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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오는 대궐(大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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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5
김동인
1
눈 오는 대궐(大闕)
 
 
2
『상감마마! 상감마마!』
 
3
펄떡 놀라서 깨니 꿈이었다.
 
4
왕은 그 뒤에는 다시 잠이 들지 못하였다.
 
5
가만히 듣노라면 눈잉 오는 모양으로 밖에서는 퍼석퍼석하는 소리가 연하여 들린다.
 
6
망연히 일어나 앉아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앉아 있는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7
신라 흥덕왕(興德王) 초년(初年) 섣달 그믐, 남국 특유(南國 特有)의 함박눈은 끊임없이 밤새도록 내리붓는다.
 
8
사랑하는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을 땅속에 묵은 것이 어제였다.
 
9
이 왕은 본시는 선왕(先王)의 동생으로서 정통의 세자가 아니었다. 선왕에게는 왕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선왕이 승하하면 물론 그 왕자가 즉위할 것으로 누구든지 믿고 있던 바였다.
 
10
그랬는데 불행히도 왕자가 성장하기 전에 승하하여 어린 왕자를 임금으로 세우기 힘들기 때문에, 온 국민의 의견에 따라서 선왕의 아우님인 지금 왕이 즉위를 하게 된 것이었다.
 
11
본시 왕제(王弟)로서 왕위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더니만치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으니 만치 장화부인과의 사이도 유달리 좋았다. 그 부인이 그 해 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었다. 의가 유달리 좋았으니만치 그는 침식까지 잊고 부인의 병 간호를 하였다.
 
12
부인의 병 때문에 천하 만사가 모두 귀찮을 때에 또 한 가지의 사건이 그에게 이르렀다. 현왕이 갑자기 승하를 한 것 이었다. 그리고 현왕이 승하를 하기 때문에 왕위(王位)가 그에게 굴러온 것이었다.
 
13
한낱 왕제에게 갑자기 이 신라의 지존이 된 그였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하루 마음 펴보지를 못하였다. 사랑하는 아내─ 지금의 왕비의 가볍지 않은 병 때문에 한때도 용안을 펴본 적이 없었다.
 
14
시월에 즉위를 하여 십 이월까지 즉위식이라 사무 인계라는 모든 시끄러운 일들 때문에 중태에 있는 비를 마음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쩔쩔 맬 동안, 비의 환후는 나날이 더하여 가서 섣달 중순 드디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이었다.
 
15
떠날 때의 신분은 비록 왕비라 하나 한때도 왕비의 행세를 못하여 보았다.
 
16
즉위의 기꺼운 날도, 행정의 호화로운 날도 왕비는 그것과는 관계도 없는 음침한 세상에서 앓고만 있었다.
 
17
그리고 이전 한낱 왕족 시대에는 늘 병상에 지켜서 앓는 아내를 위로도 하여 주었지만, 신분이 지존으로 된 뒤에는 번잡한 용무 때문에 그것도 못하기 않았던가.
 
18
더구나 떠나기 순간 전에 왕비는 왕을 내전으로 청하였다.
 
19
왕비가 청하므로 황황히 내전으로 들어가 보매, 의외에도 비는 새옷(그것은 즉위식 때의 예복으로 쓰려고 지었던 것인데 비가 환후로 즉위식에도 참례치 못하였기 때문에 그냥 간직하여 두었던 것이다.)을 갈아입고 자리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이 의외의 광경에 왕이 눈을 크게 할 때에 비는,
 
20
『설경이라도 좀 보려고…』
 
21
이렇게 연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왕께 몸을 붙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22
오래간만에 이 의좋은 내외는 서로 붙들고 내전 댓돌에 나섰다. 함박꽃 송이같은 눈이 펑펑 퍼붓는다. 그 누 아래 고요히 잠겨 있는 서울을 이 서로 붙든 두 사람은 한없이 한 없이 굽어보았다.
 
23
『상감마마!』
 
24
이윽고 왕비가 왕을 붙렀다. 그 소리에 왕이 굽어보매 왕에게로 향한 비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괴어 있었다.
 
25
『상감마마, 저 눈 아래─ 아이구!』
 
26
비츨비츨 몸이 쓰러지려 하였다. 거기 놀라서 왕은 한 팔로 비를 껴안고 의자라도 가져오라고 내관을 부르러 할 때에 비가 말렸다.
 
