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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선(帆船)에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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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7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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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帆船)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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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배가 인천에서 한 이틀 묵게 될지도 모른다는 정장의 말에 석은 가슴이 울렁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꼭 사형이 되리라고 아주 깨끗이 단념하고 있던 죄수가 뜻밖에 석방이 된다는 말을 들은 때와도 같은 충격이었다. 만일에 꼭 이삼 일만 인천에서 지체가 될 마련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당진엔가 하는 데를 가볼 수 있을 것이다. 범선이라도 인천서 해변까지면 하룻길밖에는 안 될 성싶었고, 배에서 당진까지가 이십리 가량 되어 보이고 오장골이란 동네는 지도에도 없는지라 정확한 거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면천면이라고 보니 맨 변두리가 된대도 기껏해야 삼십리보다 더 멀성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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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올 적 갈 적 친대야 오십리니 배가 조금만 일찌감치 대어준다면, 밤길을 걸을 작정만 하면, 그날 안으로 처자가 있다는 오장골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게고, 이튿날 새벽에만 나온다면 늦어도 그 이튿날 밀물 때까지는 돌아가는 배에까지 댈 수가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꼭 몰살을 당한 줄만 알고 있던 가족이 전부 살아 있다는 이 희한한 사실 앞에 석은 꼭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반동 분자의 낙인이 찍힌 석의 가족이고 보니, 남겨둘 리도 만무리라 싶었지만, 더욱이 9․28 탈환 후에는 군에 적을 두게 된 터라 목숨을 붙여두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편 아주 단념을 하면서도 또 혹시 어쩌면 한둘은 어디로 어떻게든지 저의 어미가 돌려빼서 살렸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는 판에 하루는 같은 면내에 살던 사람을 목포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내 가족이 놈들한테 청어 두름처럼 엮여가지고 농업창고로 가는 것을 보고서 자기는 떠났다는 것이다. 석의 욕심 같아서는 그 재중이란 사람의 말을 억지로라도 믿지 않으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믿지 않기보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많은 터였고, 또 그의 가족뿐이 아니라 자기도 한때 구장을 지낸 터라 자기 여편네도 끌려가는 것을 보았노라고 보니 아무리 믿고 싶지 않아도 희망을 가져 볼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또 그의 아내라는 사람이 남자인 석이보다도 체구도 크지만 선이 굵어서 살려달라고 손을 싹싹 비비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중공군 육십만이 개미떼처럼 기어내려 온다는 뉴스를 들은 그 순간 석이가 근심한 것도 그 점이다. 일이 그렇게 되거든 부지런히 서둘러서 남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딴에는 전번 사변 때와 달라 이 엄동 설한에 아이가 여섯인데다가 이제 겨우 댓 달 된 젖먹이를 업고 나간다고 살아질 것도 아니다, 죽어도 앉아서 죽는 것이 편한 일이라고 떡 버티고 앉아 있지나 않으려나 하는 것이 석이가 은근히 속을 끓인 점이다. 그리고 이 석이의 추측은 불행히도 들어맞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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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석이는 재중이란 위인의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기는커녕 으레히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슬픈 단념을 하고서 더 자세히 묻지도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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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석이한테는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았다. 아무리 도척이 같은 것들이기로니 일곱 식구를 몰살하기야 했으랴 하는 희망이었다. 그래도 한둘은 남기지 않았을까, 남는다면 누구를 남겼을까? 아내? 아니다. 아내를 남겨둘 리가 없다. 그러면 딸년? 큰놈? 작은놈? 열넷 된 딸년에 열두 살, 열 살의 형제 밑으로 일곱, 다섯, 젖먹이 ─ 이렇게 졸망졸망한 어린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어도 보았다. 놈들이 사내아이는 안 남겼겠지, 되놈들이니 계집아이들은 들고 가지 않았을까. 놈들한테 끌려갈 바에는 차라리 죽여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울지 모른다고 석이는 혼자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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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이 일곱 식구 중에서 누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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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바닷가를 돌며 헤매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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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한둘이라도 살아 있어준다면 역시 아내가 살아 있었으면 했다. 자식들이 불쌍하기는 하지마는 어쩌면 아내두 하나쯤은 아이 낳기를 더할 것 같기도 해서, 둘이 살아만 있다면 자손을 끊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아내가 살았다면 어린것 중에서도 더 바랄 수는 없지만 하나쯤은 살아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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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산다면 어떤 놈이 살기를 나는 바라는가? 열네살 난 딸년? 그렇지, 그것이 그래도 제일 큰 것이니 그것이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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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는 이렇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열두 살 먹은 녀석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본 석이는 금세 머리를 흔들었다. 계집애보다는 아들놈이 살았으면 싶다. 그렇지! 아들놈이 하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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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다음 녀석의 얼굴을 그려보고는 석이는 또 살아준다면 작은놈이 몸도 약하여 지질구질하게 살았고 재주도 놈이 큰놈보다는 좀 나으니 작은 놈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의 주장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또 변하는 것이다. 넷째는 일곱 살 먹은 계집애다. 제 어미를 닮아서 무뚝뚝하고 심술패기여서 제 어미도 그랬지만, 석이도 몹시 미워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이 일곱살짜리는 또 미움만 받고 살았으니 그것이 남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고, 그 다음 계집애는 또 재롱이 여간 아니어서 석이가 늘 귀여워해온 터라 이번에는 그것이 남기를 바라게 되고, 마지막 젖먹이 계집애는 채 정이 든 것도 아니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불과 반년에 그대로 죽어버린다는 것이 인정상 못 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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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보면 결국은 일곱 식구가 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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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엄숙했다. 하나도 상치 말기를 빌고 바라는 이 일곱 식구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이 있든 없든 여덟 식구가 모여 살다가 자기 혼자만이 남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벌써 슬픔이 아니라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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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잊어야지! 잊자. 