈춘향전〉은 고구려의 한주(韓珠)를 연술한 것이요, 〈놀보전〉은 신라의 방색(房色)을 연술한 것이요, 〈토끼전〉은 고구려의 구토담(龜兎談)을 연술한 것이니, 다 창작 아님이 명백하며, 만일 명문 걸작을 찾으면 한문 작가에는 혹 몇 편이 있다 하려니와 언문에는 절무(絶無)하니, 세종대왕의 제작한 은덕을 고부 함이 또한 심하도다, 아으.
 
158
최근에 와서 일반 조선 문법의 학자들이 우리 글의 발달을 절규하나, 그러나 각국 문학의 진보는 매양 다수한 작가가 나서 전 사회를 고무할 만한 시나 소설이나 극본이나 기타 각종 문예작품이 많아, 이로써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어 주린(飢[기])자의 양식이 되며 병자의 약이 되어, 자가 문학의 독립국을 건설할 만한 일이니, 근일에 작가로 칠 작가가 몇이냐, 아으.
 
 
159
부언
 
 
160
본편의 전반은 저자가 지난 달(去月[거월])에 초(草)한 바, 《조선사》 가운데 삼국·동북 양 시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에 관한 사론의 일부분이요, 후반은 동아일보사의 욕탁(辱託)에 의하여 속성한 자라. 첫 의도(初意[초의])는 ‘세종대왕이 지은 언문의 이두문에 대한 관계’와 ‘이조 5백 년래 시조잡가 등의 변천하여 온 원류’를 상론하려 하였더니, (1)은 객탁중(客橐中)에 근세사에 관한 참고서류가 부족하며, (2)는 저자가 추위를 두려워함이 심하여 근일에 붓을 잡기 곤란하여 다 여의하게 쓰지 못하므로, 후반은 너무 초초하니 독자의 아서(雅恕)함을 바라노라.
 
161
그러나 이두문으로 지은 처용 본가의 의의를 발견하며, 사책에 누락된 〈정과정(鄭瓜亭)〉의 국시를 안출(按出)함은 저자의 이 편부터 비롯됨이라 할지니, 혹 이후 조선문학사 편찬자의 채택이 될까 하노라.
 
162
전반에도 (1) 이두문 제작의 전에 수두(蘇塗[소도])의 신단에서 신지가 구전하여온 불문(不文)의 가사를 뺐으며, (2) 이두문 시대에 성행한 화랑의 ‘풍월’을 논치 못하였도다. 다른 날 다시 기회를 얻어 보충하려 하노라.
 
 
163
─《동아일보》(1924. 1. 1).
【원문】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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