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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小說)의 장래(將來)와 인간성(人間性) 문제(問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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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3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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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소설]의 將來[장래]와 人間性[인간성] 問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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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전환기를 맞이할 때마다. 인간성의 문제가 새로운 각도로부터 다시금 상정되게 되는 것은 무슨 때문일까? 전환기란 말할 것도 없이 부정되어야 할 낡은 시대와 긍정되어야 할 새로운 시대의 중간에 낀 기간을 이름하는 것인데, 이러한 때 새로이 역사의 계단을 찾아올 시대는 전대의 기초가 되어 있던 낡은 인간을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 이념을 창조 확립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가 낡은 시대를 청산하고 과도적인 전환기를 아름답게 극복하려면 여하한 의미에서든지 자신의 가운데 휴머니즘을 포함치 아니하고는 그의 임무를 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제출된 인간성의 문제란 일방 인간 이상의 상망(想望)이라는 각도로부터, 기존하는 인간형의 극복과 당래(當來)할 인간의 새로운 이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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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개념의 본래의 창조자를 저 멀리 기원 전의 키케로에서 발견한다고 하여도, 그의 욕구는 의연히 교양의 결핍을 인정한 로마인의 생활 이상으로서의 희랍적 인간에 대한 상망 때문이었다. 로마인의 자기 생활에 대한 반성이 인간성의 개념을 창조케 하는 삯이 되면서 또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희랍적 인간의 교양과 내적 높이로부터 자기네들이 멀리 상거(相距)하여 있다는 반성을 가졌을 때, 희랍적 인간을 인간 이상으로 느끼는 로마인의 인간성의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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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또한 세계사상 획기적인 전환적 의의를 가지는 문예 부흥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휴머니즘의 기본적인 개념이 규정되었다고 생각되는 르네상스에 있어서는 중세의 봉건적 인간 이념의 양기(揚棄)와 새로운 근대적 인간 이상의 창조 확립이 역사적인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적 가치, 새로운 인간상, 이것을 향해서 집중된 노력은, 그대로 중세의 봉건적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성의 억압, 인간성의 왜곡, 인간성의 천대에 대한 안티테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근대 인간이라고 이름하는 페트라르카는 중세적인 잔재물이 아직도 다분히 남아 있는 그들의 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멀리 고대를 돌아보았다고 전한다.‘나에게는 나 자신의 시대가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나는 고대를 연구한다. 현대(페트라르카의 시대니까 14세기)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른 시대속에 몸을 두어보려고 애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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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세로부터 찾아낸 근대 인간이 만든 사회 환경과 그들이 그들의 인간 이상에 준거해서 제도화한 모든 생활 문화는 다시금 인간성을 하나의 관습 속에 가두어두는 결과를 재래(齎來)하지는 아니 하였는가. 환경과 문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나, 그것은 다시금 인간을 관습의 시멘트 속에 경화시켜버린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중세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성의 존중과 인간 본성에 준거하여 새로이 꾸며졌던 환경이, 그 뒤 16세기를 지나 계몽 시대와 18세기말의 독일의 노도질풍기의 휴머니즘을 거쳐서 근대의 종언이 가까워짐을 따라, 점차로 인간 자체를 소외하고 개인주의와 인간의 타락을 결과함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근대적 인간 이념에 굳어진 시멘트로 화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벌써 19세기의 말기에 이르면 하나의 질곡으로 전화되어버린 시민적 인간 이념으로부터 완미한 인간성을 찾으려는 전혀 새로운 휴머니즘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니, 그들의 서는 바 발판과 구상하는 생각이 각각이라 하여 시민 사회의 폐해와 시민 문명의 경화된 관습 속에 굳어져버린 기식엄엄(氣息奄奄)한 인간성을 놓고, 멀리 건강하고 명랑한 고전적 이상 인간을 상망하고 있는 심적 태도에 있어서는, 뒤이어 일어난 20세기의 모든 사상가들의 휴머니즘과 함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기는 힘드는 것이다. 