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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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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1.9
권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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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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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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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모윤숙여사는 “영원히 문이 열리지 않았던들 차라리 애틋한 동경의 궁전으로나 바라볼 수 있을 것을……”하며 오랫동안 침묵에 담으려짓는 덕수궁 문이 십전씩에 해방된 것을 비탄하였다. 애틋한 서정시인의 감정이라 하겠다. 석일(昔日)의 영화를 일장의 춘몽으로 돌리고 무심한 까막까치만 오락가락하는 음울한 고림(古林)에 쌓여 우는 듯 조는 듯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구중궁궐의 옛날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에 누군들 강개지심이 없으랴? 그러므로 예로부터 시인들 가운데에는 슬픈 노래를 던진 분이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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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측정할 수 없이 풀려 나아가는 역사의 실마리인지라 현실에 간정한 우리들로서 어찌 과거를 돌아보는 애틋한 시상에만 잠길 바이랴? 과거는 과거인지라 차라리 이러한 것은 시인들의 곱다란 붓끝에나 맡겨두고 우리는 앞날을 전망하면서 현실을 현실 그대로 직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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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옛날을 가졌던 덕수궁, 오랫동안 그윽한 침묵에 잠겼던 덕수궁의 백조전에 미술품이 진열되었다. 시간적으로 제한된 단순한 전람회와 달라서 차라리 미술의 전당으로 화한 감이 있다 하겠다. 그리고 동미교수(東美敎授) 전변효차(田邊孝次) 씨의 말과 같이 왕가의 궁전에 진열한 점으로 보아서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서 멀리 저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이탈리아의 치뽀리 이궁, 영국의 함푸튼 별궁, 독일의 포츠담 이궁, 서반아의 아랑호예쓰 별궁 등 궁전 미술관에 비하여 말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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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나 여기에 관심되는 점은 불란서 베르사이유의 궁전에는 불란서인의 명화가 진열되어 있고 영국의 함푸튼 별궁에는 영국인의 걸작이 진열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독일, 이태리, 서반아 할 것 없이 다 각각 그 궁전에는 그 궁전을 쌓고 사는 그 땅 사람들의 명품과 걸작만이 만개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석조전에 진열된 미술품은 이와 달라서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못하다. 비록 근대에 이르러 다른 문화와 함께 조선의 미술이 쇠퇴하였다 할지라도 오히려 일가를 이룬 화가가 한둘에 그치는 바 아니요,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할 만한 역대 명가들의 대표적 작품이 박물관의 장품(藏品)을 비롯하여 멀리 항간에 이르기까지 광구할진대 소위 문외불출의 유품이 불소하겠거늘 이를 도외로 무시하고 한갓 일본인의 작품만을 이입 진열하여 놓고는 왈 ‘반도문화사상의 획기적 대광’ 라고 당국자는 자랑삼아 큰소리하는 모양이나 이것은 글자 그대로 일본 미술의 자랑일지언정 조선 사람에게 광영될 것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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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각 신문지면상에 논평되어 있고 또 일부 사회의 여론도 있었던 터이므로 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화학도(畵學徒)적 양심을 가지고 석조전을 찾았으니 여러 화면에서 얻은 바 인상과 소감을 기미하여 봄에 그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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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변효차 씨의 서술과 같이 제일주의와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은 금번에 진열된 일본미술은 그 명실과 함께 종합적 대표적 작품이라는 데에 있다. 다 아는 바거니와 일본미술에는 유파가 심히 많다(다른 나라도 다 그렇겠지만). 