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1940년 3월 창작평 ◈
카탈로그   본문  
1940.4
채만식
목   차
[숨기기]
1
三月 創作槪觀
 
 
 

1. 傳記와 小說의 限界性

 
3
이달치 작품을 읽기는「김연실전(金硏實傳)」을 비롯하여 「실화(失花)」「녹성당(綠星堂)」「수심(愁心)」「거울」「묘목)」「수석(燧石)」「골목」「폐어인(肺魚人)」이래서 아홉 편인가 보다. 이 밖에도 내가 못 읽은 것까 지 죄다 찾아낸다면 5,6편은 더 나올 터이고 보니 3월치로 발표된 창작 이 도통 14,5편은 될 성부르다.
 
4
위선 양으로 보아 전에 한동안 전문의 문학잡지 하나 없이 종합잡지 며 특수잡지의 한귀퉁이를 빌어 단편소설이라야 다직 3,4편 겨우 흉내 내듯 발표될 적에 대면 14,5편이라는 수효가 대단히 반갑다. (실속 없는것 수효만 많아서 무슨 소용이냐고 입을 삐죽거리지 마라. 실속도 있고 수효도 많으면 곱쟁이로 좋지 않으냐) 요새는 또 신문들이 단편에 지면을 빌려주어서 두루 좋다.
 
5
양에 있어서는 아무려나 그러하고 일면 질을 가지고 따지어 내가 읽 었다는 전기 아홉 편만 하더라도 모두 쑬쑬히 좋은 작품들이겠다. 그중 에는 동인(東仁) ‧ 민촌(民村) 두 작가의 작품도 있고 하여 이 봄을 다 가불원(不遠)에 필 꽃보다도 앞서서 화려하게 꾸며놓아 주었으니 이건 미 상불 ‘조선문학 만세!’를 한바탕 부름직도 하다. 적잖이 동정할 처지 가 아닌가 싶다.
 
6
물론 이 달 3월치 작품들의 전체의 성과를 가지고 바로 그 전달인 2 월이나 혹은 정월쯤에 비교를 해본대야 새삼스럽게 비약을 한 형적(形 跡)은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고개를 훨씬 쳐들어 내년 전전수준과 비교를 한다면 거기에는 무던한 성장이 있었음을 쉽게 알아볼 수 가 있을 것이다.
 
7
이 지나간 수년간의 역력한 성장을 미루어 그리고 시방 조선문학이 상승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사실인 이상, 또 그리고 문학의 성장에도 가속도의 법칙이 엄연히 작용을 하는 것이 사실인 이상 인제 앞으로 다시 10년을 지나고 나는 날이면 그때의 조선문학은 제법 호패(號牌)를 차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장담해도 노상 허풍은 아닐 것이다. 그리 고 그러므로 이 달 3월치의 작품 전체의 성과가 비록 눈에 띄지는 않아도 이론적으로나마 이제 10년 후면 호패를 할 그 수준의 10분지 1의 12분지 1만큼은 지난달보다 더 자란 것이다.
 
8
이렇게 나는 이 달 작품의 전체적 성과를 반가와하고 그 전도를 심히 낙관을 하기는 하면서도 일단 그들 작품을 개별적으로 평이라고 할까 혹은 작은 소감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말하니 또한 다소의 곤란을 느낀다.
 
 
 

(1) 「金硏實傳」 (金東仁 作)

 
10
좌우의 그럼직한 경치를 구경하면서 주욱 길을 가다가 별안간 허방에 가서 푹 빠진 이런 싱거운 일을 당해본 독자는 없는지. 당해보지 못했 으면 부디 동인의「김연실전」을 한번 읽어볼 것이다. 다분히 설명체로 된 것이 좀 불만이기는 하나 역시 동인다운 대가의 솜씨가 아니고는 그만큼 선이 굵고도 간결하게 매만져 놓기가 어려울 그 처음 한동안이 그리하여 읽는 사람의 주의를 완전히 집중시킨 것은 참으로 탄복하기에 족했다. 하다가 후반이 비교적 산만하고 또 옹색스러워졌으나 그런 대로 무난하다면 무난하달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
 
