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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의 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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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5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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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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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는 전통이 없다, 또는 경박하다, 역시 우리들을 매혹시키는 곳은 서구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면에서만 하는 말이지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실상 우리들의 개념으로서의 전통이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 동양 사람인 우리들은 하루 이틀에 서구적인 전통이 없다는 것을 곧 아메리카에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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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나는 이곳에 대해 아직까지 어떻다는 것을 확정하게 말할 수 없다. 아메리카에 사는 사람들 역시 자기의 나라가 무엇을 지니고 어떠한 인상을 남에게 주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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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아메리카는 광대한 곳이다. 마천루와 바벨의 탑과는 관련이 없건만 그들이 원대한 야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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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회고하면 아메리카는 야욕에 불탄 이단자의 나라다. 구라파가 잠자고 그들이 발전에의 꿈을 버렸을 적에 아메리카의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 새 나라를 만들었고, 그들은 꺾지 못할 청춘의 힘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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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없다? 경박하다? 하는 소리를 아메리카가 듣지 못할 리 없으며 도리어 많은 그러한 비난을 받아가며 살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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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구를 노년기로 본다면 아메리카는 청년기이며, 청년이 가지는 자랑스러운 힘으로써 생활하며 사고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나에게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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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물론 전통을 무시하거나 자기만족에만 살고 있지 않다. 한걸음 더 나가 좋은 현재와 그 생활의 환경을 만들고 그것으로 하여금 다음 세대의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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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고 떠난 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리버티형의 화객선이었다. 이것은 2차대전 중에 미국에서 건조한 수송선이며 현재 한국 해운계에서는 큰 자랑거리다. 하지만 아메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놀란 것은 시애틀을 지나 터코마에서 워싱턴주의 수부인 올림피아항에 이르는 해상에 수백 척씩 계선(繫船)하여 놓은 천여 척의 리버티형의 수송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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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볼 때 우리의 빈약성은 고사하고 아메리카가 가진 놀라운 힘에 먼저 경탄하여 버렸다. 그 후 다른 서적에서 본 바에 의하면 허드슨강에도 천여 척이 계선되어 농작물의 그레인 창고로 선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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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서북쪽으로 접경을 이루고 있는 워싱턴주 북방은 무성한 삼림으로 알려져 있다. 헴록, 유의 수목들은 요즘에 와선 재목이 되는데 웨스턴유의 평균 길이는 40피트, 100피트의 헴록은 온지대에서는 200피트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가본 여러 도시의 대부분도 거의 재목공장이 아니면 펄프 제작회사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되는 몇 가지 일중 아메리카의 원동력 속에는 이러한 삼림의 힘도 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최근의 아메리카 영화가 사진과 암석의 서부극에서 삼림과 하천의 서부극으로 옮겨진 것과 같이 재목은 집을 만들고 예전의 다리가 되고 철도의 침목이 되고 펄프는 지류(紙類)로 변했다. 건물과 철도와 신문, 서적 도서의 발달은 현재의 문명국으로서의 아메리카와 결부시킬 수 있으며 창해와 같은 삼림은 아메리카의 웅대성을 말하는 동시 그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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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자유와 질서의 발달을 의미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개인과 사회에 있어서의 자유나 질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며, 내가 단기간의 견문으로 느낀 것은 그들의 참다운 질서의 확립이다. 자동차가 보행하는 사람을 먼저 걸어가게 하고 지나간다든가 밤 한두 시 보행하는 사람이나 달리는 차 하나도 없는 교차로에서 적과 청의 두 가지 신호등을 지킨다는 것도 쉽게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질서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일상의 어느 한 잠시간도 마음의 질서를 버리고 사는 것 같지가 않다. 판매원이 없어도 그 대금을 놓고 신문을 들고 가는 것은 두말할 것 없고 노동자는 자기가 맡은 작업에 조금도 시간을 어기지 않고 열중한다. 백화점은 개점시간이 단 1분이 지나도 어떠한 고가의 물품도 팔지 않으며 버스의 출발은 결정된 시간의 단 1분도 늦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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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매일 신문을 샀으나 별로 큰 범죄기사를 읽지 못했다. 