27
『상감마마! 마마 손수 신을 안아 주세요. 앉기 싫습니다.』
 
28
왕은 내관을 부르려다가 그만두고 양팔로 비를 안았다. 그 왕의 팔에 힘있게 붙안긴 비는 놀랍게 빛나는 눈을 들어서 왕을 우러러보았다.
 
29
『상감마마, 저 눈 아래, 눈, 눈, 아이구─』
 
30
이것이 왕비의 이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런 뒤에 왕의 팔에 붙안긴 채 용안을 우러러보면서 저 세상으로 떠 난 것이었다.
 
31
그로부터 반 삭─ 나날이 꾸는 꿈은 단지 왕비에 관한 것 뿐이었다.
 
32
아침에 보매 눈은 왕비가 떠나던 날과 꼭 같은 정도로 쌓여 있었다.
 
33
즉위(卽位)와 왕비 승하─ 인생의 가장 즐거운 일과 가장 슬픈 일을 한꺼번에 겪은 왕의 초년은 지나가고 새해가 이르렀다.
 
34
새해가 되면서부터 신하들 사이는 차차 왕비 간택에 관한 의논이 일어났다. 온갖 생물은 반드시 짝이 있는 것, 하물며 왕께는 왕비가 없으면 안되겠다는 아주 평범한 생각 아래서였다. 고르고 고르고 고른 결과, 어떤 왕족의 따님 한 분을 선택하여 왕께 그 뜻을 상주하였다. 그랬더니 의외에도 왕은 첫말로 거절하여 버리는 것이었다.
 
35
사실, 왕은 새 비를 맞는다든가 그런 생각은 하여 본 일도 없었다.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한 아내가 죽으면 다른 아내를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왕의 마음에는 해로(偕老)를 맹세하였던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홀로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36
신라(新羅) 천리에도 봄이 이르러서 산에는 진달래요, 들에는 무궁화가 빛을 자랑하는 좋은 봄날이었지만, 왕의 마음에는 봄이 이르지 않았다.
 
37
일어나면 승하한 장화부인의 생각이었다. 잠들면 장화부인의 꿈이었다. 자나깨나 왕의 마음에는 승하한 왕비의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38
왕이노라고 정청에 나가서 정사를 통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왕이노라고 모든 일에 남의 표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39
이러한 의무감 때문에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강잉히 참고 어름어름 지내 보내지만, 사람들만 없으면 홀로이 내전으로 들어와서 궁인들까지 물리치고 엎드려서 울었다.
 
40
후궁들 가운데는 인젠 왕비가 없는지라 혹은 왕께 아롱거려서 왕의 총애라도 사보려는 야심으로 왕의 가까이서 이상한 눈치를 보이는 자도 간간 있었다. 그러나 왕은 그런 데 일체로 무심하였다. 아롱거릴지라도 그저 무심히 보아 두었다.
 
41
그랬는데 어떤 날 밤, 너무도 노골적으로 수상하게 군 일이 있어서 왕도 드디어 눈치를 채었다.
 
42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지극히 오뇌스럽게 하는 어떤 봄 밤이었다. 그 날도 왕은 이전 왕제 시대에 부인과 함께 꽃 따러 다니던 생각이 너무도 심하여 진일을 뒷동산 꽃밭에서 홀로이 울고 있다가 밤이 들어서야 침전으로 돌아왔다.
 
43
서나(西那)라는 궁녀가 그 날은 시중 들 차례였다. 서나는 왕의 침구를 준비하고 왕이 누운 뒤에 왕의 다리를 주물렀다.
 
44
왕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다가 이상한 기척에 깨어 보니 서나가 벌거벗고 왕의 자리 속에 들어와서 왕을 쓰러안고 있는 것이었다.
 
45
왕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서 소리쳐 궁인을 불렀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머리를 들지도 못하는 서나를 끌어내었다.
 
46
서나는 그 밤으로 궁에서 쫓겨 나갔다.
 
47
그 뒤에 때때로 왕은 그때 일을 회상하고 젊은 여인에게 너무도 창피를 준 것을 후회하기는 하였으나 만약 밤중에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였으면 또 그렇게 처리할 밖에는 없었을 것이었다.
 
48
이 한 가지 사건 때문에 후궁들의 넘실거리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대체 이 일이 있은 뒤부터는 왕은 여인이라 하는 것을 대하기조차 싫어졌다. 여인이란 단지 정욕의 덩어리라고만 믿어진 것이었다.
 
