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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 점철(耽羅點綴) 초(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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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점철(耽羅點綴) 초(抄)
 
 
 

1.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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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아, 해녀(海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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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끝과 맞닿은 듯이 보아도 보아도 끝도 없는 마안한 바다, 하얗다 하얗다 못해서 새파랗게 짙은 비취빛의 물결, 이 물결이 길을 넘어 뛰는 파도, 파도의 주악 속에 고스란히 잠긴 바다, 이 바다 위에 해녀는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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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다는 수건을 동이고, 적삼으로는 유방(乳房)을 가리우고, 잠방이로는 하복부(下腹部)를 거뜬히 감춘 다음, 팔목에다는 ‘피창’ 을 걸고, 가슴에다는 ‘태박’ 을 가슴에다 안고 휘파람을 휘이휘 불면서 개구리처럼 버지럭버지럭 물을 밀고 나간다. 나가다가는 곤두박질을 친다. 두 다리를 종긋이 모으고 하반신(下半身)을 수면 위로 공중 꼿꼿이 거꾸로 올려비치며 잔뜩 팔마, 물속으로 달려드는 그 날램이란 마치 물속에다 쏜 사람의 화살이 었다. 물속을 헤여드는 고기를 쫓아 들어가 ‘소살’ 로 쏠 작전이니 오죽 신속해야 할 것이련만 육지에서의 동작보다 오히려 날랜 데는 자못 놀라지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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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도의 주악에 잠긴 한바다 위에 오리떼처럼 둥둥 떠서 오거니 가거니서로 엇갈려 돌며 나왔다 들어갔다 물속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이 해녀의 작업 풍경이야말로 제주 바다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이다. 여기, 돛폭에다 바람을 넌지시 안은 어선이 드문드문 물결 좇아 몸을 일며 오락가락 한가로움을 한 폭의 풍속화를 대한 것처럼 마음을 황홀케 한다. 이 바다 이 풍속에 갈매기의 춤이라도 어울렸으면 그 얼마나 해녀의 작업에 흥을 돋우며 운치를 도울 것이련만 바다면 으레 따라다니는 갈매기가 없으니 무색하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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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에 어울린 춤은 없다 하더라도 가다가 그 어느 외딴 수상석(水上石) 위에서 주둥이를 뒷가슴 깃 속에 틀어박고 깽지발로 한가히 서서 졸고 있는 늙은 갈매기나마 한 마리 눈에 뜨인들 이렇게도 무색하지는 않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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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 날이 길면 어쩌다 해풍에 풍기어 날음에 자유를 잃고 비칠비칠 소리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 바다 위를 거슬러 날고 있는 갈매기가 한두 마리 눈에 뜨이기는 하나, 이 바다, 이 풍경에는 쓸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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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와 갈매기와는 그 어이 그리 인연이 멀던고.
 
 
 

2. 여인(女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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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굽은 꼬부랑할머니란 말은 제주도 할머니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7, 80의 백발이 허이연 할머니들도 허리가 굽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잔뜩 다들 재쳤다. 어느 백과사전이 노파의 특징을 자상히 밝히느라고 할머니 허리를 굽혀 놓고 지팡이를 들린 사진으로 설명을 보충하였다가는 제주도 할머니들에겐 분노를 아니 살 수 없을 것이다. 제주도 할머니는 이렇게들 허리가 건강하다. 좋게 말하면 늙어도 젊은 할머니들이요, 나쁘게 말하면 늙을 줄 모르는 할머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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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육지에서와 같이 다들 제대로 늙어 허리가 굽은 사람은 여전히 굽고 하는데, 유독 여인네만은 육지에서와는 달리 머리는 그냥 허옇게 세어가도 허리만은 그대로 굽을 줄을 모른다 여인은 짐을 진다. 어려서부터 짐을 지는 데 그 연유가 있었다. 여인치고는 노유(老幼)를 물론하고 구덕(대바구니)을 안 지는 여인이 없다. 저녁 물을 기를 때부터 한 말들이나 되는 허벅(크다란 독병)에다가 물을 남실남실 하게 길어서 구덕 안에 들여놓고 저나르기를 위시해서 쌀을 판다, 나무를 판다 걸금을 낸다 하는 유의 온갖 생활수단이 이 구덕의 등짐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제주도 여인의 등에는 이 구덕이 실로 하루도 떠나는 날이 없다. 