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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의 하나이다. 어두운 삼림으로 덮인 높은 절벽, 거기에 수원(水源)을 뻗치고 있는 여러 급류, 넓은 호수를 뒤덮고 있는 안개, 상쾌한 공기, 고독과 정막, 이러한 모든 것은 여러 영웅적 인물을 출생시키는 데 적합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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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의 동쪽에 있어서는 토지는 다시 광야로 되고 거기에 많은 산악이 있으며 아무르 강의 수원으로 되는 많은 지류가 있다. 이들 지류의 하나인 오논 강 연변에 후에 칭기즈 칸이라고 불리게 된 몽골 인 테무친이 출생했다. 때는 서력 116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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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지방과 그 동쪽은 산과 숲이 많고 여러 하류는 건조되어 있다. 참말로 몽골의 국경은 광대한 초원이며 봄은 녹색, 여름은 회색, 겨울이 되면 거의가 다 짙은 회색으로 변하고 만다. 거기에는 강물의 폭도 넓고 수목이라면 여기저기의 계류에 얼마밖에 되지 않는 느티나무의 고목이 있는 데 불과했다. 남방 저쪽에는 고비의 대사막이 있고 그곳은 단지 모래와 먼지와 건조한 흙만이 있을 뿐이다. 이곳저곳에 사구가 있으며 초록은 성류와 가시 덤불의 관목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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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편편하지 않고 바람 때문에 기묘한 모습으로 되어 있어 그 형상은 초기의 독일 예술 영화의 환괴한 세트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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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광막한 전 지방에는 가장 오랜 시대부터 둥근 텐트에 살고 양육(羊肉)을 먹고 말젖을 마시는 방목 민족이 살고 있었다. 테무친이 출생한 12세기경에는 원래부터 한 민족이었던 이 민족은 터키 인, 퉁구스 인, 몽골 인의 세 가지의 주요한 부족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각자 독특한 언어,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최후의 몽골 족에 관해서 12세기에 이르러 그 추장 가불칸이 중국의 금조(金朝)에 대해서 반역할 때까지 거의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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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족에는 하나는 산림 속에서 사냥을 하고 하나는 광야에서 방목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 내상을 모르는 문명인에게 있어서는 그 상쾌한 공기 속에서 광막한 대원야에서 자유로운 행복된 생활을 보내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들의 생활은 절대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의 방랑 그 자체가 가장 복잡한 도시생활과 같은 엄격한 규칙에 의하여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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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행복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그것은 주로 주관적인 일이기 때문에 얘기할 필요도 없다. 이들 유목의 민족은 양, 소, 사냥말을 기르고 있었다. 낙타는 아직 이 무렵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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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 ─ 일 년의 각 계절마다 다른 목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말과 소와 개와 텐트와 부녀자를 데리고 이류하는 것이다. 여름에는 강기슭에 텐트를 치고 겨울에는 남방의 고비 지방의 호수 사이에, 가을과 봄에는 이 양쪽 지방의 중간에 일시적인 텐트를 치는 것이었다. 이 텐트는 유목민의 창조이며 그 중심이었다. 손쉽게 세울 수 있으며 또는 옮길 수 있고 그것은 아시아의 광야의 사나운 바람과 비에 대한 훌륭한 보호이었다. 사냥은 또한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인 기능의 하나일뿐더러 유목민의 모든 시가(詩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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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형적인 몽골 인의 풍모는 어딘지 체구가 왜소하고 머리는 둥글고 골격은 튼튼하며 갈색빛의 눈은 풍우와 모래알 때문에 충혈되어 있으며 얼굴에는 털은 적으나 수염이 있다. 머리는 깎지 않고 바늘과 같은 검은 머리는 편발을 하여 양쪽으로 내리고 있다. 이는 빛나는 것처럼 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쾌활하고 사교적이나 간혹 침울한 표정을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주인공 칭기즈 칸이라 할지라도 아마 이 표준에서 그리 다르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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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사회의 기초는 족장적 씨족이며 그것이 또한 여러 가족으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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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씨족 사이에서는 서로의 결혼이 용서되지 않으므로 젊은 청년은 그가 속하는 씨족 이외에서 아내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결혼의 습관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와 똑같이 허용된 씨족 간에서 아내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그 때문에 쉴 사이 없이 습격과 약탈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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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이 출생한 13세기경이 되니깐 옛날부터의 낡은 씨족은 이어 분열되고 새로운 적은 씨족이 무수히 생겼다. 