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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처지(處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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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8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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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處地[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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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사람 마침 잘 만났네. 그렇잖아도 시방 자네게로 좀 찾아갈까 어쩔까 하고 서서 망설이는 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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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제 저녁에 올라왔어. 머 내 재미란 게 별것 있다. 명색이 지점장 대리라서 일은 한가하겠다, 또 주축하는 축들이 과히 상스럽진 않겠다, 하니까 심심하면 모여서 술추렴이나 하고, 그러지 머, 허허…… 그만하면 나도 옳게 타락은 됐지? 허허. 사실 나야 변하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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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댁내는 다 안녕하시고? 또, 재미나 좋았나? 아따 이 사람아, 그만하면 무던하이. 시방 이 세태에 그 이상 더 바란대서야 외려 도둑놈이지. 허허허 그렇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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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우리가 만난 지가 꽤 오랬어. 그래 그래, 그게 바로 작년 이월 초생이야. 나는 차에서 내리고, 일변 자네는 남쪽으로 가느라고, 그 차를 올라타고, 머, 인사도 변변히 못했겠다? 그러고서는 이번 첨이지? 응, 옳아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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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이야, 오래 적조도 했고, 또 내가 서울이라고 올라와야 자네 말고서 어디 만만한 친구가 있나, 전과 달라서 말이지. 그래, 자네를 좀 붙잡아냈으면 꼭 좋을 생각인데, 아 그런데, 자네는 유명한 애처가(愛妻家)였다, 착한 파파였다, 일요일이면 으례껀 부인하고 아이들한테 가정 써어비스를 하는 사람인걸 섣불리 유인을 해냈다가는 자네 부인한테 눈치를 먹을 것이고, 사실 또 적악이기도 하고,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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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도 않다고? 그럴 리가 있나, 사실이라면 자네 맘 변했네. 그래서는 못쓰이. 사람이 가정의 낙을 본다는 게 적잖은 행운인 줄을 자네는 아직 깨닫지를 못한 모양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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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허, 설교. 그런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노상 고루한 수작은 아닐세, 아닌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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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자, 머 깍두기가 아닌 바에야 이렇게 길 한복판에 가 서서 약도 없는 약을 팔 게 아니라, 어디고 좌석 있는 데로 가세그려. 자네 아뭏든 별 볼일이나 약속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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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그러면…… 자아, 어디가 졸꼬? 아직 오정도 채 못됐으니, 빠아나 카페 등속은 좀 멋하고, 아 이 사람아, 자네는 서울 사람이고 나는 시골서 온 손님이니, 자네가 알아서 안내하게 그려. 찻집? 찻집은 싫으이. 우리 같은 사람은 찻집을 향락할 신경의 여유는 없는 종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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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릴 같은 데가 좋겠는데…… 실상 나는 아직 조반도 못 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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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그렇게 놀랄 거야…… 아니야, 자네 댁으로 가서 폐를 끼치느니 또 갑갑하기도 하니까, 어디 요기도 시켜 주고, 좀 자유롭게 앉아서, 그리고 참 나마비이루! 이 사람아! 나는 서울 나마비이루가 먹고 싶어서, 여름이면 살이 내릴 지경이네. 아니야, 엄살이 아니라…… 어디? 보아 그랑? 거 좋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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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가세 그리로. 보아 그랑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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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해 무얼 하나. 더워? 허허, 자네같이 저렇게 야윈 사람이 벌써 더워? 원! 아무려나 좀 참고서 천천히 이야기 이야기 하면서 걸어가세그려. 나는 서울 올라오면 위정 걷는 때가 많네. 시골은 아스팔트가 없어서 그런지, 경성역에서 척 내려서 아스팔트에 발을 디디면 무척 반갑고 얼마든지 그 위로 걸어보고 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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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그렇게 부고(訃告) 가지고 가는 사람처럼 바쁘게 갈 건 없고, 산보삼아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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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과히 시장하진 않아. 응, 간밤에 술을 좀 먹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입맛이 없어서 여태 조반을 안 먹은 건 아니야. 