이런 구덕이 일생을 통하여 늘 무겁게 잔등에 매달려 있으니 허리가 앞으로 굽을래야 굽을 수가 없게 뼈가 굳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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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무겁게 뒤로만 자꾸 제자지니 이것을 막기 위하여 자연히 앞부분에 힘을 주게 되므로 앞부분 발달이 또한 될 대로들 되었다. 그래서 파파노인의 걸음걸이도 허리를 똑잡아제치고 커다란 엉덩이를 징그럽게도 모로 일며 성큼성큼 걸어야 되게끔 골격이 굳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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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음걸이의 동작을 보고 제주 여인의 동작미를 육지의 여인네들은 혹 비웃을는지 모르나, 걸음만 보지 말고 얼굴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납작한 바탕에 유난히 새까만 동공이 쌍가풀진 눈썹 밑에서 이글이글 광채를 내고 있음은 그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랴! 제주도 여자치고 얼굴이 둥글지 않은 여자가 별로 없고, 얼굴이 둥글면 으레 쌍가풀진 눈에 새까만 동공이 배였다 여기에 격에 맞지 않은 그 걸음걸이가 동작미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기는 할 것이다. 이런 걸음걸이가 말하는 그 건강한 체격 앞에는 이 또한 아니 굴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미의 소유자인 여인들이 제주도에선 주로 생활의 멍에를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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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선 남자가 벌어서 여자를 먹여 살리지만 제주도에선 여자가 벌어서 남자를 먹여 살리는 것이 원칙이다 철저한 남존여비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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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인네들이 짐으로 자라서 짐으로 늙으며 뼈를 굳히는 제주도 풍속을 안다면 ‘남부여대(男負女戴)’ 란 술어도 모름지기 정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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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간(廁間)에는 돼지를 친다. 배설물을 처리시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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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평 정도의 터전에 위설비도 없이 돌로 네모지게 한 길 남짓이 쌓아올린 것이 측간이요, 동시에 돈사(豚舍)다. 한편 구석에다 기다란 돌 두 개를 다리처럼 건너 놓았다. 여기 올라앉아 뒤를 본다. 그러면 돼지는 그 아래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배설물을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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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이렇게 습성이 된 돼지라, 사람이 그들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그것이 벌써 무엇을 하자는 것인 줄을 알고 한쪽 구석에 모로 근더져서 씨익씩거리며 눈을 껌벅이던 돼지는 어느새 그 육중한 몸을 일으켜 훌눙거리는 배때기를 모로 일며 돌다리 아래로 들어와선 대가리를 잡아쳐들고 연밤송이 같은 콧구멍을 벌룩시며 꿀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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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물 처리는 좋다고 해도 이 미물이 과연 성급하지 않게 사람의 그 일을 완완히 기다려 가지고 그것만을 처리함으로써 그 임무 수행을 다하고 말게 될는지 이런 데 단련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선 안심하고 앉아서 일을 치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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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은 짐승이 돼지다. 어느 모로 뜯어보나 둔하게만 생겨먹었다. 목이 그렇게 굵어가지고 마음이 곧을 리 없고, 꼬리가 그렇게 짧아가지고 영리할 리 없다. 게다가 그 비계덩이로만 찬 뚱뚱한 몸집은 비위주머니일 것만 같고 기다란 눈썹 밑에서 한가롭게 꺼먹시기만 하는 충혈된 그 길쭉한 눈은 아무리 보아도 흉물스럽다. 이렇게 생긴 짐승이 제 욕심을 희생해서 사람의 편리를 도모해 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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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이 짐승이 이렇게 안심치 않은데 소변을 받는 단지가 또 소변이 받길 만한 위치에 놓여 있어, 앉으면 코 끝이 그 단지와 일직선으로 딱 마주선다. 올려뻗치는 악취에 정면을 하고 앉았을 수가 없다. 그러니 뒤로도 안심치 않고, 앞으로도 안심치 않다. 한쪽의 불편이나 덜까 해서 소변을 그 단지 밖으로 피하게 되면 그 아래서 일어다니던 돼지의 목덜미에 멱을 감기게 되니 미물이라도 그건 싫은 모양이다. 후두둑 몸을 떨어대는 바람에 소변 비말이 전신에 튀어 오른다. 아니 앞뒤의 배설이 일시였을 때의 그 비말엔 정말 질색이다.