아내도 큰딸년도 머슴애도 그리고 셋째도 넷째도 다 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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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는 훈련이 하루바삐 끝나기만 빌었다. 달구치는 군무에 모두 잊고 살고 싶었던 것이다. 신문기자 생활도 오십이 가까웠으니 총칼이 하상관이랴마는 글펜으로써 적의 심장을 찌르고 국민을 북돋우자던 석이었던지라, 교육이 끝나면서 바로 제일선 부대에 배치가 되어 치열한 전투 상황을 보도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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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달구쳐놓으니까 사실 그는 가족 생각도 거의 잊고 살 수 있었다. 슬픈 단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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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거든 시체 없는 무덤이라도 하나 만들어 일년에 한 번씩 찾으리라 ─ 이것이 지금의 석이가 꾸고 있는 꿈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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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 앞에 뜻밖에도 가족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일주일간의 육상 근무를 하고 다시 부산에서 함정으로 황해 작전에 참가하러 나오던 길이었다. 그는 시골서 같이 살던 친구의 부인이다. 일월달까지는 이 가족과 같이 산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장소는 충남, 당진, 이리, 이러한 동네에 가면 황 아무개란 사람이 있으니 그를 찾아보면 알리라고 한다. 정말 의외였다. 친한 친구의 부인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다. 그러고 보면 살아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고, 당진은 후퇴는 않았던 지역이니 아직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계를 보니 벌써 함정이 입항할 시간이었다. 석이는 자세한 이야기도 못 듣고 그대로 배로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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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또 하나 기적이 나타났다. 일선으로 직행할 줄 안 함정이 인천에서 이틀 동안은 지체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틀을 이용해서 어떻게든지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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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방법은 함정이 당진을 들러서 자기를 좀 내려놓는 것이다. 한 개인의 가족을 위해서 이 명령에 없는 항해를 할 수도 없고 둘째가 피킷 보트 같은 것으로 달렸으면 다섯 시간에 갈 수 있겠는데 그런 말은 낼 수도 없다 그래서 . 초조한 대로 풍선을 타고라도 가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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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된 시간이 꼭 50시간이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시간만 어긴다면 배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출항을 할 것이요, 석은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이 엄숙한 현실 앞에서 바람과 조수만 믿어야 할 풍선을 타고 떠난다는 것은 일대 모험이라기보다도 실로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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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회의에 회부된다고 설마 사형까지야 안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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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까지 했을 만큼 절박한 감정이었다. 50시간 만에 대어 와지기를 빌고 빌면서도 못 대면 한두 달 영창에라도 들어갈 각오가 아니었다면 감히 떠나지 못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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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대여섯 톤 되는 풍선을 타고 떠난 것은 아침 일곱시였다. 당진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지리를 물으니 뱃길에서 사십리 길이라 한다. 마침 하늬바람이 슬슬 불어주어서 돛은 벌름하니 바람을 안고 큰바다로 나간다. 큰바다로 나가더니 마침 썰물인데다가 바람도 세어져서 살같이 달린다. 석이는 눈물이 나게 고마웠다. 만일 이대로 바람만 불어준다면 오후 세네시면 들이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석이는 정말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네시까지만 대면 사십리라니 세 시간이면 될 게다. 그러면 어둡기 전에 들어갈 수가 있지 않으냐, 석은 오직 바람이 멎지 말기를 빌고 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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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계를 보고 보고 했다. 십분도 못 되어서 또 보고 다음에는 오분이 되었다. 일부러처럼 시간 가는 것이 늦다. 그는 또 배 안 사람들한테 얼마나 왔느냐를 따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 질문은 혹은 그를 기쁘게 했고 혹은 그를 절망시키었다. 반은 왔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다 후련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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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 무슨 반, 양재섬을 지나서야 삼분지 일인데 양재까지두 두 시간은 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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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수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쥐어박고 싶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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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시까지 들어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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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벌써 열 번은 물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말을 또 묻고 있었다.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기가 쑥스럽던지, 나이 지긋한 위인이 체통없게도 군다고 밉살스러운 생각이 들었던지 누구 한 사람 대답도 않는다. 그러면 멀쑥하니 앉았다가 금시에 또 주책이 나오는 것을 그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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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님, 무슨 볼일로 어디 가시는지 모르겠소만 풍선이란 함정과 다르외다. 오늘 못 가면 내일 가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지 ─ 이 식으로 차리셔야지 애를 쓰신다고 배가 갑니까. 뽕뽕선을 한 척 징발해가지구 가실 게지, 함정 타시던 분은 풍선 속상해 못 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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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주인이 어린애 타이르듯 한다. 석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잠자코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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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체면 유지도 십분을 더 못 가는 것이었다. 바람기가 조금만 자도 그만 조바심이 난다. 더욱이 이 썰물 무리에 양재도의 여울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양재도에서 다음 썰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좀더 세어주기만 하면 이번 썰물을 타고 여울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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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람이 세어지기는커녕 양재도를 눈앞에 두고서 바람은 슬슬 방향을 바꾸는 듯하더니만 거짓말처럼 아주 잔잔해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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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빙빙 돌기만 하다가 나가기는커녕 슬슬 뒤로 밀리는 판이다. 