49
왕은 내전 제도를 고쳐서 일체로 여인을 없이하여 버리고 온갖 잔심부름까지 남자를 쓰게 하였다.
 
50
한 번 왕비 간택을 상주하였다가 물리침을 받은 대신들은 자기네들의 심리를 가지고 왕늬 내심을 추측하여서 이것은 아직 시기 상조이기 때문에 거절당한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 뒤 한 동안을 지나 왕비의 승하를 거의 잊게쯤 된 뒤에 다시 주청키로 하였다.
 
51
이리하여 왕비 승하한 지도 일 년이 획 하니 지나가 또 몇 달이 더 간 때, 즉 왕의 즉위 만 일 년 반쯤 지나서 다시 한 얌전한 규수를 골라내어 가지고 왕께 주청을 하였다. 그러나 그 때도 왕은 단연히 거절하였다.
 
52
『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나를 단지 귀찮게 하는 것에 지나지 못하니 아예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마오. 만약 이 뒤 내가 비를 영입할 생각이 있을 때면 그때 부탁을 할 테니 그때까지는 일체 내 앞에 그런 말은 내지 마오.』
 
53
왕은 적적이 이렇게 말하였다.
 
54
그로부터 또 반 년, 일 년, 나날이 초췌하여 가는 왕을 보고 재상들도 드디어 왕의 심경을 알았다.
 
55
다시는 이 왕께 왕비 간택을 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적적한 심경을 이해하느니만치 할 수 있는껏 왕을 번거롭지 않게 하려고 웬만한 일은 모두 재상끼리 협의하여 결정하고 왕께는 단지 형식상으로 상주하는 데 그쳤다. 이 적적하고 가련한 임금으로 하여금 쓸데없는 심로를 안하도록 하게 노력하였다. 온 재상들의 이런 호의 아래 왕은 대개 내전에서 날을 보내며 혼자서 승하한 비를 생각하면 그를 위하여 명복을 빌고 있었다.
 
56
어떤 날, 어느 대신이 내전에 왕께 배알하여 왕의 적적한 심사를 풀어 드리다가,
 
57
『상감마마, 이번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모(某)가 기조(奇鳥) 한 쌍을 마마께 진상하려고 가지고 돌아왔삽는데 어의에 듭시면 가져오리다.』
 
58
『어떤 새요?』
 
59
왕은 이렇게 물었다.
 
60
『앵무옵니다.』
 
61
『앵무?』
 
62
『네이, 인어(人語)를 능통한다 하오나 불행히 당나라 생장이라 당어(唐語)밖에는 아직 통치 못하와 신이 그사이 며칠을 스스로 우리 나랏말을 몇 마디 가르쳤더니 한두 마디는 어떻게 하는 모양이옵니다.
 
63
『어디 가져 오오.』
 
64
이리하여 앵무는 어전에 나올 영광을 얻었다.
 
65
암놈과 수놈의 한 쌍이었다. 무엇이라 재잘거리는 것은 아마 당나라 말인 듯.
 
66
그 뒤부터 왕은 앵무를 섭하여 날을 보내고 있었다.
 
67
하루 진일을 갈지라도 사람의 소리 한번 나보지 않던 내전에서는 왕이 앵무에게 신라말을 가르치는 소리가 때때로 들리었다.
 
68
여인은 일체로 물리쳐 버렸고 사내라는 것은 가까이 불러서 이야기할 재미도 없으므로 쓸쓸하고 조용하던 내전에서는 왕과 앵무의 이야기가 울리워서 밖에 모시는 내관들을 미소케 하였다.
 
69
『잘 잤느냐?』
 
70
『네이, 상감마마.』
 
71
『모이 먹으려느냐?』
 
72
『상감마마부터 모이를 잡수세요.』
 
73
왕과 앵무의 대화─ 영리한 앵무였다. 그는 단지 말을 받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말의 의미까지도 이해하는 모양으로서 때와 경우에 적절한 말을 하여서 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74
이 앵무 한 쌍 때문에 왕의 적적한 심사도 얼마만치 줄었다.
 
75
앵무와 벗하는 왕─ 이 영리한 앵무는 왕과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든 신라말을 하였지만 저희 수놈 암놈끼리의 때는 새의 소리도 하였지만 때때로는 당나라 말로 들리는 말로 하는 때도 있었다.
 