 
 
 

4.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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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이란 원래 그리 마음에 당기는 빛이 아니다. 흉(凶)의 상징에 흔히 이 빛이 쓰인다. 자연도 어둠의 표현을 검은 빛으로 나타내거니와 죽음을 표시하는 상장(喪章)도 이 검은 빛으로 택해졌다. 이런 흉색을 새까맣게 혼자 뒤집어쓰고 태어난 새가 까마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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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맑고, 산 아름다운 이 섬에 보기만 하여도 정떨어지는 까마귀가 듣기만 하여도 흉물스러운 탁한 목소리로 까악까악 밤낮 난동을 친다. 물이 맑으면 노래 맑은 물새라도 살 법하고, 산이 아름다우면 빛 고운 산새라도 있을 법한데, 이렇단 물새, 이렇단 산새 한 마리 없이 이 어인 까마귀란 말인가. 빛이 까만 새가 하필 까마귀뿐이련만, 그래도 다들 발이나 주둥이만은 색다른 빛을 지녔더라. 주둥이도 발도 그리 영악스레 온통 새까맣게 더럽힐 법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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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바람이 세다. 어쩌면 바다에 바람이라니, 바람이 셈은 당연한 바람일 것이요, 바다엔 파로라니, 파도가 셈은 바다의 운치를 돕는 것으로 오히려 상 줄 바로되, 이 바람, 이 파도 소리에 까마귀 소리가 어울려 제주의 해가 뜨고 지고 한다는 것은 모름지기 제주의 욕이 아닐 수 없다 한두 마리도 아니요, 수백 수천으로 세일 떼까마귀가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흉악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떠돌다가는 행길일지 지붕일지, 아니, 해안에 까지도 격에 맞지 않게 새까맣게 내려와 깔려서는 어쩌하자는 놀음인지 목세를 추어 가며 까왁신다. 아무리 까마귀 제 소리라고 해도 지붕 위에 떼로 올라 앉아서 방안을 들여다보며 까왁심을 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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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에 갈매기가 이렇게 가난함은 이 까마귀의 난동에 멀리 어느 다른 바닷가로 몸을 피해 옮아 앉은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제주 바닷가의, 갈매기는 그 어느 조용한 바닷가로 피난을 가서 해녀와 같이 멱을 감으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춤을 추다 졸다 하던 옛 고향 제주의 꿈에 잠기었음인가. 내 제주에 피난 온 몸이라 평소에 소원턴 이 갈매기의 신세에 새삼스럽게 마음이 가누나 과연 갈매기 너는 어느 깊숙한 바닷가로 피난을 간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밉던 까마귀가 갈매기 너 생각을 하니 더한층 미워지누나. 당연히 네 보금자리여야 할 해석(海石)을 더럽히며 앉았다 날았다 제 세상처럼 설레이는 까마귀 떼를 보고 나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청강(淸江)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라고 격려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5.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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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기로 유명한 짐승이 소이거니와 소치고도 순한 소는 제주 소다. 뭇 짐승과 같이 산 속에서 야생적으로 자란 조상의 혈통을 받았으면 모름지기 마음도 포악할 법한데 육지 소보다 오히려 순하다. 생김새로 보면 암소도 황소마냥 이마빼기가 넓적하고 뿔이 꼿꼿이 내뻗어 성미가 아주 사나울 것같은 인상을 주나 외양과는 달리 마음이 착하다 조그마한 반항도 없이 사람의 말이라면 무엇에나 그저 순종이다. 그러기 때문에 코를 꿰기는커녕 굴레조차 씌울 필요가 없어서 산에서 자란 때나 마찬가지로 자유가 허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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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라는 건 그래도 두기가 멋쩍기라도 한 것처럼 좌우 뿔에다 아무렇게나 매서 늘어놓은 놈도 간혹 있으나, 특별한 필요가 없으니 그것도 거추장스러워 모두 뿔에다가 이리저리 그 고삐를 엇새여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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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전까지는 농가에서 일 년 두루 소를 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산에서 자라는 놈을 농사철을 접어들면서 기경을 위하여 그때에야 비로소 산에서 소를 몰아다가 농사를 짓고는 다시 놓아 주어 산으로 올려보내곤 하던 것이 폭도가 산 속으로 들어와 잠복을 하게 되자부터 소를 잡아먹기 시작할 뿐 아니라 마음놓고 산에 오를 수도 없어 소를 산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집에서 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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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른다고 하더라도 육지에서마냥 고삐를 꼭 매어 기르면서 사료를제공하여 먹이는 게 아니라 제가 나가서 벌어먹게 일을 시키고는 자유로이 놓아 준다. 