벌써 밀물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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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되면 도리가 없소이다. 닻을 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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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의 초조는 모르는 체 배주인은 닻을 내리고 닻줄 채비를 한다. 석은 질겁을 해서 말리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가보자는 것이다. 그 무슨 짓이란 바람을 만드는 것뿐이다. 바람을 제조할 방법이 없으면 이 밀물이 다시 썰물때까지의 예닐곱 시간을 해상에 닻을 내리고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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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따져보니 벌써 여섯 시간이나 잡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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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닻을 내리자 다른 사람들은 백호야 하고 벌렁들 드러누워버린다. 누가 내 배 다칠까보냐 식이다. 석은 번듯이 자빠지는 사람들의 상판대기를 구둣발로 짓이겨주고 싶은 충동을 남한테 눈치채이지 않느라고 멀리 인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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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조바심도 안 난다. 될 대로 되라는 막 생각이 들다가는 차라리 인천으로 돌아가리라고 배를 기다리나 밀물이고 보니 얼마든지 있어야 할 배는 한 척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바다는 무심할 만큼 고요하다. 바다가 아니라 그대로 얼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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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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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머리에 오도카니 앉아서 시계를 들여다보기를 만 세 시간 했다. 이제는 석도 지쳐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석도 그대로 뱃바닥에 벌렁 드러누워버리고 말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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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간으로 따지면 당진에 가서 닿았을 시간이나 되어 배는 겨우 자리를 떠서 양재도 여울목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여울목만 넘기면 인제는 살처럼 달리리라 생각한 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짱하던 날이 갑자기 안개가 자옥하니 끼기 시작하더니 불과 삼십분에 지척이 보이지 않는다. 인제는 뱃전을 치고 울어댄대도 배가 움직이어질 가망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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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두 다니면서 그래 요만한 안개쯤에 물길을 모르다니 무슨 말이오? 그러지 말고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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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입으면서 동료와 자기 자신에게 절대로 군인티를 안 내겠다던 것이 그의 결심이었음을 깜박 잊고서 석은 따지듯 이렇게 언성을 높이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석에게는 이 배주인이 일부러 늘쩡대는 것만 같이 고깝게 생각이 든다. 말은 영창이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서글픈 일이었다. 군에 들어온 지 석 달도 못 되어서 가족 때문에 영창에 들어갔다면 남 듣기에도 꼴사나운 일이었지만 그이 결벽성으로 보아서도 그것은 견디기에 어려운 고통이었다. 인제 남은 유일한 희망이란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석은 초조하다기보다도 차라리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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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석의 초조가 안개에 통할 리가 만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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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기어이 어둠으로 변했다. 초열흘 달이 있으련만 그야말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배주인은 닻을 내리고 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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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울상이 되어 배주인을 또 한번 붙들고 늘어져보았다. 뱃사공은 인제는 대꾸도 하기 싫다는 듯이 저 할일만 한다. 오불관언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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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님도 좀 눈을 붙이시지요. 여기서 떠났댔자 인제는 당진 가기까지 적(배 대일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다 맨여 암초투성이가 되어서 갈 수가 없을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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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가 딱하던지 나이 사십 남짓한 사람이 밤송이처럼 까칠한 수염을 만지며 위로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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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 탄 배가 돛을 올린 것은 훤히 먼동이 틀 무렵이다. 밤 사이에 빗방울까지 듣더니만 새벽부터 바람이 불어댄다. 하늬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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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눈이 번했다. 돛은 세찬 바람을 담뿍 싣고 살처럼 내닫는다. 마침 또 썰물이기도 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두시에는 닿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시에 닿는대도 벌써 삼십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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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 당진 어귀 한내에서 내린 것은 오후 세시였다. 이제 남은 시간이라고는 겨우 열여덟 시간뿐이다. 바람만 잘 만나면 열 시간 이내에도 인천까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석의 유일한 위안이다. 그는 배에서 내리면서부터 그대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을 묻는 시간이 뼈가 아프게 아깝다. 합덕까지의 십리라는 것이 뛰다시피 했는데도 실상 가보니 한 시간 이십분이 걸렸으니 이십리 길이나 되었던 모양이다. 합덕서 변촌까지가 삼십리요 거기서 오장골이 시오리라니 오십리 길이다. 그러나 지름길로는 삼십오리라고 해서 거의 구보로 달렸으나 시골서의 삼십리란 암만 가도 삼십리가 줄지를 않는다. 석은 배에서도 꼬박 굶었고 내려서도 잔입이었었다. 떡이라도 있으면 했으나 떡은 없고, 밥은 해야 한다니 이 뼈를 깎는 듯싶게 귀한 시간에 밥을 지어 먹을 도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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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중에 해가 졌다. 또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달이 있을 턱 없다. 그래서 석은 한 주막에 들러 길 안내할 사람을 하나 구했다. 여기서도 이십리라니 삼십리 길은 또 될 것이다. 열두시면 닿겠지 싶어 적이 안심은 되었으나, 돈을 오천원이나 내라고 하니 딱하다. 도시 돈이라고는 도합 오천이백원이었다. 어쨌든 가고 보자고 안내인 영감을 앞세우고 길인지 논둑인지도 분간키 어려운 길을 걷는다니보다 헤매기만 네시간, 아닌밤중에 황씨 집을 찾아갔더니만 또한 기막히는 대답이다. 보름 전까지도 자기 집에 있었는데 준다 준다 하던 피난민 배급도 주지 않아서 굶다 굶다가 부산을 가본다고 떠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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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살기는 분명 살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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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살아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데서 석은 우선 봉당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 때문도 있었지만 긴장이 풀린 것이었다.
 