조선 문학의 길지 않은 역사에 있어서도, 가량 30년 전, 신문학 초창기의 인도주의가 근대 인간에 대한 상망이었다고 하면 수삼년 전의 휴머니즘의 논의는 근대 인간의 타락의 언덕배기에 서서 인간성의 옹호와 고전적 이간 이상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실상은 후자, 수삼년 전 우리 문단의 휴머니즘이, 안티파시즘을 실천 목표로 하는 불란서 지식인으로부터의 수입이면서도 경향 문학(傾向文學)의 반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활동이나 남겨놓은 성과가 일층 더 소극적인 데 그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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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지금 인간성의 문제가 어떠한 각도로서이든 새로이 상정될 필요 앞에 서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전환기라는 것을 그만큼 더 신체적으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현대가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의 개조라고 하는 근원적인 과제 앞에 서서 혼신의 정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는 것도 한 가지로 의미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건설의 단초(端初)가, 만약,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의 청산을 기도치 않을 수가 없어졌다면, 낡은 인간 의식의 소탕과 새로운 이상 인간의 건립을 허술히 하고는 도저히 그의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래의 사회와 문화의 기저에서 이를 받들고 있던 낡은 인간을 부정하고 이것을 초극하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데 의하여, 세계사를 찾아오는 새로운 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기초와 전제를 이루어놓는 데 전환기가 짊어진 커다란 과제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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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떠한 각도로부터 인간성의 문제를 제기하여야 하는 것일까. 우선 우리는 근대 인간을 건립한 르네상스에의 회고와 향수로 향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민 사회의 황혼에 처하여 자의식의 분열과, 인간의 무력과, 인간의 왜곡 가운데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당연히 가져야 할 건강한 욕구로서 명랑하고 건강하고 강력한 르네상스의 인간을 회복하려는 그들의 권리와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인간을 회복하는 것으로써 모든 것은 끝이 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이 지금 폐기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낡은 인간 이념은 기실은 르네상스의 인간 이념이 아니었던가. 르네상스야말로 지금 우리가 부정을 선언하는 낡은 인간을 발견하고 탄생시킨 장본은 아니었던가. 중세의 낡은 인간을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긍정되었던 근대 인간의 이념이야말로 현대에는 낡은 인간으로서 폐기를 당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전환기가 제기하는 인간성의 문제는 또한 르네상스의 휴머니즘과 인간 이념을 극복하고 초월하는데 성립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시민 사회 말기의 인간성과 인간 의식이 이처럼 타락하고 불건강해진 것은, 르네상스의 인간 이념 가운데 내포되어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장래가 만약 인간성의 문제와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응당히 이러한 데서 교섭 면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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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편 소설을 인간성의 문제라는 각도에서 검토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회와 개인이 통일되어 있는 완미한 고대적(희랍적) 인간 이상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문학 형식일는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장편 소설은 무엇보다도 우선 시민 사회의 사회와 인간의 모순의 기록이므로 근대 인간이 획득한‘인식된 개인주의(개성의 자유, 합리주의적 이성)’가 시민 사회의 모순의 표현으로서 나타날 때에, 그의 일체를 기념비적인 산문 형식 가운데 포섭하는 것이 장편 소설의 양식상 본질이었다. 시인이 노래를 걷을 때에 소설은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시가 번영하기 불편해졌을 때 소설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서사시는 집단과 개인이 직접적으로 통일된 인류의 유년 시대, 다시 말하면 희랍적 고대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게 나래를 폈고, 장편 소설은 개인의 처지와 환경을 개선하려는 경쟁의 자유가 반드시 사회의 진전을 약속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개인과 사회가 절리(切離)된 시민 사회의 상태 가운데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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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로부터 인간성을 찾아다가 근대 인간의 이념을 형성하던 봉건 사회 붕괴기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러므로 반드시 소설이라는 형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단테가《신곡》과《신생》을 썼고, 페트라르카가 또한 시를 노래하여 소설에 붓을 들지 않은 것은 그대로 우연의 소치만은 아닐 것이다. 14세기 하반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보카치오의《데카메론》이 나왔고, 라브레와 세르반테스가 각각《가르강투어》와《동키호테》를 쓴 것도 15,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소설은 이때까지도 가령 영국 같은 데서는 아직 전형적으로 발생할 만한 발판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일까. 16세기의 하반기에 활약한 셰익스피어는 극문학을 가지고서 충분히 현실을 개괄할 수 있었다. 