아니구, 속담에 주인 많은 나그네 끼니 간데없단 푼수로 서울하고 시골하고 큰집 작은집 해서 명색 여편네가 둘씩이나 되는 놈이, 것도 여편네 둘 데리고 사는 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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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기는! 이 사람아. 우리 여편네라는 게 내가 그 위인하고 맞싸움이라도 할 상대나 된다든가. 부부 싸움이란 건 웬만큼 의가 있고 해야 싸우기도 하고, 싸울 맛도 있는 법이지. 이건 머 한 좌석에 같이 앉을 잡이도 못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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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생각하면 팔자는 무척 잘못 타고난 놈이야. 자네는 결혼을 늦게 한 덕에, 사실 말이지 그게 다른 게 아니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덕일세그려! 그렇잖나? 막상 자네도 나처럼 돈냥 있는 부모께 태났다면야 이십이 훨씬 넘어 근 삼십에야 결혼을 했겠나? 더구나 우리네 고향이라는 데가 다른 지방보다도 더 완고하고 그놈의 조혼이 심한 고장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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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생각하면 자네는 불행을 행운하고 바꾼 사람이야. 나이 지긋해서, 또 세상 제풀로 살아갈 준비 다 해가지구 비로소 버젓하니 교양 있고 썩 현대적인 부인하고 결혼을 하고, 그래서 가정이 원만하고 평화롭고, 오죽 좋아! 나는 더러 자네네 그런 행운을 부러워하다가, 혼자 질투까지 하곤 하네, 허허허. 남의 가정 행복이나 부러워하는 게 고작이고, 나도 큰일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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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건 자네가 요지간 어떤 곡절로 가정에 다소간 염증이 났나 보이마는 머, 교양이 있는 부인이 주부가 된 가정은 가령 한때 불화나 부부간에 알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구식 가정의 그 야속스럽게 답답한 가정 문제와는 근본으로 성질이 다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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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불행해서 가령 최후 극단의 해결을 지어야 할 경우라도 말이지, 이건 자네네를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일반으로 신가정이야 다 그렇잖나? 무엇이냐 저 거시기, 두억시니 여대치게시리, 나는 죽어도 이 집 귀신입네, 나는 목을 썰어도 안 나갑네 하고, 생떼거지를 쓰는, 마치 소나 돼지하고 진배없는 그런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경우와는 더구나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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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편이 한편을 싫어한다든지 또 싫어하진 않더라도 주위 환경이나 막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든지, 둘이서 부부생활이 조화가 되질 않는다든지 하는 경우에 웬만큼 교양이 있고 생활을 비판 조종할 이성이 있는 두 남녀라며는, 그러한 경우에 억지로다가 맞붙어서 산다는 게 얼마나 부자연하고 제 자신이나 상대편의 인간성을 극단으로 무시하는 것인 줄은 넉넉 짐작을 할 수 있으니까, 그 문제 해결도 원만하고 수나로울 게 아니겄나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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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하기는 그래. 요새 교육받았다는 여자들도 아직 세상이 일반으로 낡은 관념이나 풍습이 깨끗이 씻겨지질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한번 결혼을 해만 놓으며는 좀처럼해서 그 가정 그 부부가 조화되지 않는 생활이라고 섬뻑 갈려서 새로 새생활을 개척할 용기를 간대로 내질 않나보더군그래. 마치 한번 결혼을 했다가, 갈리고 나서면 천사(天使)가 돼지울로 타락이나 하는 줄로 무서워서 벌벌 떨고…… 그렇지? 대개들 그렇지? 그래, 그렇기는 한데, 하지만 그건 파탈이 생겨서 부부가 갈려서야 할 경우 말이고, 또 그렇더라도 구식 가정에 구식 부부간에 그런 문제가 생겼을 경우보다는 그래도 덜 답답하지. 이르면 말귀를 알아듣는 것, 그것 한가지만이라도 글쎄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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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이 사람, 겨우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땀을 저다지 흘리나? 전보다 더하이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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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몇 관인가? 십오 관? 허! 그건 너무 참혹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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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아니라지만, 자네 부인이 자네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시나보이?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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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평화롭고 맘에 드는 가정, 참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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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별건 아니란 소리는 자네가 알고도 모르는 말이네. 모르는 말이고, 또 모르는 것도 혹시 무리가 아닌 것이, 결국 가정의 낙이랄 것은 술이나 커피나 칼피스나 그런 것처럼 사뜻한 자극은 없어도 하루 세 때 먹는 밥처럼 담담(淡淡)하니, 말하자면 꼭 필요하고도 점잖은 영양이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늘 밥을 먹고 지내노라면 밥이 고마운 맛을 몰라도 밥 대신 호떡이나 죽만 먹는 사람한테는 밥이 여간 그립고 매력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시방 자네하고 나하고 처지가 그러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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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참, 요새 내가 무얼 연구하는지 아나? 아니야,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라, 좀 들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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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어냐 하면, 인간성과 가정문제…… 허허허허. 