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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흑과 더불어 3개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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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6
박인환
1
암흑과 더불어 3개월
 
 
2
불과 3일간의 싸움을 하고 우리 군대는 서울을 떠났다. 한밤을 자고 나니 비는 개고 듣지도 못한 탱크 포성이 서울을 진동시켰다.
 
3
불길한 감정을 품고 새벽 거리로 나갔다. 정막을 뚫고 탱크의 막진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의 의식을 빼앗아갔다.
 
4
자유가 사라진 주검의 고장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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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아 나는 축 늘어진 어깨와 비틀거리는 의식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괴뢰군의 수발의 총성을 들었다.
 
6
그것은 패주한 국군 용사를 향해 난사하는 발악의 총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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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쓰러진 자유의 군대…… 이름 모를 젊은 군인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본 것이 이것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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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과 체포 납치는 서울 도처에서 벌어졌다. 가옥에 대한 불법침입과 물품 강제압수는 매일 밤이면 밤마다 일어났고 젊은 청소년은 소위 인민군대라는 이름으로서 잡혀갔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그 후 죽었다.
 
 
9
정막보다도 무서운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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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語]와 행동을 잃은 시민은 그저 눈을 뜬 시체라고 형용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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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아침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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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나와 같은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이냐. 어제까지의 모든 희망과 꿈은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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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었던 정부와 군대는 아무 소리도 없이 도망쳐버리고 불쌍한 자유시민만이 이 주검의 도시를 지키기에는 너무도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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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주검뿐만 아니라 간단없이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또다시 쓰러져간다. 나와 알지 못하는 청년이 아니라 친척집에서 이웃집에서 사람이 끌려가 사직공원이나 미아리 밖에서 총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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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뿐이라면 좋았다. 어제까지 우익을 가장했던 사람이 급진적인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범죄 전과자들이 인민위원장이 되어 노력동원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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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을 신문지상에 공포한 문학자와 미술가들이 해방의 날이 왔다고 거리에 날뛰며 이곳저곳에서 김일성이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만화가들이 의기양양하게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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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을 위해 빵가게를 연 여류소설가는 며칠 전까지는 공산주의 반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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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기만과 표변의 계절은 무더운 날씨와 함께 우리의 주변을 휩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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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은 하나 정신의 내부는 기절 상태이며 입에서 말소리는 들려오나 그것은 의미가 없다 친한 친구와 . 손을 잡을 때 싸늘한 냉기가 표정을 긴장시킨다. 이런 일은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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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지금 6·25를 회상할 적에 참으로 좋은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전까지는 막연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만 해왔고 이북에서 남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솔직한 것으로 듣기에는 나의 하나의 편협된 개념이 수긍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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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6ㆍ28부터 불법침입한 공산군은 수도 서울을 휩쓸고 방비력이 약한 우리 군대는 남으로 쫓겨가 남한의 대부분이 그들의 치하에 임시나마 굴욕당했다. 그들은 입으로는 인민의 복리와 자유를 외쳤으나 실은 이것은 허위이며 몇 사람의 상부 특수층을 위한 착취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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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전연 유린되고 사유재산은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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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집회의 자유……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아는지 모를 지경으로 개인의 모든 의사는 박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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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한 일주일 동안은 명동에 나와 차를 마시고 단파방송에서 청취한 뉴스……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현대과학 무기의 사용은 공산군을 여지없이 무찌르고 앞으로 수일 간이면 서울이 다시 탈환될 것이라고 믿고 살았다. 허나 나의 믿음은 하나의 수포가 되고 날이 갈수록 우리의 판도는 좁아져 괴뢰군의 남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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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검색과 가택수색은 연일 심해 서울은 그들의 모든 거점으로서 등장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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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소설가 김광주 씨와 만났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반가웠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도를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며 그 전날 유엔 공군에 의하여 폭격된 서울역과 용산 일대를 두 사람이 산보했다. 그것은 우리 자유 군대가 처음으로 서울 시민에게 힘의 위력을 알려준 것이며 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민간인이 사상되었다 할지라도 괴뢰군에게는 큰 손상을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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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아직 연기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울며불며 오고 가고 했으나 행복과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부수되는 현상으로밖에 해설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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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의 위력은 실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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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말을 주고받으며 마음 한구석 든든한 희망을 품고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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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을 무사히 보낼 때마다 지금까지 믿어본 일이 없던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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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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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는 잠을 자지 않아가면서 대문 소리만 나도 숨으라고 했다. 