서사시와 드라마가 모순의 도폐(塗蔽)와 복잡성과 다양성의 거세없이 유지될 수 없을 때에 가장 전형적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이 다름 아닌 장편 소설이었다. 소설은 발자크의 시대에 와서 그의 절정을 맞이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바로 불란서 시민 사회의 확립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해서 장편 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흥과 함께 생성 발전하여 그의 노쇠와 함께 붕괴되지 않으면 아니 될 운명 앞에 서게 된다. 시민 사회의 모순 속에서 자라나던 부정적 요소가 자립하는 시기에 이르면 소설은 붕괴냐 개조냐의 전환점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모두 일찍이 딴 기회에서 살펴 본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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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경로를 근대 인간의 형성과 그의 파산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소설의 전환점은 근대적 인간 의식이 드디어 하나의 파산에 당도하게 되는 시기와 부합되지는 아니하는가. 사실 소설의 전환점과 근대 인간 이념의 전환점은 같은 시기에 오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벌써 소설에는 발랄한 인간이 등장하지 못하고 생기 있는 리얼리즘에서 떠나서 공허한 객관주의와 황폐한 주관주의가 내용 없는 대립을 보인 채 경화하기 시작하는 것인데 (졸라의 자연주의), 이것은 한편으론 시민 의식의 위기와 근대적 인간 이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톨스토이가 시민 문명의 폐해를 지적하여 인도주의를 제창). 이때를 우리는 대범(大凡) 19세기의 하반기라고 잡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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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순간은 그때로부터도 이미 반세기를 경과하였다. 지금 우리는 소설의 운명과 인간 이념의 운명이 전환기를 맞이하여 하나의 긴밀성을 가지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산문문학(大散文文學)이 개조되어 갱생되는 길과 낡은 근대 인간이 극복되고 그것을 넘는 새로운 인간이 창조되는 길과는 같은 몸에서 나온 두 개의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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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에서 시민 장편 소설의 양식상 본질을 형성시킨 근간이 개인과 집단과의 분리에 있다는 것을 보는 한편 그러한 양식상 본질이 변모되고 상실되는 과정의 밑을 흐르는 물줄기도 또한 개인과 집단과의 시민적인 분리가 아니면 아니 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중세에서 인간성을 찾아온 것이 다름아닌 근대 인간 이념이나, 현대의 왜곡된 인간성을 결과한 것도 또한 근대 인간 이념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조략하게나마 돌아본 결과, 소설의 운명을 극복하는 길이 소설의 양식상 본질을 초극·개조하는 데 있고, 소설의 양식상 본질이 개인과 집단의 분리에 있을 때에 개인을 집단의 상위에 설정한 자유주의적인 근대 인간 이념 자체가 엄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을 우리는 제기 할 수 있었다. 소설의 양식을 개조하는 길은 근대 인간 이념의 초극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멀리 돌아보아 상모(想慕)할 수도 있고 우리들의 상실된 인간성을 그것에다 비준해서 향수할 수도 있는 르네상스의 인간이란 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끼어 전환기를 아름답게 초극시킨 근대 인간이 현대에 와서 이렇게 무력하게 된 것은 무슨 때문인가. 지금 우리는 그것을 간단히나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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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나는 근대 인간의 이념의 근간이, 집단(국가·사회)의 상위에 개인을 두는 데 성립되었다는 것을 언급하여 보았는데, 이것은 어떠한 사정과 경로를 거쳐서 이루어졌던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르네상스의 인간 이념은 중세 기독교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 대하여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대립시키는 데 의해서 성립되었다. 헬레니즘을 종합시켜 아름답게 통일된 중세의 기독교적인 문화와, 그 자각으로서 생겨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신 중심적이었다. 일체의 사물(인간 및 세계)은 신과의 관계에서만 비로소 자기의 의미와 지위를 가질 수 있었고, 인간의 현세(此岸[차안])의 생활도 그 자신으로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은 내세(彼岸[피안])와의 관계에 있어서만 고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生)은 사(死)의 입장으로 이해되고 사의 그림자로서만 파악되었다. 