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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명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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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10
고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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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명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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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로서의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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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우리나라엔 시의 방법론이 거의 배제되다시피 등한시되어 왔다. 비평가들의 양식만으로 우리 시의 전도를 개척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넉넉한 보조 이론도 없이 시를 말해보는 대부분의 태도가 감상적인 발설에 불가하다면 이는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부진을 털고 시의 방법화를 규정하려 든 희귀한 글을 오래간만에 읽게 되었으니 바로 「두개의 방법」이라는 조지훈씨의 시단시평(문학예술 7월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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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조씨는 이 글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를 제기하여 주었으나 그 문제의 해답을 다음 세대에 위탁할 뿐 자기대로의 분석은 태반 우회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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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충격된 나는 몇가지 의아와 관심의 꼬투리를 늘어놓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문제에 대한 광범한 검토를 상호 요청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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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에서와 같이 조씨가 지적한 「두개의 방법」이란 「해석학적 방법과 의미론적 방법」이며 그 골자는 대략 아래와 같은 설문에 나타났다고 본다. 즉 “우리 시가 새로이 착안할 것은 「의미론」의 방법이라 보아지니 주제와 사고구성과 문장관념과 어의의 통일은 우리의 현대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노력을 완성된 미로서 통일화 해둘 것이다”는 내용이다. 이에 앞서 조씨는 해방이후 등단한 몇 사람 시의 통성을 일관하여 「해석적 방법」이라고 요약하였는데 나는 이것부터가 하나의 무리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마침 해석학적 방법을 부연하여 「감각적」이라고 매긴 것은 어떤 연유에서 였을까. 흔히 우리는 무작정하게 「카테고리」를 선정하고 필연 그 「카테고리」 속에 감금되는 우리들의 허술한 정신사를 통한하는 버릇만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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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의 경우, 철학자체가 하나의 보조이론으로서 우리시의 방법을 규정지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보조이론에 대한 막연한 기호성에서 이를 혼용한다면 결과적으로 크나큰 불행이 될 것이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본 범주로서는 문헌학의 시대를 떠 받들며 자라난 해석학의 변천이 결코 「감각적」인 것이었다곤 긍정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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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과 딜타이의 정신과학적 기초이론만 보더라도 한국의 신인들이 얼마만큼 이들의 사고와 방법에 투철하였던가를 성찰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해석학적 방법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방법에 대한 해석이 오히려 감각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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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구가 해석학적 고비를 넘어서 실용주의 사회에서 한창 유행인 의미론의 방법과 새로이 절충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학파운동이 그냥 그대로 우리시의 발전에 타당하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 나 역시 의미론의 방법과 그에 수반한 심리론 논리학 등에 대하여 지대한 흥미를 갖고 있으며, 이들의 절실한 필요성을 간과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지만 「주관적 함정」에 대부분의 신진신인들이 빠지게 되었으므로 조속히 「일반 문화사적 사회학적 고찰의 일환」으로 번져야 한다는 논조는 시인각자의 개성확장의 의미는 될지언정 시의 방법화는 쉬 유도될 수 없으리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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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이란 것과 「객관」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보편성에 대하여 개성의 관심 즉 문구에 대한 참여의식이 언어의 공동적 제약과 동일시 되어야만 한다는 주체와 주체 표상간의 착각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더욱이나 언어 「사실」과 언어 「의식」과를 혼동하고 있음에야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은 한편 해석학적 방법을 감각적이라고 속단해 버린 것처럼 「주제와 사고구성」과 문장관념과 「언어의 통일」 운운 할 때에 가상(?)된 의미론의 방법도 마찬가지로 극히 추상적인 공식에 치우쳤음을 가정하는데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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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씨]가 해석학적 방법 대 의미론적 방법이란 어마어마한 공식을 준수하고 있는 한 「의미론의 의미」는 끝까지 시의 의미와 분별될 수 없을 것이 마땅한 이치이다. 만일 씨에 있어서도 두 가지 방법을 사뭇 「인식의 방법」과 「언어의 방법」과를 대치시킨 정도로서 이해한다 할지라도 후자의 경우 의미론은 피험적인 사건으로만 언어를 생각할 뿐 지시관념에서 얼마든지 벗어나 있는 시의 「정서적 언어」 (리챠즈, 「의미의 의미」 참조)를 계량할 수 없으므로 이 우연한 사실은 시인으로서의 태도에 일대 의혹을 품게 하는 것이다. 의미론의 의미가 공동적이며 실증적인 의미인데 반하여 시의 의미는 독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의미라는 대체의 구분은 베르그송의 저작(『사상과 동체』) 참조)과 아울러 급진적 의미론자인 A.J.에야 (『언어, 진리, 논리』참조)나 카아네프의 체계(『의미와 필연성』 및 『의미론서설』 참조)에서 한결같이 명시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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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이야기는 후일에 미루고 다만 언어의 애매성을 털고 언어의 명징화로 나가자는 氏[씨]의 일시적 고충을 지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구사된 이전의 시어들이 몹시 구태스럽고 감각적인데 비하여 새로운 시어들은 아주 신기롭고 주지적이어야겠다는 전망에 대하여 몇가지 사족함으로써 오늘의 나의 소감을 끝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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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조씨의 발설엔 언어의 의의, 즉 「어의」와 문장의 「의미」와를 매 하나로 혼동하고 있다. 모든 언어는 각기의 어의를 지니면서도 언어관계의 의미에 준하여 여러가지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이때의 언어관계란 언어의 상대성, 즉 문장을 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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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문까지를 허용할 수 있는 바에야 시는 언어의 표준적인 의의를 새삼 검증당할 하등의 필요성도 없는 것이 아닐까. 가령 우리나라의 범모더니즘적 시인들이 수상한 낱말과 문법파격을 일삼았다 하자…… 우리가 조상(爼上)할 초점은 그 낱말의 언어보다 그 낱말이 놓인 상태감은 그 시인에 있어서의 「내적 문법」(훔볼트설)을 어떻게 보는가가 더욱 논의될 문제이다. 시는 마침내 시 아닌 것으로 나가고 있다는 참여라든가, 따라서 시의 효용성 같은 것도 이러한 시인의 문체론적인 분석을 거치지 않고선 실현될 수 없다. 「의미」로서의 현대시는 「의의」로서의 언어를 전체 포괄하는 정상에 군림한다. 언어를 명징화하는 방법이란 언어사실을 검증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수의 언어관계, 즉 언어의 상태를 지어가는 언어의식의 비판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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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처음부터 언어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반대로 전체의 의미가 각각 언어의 의미를 이해케 하는 것인즉…… 의미는 언어의 총계가 아니라 언어를 짓는 유기적 전체인 것이다. (싸르트르, 상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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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10. 7. 국제신문》
【원문】언어의 명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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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석규(高錫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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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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