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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소설가의 작품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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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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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소설가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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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신인이라고 불리워지는 분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이해를 가져볼 생각으로 편집자의 소청(所請)대로 일에 손을 붙여 보았으나, 시작해보고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깨달았다. 나와 같이 직감력이 충분치 못하고 다망(多忙)한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한 바 아니나, 우선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여기에 미비한 이 기록을 초(草)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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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내가 대상으로 하려는 분들이 작품 외에 어떠한 창작적 주장을 발표하거나, 또는 같은 문학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 간에 유파나 조류나 집단이 있어서 자기네들이 표방하는 예술상 신조를 토로한다던가, 그러한 습관이 도무지 없어서 씨 등의 세계를 측단(測斷)하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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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그렇다면 씨 등 각 개인의 문학세계를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저서나 창작집이 있으면 간편하겠는데, 그런 것조차 하나도 없어서, 산일(散逸)된 작품을 모아서 계통적으로 씨 등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도 나의 지금 상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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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한 작품으로 능히 그 작가의 정신적 예술적 전모를 엿볼 수 있을, 그토록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을 읽지 못한 것도 있고, 또 그런 것의 작품명조차 모르고 있지는 않을는지, 그것도 딱히는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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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 허준, 정인택, 정비석, 박노갑, 김동리, 현덕, 김영수, 이선희 등 제씨 외에 계용묵, 이근영, 현경준, 김정한 등 제씨도 취급해 보려던 심산이었으나, 지면의 제한과 나의 준비관계로 부득이 다음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음도 적지 않은 유감이었다. 그래도 이 기회에 내가 읽어본 작품의 총 수효는 이하 구체적으로 취급하겠지만 50편이 넘었다. 이 미비한 기록의 발표를 기회 삼아, 분석과 논단의 잘못된 곳을 들어 작가나 평가(評家)들의 교시와 논평을 받을 수 있으면, 이 방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헛되이 되풀이되는 왜곡된 신세대론, 순수론 등에 적지 않은 광명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행여 작가 제씨와 대방(大方)의 비판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기록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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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 씨의 「비오는 거리」는 읽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昭和[소화] 12년 9월에 발표된 「무성격자(無性格者)」가 나에게 있어서는 최초의 작품이었다. 「역설(逆說)」, 「폐어인(肺魚人)」, 「봄과 신작로」, 「심문(心紋)」이 여태껏 씨가 나에게 보여준 작품의 전부인데, 그 중에서 「봄과 신작로」는 이질적인 작품으로 최씨의 본질세계와는 직선적으로 통하지 않는 일면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전혀 시험적인 정도를 면치 못하고 있는 소설이다. 씨의 문학적 본질은 벌써 「무성격자(無性格者)」에서 충분히 그 특징을 나타내었지만, 역시 그것의 뒤를 잇는 「역설(逆說)」, 「폐어인(肺魚人)」, 「심문(心紋)」의 정신적 내용이 되어있는 지식인 소시민의 문제의 문학적 반영에 있다. 「무성격자(無性格者)」의 정일이라는 중학교 교원은 이 시대를 사는, 의지가 박약한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퇴폐적인 일면을 가장 뚜렷하게 대표하는 인물이다. 상업과 대금(貸金)으로 성공한 만수 노인의 장남으로 대학을 졸업한 정일은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고 생활력조차 상실한 만큼 생존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는 청년이었다. 