59
석은 주인 황씨의 후의로 아내와 어린것이 두 달 동안이나 썼다는 방에서 하룻밤을 더 새웠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니 찾아볼 도리도 없거니와 인제는 시간도 없었다. 남은 시간은 열 시간뿐, 천운으로 바람이 잘 불어주어야 겨우 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열한시라야 만조가 되니까 그때까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외섬까지 가야만 했다. 석은 세 시간을 누워 다리를 쉬고 네시에 다시 당진을 향해서 황씨 집을 떠나왔다. 알고 보니 합덕으로 보다도 당진으로 나가서 외섬에서 배를 타면 네댓 시간은 물길을 얻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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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에 이르니 열시가 넘었다. 여기서 외섬까지는 삼십분이면 간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삼십분 있었다. 이 삼십분에 요기라도 해두어야 했다. 마침 당진은 장날이어서 장돌뱅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자도 많았다. 어린아이들도 상자를 들고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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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밥집을 눈여겨보다가 그만두었다. 외섬에도 주막이 있다니 막걸리라도 한잔하고 때울 셈이었다 . 돈도 이천백원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기다려도 외섬 나가서 기다릴 작정이다. 석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다란 장터를 빠져나가 담배가 싸면 한 갑 살까 싶어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상자를 놓고 앉은 데로 가자니까 난데없이 여남은 살 난 아이가 총알처럼 내달리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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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눈을, 다음에는 자기의 머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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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아이는 분명히 이렇게 그를 불렀던 것이다.
 