그러면 소들은 마음대로 저희들끼리 풀을 찾고 물을 찾아 스무 마리고 서른 마리고 서로 떼를 지어 엉기어 돌며 제주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풍경을 자랑시키며 저무른 날과 같이 어슬렁어슬렁 저희들끼리 또 집으로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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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복종만을 아는 짐승이라고 하더래도 조상 적부터 살던 산속 고향이 모름지기 그리울 법하건만 이렇게 자유가 허여되어 있는 데도 산 속엔 얼씬도 않고 그대로 집으로들 감돌아 든다는 건 어쩌면 미물스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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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체 생김생김이 꾀라고는 한푼어치도 없이 생긴 짐승의 소이지만 이렇게도 복종만으로 일관하는 짐승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기는 이 순종의 미덕이 대접을 받게 되는 원인인지는 모르나 제주선 말보다 소가 뛰어나게 대접을 받는다. 그까짓 말은 고사하고 부인네들까지 진날 마른날 없이 고역으로 허덕이는데, 유독 소만이 밭을 가는 외에는 별로이 부리워지는 일이 없다. 일단 밭만 갈아 놓으면 그만으로 자구는 또 말을 들여 세워서 밟히운다. 이 무슨 미신인지. 자구는 말이 밟아야 곡식이 잘된다고 해서 이것까지 말의 부담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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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하는 품으로 보아 제주선 여자와 말의 역할이 가장 고되다. 여자의 등에 짐이 떠나는 날이 없고, 말의 목에 말구적 멍에가 떠나는 날이 없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말은 여자의 위치에 처해 있고 소는 남자의 위치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6.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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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두고 맑은 날이 대체 며칠이나 이 제주엔 계속되는 것인지 아니, 옹군 하루도 볕이 명랑하게 대지를 어루만지, 제대로 서산을 넘어 내는 날이 별로이 없다. 하루도 몇 번씩 구름과 비와 바람이 급각도로 교체를 하 는지 모른다. 구름이 떠도는가 보다 하면 어느새 비로 화해서 질금거리고, 비가 질금거리는가 보다 하면 어느새 퍼뜩 또 해가 제법 구름을 헤치고 비죽이 내다본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다. 한 곁도 못 참아 낮은 구름이 또 뒤덮이며 바람을 몰아 온다. 이 구름이 몰아 가지고 오는 바람은 왜 그리도 세기는 센 것인지 그저 일어만 나면 솨아 솨아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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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바람은 따라다니는 것이라 비가 많으니 바람이 많을 것은 정한 이 치일 것이니, 질금대는 비면 바람도 좇아서 여숭이 없을 성싶은데, 비는 질 금대는 비라도 바람만은 어지간칠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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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원체 센 바람인데 저 갈 대로 채 가기도 전에 뒤좇아 몰리는 바람이라, 바람과 바람이 서로 맞부딪쳐 일어나는 풍파가 ‘휘이’ 하고 한 번 먼 지를 하늘로 날려 올리게 되면 뒤이어 밀리는 풍파에 그저 ‘휘이 휘이’ 하 는 소리 속에 제주 천지는 금시에 안개 낀 날처럼 먼지 속에 보얗게 잠기게 된다. 그러다가 밀리는 바람이 좀더 세게 되면 급속도로 달리는 불자동차의 경적 소리와도 같이 ‘오옹이 오옹이’ 소리로 변한다. 이렇게쯤 되면 바람이 어디 걸려서 그런 소리를 지르는지 꼭 돼지가 급소를 찔려가지고 지르는비명 소리같이 꾀액 꾀액 하는 소리가 어디선지 한편으로는 또 들려온다. 게다가 돌담에 부딪치는 바람이 그 돌담 좁은 틈바구니를 뚫고 헤어나느라고 애를 쓰는 ‘호오이 호오이’ 하는 목메인 휘파람 소리가 또한 어울려 뒤 범벅이 된 바람 소리는 무어라고 형용할 수도 없는 소리로 한동안씩 제주 천지를 들었다 놓곤 한다. 이런 날이면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거니와 몸도 지쳐 걸음걸이조차 자유롭게 옮길 수가 없다. 새들도 그 날개의 힘으로는 이 바람을 정복할 수가 없어 공중에서 그저 너불너불 깃부츰만 하며 뒤로뒤로 자꾸 멀어졌다가는 그만 맥이 빠져 전선주고 지붕이고 아무 데나 되는대로 앉아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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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의 섬 제주-! 이런 날씨에 이런 바람보다는 차라리 이가 떡떡 갈리는 추운 겨울이 그립고, 등어리가 지글지글 타는 더운 여름이 그리워짐은 내 단순한 기질의 탓일 것이다.