그렇기는 허이. 이 격렬한 시대적 급류 속에서 그런 유장한 문제를 가지고 연구니 무어니 하는 수작이 좀 신경이 둔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기는 하이마는, 아 여보게,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조건이랄지 주위 환경이랄지 성격이랄지 체질이랄지 또 요새 거 모랄 소리 많이 하데마는, 그 모랄이랄지, 그런 여러 가지 조건으로 해서, 이렇게 이외에 아무렇게고 달라질 수는 없는 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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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방 그러니 다시 새 채비로 그 격류 속에 뛰어들어서 거슬러를 올라가겠나? 또 그렇다고 같이 휩쓸려서 좋다구나 덩실거리고 흘러내려를 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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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가지가 모두 내게는 임포시블이어든. 거진 절대야. 그러니 그저 농판같이 뒤쳐진 역사 속에서 끄먹끄먹 호흡이나 하고 있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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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누가 새삼스럽게 내 멱살을 추켜들고서 따귀를 치거나 시비를 할 호사객도 없으려니와,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고, 또 가령 시비를 한댔자 그걸 아파할 내 신경도 아니고, 시방 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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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내가 괜히 객적은 소리를 씨월대는군. 도무지 영해(領海)밖엣 소리요 한 걸 가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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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그렇지도 않아? 허어! 그렇다면 자네 그건 아직도 맘 못잡은 표적일세. 아서, 그래서는 못써! 더구나 다 저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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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외람스런 맘 애여 먹지 말고, 이젠 정말 애처가요, 좋은 파파 노릇이나 하게. 머 다 늙게, 정열 빠져버린 자네나 나쯤, 시대를 고민한다고 무슨 뽀족수가 있다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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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런 세탤수록 농판 놓아, 응? 연전에 엎으러진 중놈같이, 허허어 웃고서 세상이야 어떻게 돼가건, 제 정신 대로 아무데나 한편 구석에 처박혀서, 끽 소리 말고 살아가는 거야. 그리고 나처럼 인간성과 가정문제 같은거나 연구하고, 허허허허……그리고 술이나 먹고 술값 외에 돈 여유가 있거들랑 골동품이나 수집하고, 오죽 좋아? 차일시 피일시 아닌가? 자네나 내나 다 그때 일은 일종 젊은 혈기에 호기심이요 기분이댔지, 머 어디 그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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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리고 자네를 위해서 내가 연구한 걸 한바탕 설명할께시니 들어보게. 대체 부부간이란 게 생판 남남끼리 만나가지골랑, 세상 허물 없고, 가깝기로는 부모 자식지간보다도 형제간보다도 정다운 친구보다도 더 가깝고 더 허물이 없이 한평생 같이서 살아가는 게 소위 부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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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둘 새에는 상식이지만 무엇보다도 정이 있어야 하고, 서로 이해를 해야 하고, 동정이 있어야 하고, 교양으로 말하더라도 어슷비슷해야 하고, 그래서 둘이 살아가는 가정이라는 게 ‘재미’…… 한말로 하면 재미가 있어야 할 게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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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가정이라는 게 재미는커녕 큰 죄다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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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다 속을 알지만, 내가 죽 열거를 할 테니, 들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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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편네라는 게 인물이 천하 박색이지. 나는 여자 치고 얼굴 미운 여자는 여자 값으로 치질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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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여자를 노리개삼자는 게 아니라, 계집은 귀애할 물건이라면 이쁘게 생겼어야만 귀애할 수가 있는 게지, 미운 걸 어떻게 귀애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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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웬만해야 말이지. 도무지 우리 여편네라는 위인은 공자님이 살아와도 이뻐하진 못할 얼굴 상판대긴걸. 말(馬)처럼 닷 발이나 되는 얼굴이 코는 안장코요, 바탕은 뜨다가 만 누룩이요, 입은 죽가래로 푹 지른 형용이요, 눈은 뱁새눈인데, 게다가 누런 뻐드렁 이빨! 참 야속히도 골고루 추물이지. 꼭 방물장수나 남의 집 행랑어멈 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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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잠자코 들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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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환중에 나이는 자셔가지고 꼭 마흔, 나보다 다섯 살 위야! 잘못하다가 나하고 모자간으로 보기 쉽지, 허허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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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실없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젊어 뵈는데, 그 위인은 벌써 우글쭈글해요. 