본처에 대한 정상적인 애정도, 강인한 성격의 수전노인 아버지와 가정에 대한 애착도,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까지도 잃어버리게 되는 지식인의 사회적 정신적 병근(病根)이 어데 가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하여도, 이러한 정신이 따라갈 방향의 한 갈래가 퇴폐에로 뻗어져 있으리라는 것은 추상키 힘들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정일은 ‘달 아래 빛나는 독한 버섯 같이 요기(妖氣)로운’ 문주의 각혈하는 품속으로 권태와 무의지에 허덕이는 몸과 마음을 묻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자의식은 아직도 거추장스럽게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이 구할 길 없는 지식인의 세계가 조잡한 심리와 의식의 기술(記述)을 통하여 우리의 앞에 벌어진다. 죽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을 치리만큼 생존욕이 왕성하던 아버지도, 그리고 죽으면 같이 죽자고 말끝마다 되씹고 있던 생명의 낭비자인 문주도, 같은 날 세상을 하직하였으나 정일의 가슴에는 의연히 생활력이나 신념은 소생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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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역설(逆說)」이나 「폐어인(肺魚人)」도 한가지 비등(比等)한 세계여서 강한 성격이 빠져나간 신념을 잃은 지식인의 무의지한 자존심의 유지를 통하여(전자), 또는 건강을 상실한 자의 무가치한 세태에 대한 체관(諦觀), 건강을 유지해 보려는 하찮은 노력에 대한 쓸쓸한 정관(靜觀) 등을 통하여(후자) 작자는 같은 세계의 슬픈 노래를 되풀이할 뿐 신생(新生)의 싹은 조련히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최근의 역작 「심문(心紋)」에서는 그것을 보다 정상된 상태에서 전개하여 보았고, 사회운동의 극단의 탈락자 현혁이와 그의 정신적 유지자인 여옥이을 완전히 처리해 버렸으나, 작자는 김명일이라는 주인공에게 어떻다 할 새로운 신념을 부여하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최명익 씨는 수삼년래(數三年來)의 우심(尤甚)한 전환기를 경험하고 있는 지식인 소시민의 정신적 일면을 가장 중심적인 문제 위에서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복잡한 세계의 결척(抉剔)에서 반드시 필요한 심리주의 수법의 일단(一端)을 씨의 표현법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심문(心紋)」에서 보는 바와 같이 씨의 지식인의 사상문제의 취급이 어딘가 약간 초점이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최씨는 약력에 의하면 明治[명치] 37년으로 출생년(出生年)이 되어 있다. 우리 문단에서 중견이라고 불리워지는 대개의 작가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풍양(豊穰)한 사조(思潮)의 변천을 체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 대신 씨는 그러한 사조(思潮)의 변천을 당하여 그것을 완전히 제 자신의 ‘자기의 문제’로써 처리해 본 경험이 희박한 것이나 아닐까? 나는 펀뜻 그러한 것을 생각하여 이 의문을 내 스스로 풀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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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 문학과 가장 가까운 지대 위에서 허준 씨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허씨의 과거의 경력으로 보면 수긍할 점이 없지 않다. 허씨 역시 청소년기를 30년대에 보낸 작가이다. 씨가 30년대를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딱히 알 수 없으나, 씨의 최초의 작품 「탁류」와 씨 자신의 기록한 작은 전기(傳記)에 의하면, 우리의 작가가 생활신념에 있어서 어떠한 용이(容易)치 않은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었고, 다시 이러한 평상(平常)되지 않은 정신적 상태를 허씨와 및 허씨의 문학이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막연하기는 하나 30년대 이후의 지식인이 처한 비상한 난국으로부터 유래된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나로 하여금 추상(推想)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씨의 최근의 역작 「야한기(夜寒記)」는 정밀히 읽어보지 못하였으나 신문에 게재되던 때 한두 회 읽어본 느낌에 의하면 「탁류」와 확연히 구분을 지을 정신세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탁류」는 허씨의 본질세계를 규시(窺視)하기에 족한 특징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작중인물 현철은 무기력하고 해태(懈怠)하고 결단력이 없는 청년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으나 그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여러모로 착착(窄鑿)해 보나 딱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느 시골서 관청에 다니며 그날 그날을 보내고는 있으나 그 생활방도에 의의나 희망을 가지는 것도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생존의 이유가 나변(那邊)에 있는지도 의식치 못한다. 그렇다고 물론 결단력이 없으니까 생활의 개혁도 자살도 하지는 못한다. 