64
“아빠! 아빠!”
 
65
그리고 그것은 또 분명한 자기의 아들놈이었다. 열두살 난 현이었다. 못 알아볼 만큼 한쪽 눈이 작아졌다.
 
66
“현아!”
 
67
석은 품에 안기어 흑흑 느껴 우는 어린것을 안은 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따뜻한 체온이 피를 나눈 자식의 체온이 소물소물 스미어든다.
 
68
“어떻게 된 것이냐, 엄만 어디 있니?”
 
69
“여기서 이십리여. 아빠, 나 장보러 왔어. 누나도 이제 곧 와요. 담배 받으러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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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것은 이렇게 말하며 상자를 가리킨다. 상자 비슷한 갑 속에는 쌀튀기 과자 네댓 쪽에 성냥 댓 갑, 장수연 두어 봉, 깨엿 댓 개, 빨랫비누 한 장, 눈깔사탕에 과자가 한 봉지 ─ 이것이 상품의 전부였다. 석도 체면없이 울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곧 딸년도 왔다. 화랑 다섯 갑을 사들고 온다. 밑천이 적으니까 팔고서 떨어지면 또 사오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의 치마를 팔천원에 팔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오늘은 당진, 내일은 합덕, 모레는 고교 ─ 이렇게 장을 본다는 것이다. 장까지는 어디나 이십리 삼십리요 ─ 합덕장은 사십리 길이나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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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었다. 빨리 가도 바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서글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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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면 좋으냐!”
 
73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있는 데까지는 이십리가 넘는다는 것이다. 물론 갈 수는 없지만 이 어린것들을 어떻게 하고 가면 좋으냐. 그러나 이런 생각도 길게는 하고 있을 경우가 못 되었다.
 
74
그러고 있는 동안에 또 오분이 갔다. 석은 어린것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부산으로 갈래도 아내는 치마도 없어 밖에도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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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어린것의 손을 놓았다. 더 할말이 없었다. 편지를 부치고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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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을 해서라도 인천까지만 나오라고 아내한테다 몇 자 적어주고 석은 돌아서 올 수밖에 없었다 . 저도 데리고 가라고 큰놈이 엉엉 울어대고 몸부림을 친다. 딸년은 그래도 철이 났다고 돌아서서 울고만 있다. 석은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걸음을 제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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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걸음을 재치어도 어린놈의 울음소리는 자꾸만 따라온다. 기분만이 아니라 정말 큰놈은 엎치락거리며 따라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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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빠! 나두 갈 테여, 아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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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돌아다보지 않으리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지끈하는 소리가 들린다. 피가 났는지 입술이 짭짜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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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 2호, 1951년 7월〉
【원문】범선(帆船)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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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無影) [저자]
 
  # 신조(잡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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