11
또 소녀 연실이 그의 부친과 첩이 하룻밤 음탕한 장난을 하는 장면을 이불 속에서 목도를 한 결과 구역을 할 만큼 혐오를 느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성이라는 것에 대하여 극도의 불쾌한 관념을 가지게 한 이상 제 자신은 성행위를 당연히 멸시하고 기피하고 할 것임에 불구하고(정조관념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담담 무신경한 그 행동의 모순이랄지 언뜻 독부(毒婦)를 생각케 할 만큼 이지적인 소녀 연실이 이렇다 할 결정적인 이유도 없이 센티멘탈한 그리고 흘개빠진 여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랄지 이러한 것 역시 불만이라면 아닐 것은 아니나 그런 대로 눌러보자면 보지 못할 것은 아니다.
 
12
소설은 인생의(혹은 세상의) 한 토막인데는 틀림이 없으나 그냥 인생과(혹은 세상과) 달라서 반드시 고패나 매듭이 있는 것이 그의 약점인 동시에 그러나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소설이고 한 번 펴들고 앉으면 그를 읽기 전에 그 소설에 있어서의 그의 생명을 즉 소설적인 무엇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대기를 한다.
 
13
「김연실전」에 있어서도 나는 그러했다. 무엇인가 소설적인 무엇이 있으려니 하고 50여 항을 주욱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소설적인 무엇이 방금 있을 듯 있을 듯하다가 그냥 싱겁게 끝이 무뚝 잘려버리고 말았다.하도 허망하여 혹시? 하고 돌려다보았으나 종내 소설적인 클라이맥스 도 없고 매듭도 없고 축(蓄)도 없었다. 단지 그저 제호 그대로 어떤 전기의 첫머리 한 토막이다.「김연실전」에 대한 나의 불만은 바로 이것이다.
 
14
전기가 그것만으로는 소설일 수 없을뿐더러 동인 자신도 소설「김연실전」을 쓰느라고 쓴 것이지 결코 전기를 쓸 요량은 아니었을 것이다.또 동인이 모처럼 2백 매나 되는 것을 썼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상당한 대작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랬던만큼 기대가 어그러진 때의 실망도 컸다.
 
15
구태여 조선의 소위 초대 여성해방의 제일선에서 납뛰던 일부 여자 동경유학생들의 그 분반할 소행을 풍자한 것이라고 하자면 풍자 그것이 스스로 가지는 소설적인 의의를 주장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풍 자도 풍자 나름이지「김연실전」에 의한 풍자는 아직 재료에 그칠 뿐이지 소설에까지 승화했다고는 보아지지 않는다.
 
 
 

(2)「失花」(李箱 遺作)

 
17
이상의 유고가 또 발표되었다.
 
18
「실화」도 이상의 다른 작품의 예에 빠지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예의 세계를 지극히 반(反)상식적인(비상식이나 몰상식이 아니라) 신경으로 감각을 해놓은 ‘사자(死者)의 글’이다.
 
19
현실은 단조하여 갑갑하고, 가난하고, 폐는 썩어 피가 쏟아지는데, 계집은 비밀을 자꾸만 저축하고, 그만 못 견디어 동경으로 도망을 갔다가 마침내 ‘불우한 천재’ 영예(榮譽)를 탄 이상, 불쌍하다고만 해서는 미 흡하고 차라리 침통하다 해야 대접일 것 같다. 그것은 시방 당장에도 성명만 달랐지 비슷 같은 이상이 여기도 거기도 수두룩해서 말이다.
 
 
 

2. 素材와 構成——民村의「苗木」과 南天의 「綠星堂」

 
21
민촌 것으로는「묘목」을 먼저 읽었다.『조선문학』지에 실리는 장편의 인물들을 그대로 이식을 해놓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야 흉할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아무리 양심과 이상이 불타기로소니 그렇게도 옹색스럽게 억지를 써서 소설을 꾸미지 않고는 안되는 법인지 모르겠다. 이상주의 소설이 흔히 보면 대개 그 이상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갈팡질 팡, 작자의 편할 대로 기계인형 놀듯 하기, 아니면 다분히 인간성이 박 탈되는 폐단이 많기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분수가 있지 ‘영수’ ‘영순’ 그게 모두 어디서 생긴 반인반신(半人半神)들일까.
 