 
 
 

7.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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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이 없어 문단속을 않아도 좋다는 곳이 제주라는 말을 듣고, 이런 곳에 짐을 풀게 된 것을 퍽 다행으로 여겼거니와, 그러지 않은들 피난민 보따리에야 누가 손을 대랴 싶어 짐을 흐트러 놓은 대로 그대로 하룻밤을 지나기로 했더니 웬걸 배 안에서 먹다 남겨 놓은 뒷박쌀이 한밤 동안에 반이나 나마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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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샤쓰에다 우무러쳐 발칫목에 버려 놓았던 것이 이쪽의 잘못이기는 하였으나 원 많지도 않은 됫박쌀을 반이나 갈라 갔다는 건 이건 도적도 영악한 도적이 아닐 수 없었다. 제주에 도적이 없다던 말도 빨간 거짓말인 듯싶어 쓴입을 다시고 살펴보았으나 아무렴 그렇지, 사람이야 마득해 요런 좀짓을 했으리라고, 알고 보니 그게 사람의 짓이 아니었다. 쥐의 장난이었다. 윗목 머리맡 벽장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렸기에 들여다보니 그 구멍 가득히 하이얀 쌀이었다. 밤새도록 날라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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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단속은 필요치 않아도 쥐 단속은 있어야 하는 곳이 제주인가 보다고, 그적엔 그날 사 온 쌀 한 말은 륙색에 넣어 주둥이를 단단히 호매어서 머리맡에 가까이 놓고 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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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얼, 그날 밤이 깊기도 전에 어릿어릿 잠에 취한 신경을 뭣이 바스락바스락 건드리기에 불을 켜고 보았더니 이놈의 쥐가 어느 틈에 막아 놓았던 그 소라껍질을 또 밀어내고 들어와서 륙색을 쏠고 있었던 것이다. 안심이 가질 않아 그적엔 아예 그 쌀자루를 바싹 당겨 머리에다 대고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허사였다. 여전히 쥐는 덤벼들었다. 쫓으면 제법 질겁을 해서 가기는 하나 갔다가는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할 기세로 달려드는 품이 이건 꼭 마가을 누런 논에 새 날리기다. 통 사람을 몰라보는 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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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라고 쥐의 장난이 없는 게 아니지만 이렇게도 영악스럽지는 않다, 이래서야 어떻게 쌀자루를 방안에 두고 잘 수가 있을까 잠만 들었다가는 영락없이 잃어버리게 될 것이 빤히 내다보인다. 그러니 그렇다고 쌀자루를 그냥 붙들고 앉아서 한밤 동안을 뜬눈으로 샐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우리 부처는 이 쌀자루 처리의 방법에 궁하여 한동안 멍하니들 싱겁게 앉아 있다가, 마득해 쥐란 놈이 이불 안에까지는 못들어올 테니 이젠 아예 쌀자루를 이불 안에 넣고 품에다 품고 자자는데 합의를 보기는 봤으나 베고 자는 쌀자루를 건드리는 쥐라 품고 자는 이불 안인들, 그놈이 무서워 건드리지 못하랴 싶은 데다가 만일 이불 안에까지 뚫고 기어들어 온다면, 그리하여 왔다갔다 몸둥이를 어릅 쓸며 밟고 돌아간다면 그걸 징그러워서 어떻거느냐는 것이 또한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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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시 조치로선 이 밤중에 그렇게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용단을 내어 쌀자루를 이불 안으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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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불을 끄고 누웠다. 쥐의 세상이었다. 흥에 겨워 날뛰는 장난인지 혹은 수가 틀려 어르대는 싸움인지 그건 알 바 없으나 그저 물고 뜯는 것 같은 찌익 째액 소리가 밤이 깊어갈수록 요란하다. 몇 마리씩이나 그렇게 밀려 다니는 건지 그놈들이 벽 사이에 통과할 땐 우르르르 소리가 꼭 벽이 무너지는 소리다. 이렇게 벽 사이를 뚫고 선 천장으로 밀려 올라온다. 올라와선 한다는 짓이 세 다리 네 다리 곤두박질이다. 이것이 쥐 사회의 무도회인지는 모르나 만일 그렇다면 그 노는 품으로 보아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성대한 연회 일 것 같다. 한참 곤두박질을 치며 천장이 좁다고 난탕으로 돌아가다가는 또 밀려 내려가고 또 밀려 올라오고 ……. 쌀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이건 원 우선 시끄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십리나 달아난 잠을 재촉하느라고 눈에다 힘을 주고 이 단련을 받으며 누워 있노라니 뭣이 턱 하고 이마빼기를 바쪼아댄다. 천장 위에서 한참 곤두박질을 치며 돌아가던 쥐가 공중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만 어떻게 실족이 되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요기를 또 좀 해 보려는 고의의 낙하이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건 어쨌든 쥐에서 이마빼기를 맞고선 질겁을 아니 하는 수가 없었다. 