매춘부 순이와 동서(同棲)하여 질투와 시기와 사추(邪推)에 찬 대접과 취급을 당하면서 망신과 창피를 겪고 있으나 자존심도 또 그러한 여자를 단죄할 자격도 자기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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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금도 내가 너를 동정한 줄만 안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동정한다는 말이냐. 누구를 건져낸다고 하는 말이냐. 건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건지지 못해서 하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어떠한 결심이었을 따름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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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순이가 아닌 질투에 제 몸을 이기지 못하여 동네를 소란스럽게 하고 말았을 때, 현철은 드디어 이 교양 없는 부패한 살덩어리와 동거생활을 청산하려고 결심하고 있으나 이러한 것이 전생애의 종막(終幕)처럼 느껴져서 잠시 그는 치를 부르르 떨었고 이어서 “그 다음 순간에는 그것도 일종의 통쾌한 미소가 되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고 작자는 서술하였다. 물론 이러한 ‘미소’가 어떤 것인지를 작자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퇴폐를 형식적으로 청산은 해 보았으나, 그 다음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러한 상태를 넘어설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자기 조소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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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前記), 최, 허 양씨와는 다소 다르나 지식인의 무기력과 피로와 허무와 동요를 최초의 작품부터 여태껏 일관하여 따르고 있는 작가에 정인택 씨가 있다. 정씨는 주로 그날그날 자기를 유지하고 살림을 붙들고 나갈만한 생활력이 결여된 ‘룸펜’ 동양(同樣)의 지식청년을 취급하여, 이러한 상태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건강의 위협, 비열한 심정과 주체스러운 자의식 등의 발호 가운데서 자기를 부둥켜 세워 보겠다는 노력이 얼마나 힘없이 좌절되는가를 즐겨서 그리고 있다. 소화 11년 6월에 발표된 「촉루(髑髏」에서부터 최근의 「준동(蠢動)」, 「미로」, 「동요(動搖)」에 이르기까지 제목만 보아도 추상할 수 있겠지만 씨의 문학은 언제나 같은 세계를 방황하고 움직이고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촉루」에서는 ‘오시이레’에 숨어서 장작불을 놓는 것으로, 「준동」에서는 지진이 지상의 온갖 것을 뒤흔들 때에 위험한 2층으로 뛰어들어가서 그의 ‘유미에’를 쳐들고 나오는 것으로, 그리고 「미로」에서는 피곤과 사(死)와 절망과 허무 속에서 허덕이다가 유미에의 임신 3개월로 신생(新生)의 씨를 발견해 보는 것으로, 또다시 「동요(動搖)」에서는 사나이의 미래를 위하여 동거생활을 청산해 주는 여급(女給)과 지식청년을 그리어서, 이러한 불건강한 세계로부터 정신을 구출하려고 비상한 고심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단정하기에 곤란치 아니하나, 그러한 노력이 겨우 작품의 종말의 몇 줄에만 배회할 뿐, 그 다음 작품은 전작의 종말을 그대로 계승하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정씨의 시대적 신념이 역시 결코 작품의 결론 같지 않다는 것을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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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이상의 3씨는 커다란 역사의 법칙 밑에 깔려서 허덕이는 지식인의 문제를 각기 득의(得意)로 하는 색다른 작품세계로부터 토구(討究)해보고 있으나, 이것과 맞부딪쳐서 싸워 나아갈 신념이나 생활력을 획득하지 못하였다는 점은 공통하다. 씨 등이 모두 심리와 의식의 묘사에 조련치 않은 수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외부세계에 대한 산문 정신의 패배와 이것의 심리 세계에의 전환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지식인의 정신적인 상태를 응시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힌트가 될 것이다. 심리와 의식을 단순화하려고 하려 않고, 오히려 평상(平常)되지 않은 채로 비범상(非凡常)하게 표현하려는 점에서 허준 씨의 수법은 차라리 시작(試作) 같은 느낌까지 주고 있다. 여하튼 이하 계속하여 취급하려는 다른 작가의 대부분과 함께 전기(前記)의 세 분이 소설의 고전적 법칙을 의식적으로 파괴하려는 점은 기술상 특이점으로써 기억해 둘만한 일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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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12년에 「성황당(城隍堂)」의 당선작으로 문단에 데뷔한 정비석 씨에게도 「저기압」이나 「동경(憧憬)」이나 또는 부분적으로는 「이 분위기」 같은 지식인을 취급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물론 상기(上記)의 제씨처럼 우심(尤甚)한 정신상태를 근본적으로 파헤쳐 보거나, 본질적인 여러 가지 시대적 산물 속에서 자신을 검토시키자는 근기(根氣)있는 노력은 있지 않았다고 본다. 