이들의 족장의 의무는 그들 여러 사람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는 것을 필요로 했으나 천연의 산물은 적고 이와 같은 원시적 경제 사회에 있어서는 충분한 의식을 찾아낸다는 것은 곤란했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다른 씨족을 습격하고 약탈하려는 호시탐탐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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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장의 무용과 지모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부하는 안전했으며 그러한 족장 아래에서 점점 많은 부하가 모여들었다. 즉 무용 황금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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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부단의 투쟁 속에 사람들은 암암리에 일대의 영웅이 나타나 전 몽골 민족을 통일하고 질서를 이루며 의식의 분배를 한층 더 풍부하게 해 줄 것을 기대한 것도 일면의 진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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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는 구라파에서도 가장 암흑의 시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동양의 그것과 비교할 때에는 아직 전자에 있어서 어딘지 젊고 씩씩한 것이 엿보인다. 이것에 반하여 아시아는 낡은 문화가 이미 퇴폐하고 지배자는 토민의 고혈을 착취하는 데만 급급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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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테무친의 몽골 통일의 과업이 겨우 이루어질 때 중국에 있어서는 송조의 세력이 차츰 약해지고 북방에서 궐기한 금조 때문에 그 북반(北半)을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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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앙아시아에 군림한 셀주크 대제국의 왕 무하마드는 용기는 있었으나 지모가 없고 자부와 탐욕만을 알았다. 칭기즈 칸이 몽골 통일을 이루었을 때 그는 이미 51세 그리하여 66세에 죽을 때까지 겨우 15년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에 중국의 태반을 정복하고 서쪽은 멀리 인도, 코카서스 지방에까지 그 군대를 진출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원래부터 그의 군인으로서 또 정치가로서의 영재(英才)에서 온 것이긴 하나 또 그 당시 몽골을 둘러싼 각국의 정권이 부패하고 퇴폐에 빠진 것도 크게 도운 힘이라고 하여야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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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 칭기즈 칸의 아버지는 예수게이 바가톨(용감한 예수게이)라고 부르며 예수게이는 즉 오랜 씨족에서 독립하여 모험을 구한 새로운 족장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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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수의 씨족을 그 통솔 아래 거느리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어떤 날 오논 강 변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메르키트 족의 한 사내가 오로노트 족의 한 소녀를 신부로 얻어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예수게이는 소녀의 눈이 아름답고 더욱 자기들이 결혼할 수 있는 부족에 속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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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 처녀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청년의 피가 온몸에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고 자기의 갑자기 생긴 목적을 두 형제에게 알리기 위해 급히 텐트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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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을 무장한 그들이 강변에까지 달려왔을 때 젊은 부부는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신랑은 세 사람의 형제가 무기를 손에 들고 그들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자 즉시로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부도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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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엘른이라고 부르는 그 처녀는 그들과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시라도 바삐 이 장소에서 도망치라고 자기 애인에게 설복했다. 신랑은 어두운 눈초리로 잠시 호엘른을 쳐다보았으나 말에 채찍을 치자 저쪽 산을 향하여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힘도 들이지 않고 신부를 뺏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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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엘른은 최초의 남편의 아들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예수게이는 자기의 장남이 틀림없이 자기의 피를 나눈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는 부친이 그 주장의 한 사람을 포로로 해서 타타르 인 약탈에서 돌아온 날에 세상에 나왔다. 그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테무친이란 그 포로의 이름이 그 아들에게 수여되었다. 그 후에 호엘른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길렀다. 제2부인에 의하여 그는 또 두 아들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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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게이는 자신의 힘을 확신했다. 