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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 경제론과 크로포트킨의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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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2.10
권구현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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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경제론과 크로포트킨의 비판
 
 
 

1. 사회생리학(社會生理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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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취하는 방법은 생산기관과 소비물자의 사이에 제다(諸多)의 구별을 세우는 경제학자들이 취하는 방법보다 더 훌륭히 과학에 합치할 것이다. ……” 그리고 민중은 참으로 성가있는 유일한 경제학 ‘인간의 필요와 그것을 만족하게 할 경제적 수단의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울 것이라고 크로포트킨은 말하였다. 다시 그는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가 경제학을 볼 때에 그것은 곧 면목을 일신한다. 경제학은 벌써 사실을 기술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한 개의 새로운 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의 필요를 연구하여 인간 에네르기의 최소한도의 소비로써 필요를 만족할 수 있는 수단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과학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과학의 진정한 명칭은 「사회생리학」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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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 하에서 고구하는 진리와 고안이 즉 사회생리학이다. 크로포트킨이 여기서 경제학을 부정하고 사회생리학을 수입(樹入)한 것이니 그는 경제학이 전연 오류된 입장에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을 불경제학(不經濟學)이라 타파하고 사회생리학을 제창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윤리학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는 그의 『윤리학, 그의 기원과 발달』중에도 윤리학에 대하여 통절한 비판을 가하였다. 다만 유감인 것은 이 최후의 저서가 중도에 각필(擱筆)되어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전원 공장 제작소』 등 저서로써 경제학으로써 경제학을 말살한 것과 같이 윤리학으로써 윤리학을 말살하기에 만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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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불경제학이요, 윤리학이 불윤리학임과 같이 이 정치학이 혼란학인 것도 명료한 일이다. 크로포트킨이 정치학으로써 정치학을 말살한 것은 그의 저(著) 『국가와 그 역사적 임무』를 일평(一評)하면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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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윤리학, 정치학의 세 가지는 인간사회의 사회생활을 세 방면으로부터 관찰한 것이다. 인간의 사회생활이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라 할 것 같으면 경제학과 윤리학과 정치학을 말살하는 것은 종래의 사회생활에 대한 관찰을 전연(全然) 개신(改新)함에 불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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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은 경제학을 불경제학이라고 배척하고 신경제학 즉 사회생리학을 제창하였으니까 그의 신윤리학에 대하여서도 무엇이나 새 명칭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경제학, 신윤리학, 신사회학을 전부 포괄해야 한 개의 사회생리학이라고 명명한다. 사회생리학은 “인간의 필요를 연구하여 인간의 에네르기를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소비하고도 그 필요를 만족하게 할 수단을 고찰하여 만인 행복의 실현을 기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사회생리학에 의하여 경제학과 윤리학과 정치학을 말살하고 사회생리학속에 경제문제와 함께 사회문제의 모든 문제를 포괄시키려한다. 아니다. 경제문제 속에 사회생활의 일체 문제는 포괄되는 것이니 사회생리학 속에 윤리문제와 경제문제도 모두 포괄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결코 크로포트킨의 취지에 위반될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과학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2. 사회과학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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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은 불란서혁명에 자극되어 일어난 과학이니 자유, 평등, 박애를 절규함만으로는 인류는 구제되지 않는다 하고 과학적 실증적으로 사회를 연구하며 사회현상을 발생학적으로 또는 해부학적으로 관찰하여 그 구성원리를 구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갓 과학적 입장에서 사실만을 기술하며 설명함으로써는 진정한 사회문제에 접장(接腸)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회과학이 발흥되었으나 사회과학은 과학적으로 사회문제를 취급한다면서 현재의 실정으로는 맑스주의의 연구만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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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리학은 과학에 대한 견해가 사회과학과 다를 뿐 아니라 맑스주의에 대하여서는 전혀 그 입장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사회과학과 구별하며 또한 이것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사회생리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과학을 비판하는 동시에 맑스주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으나 과학에 대하여서는 여기에 약(略)하기로 하고 맑스주의의 검토는 이하 경제학설에 한하여 간략시 시(試)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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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리학은 2개의 부문으로 분할 수 있는 것이니, 즉 첫째 기초론이요, 둘째는 조직론이다. 기초론에 있어서는 자연과학 및 문화과학을 비판하고 특히 경제학, 윤리학, 정치학을 비판함과 동시에 문명의 제 문제를 논하며 사회병리를 연구한다. 그리고 가치의 문제를 고구하며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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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론에 있어서는 사회조직의 방식을 연구하고 경제조직을 검토하여 소비기본이 경제조직과 분산제도와 공업농촌 등 공동의 경영법을 고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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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을 크로포트킨의 경제관에 입각하여 단편적 또는 통속적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3. 