자기 친구집에 가서 우정 방송 소리를 듣고 와 “유엔군은……” 어떻게 하고 있다는 뉴스를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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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좀 늦게 돌아와도 걱정을 하고 마음을 졸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나에게 해준 일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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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달도 흐지부지 지나고 마음의 고통만이 늘었다. 집에서 시를 한 편 썼다. 제목은 “검은 준열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니며 자유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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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와 금전의 결핍으로 온 가족이 영양부족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선풍기, 트렁크, 양복, 그 외 것을 들고 남대문 시장에서 내 자신이 장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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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 형이 이 광경을 보고 비통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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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무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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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봉구, 시인 김경린, 김광균 씨 등은 그 동안에 있어 가장 친했고 자주 만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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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유가 그리웠던 시절이었다” 는 시인 경린의 고백은 아직까지도 내 귀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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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나가면 골목길을 걷고 집에 오면 다락 속에서 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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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악수 이외는 다정한 말 나의 진실한 뜻을 전해본 일이 없다.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내 양심이 준 자유를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내일도 모레도 유지한다면 반드시 기다리던 날이 오겠지, 이것을 믿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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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경 친구 세 사람과 서울을 탈출하여 부산으로 갈 것을 약속하고 30일 날 아침에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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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그 달이 만삭이어서 혹시 어린애를 낳으면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기념 반지를 팔아 도중의 여비로 쓰라고 주었다. 내가 집을 나올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사히 살아서 만나자고 말하는 것이다. 아마 집에 들어가서는 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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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기동차를 타고 광나루에 내린 다음 하루에 100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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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은 80리 폐허가 된 집터에서 자고 나서는 아직도 안개 짙은 새벽길을 떠나 70리를 지나고 9월 23일 결국엔 소위 보안대원에게 세 사람이 잡혀 이천 보위부에서 밤새도록 취조를 받은 후 겨우 석방되었다. 그간의 경위를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고 다시 서울에 오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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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부터가 더욱 곤란이었다. 집에 있기에는 너무 대담해서 여기저기 아는 집을 찾아다니며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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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맞이해 주는 집도 있고 위험하기 때문에 귀찮은 표정으로 대해 주어도 별수 없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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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폭격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괴뢰군은 아마 당황한 모양이다. 인원 보충을 위해 집집에서 젊은 사람을 군대에 끌어가 편입시키고 매일처럼 노무 동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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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게 해준다’ 는 것은 결국 고통과 압박을 준다는 뜻에 그치고 이들의 슬로건은 자체의 허위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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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인천 상륙을 고하는 방송을 들었다. 허나 2, 3일이면 탈환될 것으로 믿었던 희망은 10여 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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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지지한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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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많은 인명이 그들에게 빼앗겨 갔다. 발악한 그들은 방화, 약탈을 하고 서울은 생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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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에 수감된 사람이 대부분 피살되었다는 소식과 아울러 유엔군이 한강 도하작전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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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성과 기총의 요란함은 온 장안을 부수는 듯 진동하였으며 밤은 낮과 같이 밝다. 중요한 시가지가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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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아침 아내는 폭격 아래서 계집애를 낳았다. 불과 100미터 앞은 불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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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딸의 이름을 ‘세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세상이 평화롭게 되었다.”는 뜻에서이다. 그후 이틀 후 서울은 굴욕과 박해의 치혹에서 해방되고 우리는 갈망하던 자유를 찾았다. 지나고 나니 좋은 경험을 했으나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수만의 사람이 죽고 도시가 불타버리고 마음마저 황폐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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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계』(1954. 6)
【원문】암흑과 더불어 3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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