76
어떤 날, 어떤 대신(그 대신은 이전에 여러 번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으며 따라서 당어도 아는 사람이었다. _ 이 입시해 있을 때, 앵무 내외가 무슨 소리를 하였다. 그 앵무의 말을 듣고 대신이 빙그레 웃었다.
 
77
대신의 웃는 것을 보고 왕은 대신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78
거기 대하여 대신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하였다.
 
79
『상감마마, 앵무의 내외가 너무도 의가 좋기에 웃었읍니다.』
 
80
『의가 좋단?』
 
81
『암컷이 수컷에게 향하와 시장치 않으냐고 묻사오매 수컷이 자기는 괜찮지만 임자가 시장하겠다고 대답하옵이다.』
 
82
대신은 미소하였다.
 
83
그 대신의 미소에 따라서 왕도 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용안에는 미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콱 다른 편으로 외면을 할 때에 왕의 눈 좌우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84
아아, 미물에게도 내외가 있고 내외 있으면 의가 좋건만─ 비여, 그대는 왜 먼저 갔는가?
 
85
그날 밤 궁전으로 모두 잠든 틈을 엿보아 가지고 왕은 몰래 대궐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왕비의 능으로 찾아가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다.
 
86
덧없이 흐르는 세월은 오 년이 지나고 육 년이 지났다.
 
87
왕비 장화부인을 잃은 슬픔─ 그것은 세상 온갖 슬픔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르면 그 세월에 씻기어 버리리라고 대신들도 믿고 백성들도 믿었던 바였다.
 
88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다. 왕의 슬픔은 세월이 아무리 흐를지라도 조금도 덜어지지 않을 뿐더러 나날이 더하여 가는 듯하였다.
 
89
내전에 꾹 박혀서 앵무만 벗하여 살았다.
 
90
앵무의 자웅이 너무도 의가 좋은 것을 보고는 역정을 내며 다시는 보지도 않을 듯이 멀리 치워버리나 한 각을 지나지 못하여 왕은 다시 앵무를 부르는 것이었다.
 
91
심사를 위로해 드리는 자가 없었다.
 
92
그 지극히 의가 좋은 앵무 내외를 보노라면 승하한 장화 부인의 생각이 맹렬히 나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지만, 그래도 이 한 쌍의 앵무가 이 세상에서 유일의 벗이었다.
 
93
때때로는 후원에 거닐었다. 이전 왕제로서 사랑하는 아내 장화 부인과 봄에는 꽃따러, 가을에는 홍엽 보러 다니던 들에 혼자서 거닐 때에 눈에서는 언제든 눈물이 흘렀다.
 
94
앵무 한 쌍을 이 세상의 단 한 가지의 위안으로 쓸쓸한 세월을 보내기 수년, 왕이라 하는 위는 한낱 허명에 지나지 못하였지 나라의 정사는 돌보지를 않았다.
 
95
대신들도 왕의 심경을 아느니만치 번거로운 문제는 도무지 아뢰지 않고 자기네끼리 의논하여 잘 처리하였다.
 
96
어떤 해 가을, 가을도 이미 익어서 황엽 홍엽도 전부 없어지고 고목 등걸만 성큼성큼 남아 있는 몹시도 쓸쓸한 어느 밤이었다.
 
97
그날 밤이 꽤 깊도록 앵무를 희롱하다가 자리에 들은 왕은 좀 잠이 걸핏 들었다가 심상치 않은 소리에 펄떡 깨었다.
 
98
『여보게! 여보게!』
 
99
심상치 않은 이 부르짖음─ 이 대궐내에서 여보게라 부르고 불리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몽롱한 잠에 취하였던 왕은 이 소리에 의하여 머리를 들었다.
 
100
뒤이어 들리는 기괴한 부르짖음─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새의 부르짖음이었다. 부르짖음도 예사의 것이 아니고 심상찮은 부르짖음이었다.
 
101
왕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서 앵무의 조롱으로 달려가 보았다.
 
102
가 보매 부르짖은 것은 수놈이요, 암놈은 어찌된 셈인지 지처귀를 축 느리우고 머리를 조롱 밑에 박고 너불어져 있는 것이었다.
 
103
감짝 놀라서 조롱을 열고 보매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이었다.
 
104
그 죽어가는 암놈의 앞에서 수놈은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주위를 빙빙 돌며 부르짖는 것이었다.
 