예를 들면 관전인 문부성의 제국미술원 미술전람회를 비롯하여 재야단체인 일본미술원의 원전(院展)과 이과전(二科展)이며 기타에도 춘양회(春陽會), 국화회(國畵會), 임간사(林間社), 사간사(士看社), 태평양협회(太平洋協會), 구조사(構造社), 청룡사(靑龍社), 월창숙(枂創塾) 등이 있어서 각각 회화와 조각에 특색을 발휘하여 그 주장을 달리하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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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색다른 각 파중으로부터 명치 대정 연간을 통하여 약 50년간의 대표적 작가들의 정평있는 작가만을 선출하여 일당에 진열하였다는 점으로 부터 생각하여 볼 때에 아닌게 아니라 일본서도 역사상 아직 없었던 사실로 사계에도 관심을 가진 분은 물론 일반적으로도 일본미술의 제 경향과 그 수준을 일좌에서 감미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누구나 한 번 입장하여 볼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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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딴 말 같으나 6, 7년 전에 필자는 동경서 불란서 미술전람회를 구경한 일이 있다. 일본서 불란서 미전을 보았다는 것은 그 특질상 차이는 있겠으나 이제 조선에 앉아 일본 미술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그것은 일본의 화상들이 불란서로부터 혹은 매입 혹은 대차 이와 같이 하여 진열하였던 것이다. 그 대부분은 모두 불란서의 근대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이었으며 때마침 이과전, 제전, 원전 등이 거의 연속적으로 개최된 소위 토▣의 미술의 계절이었으므로 더한층 깊은 흥미를 가지고 구경하였던 것이다. 미술의 왕국이라는 불국 미술과 일본의 그것과를 비교 감상하여 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흥미있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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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의 세평도 그러하였거니와 필자의 저열한 화안으로 볼 때에도 양국 미술의 수준상 그 고하를 측정할 수 없으리만치 정도가 대등적임에서 필자는 일본 미술의 고속도적 발전이라느니보다도 차라리 그 최고봉에 달하였음을 ▣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혹 어폐가 있을는지 모르나 근대 불란서 미술을 세계 미술사상의 최고 정점에 도달하였다는 미술비평가들의 평단에 의거하여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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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필자는 그 후에 다시 제전이나 이과전 등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나 현대 일본의 미술이 적어도 동양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세로 웅비하고 있다는 것만은 늘 생각하여 오던 바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백조전에서 진열된 제가 제파의 미술품이 조선 미술가에게 커다란 자극과 함께 사표를 보여 주리라는 것도 당국자들의 주장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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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각설하고 진열된 ▣작품 품의 내용을 일▣키로하자. 진열품은 일본화, 서양화, 조각, 공예 등의 4부중 일본화가 44점 서양화가 41점 조각이 15점 공예가 42점 합 142점이다. 그러나 일본화만은 진열 케이스의 관계상 45점을 3회에 분하여 매 20일에 1회식 교대하여 진열케 되었으므로 이는 약하고 필자 자신의 편의상 서양화부에만 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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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가기(朝鮮歌妓) (中澤弘光[중택홍광] 씨) 이 작품은 씨가 작춘(作春)에 선전심사원으로 내경하였을 때에 집필한 것이라 한다. 색채의 화미로써 이름이 높은 씨라 하겠으나 이 작품의 배색은 너무도 난조임에서 정연한 맛을 잃고 인물이 실감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조선 기녀에게서만 엿볼 수 있는 수양버들가지를 바람에 날리는 듯한 그윽한 선의 미를 잃고 일본기녀들의 그것과 같은 점철적 기취를 띠게 된 것만은 노작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란 결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풍습에 섣부른 씨이니만치 무리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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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 (吉田博[길전박] 씨) 산악의 표현이 잘 되었다. 씨가 산악묘사로써 고명하다는 것도 ▣언이 아닐 것 같다. 이 작품의 정▣하면서도 전체에 떠도는 간결 명쾌한 기분은 보는 자로 하여금 곧 그림 속에 뛰어들게끔 유감(誘感)을 준다. 이 작품에서 구태여 결점을 들추어내라면 그것은 필치가 자유로운 맛을 잃고 얼마쯤 기계화한 듯한 그러한 딱딱한 맛이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어쨌든 역작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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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인(新夫人) (鹿子木孟郞[녹자목맹랑] 씨) 씨는 중촌부절(中村不折)씨와 함께 로만스계의 노대가라하나 필자로서는 별로 들은 것이 없는 분이다. 