그러니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라 내 동작과 고함소리에 쥐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일어나 앉아 보니 쥐도 질겁을 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느라고 달빛이 허이연 창문으로 후다닥후다닥 추어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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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가 없는 쥐였다. 이렇게 쥐는 난동을 처내건만 주인집에선 이 쥐에 대한 불평이라곤 한 마디도 없다.
 
51
듣자니 바다에 사는 섬 사람들은 쥐를 여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배에 침수가 되면 배에 올랐던 쥐는 나갈 구멍을 찾노라고 돌아가다가 결국은 그 침수되는 구멍으로 들어가 침수를 막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해서 파선의 구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므로 쥐를 배에 일부러 올리기도 하려니와 쥐가 배에 오른 것을 보면 그 배에선 먹이까지 주어 기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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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쥐는 섬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이렇게 사랑하는 줄 알고 자기네들이 아무리 함부로 떠들어내도 결코 천대는 못 하리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사람을 깔보고 야단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제주의 밤은 쥐의 난동 속에 깊고 짧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8.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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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기로도 유명한 곳이 제주거니와 말이 작기로도 유명한 말이 제주 말이다. 간섭 없이 산에 막 놓아 기르는 말이었거니, 번식이 많아졌을 법은 하지만, 막 놓아 길렀으면 마음대로 자라기도 했을 법한데, 굴레를 꼭 쓰고 자라난 육지 말보다 오히려 작음은 웬 까닭일가. 넉 자가 될까말까한 키가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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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립을 쓴 노인이 이렇게도 신통스러운 조롱말 허리에다 안장을 지어 타고 땅바닥에다 발을 사작시며 동백꽃 우거진 석벽 사이로 백발을 헛날리면서 타박타박 달릴 적엔 이건 대한의 고유한 정서가 담뿍이 풍기운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런 풍경을 대할 때마다 피마자 등잔 밑에서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 이야기를 졸면서 듣던 동화 속에 마음이 휩쓸려 들음은, 오로지 내 심정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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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면 거의 다 말을 매었고, 말이면 거의 가 짐으로 고생을 하는 제주에서 타마(駝馬)를 비웃고 호올로 이렇듯 호사를 함은 이 어이 희한한 일이냐. 밭갈이 한 가지만이 소에게 양여되고는 모든 짐의 역할이 도맡기었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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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말치고 제주 말처럼 존재가 무시되어 눈곱을 닦을 새도 없이 지지리 끼고 고생만 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육지에선 방아에도 소, 달구지에도 소이건만, 제주에선 방아에도 말, 달구지에도 말, 그저 부려 먹는 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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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말로 태어나서 하필 작게 생겨먹은 벌인지는 모르나, 어쩌면 말로 태어나서, 한참 젊어 혈기에 제 소리를 마음껏 기세 높이 지르며 장검을 길이 빗겨 찬 쾌남아를 한번 태워 보지 못하고 짐으로 늙는다는 것은 천추의 유한(遺恨)이 아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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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단행본 〕 * 『노인과 닭』(범우사, 1976)
【원문】탐라 점철(耽羅點綴) 초(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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