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조선출판사(朝鮮出版社)에서 발간된 권환의 첫 번째 시집 수록 시

1

산의 표정

2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한다는 고현(古賢)을 본뜨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인자도 아니면서 산을 유달리 좋아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치 색시들이 장미꽃 좋아하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지금 푸르고 높은 산기슭에 혼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3

산은 웅대한 놋부처처럼 영원한 묵상을 하고 있다

4

부 ─ 연 안개가 뭉게뭉게 에워싸다

5

그러나 꼼짝도 않는다

6

뻐꾹새가 여기저기 부르짖는다

7

그러나 달싹도 않는다

8

시냇물이 시끄럽게 속삭인다

9

그러나 들은 척 만 척도 않는다.

10

산은 나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11

산은 자애스럽게 빙그레 웃는다.

12

산은 무서운 눈을 부릅뜬다

13

경건한 산의 표정이었다

14

산아! 나는 힘껏 외쳐 불렀다

15

산은 그러나 꼼짝달싹도 않는다

16

영원한 묵상이었다

17

산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다 그러나 장미같이 정다웁다 비둘기처럼 따뜻하다

18

나는 라마교도(喇嘛敎徒)처럼 공손히 예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