장남에 대해서 적당한 신부를 찾아야 할 시기였다. 소년이 아홉 살 적에 부친은 어머니 쪽의 씨족인 오로노트 족의 텐트 속에 장래의 신부를 찾기 위하여 소년을 데리고 갔다. 도중 그들은 다이 세치엔이란 교활한 족장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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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예수게이에게 인사하여 말하기를 “형제여 어디를 가는가?” 예수게이는 정직하게 그 목적을 말했다. 그러자 그 약은 노인은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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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들은 눈은 불과 같으며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젯밤 나는 한 마리의 독수리가 그 손톱에 일월(日月)을 포착하고 내 손에 앉는 이상한 꿈을 꿨다. 일월은 단지 바라다보는 것인데 흰 독수리가 이것을 포착하고 자기 손에 앉는다. 이것은 틀림없이 길징(吉徵)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자네를 만나서 처음으로 어젯밤 꿈을 해명하게 되었네. 나의 집안에는 예전부터 미인이 많다. 형제 예수게이여, 나도 또한 집에 나이 어린 소녀를 가지고 있다. 우선 따라와서 한번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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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게이는 소녀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급히 약속을 맺은 후 오랜 습관에 따라 아들을 약혼한 소녀의 가족에게 맡기고 일어났다. 이 풍습은 오랜 모계 족장 제도에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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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는 개를 무서워하니깐 조심해서 놀라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 예수게이의 최후의 말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떠났으나 두 번 다시 아들을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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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歸途), 그는 축연을 열고 있는 타타르 인의 캠프를 발견했다. 그는 그때 마침 배가 고팠다. 또 한편 유목민의 풍습으로서 도중에서 만난 사람들의 식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나므로 그는 말에서 내려 축연에 들어갔다. 타타르인들은 즉시 그가 그전에 자기들을 약탈한 원수라는 것을 알았으나 광야의 습관으로서 손님에게 향응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몰래 고기와 술에 독약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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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이 병든 사내는 반사반생의 모습으로 겨우 자기들의 부락까지 돌아왔다. “아 가슴이 아프다. 누구 없느냐?”라는 그의 소리에 늙은 부하 챠라크의 아들 만리크가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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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의 사내는 아직 어린 어린애들의 앞으로의 보호를 그에게 바라고 테무친을 집에 데려오도록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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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크는 소년 테무친을 집에 데리고 돌아오는 데 애를 썼으나 그들이 왔을 때는 예수게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보호해 주는 사람도 없고 다음에 남은 어린애들의 운명에 가슴을 아프게 하며…….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통치는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항상 온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은 최초의 기회에 과부 호엘른과 어린애들을 버리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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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는 희생제에 가담하는 것을 거절당했다. 그가 항의하니깐 여자들은 캠프를 떠나도록 그에게 명령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그 씨족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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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이었다. 예수게이의 부하가 과부를 버리고 떠날 때 그들은 여름의 목지(牧地)를 찾아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노인 챠라크는 그들을 가지 못하도록 잡으려고 했으나 그들은 난폭하게 그것을 거절하고 노인의 어깨를 상하게 했다. 소년 테무친은 노인을 텐트로 방문하고 반은 노인이 입은 상처 때문에 반은 공포 때문에 울었다. 과부 호엘른은 지금은 남자보다도 힘이 센 여장부라는 것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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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가죽으로 만든 깃발을 들고 호엘른은 탈주자의 뒤를 따랐다. 정당한 권리에 의하여 과부 호엘른은 지금이야말로 그들 모든 자의 두목으로서 통솔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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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하여야만 된다. 