그래서 애누리 없이 십년 층은 져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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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다 말이네. 맘씨하며 행동거지라도 좀 의젓해서 내 맘에 든다면 외양 못생긴 험은 외려 견디겠는데, 이건 속은 외양보다도 더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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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싸고 새수빠지고 속 얕고 속 없고 조심성 없고 체통머리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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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나 서울 있을 때 내 집에 와서 술잔 먹다가, 무렴 여러 번 당했지? 아, 사랑에 손님이라고 무론 누가 오든지 와서 술상을 차리라든지 음식 분별을 시키든지 하면, 으례껀 두런거리고 들부시고 사랑에까지 큰소리가 들리게 하네그려? 그러니 친구며 점잖은 손님 앞에서 내 꼴이 개 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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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기를 그렇게 생기고, 속에 학문은 든 게 없다고 하더라도 제 친가가 시골서는 제법 행세한다는 선비 집안이 아닌가? 그런데 글쎄 고따위로 본데 배운 데가 없고 쌍스럽다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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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면 차차로 차차로 더해가요. 전에는 내가 고향에다가 처박아 두고서 일체 돌아보지도 않고, 육장 이혼을 하겠다고만 하니까, 또 시부모 앞이라 기가 꺾였던 모양인데, 이게 서울로 올라온 다음부터는 같잖은 것이 교가 나가지골랑, 내 온, 어처구니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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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것도 내가 저를 데려다가 살림을 하고 싶어서 한 건가? 암만 이혼은 하려고 애를 써도,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꼬박 십년 동안을 두고서 별별 옴두꺼비짓을 다 하고, 심지어 자살소동까지 나질 않았겠나! 그러고서도 이혼은 못하고서 필경 내가 파기증이 난 판인데 엎친데 덮친다고, 그해 그러니까 계유년이군. 어머니 아버지께서 척 그 인간을 자식놈까지, 아따 종태놈 말일세, 모자를 내게로 올려보내시면서, 너는 지차자식이요, 지차자식은 성취를 하면 으례 분가를 하는 법, 어미 아비가 앞날을 받아놓다시피 했으니, 생전에 그런 것도 감장을 해두어야 사후라도 눈이 감기고 하겠어서 그러는 것이니, 자금 이후는 네 처자는 네가 거느려야 하느리라, 이런 말하자면, 엄달(嚴達)이네그려! 기가 막혀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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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거나 말거나 당장 그저 선 자리에서 도로 내려쫓았을 것인데, 아, 종태놈 말이네! 그거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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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보기 싫다면서 아이는 어째서 만들었느냐고 자네는 공박을 하지만, 그게 곡절이 그렇잖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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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문을 마치던 게 스물세 살이 아닌가? 그러고서 그해 사월에 자네는 다시 동경으로, 또 나는 ××은행에 취직을 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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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골을 다니러 내려갔는데, 그때만 해도 인물이 못났다고 보기 싫어서 이혼을 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시방처럼 인간 그 자체를 미워하진 않았으니까, 외려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맘이 있었고, 그놈 동정심 때문에, 제발 좋은 일 합신다고 하룻밤 내방 출입을 했더란 말이야. 나도 실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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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첨이요 마지막이야. 아, 그런데 거기서 자식이 생기지를 않았겠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더군. 그 이듬해 정월에 자네들 일당이 득남례라고 삼백여 원어치 때려 먹던 그놈일세…… 한데, 아무려나 그 자식이 생겨나기야 어떻게 해서 생겨났든, 제대로 잘 자라기나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병신이 되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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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혹 배내병신이라든지, 또 불가항력으로 그랬다면야 무가내하겠지만, 꼭 어미 잘못으로 생병신이 됐단 말이야. 그때에 내가 젊은 놈이 가슴에 불을 묻었고, 그후부터 여편네 쳇것을 와락 더 미워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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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글쎄, 어린것이 다섯 살 적인가뵈. 다림질하는 다리미 불에 가 꼬꾸라져서 무르팍을 덴 것을 저의 자당아씨께서 시부모한테 걱정은 안들으려고 풀을 처매주고는 쉬쉬 씻어 덮었던가 보데. 천하에 순! 에이, 고,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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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덴 자리에 그대로 화농이 돼가지굴랑, 덴 자리가 화농이 된다는 것도 공교로운 일이지만, 슬개골 밑으로 농이 흘러 들어가서 관절이 상해, 그때야 겨우 아버지께서 아시고서는 생벼락을 내리고, 그렇지만 머 파기 쌍종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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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도립병원으로 보내서 다스리자고 드니, 머 편작인들 소용이있나. 죽이느니 그게 낫겠다고 무릎 위로 한뼘 높이나 되게 잘라버렸지.
 