이 ‘신부인’ 은 대작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색채라든지 필치가 모두 파렛트의 신세를 너무 많이 지었으니만치 색조에 생신한 맛이 진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가지고 뜨거운 물에 삶아 내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데에서 차라리 씨의 노력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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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허지부(子虛之賦) (中村不折[중촌부절] 씨) 씨는 회화뿐만 아니라 서도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는 분이다. 그리고 특히 중국의 고대문화를 학구적 입장에서 항상 생각하고 있는 씨이니 만치 화폭에 얻는 제재도 대개가 중국의 문물들이다. 씨의 이번 ‘자허지부’ 도 제호와 같이 중국학을 배경으로 한 대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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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씨의 수법 역시 노련한 대가임에는 틀림없으나 녹자목맹랑(鹿子木孟郞) 씨와 같이 파렛트에서 붓을 삶아 가지고 화폭에 옮겨오는 탓인지 침정한 맛뿐으로 생동하는 듯한 힘과 열이 없다. 선배에 대하여 혹 실례의 말일지 모르나 씨의 작품은 다른 경지를 밟지 못하는 한 후일에 있어서 한 개의 골동화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될런지, 그밖에는 별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 ‘자허지부’ 역시 고전적 기취밖에는 맛볼 수 없는 점에서 권태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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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絹[지나견]の前[전] (閊田三郞助[산전삼랑조] 씨) 씨는 화전영작(和田英作) 씨와 함께 문부성 유학생이었고 또 동미교의 수석교수로서 조선미전의 심사원으로까지 뽑혔던 분이니 만치 그의 수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 이번 작품은 자부인(自夫人)을 모델로 하여 그 제호와 같이 고급 중국 견(絹)을 늘이고 그 앞에 고의상을 입혀 놓은 것이다. 그 섬세한 부분까지 천착한 기교와 배색의 난숙한 필치에는 가상할 점이 없지 않다 하겠다. 그러나 그 의도부터가 일종의 수음적이라 할 만치 기교만을 희롱하는 데에서 만족하려한 느낌을 주거니와 인물의 표정이라든지 기타 모든 것이 보는 사람의 인상에 여운을 남겨주지 못하는 것이 노력이 이반되는 아까운 결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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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騰島武二[등도무이] 씨) 씨의 이 작품은 일찍이 불란서 유학시대에 기념작으로 그린 베르사이유 궁전이라 한다. 씨의 작풍은 언제나 학도적 풍미가 명분으로 있거니와 이 작품은 더욱이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성의와 열정이 넘쳐흐르는 것 같다. 멀리 천공(天空)을 떠도는 구름이라든지 궁전 앞 넓은 광장을 내려 쪼이는 씩씩한 햇빛은 명쾌한 남구의 자연을 보지 못한 자로서도 연상할 여유를 갖게 한다. 씨의 대표적 작품이라고까지는 물론 할 수 없을 것이다. 씨의 독특한 수법을 여지없이 발생한 역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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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懷鄕) (和田英作[화전영작] 씨) 씨는 일본 최초의 양화과 문부성 유학생으로서 동경미술학교 교장에다 선전 심사위원에게까지 피선되었던 분으로서 조선의 화단과 내연이 없지 않은 터이다 양화가들로서는 아마 씨를 모를 분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 출품은 씨가 불란서 유학중 1896년에 사롱에 입선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입선일 뿐만 아니라 씨의 출세작으로서 동미교의 소장품 중 그 하나이라 한다. ‘회향’이라는 제호를 붙인 것은 화복(和服)을 입은 일본 소녀가 창에 의지하여 멀리 고국의 하늘을 그리워하는 의도에서 된 것이니 화(畵)와 같이 인물의 표정이라든지 그 주위의 기분이 글자 그대로 향수에 넘치는 듯 하다. 씨의 후년작에 비하여 노련한 맛은 적다할지 모르나 배색이라든지 필치에 사실한 점으로 보아서는 차라리 후년작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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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廚先) (黑田淸輝[흑전청휘]씨) 씨는 일본 양화계의 원로였다. 서양화가 어떠한 것인지도 잘 이해치 못하는 명치 27년대에 씨는 불란서로부터 양화의 연구를 마치고 귀국하여 동미교에 양화과를 설치하였으니 오늘날 일본서양화단의 발전이 씨의 공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주선’은 씨의 대표작의 하나로서 동미교의 소장이라는 것이다. 서양인 가정의 일부를 묘사한 것이니 그의 명성과 같이 인물의 배치라든지 색조의 정연한 맛은 어딘지 모르게 대가의 풍모가 나타나 보인다. 