105
왕은 수놈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수놈은 왕의 부름을 듣지도 못하는지 듣고도 알은 척할 경황이 없는지, 그런데 여하여 머리를 기울이고 쓰러져 있는 암놈의 주위를 푸들푸들 돌고 있을 뿐이다.
 
106
왕은 궁인을 불렀다. 달려온 궁인에게 지급히 전의(典醫)를 부르라 하였다. 전의는 황황히 달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명의란들 새의 병까지 고칠 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107
쓰러져서 연하여 떨기만 하던 암놈은 새벽 동틀 때하여 그만 죽어버렸다.
 
108
죽은 새는 왕의 명에 의지하여 뒷동산에 후히 묻었다.
 
109
암놈을 묻은 뒤에 조롱 앞에 가 섰다. 우두머니 종일 안에 웅크리고 있던 수놈은 왕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 머리를 들다. 용안을 우러러 보는 새의 눈에는 맥이 하나도 없었다.
 
110
애원하는듯─ 만약 사람이었더면 눈물을 흘릴 것이었었다.
 
111
그날 하루, 진일을 새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모양으로 지냈다. 모이를 주어도 먹지 않았다. 성이 타는지 물만 몇 사시를 먹었다.
 
112
차차 저녁이 되어 오면서는 새의 고민하는 꼴이 더하여 갔다. 낮에는 정신없는 듯이 먹먹이 있었지만 저녁부터는 차차 몸을 떨며 푸들거리며 부르짖으며 조롱 안을 빙빙 돌아 다니며 안타까와하는 모양이 분명하였다.
 
113
밤이 되도록, 밤이 새도록 새는 부르짖었다. 그 능변인 사람의 말은 한번도 내어보지 않았다. 지지배배 소리를 길게 빼며 밸이 끊어지듯 우짖는 뿐이었다.
 
114
왕은 한잠을 못 잤다. 그 소리가 요란스럽다기보다 그 너무도 앵끓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115
왕이 와서 들여다보면 새는 마치 자기의 심경을 왕께 호소하는 듯이 소리를 멈추고 용안을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그 새의 애처로와하는 양을 보면 왕은 당신의 처지가 생각되어 더욱 속이 언짢았다.
 
116
『네 설움을 나도 안다.』
 
117
이미 겪어본 설움이었다.
 
118
『상감마마!』
 
119
『오냐, 네 마음을 짐작한다.』
 
120
짝을 잃은 사람과 새는 서로 바라보며 울었다.
 
121
왕이 잠시라도 새의 곁을 떠나면 새는 장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어대고 한다.
 
122
사흘을 이렇게 지냈다. 모이 한 알을 먹지 않았다.
 
123
왕도 이미 경험한 바 모이가 왜 입에 들어가랴. 억지로 먹일 생각도 안하였다.
 
124
이리하여 사흘을 지난 뒤에 왕은 한 가지의 계교를 생각해내었다.
 
125
처음에는 사람을 널리 놓아서 나라 안에서 앵무 암놈을 한 마리 값은 얼마를 주든간 사보라고 하였지만, 구하지 못하고 드디어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해 낸 것이었다.
 
126
즉 거울을 조롱 속에 넣어 보려 함이었다.
 
127
왕은 거울을 정히 닦아서 시험삼아 조롱 밖에서 새의 맞은 편에 대어 보았다. 그랬더니 얼핏 그것을 본 새는 마치 미친 듯이 조롱을 쪼으며 나오려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거울을 조롱 안에 넣어 놓았다.
 
128
짐승이나 사람이나 정의에는 다른 데가 없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본 새는 그것을 암놈으로 보고 무엇이라고 배배거리며 화닥닥 달려들었다. 그러나 달려들었던 새는 마주치는 거울에 놀라서 흠칫 물러섰다.
 
129
물러서서는 의아하다는 듯이 들여다본다. 들여다보면서 마치 오라고 부르는 듯이 무엇이라고 소리를 친다. 쳐보고는 다시 달려든다.
 
130
이렇게 서너 번을 하였다. 서너 번을 하여 본 뒤에는 이 영리한 새는 그것이 한 낱 제 그림자인 것을 이해한 모양이 었다. 실패한 뒤에는 거울 쪽으로 꼬리를 두고 돌아서 버렸다.
 
131
왕은 거울을 다시 이편 쪽(새의 머리 둔쪽)으로 돌려다 놓았다. 새는 거울을 다시 보려 하지 않았다.
 