63
나도 그때 수술하는 데를 본다고 내려갔었지만, 어린것이 마취가 깨고, 제 정신이 좀 드니깐, 내 다리를 누가 베어갔느냐고, 어서 갖다 붙여놓으라고 엉파듯이 울어쌌는데, 에이 거……
 
64
저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하 상으로 거기 있던 집안 식구는 말할 것도 없고, 간호부도 모두 울었네 모두……
 
65
그때 이혼이 꼭 됐을 것인데, 이 위인이 어린 놈이 퇴원하던 날 집으로 데리고 와서는 그날 밤에 광 대들보에다가 목을 맸더라나! 저도 죽고도 싶었을 테지. 그런 것을 따라진 목숨이란 영락없이 모진 법이라, 하인년이 그날 낮부터 아무래도 눈치가 수상한 걸 보고서, 여새기다가 살려냈다나, 어쨌다나.
 
66
그러니 죽진 않았어도, 목숨 내바치고 사죄는 한 셈,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자식 병신 만든 죄책은 그 뒤 일체로 불문에 붙이시고 말았지. 어떡하나? 그이들인들……
 
 
67
그 담부터 이 위인이 제 죄는 그래도 아는지, 자식한테는 참 극진하단 말이야! 머 여간 참 잘하는 게 아니고, 이놈 소리 한마디 못하지, 이날 이때까지.
 
68
그런데 속담에 쓸 자식은 일찍 뒤어지거나 병신이 된다더니, 그 말이 옳네그려.
 