용감한 호엘른은 탈주자의 몇 사람을 잠시 동안 잡고 있는 데 성공은 했으나, 한 사람 두 사람 그들은 몰래 도망치고 타이주트 족의 견고한 연합에 가입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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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의 형제, 2인의 이모(異母) 형제, 1인의 여동생, 어머니, 그리고 겨우 한 사람의 하인인 노파만이 지금은 예수게이의 캠프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들은 숲이 있는 강변에 살면서 모르모트나 들쥐를 잡고 생선을 먹으며 때로는 나무뿌리나 풀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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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처럼 겨우 연명을 하고 있는 동안에 적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의 부친을 알고 있는 타이주트 족의 두 사람의 추장 타가다이 길츄크와 도도양 가드는 테무친이 살아 있는 동안은 불안심한 것을 알고 단숨에 그를 죽이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부의 조그만 텐트를 습격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위독을 끼칠 생각은 없다. 단지 소년 테무친만이 필요하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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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은 숲 속으로 도망을 쳤으나 결국 허기가 져서 숲에서 나올 때 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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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가다이는 소년의 목에 칼을 채우고 타이주트 족의 모든 텐트에서 하룻밤을 지내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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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그들은 오논 강 변에서 축연을 열었는데 포로를 감시시키기 위해서는 겨우 한 명의 약한 청년을 남겼을 뿐이다. 테무친은 목에 건 칼로 감시하던 자를 찌르고 그를 기절시킨 후 강으로 도망하고 머리까지 물속에 숙이고 말았다. 그들은 사방을 다 찾았다. 그를 친절하게 취급해 준 하인 소간 시라라는 자가 그를 발견했으나, 소년에게 동정하여 조심하라고, 안전해지면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탐색을 겨우 중단한 후 소간은 이젠 걱정 없다고 알려 주었다. 테무친은 이 무거운 목칼을 쓰고서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서 밤중에 몰래 소간의 텐트를 찾았다. 소간과 그의 아들 둘은 친절히 환영해 주며 그를 양털 아래 숨겨 놓고 위기가 사라진 후에 소년에게 말과 식량과 활을 주고 도망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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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유랑의 생활을 보내는 동안 소년은 해마다 강장(强壯)해지고 용기와 지혜를 겸비해 갔다. 카살은 이미 사수(射手)로서 명성을 높였고 테무친은 현교(賢狡)한 청년으로서 도전에 대응하는 데는 언제나 용감한 청년으로 알려져 있었다. 말 도둑이 거세된 여덟 필의 말을 훔쳐 가지고 도망쳤을 때 아주 완전한 파산이 그들을 휩쓸었다. 다행한 일로 베르그다이가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겨우 한 필이 남았을 뿐이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테무친은 말을 타고 도둑의 뒤를 추격했다. 말 도둑의 뒤를 따랐다는 것은 교지와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테무친은 훔친 말을 가지고 도망치는 것을 본 젊은 남자한테서 예기하지 않았던 조력을 얻었다. 그는 테무친에게 새로 백마를 주고 두 사람은 3일간 기행을 했는데 결국 어느 유목지에 도착하여 거기에 여덟 필의 거세된 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말을 데리고 떠났다. 그것을 본 말 도둑들은 맹렬히 그들을 추격했다. 백마를 탄 한 도둑이 선두에 서서 활을 쏘기 시작했다. 테무친도 돌아서서 활을 쐈다. 얼마 후 밤은 어두워지고 추격이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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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젊은이는 이 원정으로 원기 백배가 되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테무친은 그리하여 최초의 부하를, 그리고 그가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그에게 일해 준 부하를 얻었던 것이다. 수일 후부터 그들은 또 민속하게 움직이는 기술을, 적이 숨어 있는 지점을 탐지하는 기술을,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습격하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복자는 어떠한 것도 빼놓지 않고 곤란한 청년 시대에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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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는 생애의 제2의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이 세치엔의 텐트에서 보낸 날을, 그리고 그와 약혼한 사이가 된 소녀 보르테를 생각했다. 그는 결혼해서 그 방면에 있어서도 자기를 주장할 만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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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다이는 그를 친절히 맞아 주고 여자를 그의 아내로서 주었다. 테무친은 자기의 텐트에 돌아오자마자 그의 맹우이며 부하인 보갈기를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보냈다. 광야의 생활을 갈망한 젊은이는 까만 양의 채찍을 들고 말을 타고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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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 친구와 아내와 흑표의 외투를 가지고 있다. 이 흑표의 외투는 아내 보르테가 시어머니를 위해서 선물로서 가지고 온 것이다. 더욱 그는 네 명의 건장한 형제와 말과 양을 가지고 있다. 소년은 어느 사이 어른이 되고 그의 귀에는 어머니의 복수의 말이 그칠 줄 모르는 음악처럼 들려오는 것이었다.
50
친구를 얻기 위해서 테무친이 당연히 최초로 간 곳은 그의 부친의 오랜 맹우 케레이트 족의 트그랄 칸이었다.
51
옛날 이렇게 테무친은 말했다. 트그랄은 내 부친의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나에겐 부친과 같다. 그는 지금 푸른 소나무 숲의 테유라 강 변에서 살고 있다. 나는 아내가 가져온 이 흑표의 외투를 그에게 준다.