22
작자의 가슴 속에다가는 육조(六曹)를 배포했는지 몰라도「묘목」은 다 직해야 어떤 장편이라도 쓰려고 플랜을 초하다가 내버린 휴지쪽.
 
23
석양때 골목 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장님잡기를 하고 놀았다. 그러다 가 하나씩 둘씩 혹은 저녁밥을 먹으려 혹은 애기라도 업어주려 뿔뿔이 죄다 흩져 가버렸다. 그리고는 장님이 되었던 아이 하나만 시방 눈을 가린 채 혼자서 더듬더듬 더듬고 돌아다닌다.
 
24
이 혼자 남아서 눈을 가리고 더듬는 아이를 민촌에, 다른 아이들을 과거 경향문학 시절의 지도이론에, 이렇게 비유를 한다고 그것이 악담은 아닐 것이다.
 
25
같은 솜씨지만「묘목」에 비하여「수석(燧石)」은 그래도 훨씬 힘을 들인 자취가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주인공 ‘나’를 통해서 보이는 작자의 치기와 상식적인 감각은 여전히 고색이 창연하다.
 
26
‘나’의 그 양심적인 것만은 더우기 직업을 얻자고 지조라면 남의것까지 꾸어다가라도 팔아먹으려 드는 세상이라 한결 더 반갑다. 그렇지만 무인(戊寅) ‧ 기묘(己卯)의 ‘나’는 훨씬 감성이 날카롭고 지각이 침착하 지「수석」‘나’처럼 그렇게 감각이 진부하고 치기만만하고 하지를 않다.
 
27
그리고 이 소설은 맨 끝엣 대목의 사건이 테마가 되어 전면에 나타나고 전반(前半)의 이야기는 차라리 에피소드로 최급이 되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28
남천의「녹성당(錄星堂)」을 읽고 나서 가슴이 뿌듯했는데 마침 같은 『문장(文章)』지의 김교환(金敎煥)씨의 시「제오운명송(第五運命頌)」을 무심코 읽다가 “진리는 어느 시야에 나부끼던 전설이든고”에 이르러서는 그만 울고 싶었다. 참으로 그 당절(當節)에 비하면 시방은 “……살았다 는 은총이 굴레같이 어깨를……”누른다.
 
29
「녹성당」을 처음 나는 태원(泰遠)의『천변풍경(川邊風景)』같은 것을 쓰지나 않나 했었다. 작자는 분명 그것이 흥이 나서 주욱 그렇게 천변 풍경 아닌 상가(商街) 풍경을 그려나가다가 중간에서 퍼뜩 정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신이 들어가지고 거기서 얼른 붓끝을 돌리기는 했어도 하나의 단편소설로는(구성에 있어서) 이미 건지기 어려운 파탄 을 저지르고 말았다.
 
30
이 소설은 그렇게 전후가 색깔 다른 두 토막으로 갈려졌을 뿐만 아니라 작자가(고의겠지만) 하도 지벅지벅 만져놓아서 여간 정신을 차리지 않고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31
또 그것이 남천의 주장인 자기고발의 투인지는 모르겠어도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의 ‘자기’ 즉 박성운(朴成雲)은 고발이 너무 지나쳐 불필요 한 ‘햄릿’이 되어가지고 완연히 고발을 위한 고발인 혐의가 없지 않다.
 
32
따라서 이 소설은 소설로서는 그다지 높이 평가할 수가 없을 것이다.
 
 
 

3. 新人創作壇

 
34
그의 작품을 아무 불안이 없이 안심하고서(모랄을 의미함이 아니다) 읽을 수 있는 작가는 썩 흔치 못하다. 특히 신진작가들에게서 그러하다.
 