69
이놈이 네 살부터 천자를 배웠다나 봐. 서울로 올라온 게 여덜 살 적인데, 학교에를 가겠다고 그래. 그런 것을 병신 자식 남 앞에 내놔서 제정가 막히게 하기도 싫고 하길래 가정교사를 구해주었지. 했더니, 이놈이 삼 년 동안에 육학년치 과정을 말끔 떼었겠지. 그러고 나서는 가정교사를 중학교 교원 세 사람을 골라서 대주었더니, 시방 오학년치를 하는데, 가을까지 다 마칠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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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은 이거야. 인제 중학교 검정시험을 친다나. 그러고는 다른 건 그만두고 미술 공부를 한대. 미술 하자는 놈이 중학고 검정시험은 쳐서 무얼 할 셈인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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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자네도 봤지만, 그림을 제법 의젓하게 그리고, 아따 저 무엇이냐. ××일보사 학생작품 전람회에도 두 번 출품해서 두 번 다 입선이 됐더니. 옳아 한 장은 자네가 가져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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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그렇게 재주가 있고, 내장이 있는 걸 보면 그런 자식을 갖다가 병신을 만들어버린 일이 더 안타깝고 울화가 무럭무럭 치닫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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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마는, 아뭏든 그렇게 재주가 있고, 또 여간만 나를 따르는 게 아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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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네 살, 겨우 사람 알아볼 만한 적부터도 내가 내려갈라치면, 글쎄 제가 언제 그리 아비를 많이 보았다고, 아 이건 아빠를 불러싸면서 안기고 매달리고, 따듬따듬 이야기를 하고, 그러니 나도 자연 정이 갈밖에…… 하다가 그렇게 병신이 되고 나니까, 불쌍해서라도 더 정이 갈 게 아니겠나?…… 그래 그놈인데, 자당아씨님을 따라서 그해 계유년 정월에 서울로 올라온 것을, 내가 눈을 부릅뜨고 도로 내려가라고 하니까, 아 이놈이 갖은 새소리를 다 하면서, 아버지한테 어머니하고 같이 있지 안 내려간다는 거야! 그래 내가 제한테 지고 말았지. 머 별수 있더나?
 
75
다 왔군 어서 들어가세.
 
76
응, 냉방장치도 벌써 했군 그래. 자네 같은 사람 살리려고 일찌감치 냉방장치를 했나 보이.
 
77
여기 한편에 앉세. 그리고 우선 나마비이루 먼저 두 단지 부르게. 나마비이루는 그놈 큼직한 단지째 들고서 들이켜야 제 맛이 나는 법이거든.
 
78
사실 참 내가 서울을 다달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자주 다니는 것도 그놈 종태놈 때문이네.
 
79
보고 싶고, 그러니까 그놈도 한 달만 안 올라와도 보고 싶어하고 하니까…… 그렇잖고야 머 여편네 그 상판이 그다지 보기 좋아서? 게다가 번번이 속까지 상해가지고 내려가는걸!
 
80
이게, 시방 간밤의 화풀이냐고? 허허허, 옳아, 옳게 알아맞혔네.
 
81
이번 일만 해도 어젯저녁 아홉시나 해서 집에 당도를 했는데, 여편네라는건 벌써 코를 골고 나가떨어졌군. 종태놈만 건넌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그 알량한 외다리로 뛰어나와서 반갑다고 매달리고.
 
82
건넌방으로 같이 들어가서 부자간에 이야기를 하고 있느라니까, 하인년이 두드려 깼는지, 그제서야 눈곱을 쥐어뜯고 건너오시더니, 그 괴상한 얼굴로 한번 웃어보여! 누가 반갑댔는지……
 
83
그리고는 뒤삐어지게 저녁진지를 지으리까, 냉면을 불러오리까, 삼월아, 찬 물수건 해오느라, 들이 생건사를 피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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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를테면 혹시 그새 동안이라도 내 맘이 돌아서서 혹시 저를 좀 어찌 이뻐해 줄까 하고는 그러는 수작이었다.
 