52
트그랄이 그 외투를 받았었을 때 그는 즐거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53
“나는 너한테서 도망간 자들을 모아 너한테 가담하도록 하겠다. 너의 호의는 영원히 잊지 않는다.”
54
그것은 젊은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의 번영의 최초의 상징 ─ 아내가 지참해 온 흑표의 외투 ─ 그것을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선물은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정도 효과가 있었다.
55
이 소문은 갑자기 광야에 펼쳐지고 수일 후에는 예수게이의 부하의 한 사람이었던 노인이 자식을 데리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56
“아들 제르미를 귀하에게 맡깁니다. 귀하의 말에 안장을 놓고 귀하의 문을 확 열어제치시오.”
57
기사는 최초의 종사(從士)를 얻게 되었다.
58
최초의 성공 후 최초의 그리고 최악의 패배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일이 이 남자에겐 용이하게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9
새벽 전의 희미한 빛에는 언제나 죽음과 같은 정막감이 있다. 이 정막감 속에 호엘른의 하인인 노타는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말굽 소리에 눈을 떴다.
60
“마나님 마나님.” 그는 주인을 깨웠다. “원수 타이주트 형제가 쳐들어 오는 것에 틀림없습니다.”
61
“어린애들을 일으키시오.”라고 호엘른은 말했다.
62
테무친과 그 형제는 순식간에 말을 타고 두 사람의 부하는 그들을 따랐다. 그는 모친을 자기의 딴 말에 태웠으나 아내 보르테는 말이 없어 허둥지둥하는 판에 남게 되었다. 노하녀가 그를 소가 끄는 귀비츄우카(바퀴가 있는 차)에 태워 그들은 단갈의 소류(小琉)를 따라 차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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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자는 타이주트 족이 아니고 옛날 예수게이가 호엘른을 훔친 메르키트 족이었다. 그들이 오늘에서야 복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차바퀴가 빠져 약탈자는 곧 그들을 따라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게이의 제2의 처, 즉 베르그다이의 모친을 이미 잡았고 부자의 텐트에 양털을 자르러 가는 도중이라고 노파가 속이는 것도 뿌리치고 테무친의 신부 보르테를 그 자리에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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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테무친을 발칸 산 속까지 추격했으나 테무친은 깊은 숲 속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그의 처를 잡고 지난날 똑같이 약탈된 호엘른의 오랜 원한을 풀었기 때문에 그를 산속에 남기고 두 여자 포로를 데리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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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성이 많은 도망자는 3일간이나 산속에 숨은 후 이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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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이 그동안에 생각한 것은 잃어버린 처의 신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보전이었다. 그는 태양을 향해 목에 핏대를 걸고 손엔 모자를 올려놓고 가슴을 두들기며 아홉 번이나 머리를 숙이며 예례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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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은 우리의 가난한 목숨을 살렸다. 그러므로 본인은 여기에 희생제를 올리고 나의 자손들도 여기 따를 것을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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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영원한 창공을 행하여 경례를 한 것이다.
69
오늘날까지 테무친의 이 도망을 기념해서 몽골에서는 ‘나도무’라고 부르는 대국민적 경기가 행하여지고 있다.
70
이 현명한 청년은 겨우 얼마 안 되는 수병을 가지고 아내를 구출해 내는 일을 착수했다. 메르키트 족은 보르테를 호엘른의 전의 남편의 동생인 기르가에게 주었다. 몽골의 기록에 의하면 테무친은 케레이트 칸과 자무카 세치엔한테 가서 메르키트에의 복수에 가세해 줄 것을 구했다. 그들의 조력을 얻어 메르키트의 캠프는 어느 날 밤 결국 테무친의 습격을 받고 테무친은 환한 달빛을 온몸에 받으며 검은 텐트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내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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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드를 믿는다면 사실은 이와 같이 로맨틱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케레이트 칸은 계략을 써서 보르테를 데려왔는데 그 여자가 남편의 텐트에 돌아왔을 때에는 예기에 반하여 쟈기라는 남자 애를 낳았다. 자기의 장남이 타인의 피를 받고 나왔고 아내가 마치 내버린 노예와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이 청년의 긍지에 있어서 큰 타격이었다. 그것은 신부에게 있어서도 역시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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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그 후 세 아들과 많은 딸을 낳고 다른 여자들이 이 정복자의 아내로 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항상 제1부인으로서의 명예와 지위엔 있었으나 부부간에는 벌써 서로의 존경의 마음은 사라지고 있었다. 후에 그 여자는 캠프의 음송(吟誦) 시인과 공연하게 지내게 되어 남편을 부끄럽게 했다. 일대의 영웅도 아내한테서는 행복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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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 칭기즈 칸은 늙어 갔다. 그가 구라파의 온 나라에 준 공포는 조금은 그의 양심을 아프게 했다. 그는 여러 위대한 도시에서 또한 교양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참으로 무학문맹한 야만인이며 자기의 병사들도 이와 같았다.
