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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사막 횡단의 이 여행은 그 후 십여 성상이 지나간 오늘날에도 무슨 신기한 기적 같이 넉넉히 나의 기억에 살아 있다. 그것은 마치 넓은 캔버스에서 찢어낸 한 조각의 그림처럼 나의 전 생애의 가지가지의 추억과 회상의 망막한 안개 속에 그렇게도 뚜렷하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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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구릉의 우울하고 단조한 기복, 적회색의 광막한 풍경, 아득한 지평선의 안타까운 암시 혹은 석양을 등지고 선, 라마사원에 웅장한 고탑(高塔)과 저물어 가는 사막에 초라하게 서 있는 한 모닥의 수풀, 그 그늘에 버리고 간 유목민의 천막 자취의 산란하고 쓸쓸한 광경 또는 놀랜 짐승들의 황겁한 일주와 총알에 넘어져 모래를 물들이는 그 붉은 피, 이러한 모든 것이 서로 얽히어 때로는 다시 비할 데도 없이 아름답고 황홀하게 가지가지의 순간을 잊을 수 없이 나의 뇌리 깊게 새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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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구를 떠나서 닷새째의 석양 사막에 지는 해가 그 최후를 화려한 색채로 온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할 즈음에 우리 일행을 태운 자동차는 멀리 울란바토르 곧 혁명정부에 의하여‘적색구인의 도시’라는 새 이름을 얻은 고륜의 시가를 바라보면서 탄탄한 경사를 시원스럽게 한숨에 달음질쳐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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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산에 에워싸인 분지의 한복판을 흐르고 있는 이 아시아식 도시는 우선 구릉 사이에 뾰족 솟아 때마침 황혼의 장미색에 곱게 물들여진 하늘에 그 금빛 찬란한 광채를 마음대로 자랑하고 있는 라마사원의 고탑으로서 우리에게 환영의 인사를 보내었다. 낡은 세력과 새 세력의 교대, 파괴와 건설의 교착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일시적 황량과 문란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얀 눈이 다양한 변화를 모조리 그 단조로운 흰 보자기 아래 쓸어 덮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나타난 옛 도시의 아름답고 불가사의한 매력은 결코 상상한 바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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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우라! 소리로 높이 시가의 중심으로 들어선 우리의 자동차는 몽고 상사회사 지점 문 앞에 그 긴 여정에 최후의 종결을 짓고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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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에서 보낸 최초의 밤을 기념할만한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긴 여행의 피곤도 있었거니와 그보다도 일단의 목적 지점에 무사히 도달하였다는 안도가 지금까지의 긴장을 풀어놓아서 아무데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 동지도 내일이 아니면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동행의 중국 상인들도 모두 외출을 하지 않고 다 같이 하룻밤을 이 몽고상사회사 지점에서 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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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밤의 기억을 들쳐 낸다면 그것은 도중에 사냥한 산양이 한 마리 남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본식으로 요리해서 저녁을 먹었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리에는 낙망하였다. 이곳에는 세련된 요리인도 있었고 완전한 설비와 충분한 원료도 구비되어 있었건만 식탁에 나온 음식의 맛은 가솔린 통에서 해먹은 사막의 요리에 도저히 따르지도 못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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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깊은 한밤의 잠에 고달픈 심신을 쉬이고 잠을 깬 이튿날 아침 나는 시가지로 나가 보았다. 아직 때는 일렀으나 벌써 사막도시의 주민들은 그 일상생활의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라마사원의 하얀 고탑 그늘을 붉은 옷을 입은 라마승이 머리를 숙이고 수심에 쌓여 걸어가는 이면에는 이 나라를 찾아오는 새로운 운명에 눈 뜨기 시작한 청년들의 떼가 활발스럽게 거리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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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이 낙타 털실을 실 바퀴에 감고 있는 일터 옆에는 내왕하는 행인들을 위한 음식가게가 벌어져 있었다. 간단한 식탁이 노상에 벌여 있고 바로 그 옆에 화덕에서 요리하는 음식물을 넉넉지 못한 계급의 행인들이 사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웃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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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인의 천성을 이루고 있는 풍부한 다양성은 그들의 복색에도 나타났다. 중국인의 의복 빛이 단순한 청 ․흑에 그치는 것과는 아주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서 몽고인은 실로 다종다양한 갖가지의 색채를 대담하게 자유롭게 그들의 의복에 채용하였다. 