불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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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도시의 어린 여자들은 하룻밤 안식의 잠을 달게 다 못자고 그날의 일거리를 찾아 거리로 몰려나온다. 고등관과 중역과 유민 외에는 누구할 것 없이 모두 오전 5시에는 직업을 위하여 뛰어나온다. 절대다수가 조조로부터 노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후 6시 또는 7시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야업자(夜業者)와 소매상들은 밤12시까지도 노고를 겪는다. 인간은 노동하기 위하여 생겨났다 하여도 과연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일생을 종일종후 노동으로 마치는 인간의 거의 전부가 결핍의 상태로 생활을 하니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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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말한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히 앙진(昻進)하는 것이므로 여하히 막대한 생산을 획득할지라도 의연히 결핍을 감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인간은 욕구를 제한하여 자기의 분위(分位)에서 만족을 하도록 수양을 쌓지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저 천국에 갈지라도 오히려 부족을 말할 것이라고. 아마 이와 같은 망언 아니 폭언에는 어떠한 식견 없는 노동자라도 격분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 경제학자들 중에 이러한 폭언을 학문화하고 있는 자가 있으니 그것은 욕망 증진설의 신봉자들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의 욕망은 무한히 상승하는 것이니 거기에 생산의 원동력이 있는 것이다. 무한히 상승하는 욕망은 점차로 새로운 생산력을 얻어서 생산은 더욱 더 발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연의 부자에도 한이 있고 인간의 생산력에도 한이 있다. 그러므로 무한히 상승하는 욕구는 생산의 원동력이므로 그대로 두고 타면(他面)으로 생산품의 분배만을 공평히 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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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각자의 노동에 의하여 분배를 하되 각자의 노동에 의한다는 것은 노동의 양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질에 의하여 분배를 하는 것이다. 만일 노동의 양에 의한다면 가치는 결정이 안 되는 것이니, 다과(多過)한 노동을 양적으로 할지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 있고, 조그마한 노동에 의하여서라도 귀중한 것을 생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동은 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질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가치 있는 노동은 자본가에 의하여 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최다의 소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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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학자의 논거는 대개 이러한 것으로 사회주의 경제학에 자극되어 다소 이론만은 개신(改新)을 한 셈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그 변동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 사회주의 경제학자는 ‘분배는 노동의 질에 의할 것이 아니라 노동의 양에 의하여 할 것이다. 노동의 질이라는 것은 견지에 의하여 다른 것이다. 갑(甲)에게 가치가 있어 보이는 노동도 을(乙)에게는 무가치한 노동으로 보이는 수가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각자의 주관에 의하여 판단이 서로 달리 되는 것이다. 주관적 관찰은 공정을 결한다. 가치는 어디까지든지 객관적으로 계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분배의 기준이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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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배와 가치론을 검토하기 전에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가 아닌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욕망의 상승률과 인간의 생산력의 증진량과의 대비를 검토하지 않으면 결핍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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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경제학자 중에는 욕망 ▣역설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학자와 사회주의 학자 중에는 욕망▣역설을 취하지 않는 자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시비는 후장에 이르러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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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욕구라고 함이 타당하다)이 과연 무한한 것인가 만일 무한하다면 그리고 생산력은 유한하다면 분배가 불공평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공평히 행한다 할지라도 역시 결핍은 감할 것이다. 또 혹은 욕구가 유한이라 하면 생산력의 증진에 의하여 결핍이 제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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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욕망이 과연 무한인가 유한인가 이 문제의 해결은 차장(次章)에 미루거니와 현재의 경제학자가 왜 이 문제를 한각(閑却)하며 생래적으로 인간은 과욕한 것으로써 억압하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야 노동하는 대중이 종일종생을 결핍 중에서 헤매는데 대하여 이 병리의 제거가 그들의 임무인 것을 자각하지 않는가 하면 이것은 그들은 전문학자로서 생동하는 개인 개인의 인간의 존재를 망각하고서 사회를 논하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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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동경시의 전인구 2백만 명중 1개월 60원 이하의 수입자는 약 31만 8백명(장년 남자는 약 1000명 중 777명 가량)이라 한다. 그러나 이 31만 명은 조조부터 석각(夕刻)까지 생산하고도 오히려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업군은 잠깐 별문제로 하더라도) 그러면 이것을 어찌 볼 것인가. 경제학자는 이 문제를 한갓 사회정책에 돌리고 자기들은 관념의 동경 내지 관념의 세계를 취급하여 이론 제조에만 분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경제학은 ‘최대수가 최대의 노력을 하고도 최대의 결핍을 수(受)하는 경제조직의 이론 확립’에 불과한 것이다. 즉 불경제학을 교수하고 있는 것이다.
 