85
그것도 명색 남편이라는 걸 위해서 진심으로 그런다면 몰라. 괜히 서시렁 주웅하고 속 빠안히 들여다뵈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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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광스러서 그대로 뛰쳐나와서는 카페로 빠아로 술을 퍼먹고 돌아다니다가 세시에 겨우 비틀거리고 들어가서, 사랑방에 가 쓰러져 잤지. 그때는 잠도 안 자고 청승으로 지켜앉았으면서 내가 들어가야 내다보지도 안해요. 터지게 부강이 나가지고 앉았을 테지, 머……
 
87
그리고는 오늘 아침에 열시나 돼서 일어나니까, 예배당에 행차하시고는 하인년이 썰렁한 밥상만 갖다가 들여 안기겠지.
 
88
에라, 내가 이놈의 집구석 아니면 밥 못 얻어먹겠느냐고, 그대로 뛰어나와서 본점 지배인 좀 찾아보고는, 아까 자네를 만난 게 바로 지배인 집에서 나와서 길 가운데 가 서서 망설이던 참이야.
 
89
자, 나마아비루가 왔군. 드세.
 
90
이놈이 맛도 좋지만, 이렇게 유리단지에다가 가득 부어서 앞에 놓고 볼라치면 빛깔이 또 여간 존 게 아니거든! 에에 거, 시원하고 좋다. 이 사람, 유언이니, 나는 죽거들랑 나마아비루 탱크에다가 수장(水葬)을 해주게,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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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마저 들고 오까와리 불러요. 이건 머 여남은 단지쯤이야…… 요기를 하라고? 온 사람도! 아, 술을 두어두고서 밥을 먹어? 항차 나마아비루를…… 자 들면서 내 이야기 결론을 들어요. 결론이 더 명론이지, 허허허허.
 
92
그러니까 내 처지를 가만히 좀 보게나. 여편네라는 건 그래서 지렛대로 마구 떠곤질러도 못 뗄 운명이지! 그러니까 나는 죽는 날까지 그 두억시니 면하기는 틀렸단 말이야!
 
93
그러니 내가 시방 나이 서른대여섯에, 사내로는 한참 젊고 한참 좋고 한 시절이 아닌가? 그런 걸, 여편네가 그렇다고 영영 금욕생활을 해야 옳은가?
 
94
내가 도를 닦는 중이거나, 또는 진세의 인간생활을 초탈한 성자(聖者)라거나 그렇다면 모르지만, 그저 한 개 범상한 인간이 아닌가. 그런 범상한 인간이 하루 세 때씩 먹는 밥과 한가지로 생리상(生理上) 아주 필연한 요구인 성욕 그걸 만족시키려고 하는 게 죄악이요 무리겠나? 어떡하나? 만약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만들기를 그렇게 만들기가 과실이지.
 
95
그런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성생활이 법이나 다름없이 필요한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임시임시 아무나 걸리는 대로 한때의 만족을 채우고서 만다는 게 아니라, 한 배우자를 골라서 결혼과 가정을 전제로 해서야만 비로소 그 성생활이 합리화가 되는 것이니까. 그러자면 배우자와 그 가정에 ‘재미’라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니겠나? 인간생활이 유곽타령은 아니니까……
 
96
그러니 나 같은 놈은 할 수 없이 첩질 밖에는 도리가 없는데, 자 그렇다고 누구 학식 들고 교양 있는 여자가 남의 첩이 되기를 즐겨하나?
 
97
또, 나로 말하더라도 다 늙게야 어린 계집애를 데리고 연애를 합네 어쩌네 할 비위도 없으려니와 남의 집 철없는 처녀를 나 같은 놈이 가지고 놀아서 험을 내주어서야 죄가 아닌가. 그러니깐 할 수 없이 화류계 계집을 택하고 역시 그런 계집 밖에는 차례가 돌아오질 않고.
 