범죄의 나라 아메리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판이하다. 백화점이나 귀금속상 그리고 은행의 문이 이곳처럼 무겁고 두터운 철문을 내리고 있는 것도 보지 못했으며 겨우 조그만 열쇠로 짤깍 잠글 뿐이다. 대낮보다도 눈부신 쇼윈도 속에는 많은 물건을 그대로 진열해 놓았으나 유리를 깨트리고 훔친다는 것은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라이터나 소설가의 창작에 그치는 것 같다. 결국 아메리카는 경제적으로 개인과 사회가 이미 안정해졌기 때문에 거기에는 혼란이 적어졌으며 사람들은 양심이 가리키는 질서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 생활에 있어서의 하나의 엔조이로 되고 말았다. 넓은 서점 속에서 남자 사무원이 혼자서 일을 보고 있고 주점의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한잔 권할 땐 반드시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기에 집어넣는다. 그것은 탈세를 하지 않겠다는 질서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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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시에서 많은 사람과 만났다. 그리 저명한 상류층의 사람이 아니라 노동자 식당 주인 서점의 , , 주인, 자동차회사의 세일즈맨, 도서관장, 오일회사의 사무원 등 아메리카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중추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선량하며 양심적이며 친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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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의 선생인 M씨는 나의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는데 내가 그것을 송부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한즉 한국에 돌아와보니 이미 그 사진은 잘 포장되어 나의 집에 도착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해 본 일이 있는 K씨는 자기는 이곳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후대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 대통령을 극구 찬양한다. 아나코테스에서 만난 화란계의 H씨는 우정 영업도 그만두고 나를 데리고 워싱턴주의 주립공원으로 안내해 주는 등 아메리카인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보다도 친절한 것 같다. 그들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에 많은 오해와 역선전을 듣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선량하며 서구 사람처럼 인색하지가 않다. 여행자에게 고맙게 해준다는 것은, 더욱 그것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러하다면 그것처럼 반가운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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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주에서 나는 어떤 한국인의 이민가족을 찾았다. 포틀랜드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그레셤이라는 곳이다. 오리엔탈 부락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사는 세 세대의 한국 사람들 ─ 아니 그의 가장인 부모만 빼놓고는 제2세부터는 아메리카 사람인데 ─ 은 지금 모두 생활에는 걱정이 없다. 마운틴 후드라는 백설이 휘날리는 유명한 산 밑에 자리 잡은 그들은 스트로베리의 농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 전까지는 백인의 소작인 노릇을 하였으나 이젠 자기들의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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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놀란 것은 가장 한국적 현상인 분열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세대는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반목하고 만나보지도 않고 있으며 내가 이 집에 들렀다 다른 집으로 가보는 것조차 싫어하고 있다. 원인인 즉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의 세 갈래로 독립운동의 단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적이 서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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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중 30여 년 전에 도미하여 3년 전에 작고했다는 박용현 씨의 미망인이 사는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벽에는 이 대통령의 사진과 독립운동에 물심으로 많은 원조를 한 것을 감사한다는 우리 정부의 감사장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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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나자 미망인은 오래된 우리나라의 레코드를 틀고 고국 생각이 난다고 눈물을 흘린다. 마치 불란서 영화 「페페 르 모코」의 다미아와 같은 정경이나 훨씬 감동적이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 아무 말도 없는데, 딸과 아들은 어머니의 그런 표정이 우습다는 듯이 그 옆에서 떠들고 있다. 피는 같으나 부모의 나라와 자기들의 나라가 다른 가족, 그들이 이루고 있는 농장, 참으로 기묘하다. 그리고 이민들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시민으로서 떳떳하게 자기 나라를 위해 일을 보고 있으나, 늙은 사람들은 죽기 전에 아니 죽어서라도 뼈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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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박씨에게는 딸이 넷이 있다. 모두 혼기에 있는데 결혼을 하지 못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 결혼을 시키고 싶지는 않고 백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주 빈곤한 자를 빼고서는 몹시 힘든 모양이다. 그래서 마땅한 한국 사람을 찾아보는 모양인데 제2세의 한국 청년을 찾기 드물다. 외견으로서는 단순하지만 참으로 복잡한 심정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역시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 나라에서 살고 결혼하고 생활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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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인의 기행문 - 세계의 인상』(진문사, 195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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