이러한 중세의 인간과 세계 해석에 대하여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적 견해를 대립시키고 인간이 인간 중심으로 관찰될 뿐 아니라, 일체의 세계도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생은 이미 사의 그림자가 아니고, 차안(此岸)은 피안(彼岸)의 준비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운데 적극적인 의의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우선 신 중심의 카톨릭 교권의 지배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중세 봉건 사회로 부터의 인간 해방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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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대 인간의 중세 교권 사회 속에서 이렇게 자신을 확립시키기 위하여는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원죄론에 반대할 필요가 있었다. 아담의 원죄에 의하여 땅 위에 생겨나면서부터 오욕과 죄를 짊어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인간 원죄설에 대립시켜서 르네상스의 인간 이념은 인간 무구론(人間無垢論)을 주장한 것이다. 기독교적 방법(참회·회개)에 의해서 기독교적으로 죄를 벗어나고 순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의해서 부정되었던 불순결과 죄악까지를 인간의 본성으로서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데 의하여 인간 무구론은 성립을 본다. 중세에서 인간의 오욕이요, 죄였던 것이 아무런 개변(改變) 없이 그대로 인간의 아름다운 자연으로서 긍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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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인간 무구를 주장하는 본성론이 기저가 되어 창조된 르네상스의 인간은 아직도 사회 생활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중세적인 교권과 봉건적인 생활 양식에 대하여 기탄없는 비판과 공격을 퍼부었다. 낡은 인간에 의하여 지대(支待)되어 있는 제도와 인습과 권위에서 자신을 해방하면서 기다(幾多)의 불행과 오욕을 빚어낸 장본으로서 중세의 질서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르네상스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칼날처럼 빛난 비판적 지성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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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드디어 무구 인간으로부터 무구적인 이상적 사회 상태를 도출할 수 있다는 사상이 전술한 결과로부터 탄생하게 된다. 인간 생활에 불행한 사정이 남는 것은 외부 사회가 인간과 본질적인 결합을 결(缺)한 탓이라고 하여, 높고도 아름다운 이상적 상태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시민 사회는 이러한 아름다운 이상적 상태가 아니면 아니될 것이었다(헤겔은《법의 철학》에서 프러시아 국가를 이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경제적·정치적·문화적인 각반(各般)에 긍(亘)한 자유주의 이론과 그 실천은 이것을 위하여 생겼고, 이것을 위하여 생각하는 과정에 정비된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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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이러한 자유주의가 그 뒤 무엇을 결과하였는가를, 아메리카의 철학자 ── 자유주의를 갱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존 듀이 박사의 분석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 존 듀이는 자유주의가 제출한 영구적 가치를 ① 자유 ② 자유에 의한 개성의 발전 ③ 연구·토론·표현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지성의 의미의 3요소로 보면서 이 영원의 생명을 지녀야 할 아름다운 가치가 부수적인 모든 요소 때문에 질식을 당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박사는《자유주의와 사회적 행동》이라는 소책자 가운데서 이상 세 요소의 운명을 분석하여 ① 자유 경쟁이 스스로 사회의 복지를 실현한다는 신념은 생산과 분배가 사적으로 통제되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산업과 문화상 자유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고 ② 개성을 동적으로 파악치 못하였기 때문에 인간성의 고립과 사회, 국가에 대한 개인의 추상적인 대립을 거쳐서 개성은 사회와의 부조화를 결과하였고 ③ 지성은 개개의 인간의 분해만을 목적하여 전혀 창조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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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서 혁명은 오탁한 중세 질서를 일소하는 비판적 작업의 완성이었고, 무구 인간과 그것으로부터 도출된 무구한 이상적 상태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혁명 후의 사회 질서는 반드시 예상한 바와 같이 명랑한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산업 혁명에 의한 기계의 채용, 그것으로 부터 생긴 실업자, 실업자의 기능에 대한 증오와 폭동, 구라파의 하늘을 덮는 근대적 공황의 암운 ── 무구 인간으로부터 연역(演繹)된 이상적 사회가 이러한 오욕으로 충만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이성은 예측을 잃고 인간의 사회란 알 수 없는 존재로 화하였다. 그것을 만든 인간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회는 혼자서 제 궤도를 걷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신비력을 가진 것이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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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뜻하지 않았던 혼란과 모순 속에서 새로운 사상은 배태되었으니 그것은 사회절대주의와 인간 본능설이었다고 한다. 