한 편창 틈으로부터 광선을 직사케하여 하마터면 인물과 위방(尉房)이 모두 음울한 분위기에 싸이고 말 위험에서 구출한 점은 평범한 일 같으나 범안(凡眼)으로는 아른거리는 화기(畵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면에 흐르는 기조가 정지적인 고정화되고만 점에서 보는 자에게 박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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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호반(早春湖畔) (田邊至[전변지] 씨) 동미교수로 선전 위원 등을 열력(閱歷)하였던 씨이니 만큼 그의 회화상 수완은 묻지 않아 알 바어니와 배색의 난숙한 맛으로는 누구의 작품에서도 얻어 볼 수 없는 특기를 씨는 가졌다 할 수 있으니 년 전에 필자는 씨의 대표적 걸작이라고 세평을 받은 ‘자비’를 보고 감탄한 일이 있거니와 이 ‘조춘호반’에서도 역시 신묘한 색채감을 느끼게 한다. 단조로운 수평면이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좌우에 산이 약간 눌려 있을 뿐인 이 평범한 풍경을 관자(觀者)로 하여금 화리인(畵裡人)이 되게 좀 예술화시킨 그의 돈후한 색조에는 누구나 탄복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색(寒色)을 과용한 까닭에 앞날의 희망을 약속하는 봄의 기분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게 유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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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의(綠衣) (石井柏亭[석정백정] 씨) 씨는 일찍이 선전위원으로도 왔거니와 그 밖에도 이 땅을 많이 밟은 분으로서 우리는 씨를 잘 알고 있다. 씨는 이과전의 영수인 만큼 또한 작품상 이채가 있을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씨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율동적 미감을 맛볼 수 없는 것이 심심한 일이다. 그의 필치는 대담한 듯하면서도 도법상으로써의 굳어진 한 개의 선입관에 의하여 구속을 받아 기계화시키고 마는 듯한 감이 없지 못하니 말하자면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서 그 앞날에 대한 동향을 파악치 못하고 한갓 고정화한 형영(形影)만을 실체의 전부인 것처럼 오인하는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녹의’ 에 있어서도 그러한 관계상 대작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보는 사람의 피를 움직여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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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변(野邊) (南薰造[남훈조] 씨) 이 작품은 씨가 아마 선전위원으로 조선에 왔을 때에 취재한 것 같다. 대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자연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그려진 듯한 사실한 맛이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의 자연이 가진 특유한 선의 미를 씨는 그대로 포착치 못하고 말았다. 흐르고 흘러 끝이 없을 듯한 ‘선’ , 이것은 조선 자연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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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朝) (滿谷國四郞[만곡국사랑] 씨) 씨는 금춘(今春)에 선전위원으로 내경하였던 분이니 태평양화회의 영수로서 필치를 생략하는 신화풍을 수립하여 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터로 이 ‘조’는 그 대표적 작의 하나라 한다. 그러나 필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겠다. 차라리 앞날을 기다리며 여기에서는 묵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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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상 (小杉未醒[소삼미성] 씨) 씨는 춘양회의 영수이니 일본화의 재료로써 신남화를 제작함에서 알려진 분이라 한다. 이 ‘부녀상’은 씨의 대표작의 하나라 하나 역시 묵과키로 하고 앞날을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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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ばさん (和田三造[화전삼조] 씨) 씨는 조선 총독부의 대벽화로서 일찍이 경성에 알려진 분이다. 이미 ‘おばさん’ 은 즉흥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 필자는 이 작품을 대할 때에 그 압력에 눌리어 한참 동안을 무아상태에 빠졌었다. 그 전체를 통하여 넘쳐 흐르는 듯한 자유탐방한 기질과 열과 힘에 읽히어진 색조 이것은 작자의 특이한 수완이 아니고는 도저히 얻어볼 수 없을 것이다. 회화라는 것은 안계(眼界)에 비치는 실재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실체에 대한 관찰의 정확과 충실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갓 공간적으로 고정화한 형영에만 그쳐서는 아니 된다. 