35
시방 조선문단에서 신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여럿 중에 그렇듯 불안이 없이 안심하고서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작가는 아마 최명익(崔明翊) 하나뿐일 것이다. 그의 출세작이라고 할는지「비 오는 길」을 비롯하여「무성격자(無性格者)」「역설(逆說)」「봄과 신작로」그리고 이번의「폐어인(肺魚人)」까지 그리 많지는 못한 작품이로되 그 어느 것을 물론하고 읽는 데 위태위태한 불안을 주는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36
이 불안이 없이 안심을 하고서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일면, 그 작가가 사람으로 치면 소위 불혹지년(不惑之年)에 이르러 인생으로서 터가 잡히고 무게가 차듯이, 작품을 갖다가 조금도 무리와 파탄이 없이 극히 자연스럽게 완성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역량을 스스로 증좌하는 것이다.
 
37
최씨는 그리하여 말이 신인이지 역량에 있어서는 현 중견의 누구보다도 결코 빠질 염려가 없고, 따라서 최씨만은 한 사람의 기성 중견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줄로 생각한다.
 
38
물론 신인이라서 치사할 것도 없고 중견이라서 그다지 영광스러울 것도 없고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일부 신인들 중에는 스스로의 역량을 생각지 않고(보다도 과대평가하고서) 문단이 편벽되어 무슨 진급이라도 시켜주지 않는 양 앙앙불락(怏怏不樂)하여 불평이 대단한 모양이다.
 
39
마침 계제가 좋으니 현덕(玄德) ‧ 박노갑(朴魯甲) 양씨는 각기 이 달의 자작(自作)「골목」과「거울」과를 가지고 전기 최명익 씨의「폐어인(肺魚人)」과 한번 비교를 해보는 게 십상일까 한다.
 
40
「골목」은 물론 스스로야 쑬쑬한 작품이기는 하다.「거울」도 얌전하다. 아마 박노갑 씨의 어떤 작품보다도 못하지 않은 가작(佳作)일 것이다.
 
41
그러나 현 ‧ 박 양씨는「폐어인」이 속이 꼭 찬 작품인 데 대하여「골목」이나「거울」은 여기저기 빈틈이 드러나서 엉성해 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폐어인」은 작자가 테마를 손아귀에 집어넣고 녹신녹신하도록 주물러낸, 그래서 작작한 여유가 보이는 데 대하여「골목」이나「거울」은 작자들이 테마에게 휘둘려 부치는 힘으로 빠듯이 어거를한, 그래서 마지막 붓을 데고는 후유 한숨을 내쉬고 이마의 땀을 씻었을 듯싶은 그러한 흔적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하여「폐어인」은 착 미더운 게 안심하고 읽어지는 데 대하여「골목」이나「거울」은 어딘지 생소한 게 읽는 마음이 불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42
그리고 양자간의 그러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유래가 어느 곳에 있는가를 현 ‧ 박 양씨는 한번 생각해볼 도량은 없는가?
 
43
시방 조선서 신인이라 하면 일본 내지인의 동인지 시대급을 두고 이름이다. 지위에 애를 타지 말고 역량을 기를 것이다.
 
44
수필 한 토막으로 작가가 되고 외교로 문단행세를 하던 시절은 옛말일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출세했던 사람의 존재가 날로 광채 희미하여감을 볼 것이다.
 
45
문단인구는 물론 희소하여 그야말로 낳거라 붇거라 할 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지이지(金之李之) 덮어놓고 넘나들어서야 가뜩이나 기성 수준만 떨어트릴 것, 10년에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그는 반드시 영특한 후대(後代)라야 한다.
 
46
적어도 세계문학의 수준에 우리들의 목표가 있다고 부르짖은 그 기개가 장하지 않으냐. 그 챔피언을 문단은 실로 학수고대하여 마지않는다.
 
 
47
회남(懷南)의「수심(愁心)」과 아울러「실화」「폐어인」「골목」「거울」이 다섯 편의 작품을 한 다른 각도에서 보는 흥미를 나는 여기 맨 끝회까지 보류했었다.
 
48
「수심」의 주인공 ‘나’
 
49
「실화」의 이상옹(李箱翁)
 
50
「폐어인」의 현일(玄一) 그리고 ‘도영’
 
51
「골목」의 ‘건넌방 김’
 
52
「거울」을 들여다보고 앉았는 ‘나’
 
53
세상에 얼마나 딱하고 걱정스런 사람들인고. 방금 축 처진 어깨에 고개를 깊이 떨어트리고서 거기 어디 길 한편 귀퉁이로 풀기없이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얼른 따라가서 손목을 부여잡고 “어찌하겠느냐!”고 같이서 울고 싶은 사람들이다. 결코 회남 등 다섯 사람의 작자가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직접 작자 자신이 아니면 그의 친지나 아는 사람이요,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많이 존재한 인물들이다.
 