당당한 신사와 고이 늙은 노인들이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린애밖에는 입지 않는 울긋불긋한 극채색의 옷을 입고 평연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을 눈앞에 볼 때에는 벌써부터 잘 알고 있는 풍속이었으나, 이양(異樣)한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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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숙소인 상점에 돌아온 후 나는 오정 때 쯤 되어 예정대로 이곳에 와 있는 소비에트 대표 옥흘라 동지를 방문하기 위하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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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온 주소록이 가리키는 대로 찾아간 그의 저택은 시가의 한 모퉁이에 거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 그 깨끗한 순유럽식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 맞아주는 그에게 나는 이름을 말하였다. 커다란 따스한 손으로 나의 손을 쥐면서 그는 쾌활하게 나의 도착을 매일 같이 고대했다는 말과 고륜에서 떠나기로 되어 있는 동지들도 동행할 예정으로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이런 말을 황급히 하면서 현관을 지나 응접실에 들어서니 거기에는 벌써 먼저 와 있는 방문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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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흘라의 소개에 내가 인사를 나눈 그는 모스크바에서 오랫동안 법률을 연구하고 돌아온 후 당시 혁명정부의 최고 고문의 한 사람으로 있는 에린치노프라는 부리야트족(몽고족의 일부)의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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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인 되는 마류사 남은 해삼위 태생의 조선부인 남만춘의 둘째 매씨로 소위‘얼마재’라 한다. 모스크바에서 미술을 연구하고 있을 때에 에린치노프와 서로 알게 되어 마침내 국제결혼을 한 후 부군을 따라 이곳에 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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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유목의 생활에서 한꺼번에 역사의 가장 새로운 열매인 새 생활체제로 뛰어 넘으려는 광휘 있는 노력이 시험되고 있는 곳에 생활과 투쟁의 무대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광막한 고비 대사막 한복판 옛 도시에서 자기와 같은 민족의 한 사람을 대하였다는 느낌은 일종 기묘하고 이상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교환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으나 서로 쳐다보고서는 몇 번이나 의미도 없이 웃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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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무엇을 우리들만이 잘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러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특별한 사연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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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담이 화제가 되어 한참동안이나 벌어졌던 담소가 끝나고 각각 집으로 헤어질 때에는 우리는 십년지기같이 가깝고 따뜻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몽고상사회사 지점으로 돌아온 나는 콜맨 씨를 만나 회계를 마친 다음 고륜에 체재하는 동안의 숙소를 따로 정하였다. 새로 정한 숙소는 천진에 있는 중국 부호가 경영하는 미풍공사 고륜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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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소연한 정세로 말미암아 일시 상업이 두절상태에 빠진 이 공사는 넓은 점포에 집 지키는 노인 한 사람과 심부름꾼 두 사람을 남겨 놓고 모두 중국 본부로 돌아가버린 뒤였으므로 나는 교묘히 천진 본점에서 온 사람처럼 행세하고 고륜 체재의 8일간을 이 집에서 편안하고 호화스럽게 지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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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 도착의 첫 밤을 몽고상사회사 지점에서 같이 지낸 후로는 동행한 중국 상인들과도 다시 만나지 않았다. 고륜 도착 후 제3일에는 옥흘라의 만찬 초대가 있었고 그 다음날에는 에린치노프 부부의 초대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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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류사 남은 이날 밤 초대연에는 조선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서 나를 맞았다. 미술을 연구한 사람인만큼 예술방면에 취미와 교양이 넓고 깊은 그는 러시아 민요의 훌륭한 가수였다. 나는 그에게서 몇 곡의 감명 깊은 노래를 들었다 그 중에 동해 백두산과 . 남러시아의 코사크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은, 그 가사와 곡조를 모조리 잊어버린 지금도 그 노래의 정서와 분위기만은 아득히 기억에 살아 있어, 그날 밤을 상기할 때마다 맘속에 적이 배회할 만큼 깊은 감동을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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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류사 남은 난 지 두어 달 된다는 어린애를 유모에게 안겨서 나왔으나, 그의 젊은 빛이 붉게 타오르는 뺨과 맑게 검은 눈동자는,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따라 놀랄 만큼 자유롭고 대담한 변화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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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높이 내어 놓으면서 길게 내뽑는 목소리가 고조와 감동의 절정에 달하여 거기서 질식이나 할 듯하다가는 별안간 돌연히 먼 지평선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나 같은 나지막하고 그윽한 탄식이 이 고조된 감정을 솜씨 좋게 조요한 영탄으로 이끌어 내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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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승리의 고양이 때로는 패배의 절망이 마치 서로 도망하고 쫓아가고 하는 듯이 얽히면서 실로 변화 많은 멜로디의 세계를 유감없이 전개하여 주었다. 