그 전날의 인간 중심주의는 사회절대주의로 전화하고, 인간 무구론은 인간 본능설로 전화한 것이다. 신에게 해방되었던 인간은 다시 사회라는 불가사의한 존재 앞에 궤배(跪拜)하게 되고, 인간의 본성은 아름답다고 하였던 인간 무구의 사상은 추악한 현실의 근원이 도리어 인간 내부에 있다 하여 가지가지의 본능을 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르네상스에서 성립되었던 새로운 인간은 이런 경로를 밟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완전히 파산하여버리는 것이다. 인간을 무구한 것으로 생각하여 불행과 혼란의 모든 책임을 외부로 전가시켰던 사상은, 무구한 인간으로부터 연역된 이상적 사회가 결코 예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회절대주의와 인간 본능설을 결과하면서 완전한 파산을 맞이한 것이다. 무구 인간은 외부의 혼란과 모순된 질서를 내부적 연관성에서 파악치 못하고서 사회를 피안에 세운 채 멍청하니 사회 앞에 추상적으로 대립하여 서성거리고 서 있게 된다. 한편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유출된 인간 본능설은 외부 혼란의 책임을 인간 본능에 두는 외부 질서의 혁신에 대해서 아무러한 희망도 가지지는 못한다. 불행은 인간 세계의 숙명으로 되어버리고, 그것을 초극하는 길은 온전히 차단되어 혼란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은 일체를 부정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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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간의 이상과 같은 파산의 경로는 소설의 전환점에 있어 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즉 근대 문학사상(장편 소설사상) 오노레 드 발자크의《인간 희곡》이 점하는 지위와, 에밀졸라의《루우공 마카르 총서》의 점하는 지위의 연대 유별과 차이점 이곳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게 이해되는 것이다. 불란서 혁명은 1879년에 일어났고, 발자크는 1799~1850년을, 졸라는 1840~1902을 살았다.《인간 희곡》은 복고기와 7월 왕정시대의 사회의 역사(1816~1848),《루우공 마카르 총서》는 제2제정과 제3공화제 시대(1851~1870)의 사회의 역사 풍속도다. 연대적으로 서로 꼬리를 잇대어 출생하였고, 계승적으로 불란서 사회의 풍속사를 기도한 두 작가의 차이 ── 전자의 발랄한 리얼리즘과 후자의 경화된 자연주의와, 야심적이고 생기 있는 신흥 부르주아의 성공가와 몰락하는 귀족의 성격의 전형화(전자)에 대신하여, 회색적으로 평판(平板)한 인물과 무색한 디테일의 조사 보고, 분석과 서술의 누적, 통틀어 질식할 실험 방법(후자) ── 이러한 차이는 근대 인간의 파산의 경로로부터 살펴보아 가장 농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진다. 에밀 졸라로부터 장편 소설은 쇠망의 길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그를 전환점으로 하여 문학사의 인간 중심 사상은 사회절대주의와 본능론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근대 인간의 파산은 동시에 근대 소설의 파산이요, 시민 인간 이념의 전환점은 그대로 시민 장편 소설의 전환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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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개의 졸고(拙稿)(전게〈소설의 운명〉) 중에서 장편 소설의 연대 유별의 공식을 소개하고, 시민 장편 소설이 에밀 졸라를 전환점으로 하여 하나는 고대적 서사시에의 접근을 꾀하여 양식상 개조로 향하였고, 또 하나는 소설 형식의 붕괴를 좇아 소설의 밑창을 보아버렸다는 것을 말해둔 적이 있었거니와, 후자, 소설 형식의 붕괴의 방향은 주로 20세기에 들어온 구라파의 천재적 작가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보아진다. 근대 인간이 파산한 뒤에 구라파 전체를 찾아온 것이 하나의 니힐리즘이라고 생각하면서 카를 뢰비트 교수는〈구라파의 니힐리즘〉의 가운데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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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의 허무를 예술과 정신의 모든 수단으로써 표현하는 것은, 장편 소설의 가능성을 완전히 마셔버린 작가들의 과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가들은 참된 인간 세계를 형성할 수가 없다. 오직 지성의 갈등, 영(靈)의 반동, 사회의 관계를 분석할 뿐이다. 프루스트·지드·토마스 만·헉슬리·말로·로렌스·조이스·세리누 이들은 벌써, 세르반테스로부터 디킨즈에 이르기까지의 발자크로부터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의 위대한 장편 소설과 같이 인간의 우주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인간에 관한 절망적인 진리를 매개하는 것뿐으로 거기에는 인간 그 자신이 자태를 감추어버렸다. 근대의 섬세하고 일분의 틈새도 없는 심리 소설은 무의식의 세계를 일삼고, 감각과 본능의 유동하는 세계에 몰두하고, 동시에 고도로 발전한 지성에 의하여 극단적으로 분규(紛糾)스럽다. 거기서는 인간은 무의식의 힘과 이성의 힘에 찢기고 분열된다. 근대의 소설가는 아무리 재능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창조적 상상력의 현저한 결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저 자기 자신 속에 몰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괴롭히는 악현실(惡現實)의 묘사에 전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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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사회의 혼란과 인간 의식의 분열을 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외부와의 투쟁에 패배하고 내부 의식 속에 침잠하여 제임스 조이스에서와 같이 심리 의식의 일대 기념비를 쌓아 올린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아무런 모랄이나 또는 그것을 통하여 어떠한 인간적 가치나가 발견되거나 창조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영국 비평가들의 일치하는 의견이라고 전한다. 