 
 

4. 욕구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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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욕구는 무한이라 한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욕구가 전 경제조직의 원동력이며 문명의 본원이라 한다. ‘이 같은 욕구의 무한한 과잉이 근대문명을 창조하고 진보라 칭할 만한 모든 것을 조출(造出)하였다’고 파리대학의 경제학 교수 가이드는 말하였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욕구를 더욱 ▣열케 함에는 결핍이 필요하다. 무한한 욕구와 대결핍과는 교향하여 생산의 대차륜(大車輪)을 돌린다. 이것이 문명이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벌라스는 결핍은 가치의 본원이라고 단정하여 ‘일체의 경제가치는 만족과 함께 소멸하고 결핍과 함께 발생한다. 그러므로 결핍은 가치의 모(母)이다.’라고 말하였다. 무한한 욕구와 대결핍이 근대문명을 저주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명을 옹호하는 경제학은 욕구무한설과 결핍가치론을 고집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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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욕구는 과연 그들의 말과 같이 무한한 것일까 욕구는 과연 그들의 말과 같이 근대 문명을 산출(産出)한 모(母)일까, 또는 결핍이 가치의 창조자 일까 결핍이 없는 사회는 무가치한 사회일까 아니 만인의 무결핍은 일편(一片)의 공상일까 더 나아가서는 무결핍의 사회 만인 부유의 사회 달성을 기하지 아니치 못한다.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유행하기 비롯한 이래로 사회운동은 비약력을 장실(葬失)하고 말았다. 공상은 물론 좋지 못하다. 그러나 현실이니 합리화니 말함으로써 가능한 일까지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부정과 위대한 긍정’과는 그것이 합리적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공상은 아니다. 만인 부유의 이상을 부정하는 무리는 소위 합리와 현실의 미신자 볼셰비키와 그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다. 욕구는 유한한 것이다. 그리고 무결핍만인 부유의 달성은 현재의 생산력으로써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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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의 세상을 관망하면 인간은 끝없는 욕심만을 가진 것 같이 생각될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일면에는 연대성(連帶性) 미자(美姿)도 우리는 시시처처에 볼 수 있는 것이니 재난과 변액(變厄) 같은 비상시에 보면 인간의 심저에는 오히려 참다운 ‘인간성’이 숨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흔히 말하기를 크로포트킨은 너무 낙관적이라고 비난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성능이 악(惡)사회로 인하여 유린되어 병적으로 된 방면만을 보고 연대성의 미용(美容)이 추면(醜面)의 배후에서 언제든지 자현(自現)하려고 용의하고 있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서 인간의 악성의 것으로 보며 비관론을 수립하려 하는 것은 진정한 현실의 관찰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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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주의로 해석하며 이기주의 이외에 생산의 원동력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또 페레이도 이와 같이 인간은 이기주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대철중언(大徹重彥)파 및 자유파의 경제학자 즉, 자본주의 경제학자는 모른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주의라고 단정하였다. 인간에게는 자기보존의 본능이 강한 것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연대성의 본능이 균일히 강한 것도 사실이니 크로포트킨은 연대성의 본능은 모성애보다도 오히려 옛날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던 것을 실증하였다. 아니 인간이 인간으로 된 것은 연대성의 본능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보존의 본능이 연대성의 본능으로써 움직이기 시작한 곳에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조화의 보무(步武)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 점은 『윤리학, 그 기원과 발달』 중에 상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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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인간은 덮어놓고 아욕(我慾)만 채우려는 자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린되어 있음으로 인간의 욕구가 병적으로 되어 암적 증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포의 본질은 아니다. 허나 오늘날 사회에는 암종뿐만은 아니다. 생리로 움직이고 있다. 농부의 생활은 연대성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협동, 협력, 이것 없이는 사회는 단 일일이라도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협동, 협력 등 이것은 연대성의 응용이 아니고 무엇이냐. 자본주의의 질서를 떠난 비상시, 즉 변화시 같은 때에 보면 인심의 근저에는 연대성이 있는 것임을 잘 알 수 있거니와 일상생활을 잘 관찰하여 볼지라도 그 속에는 연대성이 발현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수재나 화재 같은 때에만 수(受)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공동동작에 의하지 않고 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저 오락 같은 것도 독락락(獨樂樂)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주의의 자본주의 제도 중에도 향락은 공락(共樂)을 취하는 수밖에 없이 되어 있다. 암적 사회 중에도 연대성의 생리는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연대성이 이와 같이 인간의 본능으로서 유린(蹂躪)되어도 오히려 그 자태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인간의 본능은 조화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니 본능으로부터 출발하는 욕구가 끝없는 아리아욕적(我利我慾的)이 아닐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을 인도주의자니 낙관론자니 비난하며 인간을 성악론적으로 고찰한다면 그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아담스미스와 폐레이 류중(類中)에 추락하는 것 밖에 아니 된다.
 