황량한 사막의 여행에 며칠을 두고 시달려온 나에게 그것은 다시없이 고맙고 귀중한 대접이었다. 유쾌한 흥분에 두 뺨을 보기 좋게 홍조시킨 마류사 남이 노래를 마치고 났을 때 나는 무의식 중에 감탄의 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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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류사 남이 조르는 판에 하는 수 없이 나도 두어 곡 조선 노래를 하였다. 에린치노프도 노래를 불렀다. 부리아트족의 노래라는 목가풍의 민요를 두서너 가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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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의 유쾌한 야회가 다 마칠 즈음 마지막으로 홍차를 나의 앞에 가져 왔을 적에 나는 처음으로 마류사 남의 입에서 한마디의 조선말을 들었다. 차무르 잡수찌!(찻물 잡수세요) 러시아에서 낳고 러시아에서 자라난 이 ‘얼마재’ 여인이 할 수 있는 이것이 오직 한 마디의 조선말이었다. 그전에나 그 후에나 우리의 대화는 물론 구라파 말을 빌려서 교환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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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치노프의 집 야회 다음날 나는 옥흘라 동무의 소개로 혁명정부의 외교부에 외교부 최고고문이요 외몽고의회 의장인 단싱(丹増)이라는 몽고동지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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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정부 시대부터 외교관으로 있던 사람인데 이 넓은 몽고 땅에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라고는 그밖에 없어 그가 야쁜 단싱 곧 일본 단싱이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것도 그 까닭이라 한다. 시가의 중심지대에 있는 붉은 벽돌 이층집 외교부에 이르러 안내를 청하니 마침 단싱이 와 있어서 곧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용건은 . 러몽 국경에 있는 소도시 트로이카 삽스크까지의 여권과 또 몽고 정부시설인 역마의 편의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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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카 삽스크까지 약 4일간의 여정은 도중 곳곳마다 있는 역마을(駄站[태참])에서 말을 갈아타는 정부시설인 역전마차의 힘을 빌지 않고는 도저히 갈 길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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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넓은 응접실 탁자를 둘러싼 몇 개의 쿠션이 다 떨어진 안락의자와 장의자 등이 단순한 실용적 목적 이외에는 아무런 고려도 보이지 않고 살풍경하게 이곳저곳에 버려있는 데서 우리는 초대면의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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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싱의 흥미와 관심은 곧 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 운동에로 화제를 쏠리게 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몽고의 새로운 정권의 포부와 사업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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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는 중국어였다. 원시적 유목 생활과 오랜 세기의 신비로운 종교와 미신에 뼈 속까지 적신 뒤 떨어진 대중을 가장 발달된 인간생활의 과학적 질서인 사회주의적 계단으로 이끌려는 신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곤란스럽고 장해 많은 것인가를 그는 변화 많은 표정과 함께 누누이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 가운데서도 특히 나의 흥미를 강렬하게 끄는 것은 라마교에 대한 신정부의 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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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사막과 광대한 천지를 그 생활 무대와 배경으로 삼는 이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유목민족의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담한 능동성과 다양한 창조적 천분을 싹 돋기 전에 잘라내고 거세한 황소처럼 미련하고 무기력한 인민으로 만들고만 저‘인민의 아편’에 대하여 새 시대를 대표하는 신흥세력이 얼마나 맹렬하고 철저한 제재의 손을 내리고 있을까 하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단싱의 설명은 좀 더 다른 코스를 신정권의 대표자들이 취하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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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지도하려는 자는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참을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더욱이나 그들의 정신생활의 낡은 습관에 대하여서는 무섭게 보수적입니다. 