생명 있는 인간을 잊어버리고 공허한 관념만이 남는 데 반기를 든 로렌스는 생명과 혈과 육과 그 밑을 흐르는‘암흑의 신’을 찾으려 성과 본능의 세계로 달려갔으나 그에게 나타나 것은 일종의 본능설에 불과하지는 아니하였는가. 근경(近頃), 급속도로 휴머니스트가 되어졌다는 올더스 헉슬리에 있어서도 인간과 사회의 분석은 해체적이고, 환멸과 회의가 나래를 편 지식인의 냉소와 자학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말과 20세기의 우금(于今)에 이르기까지 가장 성실된 태도로 인간을 토구(討究)하여왔다는 앙드레 지드에 있어서는 인간은 그대로 사회나 집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개인일 따름이었다. 사회란 많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그의 저명한 몇 개의 작품, 예컨대《화폐 위조자》같은 것도 일종의 사회 연구임에 틀림없으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회는 개인을 단위로 하는 산술적인 가감(加法[가법])·승법(乘法)에 머물러 있을 뿐으로 사회를 유기적 조직체로 인정하는 것을 그는 극도로 기피하고 있다. 요컨대 작가의 태도가 창의적이고 성실할수록 소설의 형식과 양식은 붕괴되고, 인간성은 상실되고 인간의 완미한 통일된 자태는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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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근대와 구라파 정신 그 자체의 임종에 제회(際會)하여 소설을 개조하고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또 하나의 방향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시민 소설의 양식 본질이‘인식된 개인주의’에 있고 근대 인간의 형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근대 인간 이념을 넘어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길, 집단과 개인의 분리를 초극하고 행동과 사상이 통일된 완미한 성격을 창조하는 길, 위에서 가능할 것임을 우리는 곧 상상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와 개인과의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관계를 청산하고 고대 희랍적인 인간 이상을 실현시키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길 위에서만 소설의 개조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편 소설을 개조하고 발전시키려는 생각이 집단과 개인의 직접적인 통일이 이루어져 있던 고대적 사회와 그 위에 발화(發花)하였던 고대 서사시와의 양식상 접근을 기도하려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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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보아온다면 소설과 인간의 운명이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전환기의 극복이라고 하는 세계사적 욕구와 직선적으로 통한 채 현대의 과제 속에 합류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그다지 곤란한 일이 아닐 것이나 그러나 소설의 개조의 방향을 고대 서사시에의 양식상 근점에서 발견하고, 인간 개조의 방향을 완미한 인간성의 창조 가운데서 발견한다고 하여도, 이곳까지 이르는 도정이나 또는 이것을 가능케 할 이론의 정비와 실천의 과정이나가 복잡다단하고 다기다양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치 곤란한 사업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완미한 성격, 개인의 도덕적 의지가 자발적으로 곧 집단 전체의 의식으로 통할 수 있는 발랄한 고대적 이상 인간의 부활 없이 고대 서사시와 접근하는 새로운 양식의 대산문학(大散文學)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현대는 무엇을 저의 과제로 하여야 할 것인가. 설사 이러한 고원 한 (高遠) 역사의 의욕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는다고 하여도 가령 지금 우리들의 논제가 당면해 있는 완미한 이상 인간의 건립이나 새로운 인간 이념의 창조는 어떻게 하여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새로운 현대의 휴머니즘이 인간성의 문제에 있어서 소설의 과제와 그 임무를 한가지로 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의 단초를 발견치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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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나는 근대 인간을 건립한 르네상스에의 회고로 향하려는 현대인의 향수 심리에 대하여 언급해둔 적이 있었거니와 일모(日暮)를 맞이하여 아직도 건강성을 잃지 않은 현대인의 마음이 르네상스의 예술 가운데 충만되어 있는, 건강하고도 아름다운 색조와, 생명과 희망에 약동하는 인간상으로 향하여 열려져 있는 것을 누구나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인간들의 생활과 관념이 우리들의 정신을 붙드는 바에 실로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간으로부터 새로운 인간형의 모범을 구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조략하게나마 언급해두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회절대주의나 본능설이 근대 인간 이념의 전화 과정에서 튀어져 나온 것이라고 하여도 르네상스의 