75
투쟁을 계속하려는 의지가 여하히 크더라도 인생은 결국 끝나야만 했고 수많은 세계의 대국을 차차 정복해 보았으나 아직 정복되지 않은 나라가 남아 있었다. 그는 죽고 싶지가 않았다. 그에게는 자기가 제정한 법률이 가장 훌륭한 것처럼 믿었고 전 세계가 그것에 복종한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고 생각했다.
76
헤라트에 있을 때 포로에게 이마아무 인의 성자가 있었는데 칭기즈 칸은 “자기의 위대한 이름이 후세에까지 남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성자는 “이름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에만 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헤라트를 약탈한 기억은 그의 마음에 너무도 새로운 바가 있었다. 그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활을 땅 위에 내던지고 격분해서 일어섰다. 그것은 그 답변이 그의 갑주 속에까지 찔러 들어오고 그 자신이 자기에게 말해야 할 것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77
또 같은 서장(西藏) 사이에 있어서 그는 중국에 훌륭한 도교의 성인이 있는 것을 듣고 우정 편지를 보내 불러왔다. 정복자와 성인이 만난 곳은 사마르칸트였다. 정중한 인사가 교환된 후 칭기즈 칸의 최초의 질문은 “성인이여, 불로불사의 약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생명을 보전하는 수단은 있으나 불로불사의 약은 없다고 답했다.
78
서장에서의 귀로의 길은 1223년의 봄에 시작되었다.
79
1226년 단구트 왕에 대한 전쟁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칭기즈 칸은 이번엔 철저하게 그들을 정복하고 중국 정복에 대한 기지로 하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무쓰가리의 사후 다시 금(金)이 몽골에 대해서 머리를 쳐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80
그의 정신은 시야의 넓이와 본질적 파악에 있어서는 이전과 다름없이 명철했으나 육체는 이미 쇠퇴해 가고 있었다. 그 후 군대가 전선을 향해 진군해 가는 도중 그가 탄 당나귀가 들말에 놀라 뛰는 바람에 그는 낙마해서 몹시 부상을 입었다. 그날 밤 열이 심해 드러누워서 그는 자식들을 베갯머리에 불러 앉히고 말을 했다. “이번만은 나의 최후의 싸움이다. 나는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건설한 대제국을 형제들이 친화하게 자기의 영토를 지키며 지배하도록 훈계했다. 단구트 족은 패배하고 군대는 중국을 향했다. 칭기즈 칸의 병은 나날이 더하여 이젠 사기에 가까워졌다.
81
“내가 죽어도 전쟁을 그만두지는 말라. 또 절대로 근심하지 말라.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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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는 막료들에게 말했다. 수부가 떨어지거든 단구트의 왕과 부하를 전부 죽이라는 것이 최후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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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년 8월 현대의 감숙과 섬서와의 경계인 와이 강 부근에서 그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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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매장의 땅은 오늘날까지 불명이다. 아마 그가 청년시대에 생명을 구하게 된 발칸 산이라고도 한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드에 의하면 어느 날 그곳에서 산사를 할 때 어떤 한 가지의 아름답고 고독한 나무를 보고 그는 속으로 깊은 감동을 느끼고 그 아래서 잠시 명상하여 앉은 후 일어 섰을 때 “여기는 내 영면의 땅에 적합하다. 잘 기억해 둬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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