십수 세기를 통하여 그들의 정신생활을 지배하여 온 후 둑두칸(活佛[활불])의 영향을 일조일석에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공상이외다. 민중을 항상 벗으로 삼으면서 그러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편견과 미신은 도무지 온갖 그들의 정신적 질병을 깨끗이 씻어내려면 끈기 있게 서서히 꾸준하게 그들을 가리키고 계몽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혁명정부가 취한 종교적 정책은 라마교 사원의 파괴도 아니고 그 재산의 몰수나 승려의 추방도 아닙니다. 오직 ‘순결무후한 원시적 불교로 돌아가라!‘ 는 슬로건뿐이었습니다. 원시의 불교도는 순결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권력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민중과 함께 종래 후둑두칸의 수중에 장악되고 있던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몽고 민중의 정치적 생활에는 완전히 몰교섭하고 또 무력합니다. 사원내의 예배나 근행(勤行)은 그들의 자유에 아직 맡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의 불교도는 청렴하였고 가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라마승이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재산도 물론 옳지 못한 것이지 이렇게 대중에게 가르치면서 우리는 민중과 함께 이 거대한 적의 손에서 그 경제적 기반까지도 탈취하고 말 예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앞으로 수행될 프로그램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종교정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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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우리는 위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은 응접실보다 더 한층 황량하였다. 넓은 방 한편 구석에 널판으로 만든 나지막한 선반이 있어 그 위에 벼루 상 ․벼루 ․먹 ․연적 ․붓 그리고 당지 한 첩 이것이 외무부 사무실의 비품 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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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들어가는 인기척에 옆에 방에서 나온 이가 신정부의 외교부장이었다. 단싱의 소개로 용건을 듣고 나더니 그는 그 자리에서 여권 작성에 착수하였다. 커다란 당지에 붓으로 그림도 같고 글자도 같아 보이는 몽고 문자를 2, 3자 적는 것이 아마도 20분은 넉넉히 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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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묘한 글자를 다 그리고 나자 그는 커다란 말 만큼이나 한 도장을 그 위에 번듯이 찍고서 만면의 웃음과 함께 그것을 나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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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와 굳게 악수하고 헤어졌다, 헤어질 적에 단싱은 자기도 모스크바 대회에 출석하기 위하여 출발하겠는데 준비가 채 못 되었으니 3,4일만 더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뜻하지 않게 8일간이나 이 낡은 아시아식 도시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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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마쳤다. 남은 일은 오직 기대하는 일 뿐이었다. 단싱 뿐만 아니라 몽고서 떠나갈 청년대표 유학생들을 모두 합하면 10여 명이 넘는 동행이 생겨서 그것만은 유쾌하고 기뻤으나 그들의 출발 준비를 기다리는 4,5일간은 꽤 심심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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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무료의 맘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루는 이곳에 있다는 조선 사람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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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태준이라는 청년 의사로 몽고서 보낸 5,6년간의 생활을 오로지 저열한 문화수준과 불완전한 위생시설 탓으로 민중 사이에 만연되는 가지가지의 질병 박멸에 바치고, 마침내 이 이역의 흙에 그 짧은 일생의 최후를 마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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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겐 남작의 패잔군이 고륜을 노략할 때에 고륜의 주민뿐만 아니라 이태준 병원을 탈략하고 이군을 학살한 것이었다. 부근 부락의 주민들까지도 이 유명한 까울리(고려:조선)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동무들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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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민중의 생활을 망치는 정신적 질병이 라마교라 한다면 그 가장 고약한 육체적 질병은 화류병이었다. 전 주민의 7,8할이 화류병 보균자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나도 그것이 설마 사실일까? 하고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태준 의사의 노력은 이 화류병 전멸에 많은 공헌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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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게 맑은 새파란 하늘에 따뜻한 정오의 태양이 걸린 겨울날에는 드문 청량한 일기였다. 