휴머니즘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제한으로부터 이것들이 생겨난 것임도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르네상스의 인간에다 자기를 연결시키는 것 이상으로 그것과의 대립에서 새로운 인간 이념을 탐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새로운 인간 이념을 창조하기 위하여 르네상스 인간 이념의 근간이 되어 있는 인간 무구론과 무한정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하여 반성이 있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구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인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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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하여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하나의 습관의 통일체로 보는 견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는 아니할까.‘조건반사론’에 의하면 사람의 본능은 근본적으로는 후천적으로 습관에 의하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되어진다. 인간의 행동 양식은 출생후 주위의 사회로부터 배우는 후천적인 것이어서, 인간은 대체로 사회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도 또한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사회가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데는 사회의 성원이 일정한 형식으로 행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 궁극의 근원으로 되어 있다. 사회는 인간에 습관을 가르쳐서 인간을 살게 하는 한편, 또한 이것을 통하여 자기를 살린다. 만약 사회가 유한한 것이라면 그 속에서 생겨난 인간도 이것에 응하여 유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기의 유한성에 의하여 사회의 유한성을 받들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 사회의 유한성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아니 된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을 추악한 현실과 인간과의 간(間)에 우연한 관계만을 발견하여 그곳에 내적인 필연적 관련을 보지 못하고 사회와 인간을 추상적으로 대립시켰거나, 모든 책임을 인간의 본능에 전가시켜서 환경과 외부 사회에 대한 인간의 능동성을 수기(手棄)케 하였으나, 지금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매개로 하여 인간 자신의 혁신과 연결시켜서 사회의 유한성을 초극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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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인간을 만들어진 물건으로서만 인정하여 만드는 힘은 이것을 온전히 신에게만 허락하였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만 파악하고 인간이 만든 물건이 다시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건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나타났을 때 헛되이 이것을 신비화할 밖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의 휴머니즘에 있어서는 인간은 만들어지는 물건이면서 또는 만드는 물건이란 것이 깊이 파악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인간은 사회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건임에 불구하고, 사회를 만드는 물건이다, 혹은 사회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회를 만드는 물건으로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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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인간을 파악하는 데 의하여서만, 왜곡된 인간성에 대한 증오와 인간 능력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찬미가 아무런 모순 없이 통일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나드네》와 《크림삼긴의 생애》의 저자가 인간성의 해방과 말기 개인주의 의식의 고발을 거쳐서 고대 서사시로의 근접의 길을 개척하려고 기도하였다는 데는 충분한 고려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간 이념의 창조나 장편 소설의 개조의 방향은 이러한 곳으로부터도 그의 단초를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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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소설의 장래에 대해서는 조선 근래 소설의 발달상의 특이성과 조선에 있어서의 근대 인간 이념의 미발달의 특수성에 의하여 전혀 새로운 검토를 요하는 것이나, 매수 관계로 딴 기회에, 특히 조선 장편 소설의 전환점이라는 각도에서 이 문제에 언급해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원문】소설(小說)의 장래(將來)와 인간성(人間性) 문제(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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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1941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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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