 
 

5. 욕구의 성질과 그 유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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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한 개의 커다란 모순을 대담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들의 욕구론이 즉 그것이다. 그들은 일면으로 욕구가 생산의 근원이라 하면서 타면으로 욕구는 생산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논술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생산에 의하여 환기되나니 일개의 상품이 새로 생산되면 거기에 새로운 욕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년필이 없는 시대에는 만년필을 욕구하는 일이 없던 것이나 만년필의 생산에 의하여 인간의 심저에는 만년필 욕(慾)이 발생하였다. 라디오가 발명되기 전에는 라디오욕은 인간에게 없었다. 그러나 라디오의 발명과 생산은 인간에게 라디오욕을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즉 따드가 유명한 역설로써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욕구의 제일 원인은 발명이라’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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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욕구에 한하여 있는 것이다. 누구나 식물을 생산하기까지 식욕이 인간에게 없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의 욕구를 이대별(二大別)하여 필수욕구와 문화욕구로 구별하면 필수욕구 즉 이것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필수품인 식물, 의복, 주택 등에 대한 욕구로 부터 고찰하면 욕구부터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욕구 즉 필수품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다시 말하면 필수욕구의 여운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심리적 욕구로부터 고찰하면 생산이 욕구를 창조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식욕이 있으므로 식물을 발견하며 생산하는 것이나 라이스 카레(양식)가 발명되었으므로 라이스 카레욕이 생하는 것이다. 칼피스나 초코레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칼피스욕도 초코레트욕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식욕은 없다. 식욕이 있으므로 식물섭취의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욕구를 이대별(二大別)하여 필수욕구와 문화와에 의하여 욕구와 생산과의 관계가 상위(相違)하는 것을 고찰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모든 경제학자는 이 점을 무시하고 있다. 즉 욕구와 생산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욕구와 문화욕구가 함께 생산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을 역설하고 식욕은 식물이 창조 하였다고 말하기 위하여 욕구와 필요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필요로부터 생산이 출하고 생산으로부터 욕구가 생하였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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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요로 하는 것은 욕구의 설명이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무리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필수욕구와 문화욕구와에 따라 욕구와 생산과의 관계가 역위(逆位)로 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는 편이 사실을 잘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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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2대 욕구의 근저가 되는 단일 본원(本源)을 요한다면 그것은 ‘생의 의지 즉 생명’이 그것이다. 생명으로부터 필수욕구와 문화욕구가 발생한 것이니 동시에 생명으로부터 생산도 발생하는 것이다. 생명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발생하는 생산이 필수욕구로부터 출생되는 생산이요 생명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생산(즉 발명)이 문화욕구를 환기하는 생산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욕구가 필수욕구로서 생산을 의식적으로 환기하며 생명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발생하는 욕구가 문화욕구로서 무의식 생산(발명)에 의하여 환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상당한 고찰을 요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취급한 문제와는 별로 깊은 관계도 없으므로 이대로 중지하기로 한다. 다만 욕구에 2종이 있어서 일방과 타일방은 그 생산관계가 반비적(反比的)으로 되었다는 것만을 술(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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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경제학자는 욕구에 2종이 있음을 망각하고 그 종류에 의하여 생산과의 관계가 역위(逆位)로 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하며 욕구는 모두 생산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한의 욕구가 생산의 원동력이라고 말한 것을 한각(閑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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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이와 같은 모순을 의려(疑慮)없이 제창하고 있는가? 이것은 그들의 요구가 무한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길이 없는 까닭에 이러한 궁책을 안출(案出)하고서 스스로 범한 모순이다. 그들은 상품이 그 종류에 있어서 무한히 증가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점점 발명되는 신상품의 생산은 연년이 누진하여 무수히 된다. 그리고 이 상품이 일일이 욕구를 환기 함으로써 욕구는 상품과 함께 연년이 누진하여 무한히 증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이 그들의 소위 욕구무한설의 객관적 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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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욕구에는 2종이 있다. 그리고 필수욕구는 생산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생산의 근원이 되는 것이므로 필수욕구에 대하여는 그들의 소설(所說)은 편응(遍應)되지 않는다. 문화욕구에 대하여는 어느 점 까지는 응용될 수 있으나 그러나 문화욕구의 특징으로 다음의 2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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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 욕구는 순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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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화 욕구는 일정한 체계를 유(有)함
 