그와 동시에 그것에 내포된 시간적 동향 또는 정태를 파악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 회화 예술이 예술로서 성립되는 중요한 요인이니 그러므로 회화는 사진이나 물체의 재현이 아니라 물체와 독립한 창조적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작자의 생활의식을 통한 주관 활동이 절대구성을 갖는 것이니 곧 개성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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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화전삼조(和田三造) 씨는 이상의 모든 점에 대하여 보다 더 명확한 의식을 파악하였다고 본다. 이 작품에 나타난 기발한 착상과 웅건한 필치 이것은 그 자체가 그대로 작품의 설명이요 비평임을 말하여 두거니와 우리에게 사표를 보여주기에 넉넉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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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秋) (金山平三[금산평삼] 씨) 이 작품은 제호와는 딴판으로 인물을 그려 놓은 나체화이다. 인물 좌우의 배후에 약간 가을 기분이 표현되어 있으나 모든 점이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다만 색채의 ▣▣한 맛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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輕快[경쾌] (小林萬吾[소림만오] 씨) 씨는 동미교의 교수로서 연전에 선전 심사원으로 내경 중 조선 기녀를 모델삼아 그린 것이라 한다. 화제와 경쾌한 나상(羅裳)을 입은 일폭의 거대한 미인도이다. 필치에 난숙한 맛은 있으나 몰락하여가는 관학파식의 것으로 별다른 흥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마는게 작자에게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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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口驛[전구역]의 雪[설] (石川寅治[석천인치] 씨) 인상 좋은 작품이다. 설리(雪裡)에 잠긴 산협의 고요한 역촌을 온아하게 잘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그 색조의 건실한 맛이 사람을 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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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人像[부인상] (有島生馬[유도생마] 씨) 씨는 이과전의 영수로서 금춘 선전 심사원으로 내경되었던 분이니 유도무랑(有島武郞)씨의 아우요, 리견정(里見渟)씨의 형으로 또한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한다. 이 ‘부인상’은 동미교의 소장품이라 하나 인물에 대한 실감을 보여주는 점으로는 성공이라 할는지 모르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의 거리에 따라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이 유감이라 하겠다. 이만치 열이 적어 보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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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永池秀太[영지수태] 씨) 씨는 제전 심사위원으로서 정물화에 특기를 가진 분이라 하거니와 이 정물은 실로 대작이라 하겠다. 물체를 광학적으로 분석 표현한 점에서 한 이채를 보여준다. 그러나 너무나 이지적이어서 즉흥적 감각미를 결여한 감이 없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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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高間惣七[고간총칠] 씨) 씨는 제전 심사원으로서 관학파에 속하는 분이 어떤지도 그 화풍에 있어서는 자유화파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하거니와 이 북한산 역시 화법상 씨의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굽은 선과 강열한 색채로써 아무러한 구애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려진 그 자유분방한 필치, 이것은 실로 보는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는 박력을 가지고 임하려 한다. 현대인의 감정과 조화되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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へちま (牧野虎雄[목야호웅] 씨) 무성의한 말 같으나 기계적인 아니 공예적인 이러한 화풍에 대하여서는 차라리 묵언키로 한다. 씨가 제전 심사원인 것만을 알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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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の溪流[계류] (奧瀨英三[오뢰영삼] 씨) 씨 역시 제전 심사원이다. 그러나 이 작품만으로는 씨의 회화상의 전 풍모를 엿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 ‘雪[설]の溪流[계류]’ 는 그저 온건한 한 개의 소품인 것만을 말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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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裸婦) (安宅安五郞[안택안오랑] 씨) 필치의 경묘한 맛은 있다 하겠다. 