54
그들은 누구만 못지않은 한 사람씩의 현대인이다. 감각이 그러하고 사색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로부터 축방(逐放)을 당한 현대인이다. 그런데 축방은 당했으면서도 퇴거(退去)는 못한다.
 
55
양성해서 부리자고 고주파(高周波) 중공업이 2백 명의 선반공을 뽑는데 지원서를 들인 1만 명, 거기에나마도 참여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56
금광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이 허구많아야 그들에게는 전설과 같이 아득하다.
 
57
일임(日賃)이 부쩍 1원씩이나 해도 손이 모자라 쩔쩔 매는 북조선의 노동시장도 그들의 세계는 아니다.
 
58
신문 잡지사는 구제기관이 아니란다. 진리다! 미상불 80명의 늡늡장병이 머리를 싸고 들이밀어도 꼬옥 가까운 놈으로 예정한 셋만 뽑아 옆집에서도 그 진리를 행동하더라.
 
59
철도국이 기술자가 모자라게 두통을 해도 그들에게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이다.
 
60
고관의 의자는커녕 면서기도 꼭꼭 찼다. 또 감불생심(敢不生心)이기도 하거니와……
 
61
어디로 머리를 두르고 갈 곳은 없는데 저녁때도 아침처럼 가난만 하다. 게다가 폐는 자꾸만 더 썩어들어가고……
 
62
그래도 직업을 얻자고 ‘현일’이 옛 학교를 찾아갔더니 빈대머리는 이 기회에 전업을 하란다.(누가 구두직공인가?)
 
63
구렁이를 잡아먹자고 구멍을 지키고 앉았는 ‘도영’ 그는 열이 내리라고 지렁이를 생으로 집어삼키고서 피를 쏟지 않더냐——쥐덫에 친 쥐의 철학을 배워서……
 
64
가난을 팔아먹는 기능밖에는 아무것도 못 가졌다던 이상, 그러므로 그는 자살을 하면 제 시(屍)가 며칠 만에 상하기 시작하는지 그것을 골똘히 연구하기가 차라리 재미있었을는지도 모른다.
 
65
체중이 12관 미만이면 낙방이 되는 줄을, 그런데 제 체중이 약 12관 미만이어서 낙방에 자신이 생기자, 그다지도 부대끼던 순사시험을 마침내 치를 테라고 그의 악처에게 쏘아붙이던 ‘건넌방 김’ 그는, 이튿날 버젓하게 낙방이 되어가지고 돌아왔으렷다? 고 방정맞은 계집년한테 얼마나 또 가시 같은 구박을 받았을꼬?
 
66
「거울」에 비쳐 보이던 그 방 중에서 제일 보배인 단벌양복은 분명코 그날 전당포 출입을 하고라야 말았을 것이다.
 
67
모두들 생명이란 성가신 중하(重荷)다. 이 즐거울 수 없는 생명의 중하를 등에 걸머지고 현대로부터 축방을 당한 유태인 아닌 유태인들, 그렇다고 H. G. 웰즈의 ‘항시기(航時機)’가 없어서 19세기로든지 21세기로든지 퇴거를 하는 재주도 없고, 대체 어찌들 할 것인고? 그들의 거취를 그들만 못지않게 무능한 우리네 소설가들의 다 닳아빠진 몽당 철필 끝에다가만 그대로 맡겨두어야 할 것인지.
 
 
68
나야말로 차차로 연화대(蓮花臺)가 그리워서 이런 선량한 비명을 지르나 보다. 그러나 이것은 필경(筆耕)에 시달린 불면증의 소치요 나의 상태(常態)는 아니리라.
【원문】1940년 3월 창작평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40
- 전체 순위 : 1288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85 위 / 183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1940년 3월 창작평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 인문평론 [출처]
 
  1940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1940년 3월 창작평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0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