오히려 정씨는 전기(前記)의 수작(數作)에서 그러한 노력을 시험하였으나 그 가운데서 소설정신을 단련시킬 자신이 없어져서 그 후 ‘애욕’이나 ‘성(性)’의 세계로 방향을 돌려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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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성황당(城隍堂)」가운데 벌써 성(性)의 세계로 달릴 중요한 요소가 감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순이가 개울에서 옷을 홀랑 벗어버리고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삼림간수(森林看守) 긴상이 옷을 감추고, 이리하여 벌어지는 두 사람의 행동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가 아름드리 나무가 무성한 궁벽한 원시림 속이어서 오히려 건강한 매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나, 그 뒤 이러한 작자의 취미는 일로(一路) 「요마(妖魔)」「치정도(痴情圖)」그리고 「비밀」같은 화려체(華麗體)의 침범까지 경험하면서 「잡어(雜魚)」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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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 갈래 계보 외에 「애증도(愛憎道)」나 「귀불귀(歸不歸)」같은 치정 중심의 남녀심리의 비교적 고투(古套)한 전개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도 별반 괄목할 만한 ‘모랄’로 되지는 못하였다. 물론 나는 지식인의 정신문제를 취급한다고 산문정신을 허무나 퇴폐로 끌고 가거나, 또는 자기 개조와 자기구원으로 몰고 가는 것을 문학의 정상(正常)한 진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은, 그곳으로부터 떠나는 방향이 성이나 애욕이나 성욕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한다. 씨 역시 30년대를 중요하게 생활한 분이다. 이러한 분이 자기의 정신상 처리를 성과 치정 속에서 수행해 버리려고 할 때에 그것은 자칫하면 안이한 도피와, 당연히 억제하여야 할 그리 고상하지 못한 개인취미에 문학을 잡쳐버리는 듯한 오해를 사람으로 하여금 품게 할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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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갑 씨도 중견에게 못지 않은 사조(思潮)를 경험한 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의 일신상 문제로써 겪어내고 처리하였느냐 하는 것은 역시 이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는 데서도 고려하여야 될 거점이 될 것 같다. 「공상기(空想記)」「창공(蒼空)」「삼인행(三人行)」은 이런 것을 생각하여 퍽도 흥미 있는 작품이다. 이것은 모두 박씨 자신의 심경과 체험을 기록한 것인데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이 세속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날그날의 끼니에 곤락을 느끼고, 그런데다가 ‘밥’이 되지 않는 문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붙들고 나가야 하겠고, 이리하여 「공상기(空想記)」에서는 생식(生食)할 것을 결심까지 해보는 것이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아 변함없는 우울한 딱한 세계를 전개시켜 보인다. 「창공(蒼空)」에서는 역시 속세를 백안시하는 청년이 ‘무덤 푸른 잔디 위에 누워서’ 20년래에 처음 찾았던 어제 본 별을 다시금 찾노라고 ‘창공으로 창공으로 눈살을 쏘았다’고 한다. 「삼인행(三人行)」에서는 친구가 시작한 싸전에 관계했으나 돈 없고 장사 수단 없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다 했으나 생활은 향상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칫하면 동사하던 3인 사이에 우정만 상할 뻔하여 드디어 장사에서도 발을 뽑고 ‘사나운 날씨였다. 바람 먼지 뿌연 거리 위로 모자 푹 눌러쓰고 지리수굿 걸어가는’ 주인공의 쓸쓸한 모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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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세 작품에서 취급된 지식인이나 지식계급의 문제를 보면, 전술(前述)의 최씨나 허씨 정씨들처럼 그것을 사상적 정신적으로 절박한 상태에서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내 깨달을 수가 있다. 박씨는 지식인이 사상적으로 어떠한 적지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든가, 또는, 그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며 어떻게 침잠(沈潛)하며 혹은 솟아나려고 애쓰고 있다든가 하는 문제에서 자신을 방관시킬 수 있을 만큼 30년대를 파나틱하게 보내지 않은 분이다. 그러므로 박씨는 속세나 어지러운 세태에서 자기를 구별지우려고는 하지만 그것을 오히려 청빈의 길, 선비다운 길에서 택해 보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청빈에 안재(安在)한다는 것이 대학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얼마나 우울한 일일 것이라는 건 상상키에 곤란치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박씨에게는 그늘 세계의 분위기가 어떠한 작품에도 변함없이 따라다니고 있다. 「이랑이」「춘안(春顔)」은 물론 그러한 부류에다 몰아 넣을 수 없을는지 모르나 「거울」「방혼(芳魂)」, 특히 「추풍인(秋風引)」에는 이것은 극도에 달하여 있다. 「이랑이」「춘안」은 여성의 문제를 씨 류(流)의 태도로 그려본 것으로 특기할 것이 없으나, 「거울」「방혼」에서 시험하고 있는 기술상 수법에 대하여는 일언(一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거울」에서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의 표정과 눈과 눈썹과 코사이를 이동하는 동안,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의식을 그려서 이야기를 풀려고 하였고, 「방혼」에서는 환각과 현실과 추억과 유령과의 문답 등을 교차시키고 교체시키면서 의식과 표면에 나타난 현상의 배후로 숨어드는 것에 의하여 스토리를 전하려고 하였다. 