그러나 관자(觀者)에게 아무러한 여운을 남겨주지 못하는 평범한 작품이란 밖에 달리 말할 가치를 발견치 못하겠다. 씨 역시 제전 심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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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佛風景[남불풍경] (大久保作次郞[대구보작차랑] 씨) 이 작품은 씨의 체구중(滯歐中)의 작이라 한다. 그러나 화제보다는 딴판으로 별다른 이국정조를 발견치 못할 한 개의 평범한 소품임을 말하여 둔다. 씨는 서도에도 조예가 있는 분으로 제전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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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渡兩津港[좌도양진항] (中寸室一[중촌실일] 씨) 씨는 현재 제전 심사원으로서 거년에 제국미술원 상을 받고 일조에 명성을 높인 분이라 한다. 이 ‘佐渡兩津港[좌도양진항]’ 도 씨의 역작의 하나이라느니 만치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숙련한 화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배조상 웅위한 맛을 잃고 있는 게 심심하다. 어쨌든 관학파적 화풍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감을 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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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リュゥの室[실] (態岡美彦[태강미언] 씨) 씨가 일본양화단의 신진 거장임은 우리도 잘 아는 바어니와 이 ‘フリユゥの室[실]’ 은 실로 새로운 풍모를 보여준 쾌작이라 하겠다. 일찍이 씨의 출세작으로 제국미술원상까지 받은 ‘綠衣(녹의)’ 시대에 비하여 그리 화풍은 혁명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일천원의 수상에 사천원의 즉매라는 희귀의 성가를 날리는 ‘녹의’는 사진주의적인 것으로 제전파로서의 충실을 다한 작품이었으나 이 ‘フリユゥの室[실]’은 즉흥적 감각적 작풍을 띤 것으로 찰나적 색광을 그대로 포착하여 화면에 옮겨 놓은 것 등은 완연히 전일에 대한 반역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전자 ‘녹의’ 를 정적 표현이라 하면 이것은 동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사표를 보여주는 일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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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洋婦人像[서양부인상] (中野和高[중야화고] 씨) 씨는 제전의 화형(花形)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 ‘서양부인상’ 은 그의 장이한 작풍을 대표한 작 중의 하나라 하거니와 실로 態岡[태강]씨의 ‘フリユゥの室[실]’과 함께 인상 깊은 쾌작이라 하겠다. 물상의 그 내포한 바 시간적 동향과 정태를 굵은 선과 풍부한 색조로써 감각적으로 표현한 대담한 그 필치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화면에 넘쳐 흐르는 커다란 율동의 미는 실로 좌우의 모든 화면을 무색케 하는 감이 있는 쾌작 중의 쾌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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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습작 (鈴木千久馬[영목천구마] 씨) 씨는 제전 심사원중 소장파의 일인으로 신선한 감각적 표현에 특기를 보여주는 분이라 한다. 이 ‘나체습작’도 습작으로는 대성에 가까운 것으로 어딘지 모르게 씨의 특기가 나타나 보인다 하겠다. 그러나 인체의 표현이 시각을 초월하여 과대한 공소를 범치않았는가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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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牧丹[백목단] (梅原龍三郞[매원용삼랑] 씨) 씨는 국화회의 영수이니 불란서의 신화풍을 흡수한 분으로서 ‘백목단’ 은 그의 화풍을 엿보기에 가장 적호(適好)한 작품이라 한다. 그러나 한갓 온아한 소품일 뿐으로 특이한 정조를 발견치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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坐像[좌상] (安井曾太郞[안정증태랑] 씨) 이과회의 중진으로서 이채있는 작풍을 가진 씨이니 만치 이 ‘좌상’에서도 어떠한 특색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으나 열외로 평범함에서 섭섭한 느낌을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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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正宗得三郞[정종득삼랑] 씨) 씨는 정종백조(正宗白鳥 씨)의 실제로서 이과회의 중진이니 이 ‘독서’는 씨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 한다. 그러나 건실한 필치와 돈후한 색조는 노작임을 보여주나 역시 별다른 이취를 발견치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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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상 (淸水良雄[청수양웅] 씨) 씨는 제전 심사원 중 소장파의 중야(中野), 중촌(中村) 양씨와 함께 화형(花形)의 일인으로서 창달한 화풍을 가진 분이니 ‘부녀상’은 씨의 대표적 작품이라 한다. 