시가를 나서 모래 섞인 적토의 탄탄한 가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발길도 가볍게 나는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의 비탈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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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반사에 빛나는 먼 산복에는 전신을 눈같이 새하얀 보드라운 털에 덮인 양들이 두서너 마리씩 떼를 지어 우물거리고 있는 것이 아물아물 보이고 서늘한 바람은 보행에 상기된 이마의 땀을 상쾌하게 씻어 주었다. 가도가 차츰차츰 산기슭에 가까워지자 가볍게 구부러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잠깐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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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말 그대로 끝이 안 보이는 대평원이 꽤 큰 고륜 시가를 마치 조그만 콩알같이 그 광무 속에 담겨 있어 아득히 보이는 희미한 지평선 가까이는 떠도는 광선처럼 산야의 떼가 출몰하고 있었다. 기묘한 걸음걸이의 낙타도 여기저기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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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축 떼에는 흔히 목인(牧人)이 따르지 않았다. 혹 따른다고 하더라도 오직 한사람이 말을 타고 멀리 떨어져서 망을 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보고 선 나에게 인사나 하려는 듯이 일부러 말을 달려서 뛰어오는 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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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채 다 오기 전에 그는 적당한 거리에 말을 멈추고서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황진을 날리면서 돌아갔다. 그러할 때에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 나타나는 소박한 선의와 강렬한 호기심, 발랄한 흥미와 쾌활한 성격은 다시없이 유쾌하고 기쁜 것이었다. 더욱이나 그들의 승마의 묘기에는 다만 입을 벌리고 감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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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라도 말만 태우면 밥도 잘 짓겠다” 고 (몽고인은 양을 삶아 소금도 안 쳐 먹음으로 음식 만드는 법이 제일 발달되지 못했다 한다) 이 민족을 평한 구라파인의 말을 생각하면서 나는 미소와 함께 이 승마의 쾌한(快漢)을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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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산비탈을 빈약한 왜림이 이곳저곳 덮고 있는 경사지의 한복판에 찾아간 나는 묘지를 발견하였다. 간소한 분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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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건너 쪽에 보이는 이 근처의 오직 하나의 울창한 숲을 가리키면서 안내해 준 몽고 동무는(그 숲은 고륜의 남산 몽고인이 거룩한 산이라 일컫는 곳이라 한다)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경치를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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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도 오히려 어둠침침한 울창한 숲속으로 헤쳐 들어가 울창한 수림사이에 갑자기 극채색의 화려한 꽃밭을 발견하였을 때의 돌연한 경이와 환희를 그는 고조된 어조로 말하였다. 이곳에 피는 한대(寒帶)의 화초는 대개가 극히 화려한 양력 6월 하순이 만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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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한 이 교외 산책 외에도 나는 고륜에 있는 동안 대개 매일같이 교외로 나갔었다. 승마 연습도 했고 또 산보도 했다. 그리하여 이 땅이 가지고 있는 저 매력 있는 풍경을 마음껏 만끽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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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 도착 8일 후 준비가 모두 끝나 일행 십여 명은 마침내 서로 전후하여 대망의 모스크바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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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명의 다수가 한꺼번에 길을 같이 하는 것이 불리하다 하여 우리는 서너 번에 나누어 떠나기로 하였다. 우선 제1출발대의 선진은 나하고 단싱 두 사람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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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튼튼한 양두마차에 여행에 필요한 하물을 가득 싣고 국빈 대우의 우리는 의기당당하게 출발하였다. 바닥에는 건초를 깔고 그 위에는 양피를 깐 차실(車室)에 준비한 여행복을 입고 비스듬히 앉은 우리로 날아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동북쪽으로 고원의 경사를 시원하게 달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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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기복한 구릉이 사막의 단조한 평탄을 완화하고 있는 외에는 여전히 일망무제의 대평원이 다시금 눈앞에 한없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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