헨리·제임스의 「나사못의 회전(回傳)」을 읽으며 박씨의 수법을 연상하였다는 것을 부기(附記)하여 둔다. 그러므로 전기(前記)의 수작(數作)에서 기술상의 실험을 도외시하고 이를 평가하려 든다면 비평은 왕왕히 넌센스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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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씨의 것으론 昭和[소화] 11년 5월에 발표된 「무녀도(巫女圖)」를 필두로 하여 「바위」「황토기(黃土記)」「찔레꽃」「두꺼비」「완미설(玩美設)」의 제작을 읽었다. 꼭 읽으려고 하면서 여의치 못한 것으로 「솔거」「여잉설(餘剩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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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것 중에 「두꺼비」는 희귀하게 지식청년을 취급하여 허준 씨나 최명익 씨의 세계와 접근할 듯이 보이는 작품으로, 농촌애화(農村哀話)인 「찔레꽃」과 함께 이질적이었다. 역시 나는 김씨의 본령을 「무녀도」 「바위」등을 위시하여 「황토기」「완미설」에까지 이르는 작품세계에서 찾으려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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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화랑의 후예」를 가지고 중앙일보에 당선한 소화 10년은 카프가 해산을 당하는 해이고 경향문학이 전면적으로 후퇴하기 비롯하던 해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적인 것의 복고열과 부흥열이 치성(熾盛)하기 시작하여, 골동(骨董)이나 서화(書畵)나 민속취미들이 현대적 기호(嗜好)로써 등장하고, 이리하여 그것은 복고적 낭만미와 어울려서 현재까지도 하나의 중요한 위치를 지식인의 정의세계(情意世界) 속에 차지하고 있다. 선전(鮮展) 특선의 김만형 씨의 「검무」라는 그림이 많은 공감자(共感者)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전혀 이 탓이다. 그러므로 김동리 씨에 대한 우리들의 매력은 이러한 각도를 떠나서는 검토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범박(泛博)히 개괄하면 일종의 동양적인 아취(雅趣)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러한 세계다. 이 점에서 「무녀도」가 가장 대표적이다. 모화라는 무녀와 그의 딸 낭이와 그와 이성(異姓) 남매인 욱이와의 사이에 일어나는 슬픈 이야기를 귀먹고 말 못하는 ‘무녀도는 슬픈 그림이었다’로 시작되는 작품이 이것이다. 어미나 딸의 얼굴은 모두 푸른빛이라고 말하였다. 푸른빛, 또는 귀먹은 벙어리의 소녀, 무당의 신비색이 가득 찬 환기(幻奇)한 세계 등 - 이러한 것들이 표현하려는 예술의 경지는, 달 밝은 밤 파초(芭蕉)가 이지러진 커다란 절간의 뒷뜰에서 무서움과 함께 우리들이 맛볼 수 있는 그러한 세계가 아닐까. 여하튼 경향문학의 직후를 붙잡은 문학의 한 가닥이 김동리 씨의 세계로 흘러갔다는 것은 시사(示唆)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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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 씨를 박태원 씨나 채만식 씨와 합쳐서 세태세계의 묘사가로 간주하는 평론가가 있다. 그러나 씨의 당선작 「남생이」가 인천항 부두 가까운 빈민굴의 외부묘사에 있어 비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고 하여도, 나의 눈에 그것이 그렇게 매력 있게 비춰진 것은 그 가운데 심리의 기민(機敏)을 적당히 배치한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심리의 기민한 점을 포착하는 씨의 재주는 「경칩(驚蟄)」에서도 나타났으나 이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 것이 소년 노마의 어린 심리라는 것도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심리만으로 재주를 부린 「두꺼비가 먹은 돈」에 이르면 그것은 벌써 어른들의 문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골목」에서 어린아이를 뽑아버릴 때에 씨의 외부묘사가 얼마나 파탄하였는가는 우리가 한가지로 보는 바와 같다. 심리의 삽입 없이, 씨는 그의 매력을 지탱해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녹성좌(綠星座)」를 사진사와 그의 형과 형수와 그리고 한편에는 그의 우인(友人)들과 - 이 중간에서 방황하는 심리를 그려 펼쳐보일 때에 우리가 현 씨의 노력에서 얼마나 매력을 느끼었는가는 아직도 기억에 새롭거니와, 씨가 중도에서 초점을 놓쳐 버리고 극단원(劇團員)의 전부의 심리동향으로 따라갔을 때 작품이 뿌리째 흩어져 버렸던 것도 아직 나의 머리에 남아있다. 씨는 결코 전체를 넓게 그릴 수 있는 외부세계의 묘사가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씨는 너무 가늘고 적은 심리의 편편(片片)에 구애하고 있는 작가다. 환언(換言)하면 현씨는 소설세계를 통솔하는 역량에 부족을 느끼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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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 김영수 씨는 낡은 구성법을 답습하여 작품 중에 반드시 초점을 설정하려는 작가이다. 김씨야말로 어느 모로 보면 박태원 씨와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박씨와 가깝다고 하여도 「천변풍경」이나 혹은 그 반대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가까운 것이 아니라, 그 중간의 단편을 예(例)하면 「성탄제(聖誕祭)」「옆집 색시」「수풍금(手風琴)」과 통하는 세계다. 