어쨌든 보는 자를 위압할 듯한 박력을 가진 작품이다. 웅건한 선과 강렬한 색조는 고전취 나는 제작품에서 감상을 쇄신케 하는 쾌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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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ルコンの女[녀](太田喜二郞[태전희이랑] 씨) 씨는 제전 심사원중 일인으로서 색채를 풍부히 씀으로써 저명한 분이니 이 작품은 씨가 벨기에 유학중에 그린 씨 독특의 점묘화로서 그의 대표적 걸작의 하나라 한다. 색채의 배열 등에는 과연 놀라울 만한 특기를 가졌다 하겠다. 그러나 전면에 떠도는 냉정한 기분은 다각적 색광을 풍부히 또는 열정적으로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센티멘탈한 감정을 일으켜 씨의 노력을 애석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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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유]ぶ▣ (長谷川昇[장곡천승] 씨) 씨는 춘양회의 영수이니 색채의 민감으로써 특이한 화풍을 보여줌에 이름이 높은 분이라 한다. 이 작품에서만은 어떠한 ▣▣미를 발견치 못하였다. 그러나 화면에 충실을 다한 노작 이것만은 말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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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裸婦) (山本鼎[산본정] 씨) 씨는 춘양회의 영수이니 일찍이 불란서에 역유(歷遊)하고 온 후 자유화 문제의 주창자로서 유명한 분이다. 그러나 ‘나부’ 에 있어서는 한갓 그 필치상 숙련한 일가의 풍모를 보여주는 외에 아무러한 이채도 발견할 수 없는 만큼 차라리 씨의 주창을 관심케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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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子絞[녹자교](山下新太郞[산하신태랑] 씨) 이과전의 중진으로서 배색의 특기를 가진 분이라 한다. 그러나 이 ‘鹿子絞[녹자교]’ 는 소녀상을 그린 것이다. 평범이라는 두 자밖에는 더 붙이고 싶지 않은 작품임에서 차라리 묵언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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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坂本繁二郞[판본번이랑] 씨) 씨의 작품도 문제 밖으로 돌리겠다. 다만 이과전의 중진이라는 말만 하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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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郊[추교] (白瀧成之助[백롱성지조] 씨) 씨는 문전 심사원으로 이 ‘추교’ 는 씨의 대표작의 하나라 한다. 필치의 ▣달한 맛은 일가의 풍이 없지 않다. 그러나 너무도 고전적 작풍 그대로 이어서 어떠한 감흥을 주지 못하고 몰락되어 가는 자체의 비애만을 호소하는 듯한 느낌만을 일으킬 뿐으로 차라리 그의 노력이 아깝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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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ユ─ズ河畔[하반] (三宅克己[삼택극기] 씨) 수채화가로서 유일인자 평가를 받는 씨의 제2차 체구(滯歐) 중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 창달한 필치만은 가상한 점이 없지 않다 하겠으나 비록 조그마한 스케치에 불과한 작품일 망정 색조상 그 내용이 너무 단조한 데에 실패가 없지 않은가 생각한다. 구태여 이 땅에까지 가져다 보일진대 좀 더 양과 질에 사실한 작품을 택할 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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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里[파리]コンゴルドの噴水[분수] (川島理一郞[천도리일랑] 씨) 씨는 국화회의 중진으로서 작품은 체구 중의 작이라 한다. 그러나 기교에 숙련한 씨라 하나 차라리 묵언으로써 이 작품을 간과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레벨이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특수한 흥미를 끌 만한 이채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상으로 서양화부에 대한 필자의 소감은 비록 주마간산격이나마 약술하였다고 생각하거니와 이것이 물론 필자 자신의 소주관적 우견임을 면치 못할지니 앞으로 대방의 고견이 있기를 재삼 빌어마지 아니하며 망필을 ▣하기로 한다.
【원문】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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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구현(權九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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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