132
그날 밤 왕이 잠깐 침전에서 눈을 붙였다가 새벽에 깨어서 당연히 들릴 새의 애명성이 안 들리므로 가서 보매 새는 양지처귀를 쭉 펴고 벌써 주검이 되어 있었다.
 
133
이번의 이 새는 왕이 몸소 가슴에 안고 뒷동산으로 가서 일전 암놈의 주검을 묻은 자리를 파고 한 구덩 속에 넣어 주었다.
 
134
그 가을부터 왕도 드디어 환후가 나서 차차 침중하여 갔다.
 
135
병석에 누워서 늘 환성으로서 죽은 새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136
새도 암놈이 죽으매 수놈도 그 애통에 이기지 못하여 죽어 버렸거늘, 당신은 그 뒤 십 년 간을 어찌하여 그냥 살아왔나?
 
137
차차 침중하여 가면서 왕은 나날이 지금부터 십년 전에 승하한 장화 부인을 환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가치 없는 십 년 간을 그야말로 무위하게 살아온 것이 뉘우쳐졌다.
 
138
왜 그 새와 같이 일찌기 왕비의 뒤를 따르지 못하였던가?
 
139
무슨 낙에 무엇을 바라고 십 년이라는 날짜를 살아왔던가?
 
140
나라의 명의라는 명의는 모두 모여서 이 환후위중한 국왕을 위하여 온갖 약방문을 지어냈다. 그러나 그 약들을 왕은 먹지 않았다. 체면상 먹는 체는 했지만 목을 넘기지를 않았다. 암놈을 따라간 숫앵무를 본 뒤부터는 왕비가 승하한 뒤 십 년 간을 더 살아 있는 당신이 도리어 부끄럽고 미물만도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이 왕께 있어서는 약이라는 것은 무용지물이었다.
 
141
이리하여 장화 부인이 승하한 지 만 십 년 째 되는 섣달 그날─ 그날은 만 십 년 전의 그 날과 똑같이 함박 같은 눈이 퍼석퍼석 내리는 날이었다.
 
142
그날 아침 왕은 병석에서 대신과 내관장을 불렀다. 그리고 관설(觀雪)을 하겠다고 부액하기를 명하였다.
 
143
이 어명에 대신이 깜짝 놀랐다.
 
144
『상감마마! 이 겨울날─』
 
145
『아니, 그럼 누워 있으면 내 병환이 언제 쾌차할 날이 있을 줄 아오?』
 
146
『물론이옵니다. 환후─』
 
147
『왕을 속이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면 안되오. 내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 자, 어서 부액이나 하오.』
 
148
할 말이 없었다.
 
149
대신은 왕을 부액하였다. 그리고 침전밖 댓돌에 나섰다.
 
150
내관장이 의자를 갖다 놓고 왕이 앉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앉지 않았다.
 
151
댓돌 위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꼭 십 년 전 이달 이날 이맘 때, 왕비가 승하한 그 자리가 아닌가. 그날 왕비를 부축하였던 것은 당신이었거늘 오늘 당신을 부액한 것은 누구인가? 십 년 전 왕비도 걸상에 앉으라 하매 앉지 않고 왕의 팔에 안겨서 승하하셨다. 왕비가 앉지 않은 걸상이매 당신도 앉기 싫었다.
 
152
우두커니 서서 퍼붓는 눈을 바라볼 동안,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낙비같이 흘렀다.
 
153
『내가─』
 
154
왕은 부액한 대신을 돌아보았다.─
 
155
『내가 승하하거든 저 앵무와 같이 이 십 년 전 승하한 왕비와 한 구멍에 넣어 주오. 그리고─』
 
156
말이 끊어졌다. 좀 뒤에 또 다시,
 
157
『그리고 ─』
 
158
할 뿐 또 말이 끊어졌다.
 
159
너무 오래 말이 끊어졌으므로 대신이 의심되어 보매 왕은 방금 운명을 한 때였다 이리하여 장화 부인을 잃은 이래 십 년 간을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계속하던 왕은 왕비 승하한 만 십 년 째 되는 그 달 그 날, 그 자리에서 왕비의 뒤를 좇았다.
 
160
왕의 유탁에 의지하여 왕은 왕비와 한능(陵)에 들어갔다.
 
 
161
(一九三六年 五月 <野談> 所載)
【원문】눈 오는 대궐(大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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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오는 대궐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193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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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9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