그러므로 당선작 「소복(素服)」이하 「벽」「상장(喪章)」「생리」「단층」등 작품의 핀트로 설정된 것이 한말로 말하자면 그다지 기품있는 세계의 어떤 포인트가 되어있지는 못한 것 같다. 평탄한 묘사법을 살리기 위하여 씨는 크라이막스라고도 말할 수 있을 초점을 반드시 설치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하여 씨는 소설이 다소 속적(俗的) 침범을 받아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기(前記) 몇 분 작가들이 낡은 소설의 법칙에 반항하고 그것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김씨는 낡은 소설작법을 끌고 나가는 유일의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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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素服)」의 이야기는 인력거부(人力車夫) 양서방의 아내가 간부(姦夫)인 상고머리와 통하여, 드디어 남편은 그에게 맞아서 세상을 떠났으나, 그 뒤 상고머리가 선약대로 실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허욕에서 눈이 떠 눈오는 날 소복(素服)을 입고 죽은 양서방의 무덤을 찾는다는 것인데, 이 허욕의 자각이 나의 보기엔 그다지 정신적으로 높이 평가할 모랄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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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단층」은 아들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모성애를 살리기 위하여 어머니의 입장을 희생한다는 것인데, 아이를 믿을 수 없는 남편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예로부터 변함없는 어머니의 애정으로 되어있긴 하나, 그렇다고 신여성으로서의 해결방법을 자기희생과 남편과의 육신상 타협으로밖에 찾지 못한다는 작자의 의견에는 어딘가 전적으로 공감을 느끼기 곤란한 간격이 있는 것 같다. 「단층」의 전반을 먼저 보고 나는 그늘진 사회의 일단면을 전체적으로 묘파(描破)해 보려는 씨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나, 후반에 와서 결국, 오돌 부자, 학수 부부, 백인옥을 중심한 인물, 병원의 간호부들의 생활이 강정실과 허환의 이혼과 자식 문제와 어떠한 극적 연관성 밑에 등장된 것이 아닌 것을 보고 적지 않게 실망하였다. 김씨에게 있어서는 주제를 좀더 정신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설정하는 태도가, 앞으로의 씨의 문학을 속된 곳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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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제씨 외에 부인작단(婦人作壇)에서 이선희 씨의 것을 읽어 보았는데 「여인명령(女人命令)」은 읽지 못해 무어라고 말하기 힘드나 생활이라고 부를 것이 하나도 없 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였고 최근의 「탕자(蕩子)」는 센티멘탈한 이상으로 그것을 평가해 볼 건덕지가 없어서 역시 내 결론은 낙관적인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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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약간의 결어를 맺고 이 미비한 분석을 끝막아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어떠한 결론이 필요하랴! 이상 제 씨들이 경향문학의 왕성기와 30년대를 어떠한 정신상태로써 보냈는지는 묻지 않는다 하여도 씨 등이 그 직후로부터 약 5, 6 년간에 비로소 자기의 세계관과 사상을 문학적 수단으로써 표현하기 비롯하였다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한다. 그러므로 년대 이전에 30 소설문학을 인식수단으로 선택하여 금일(今日)에 이른 소위 중견작가와는 같은 문제를 취급하여도 다른 상모(相貌)를 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씨의 문학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가 산문문학을 정상되게 전진시킬 수 있을는지, 조급한 결단을 피하려 하거니와, 씨 등의 문학이 우리의 시대를 어떠한 면에 있어서이든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문학에 지나친 비관이나 또는 과대평가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점을 고려하면 요즘 평단(評壇)에서 유행하는 신세대론과 신인론, 또는 순수론의 제 평론가들이 즐겨서 가지려는 바 신인 제씨에 대한 그릇된 과대평가와 또는 그와 반대되는 결론들이 자신의 위치를 깨달음에 이를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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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경진] 신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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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평론』제5호, 1940년 2월)
【원문】신진소설가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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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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