98
이렇네그려! 한 것을, 축첩제도가 나쁘다고 나더러 그것조차 못하게 한다면야, 제엔장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욕망 앞에 도덕이 제가 어디라고 나서서 참견이야! 인간 죄다 죽고 없어도 도덕인가?
 
99
아니야. 허허허허, 흥분이 아니라 그렇단 그 말인데, 몇몇 학자님 된 옛날 친구는, 내가 첩 얻은 걸 욕하더란 이야기를 들었기에 좀 원통해서, 허허허허.
 
100
그러고저러고 간에 첩을 얻고 큰 소리를 하고 하기는 하지만, 사실 별 신통한 것도 없어요, 인간이 타락만 된 셈이지……
 
101
한 것이, 화류계 계집이란 처음 얼마 동안 새틋한 맛뿐이지, 그리고 집을 지니고 밥을 해먹고 하니까 이름이 가정이지, 실상은 가정이 아니야. 유곽 오입의 장기계약(長期契約)이라는 게 옳아. 화류계 계집이란 건 길어야 일년 이상 더 가질 못하니까. 내가 저리로 간 지가 삼년 하고 반인데, 꼬박 이태는 혼자 지냈고, 나머지 일 년 반 동안에 셋을 갈아댔네.
 
102
자 그러니 여보게, 첩은 반 년에 한번씩 갈아 세워야지? 그런데 큰여편네는 한평생 붙어 있을 두억시니지? 참말이지 불공평해! 그런데다가 재미는 재미대로 무재미지. 어떡하나? 또 자꾸만 내 인간 밑지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네, 그렇더라도 할 수 없어, 팔자니까.
 
103
팔자니까 썩 단념하고서 큰여편네는 내가 남편이라는 호적상 명의나 빌려주고, 첩은 그저 아무렇게나 얻기도 하고, 갈리기도 하고 하고 하지. 그 방면에는 일체로 주의나 관심이나 괘념을 않기로 했어. 단연코, 이건 부동(不動)의(국책이 아니라) 내 생활 철책이야, 허허허허.
 
104
그리고서 그저 좋은 친구 얼려서 무시로 술이나 마시고, 술이 깨거든 골동품이나 만지고, 돈은 내가 버는 것도 있고 부모의 유산도 있고 넉넉하니까, 허허허허. 팔자가 좋다고! 글쎄 좋다면 좋기도 하지. 한데 자네는 요지간 심경에 다시 또 변화가 생겨서 우울한 모양이지? 허허허허. 자 이제는 그만 해두고서 술 들게. 어서 들게. 주욱 들이켜.
 
105
언제 이렇게 맘이 변해서 상식세계의 인간이 됐느냐고? 흥! 그건 말해 무얼하나! 그만두게!
 
106
술 참 좋은 물건이야. 술이 없어서는 안되지. 허허허허.
 
107
나는 술하고 우리 종태놈 그 두 가지뿐이야……
 
108
울기는 이 사람, 내가 왜 우나! 아니야, 담배연기가 눈으로 들어가서, 아리더니 눈물이……
 
109
자, 어서 들게. 어서 실컷 먹고 이따가 해거름 되거들랑, 어디 요리집으로 가서 오늘 저녁에 한바탕 놀아보세, 오래간만에 만나고 했으니……
 
110
괜찮아. 오늘 못 내려간다고 전보를 치든지 전화를 걸든지 하면 그만이야. 이 사람아, 명색이 지점상 대리신데, 그렇게 구속을 받아서야 그 짓을 해먹나! 더구나 대주주의 계씨요 한데, 어디를! 허허허허. 또 내가 그걸 내노면 머, 밥이 그립나, 옷이 그립나. 한평생 놀고 먹을 건 넉넉한데……
 
111
자, 그놈 주욱 들이켜고, 주욱……
 
 
112
<四海公論[사해공론] 4권 4호, 1938>
113
<蔡萬植短篇集[채만식단편집], 1939>
【원문】이런 처지(處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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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처지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 사해공론 [출처]
 
  193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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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5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