 
 

6. 문화 욕구의 유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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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화 욕구는 순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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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욕구가 연장되어 오토바이의 욕구가 되고 이것이 다시 자동차의 욕구가 된다. 그러나 자동차의 욕구는 언제든지 다시 자전거의 욕구로 환원하는 것이다. 유행의 순환은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순환하는 이상 욕구가 무한성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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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화욕구는 일정한 체계를 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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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는 캠퍼스, 화필, 회구(繪具) 등의 회화에 관한 기구를 욕구하고 화학실험실에 진열된 실험용 약품과 제구(諸具)를 욕구하는 않는다. 여기에 일정한 체계가 되어 있다. 호음(好飮)하는 사람은 주류와 조화되는 것을 욕구하고 그것과 부조화되는 것을 욕구하지 않는다. 즉 음주가의 욕구에는 음주가식의 일정한 체계가 있는 것으로 이 체계 이외의 것은 욕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문화욕구에 일정한 체계가 있는 이상 문화욕구는 체계 내에 제한되는 것이요 덮어놓고 무엇이나 욕구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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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두 점을 고찰하면 경제학자의 소위 욕구무한설은 객관적으로 전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욕구는 필요욕구가 중시되면 될수록 감소되는 경향이 있다. 현 사회에서는 필요욕구가 모멸되어 있으므로 문화욕구가 함부로 대두하고 있다. 식욕과 성욕이 경멸되어 있는 시대에는 만인이 먹을 권리가 있음을 한각(閑却)하고서 ‘먹지 못하는’것을 보통의 일로 생각을 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타인의 빈한으로 자기의 부를 표시하려 하는 것이므로 불필요한 것을 함부로 생산하여 인간의 병적 문화욕을 자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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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욕구거나 문화욕구거나 필경은 인간의 살려하는 즉생의 의지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생명의 현상에 불외(不外)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연대성이 기본이 되어 있는 것이므로 욕구도 반드시 조화된 체계를 취하여 표현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즉 유한성의 것인 것이다. 파충류가 아닌 한에는 대체의 모든 동물은 연대성을 가지고서 일종의 사회를 만들며 그들의 욕구는 조화되어 유한하다. 인간도 한 개의 포유동물인 이상 파충류와 같이 끝이 없는 탐욕이 그 본질일 까닭이 없다. 연대성이 기초가 되어있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욕구는 반드시 유한한 것으로 경제학자들이 논하는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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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가 유한이면 만인이 결핍을 감(感)하지 않는 사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욕구가 유한할 지라도 생산력이 증진할 지라도 사회조직이 불합리 하면 역시 결핍이 온다.
 
 
 

7. 가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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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욕구의 무한한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결핍의 필요한 것을 역설하고 있다. 왜 그러하냐 하면 결핍이 있는 곳에 가치가 발생하며 가치분배의 원칙을 정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까닭이다. 가치론이 분배의 원칙을 정함에는 이의가 없으나 결핍이 가치의 창조자임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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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한다. “결핍이 없는 충족한 상태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노방(路傍)의 석(石)과 같이 무가치한 것이 된다. 먹을 대로 먹고 충족하면 잔여(殘餘)의 식물과 노방의 석(石)과는 하등의 차이도 있을 것이 없지 않느냐. 만일 인간에게 있어서 일체만사가 모두 충족한 상태가 된다면 즉, 결핍이 없게 된다면 가치의 세계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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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은 기만으로서의 의의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논의를 함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즉 여하(如何)히 생산력의 증진이 있을지라도 만인을 결핍 중에 봉쇄하여두고자 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일소(一笑)에 부(附)하여도 무관한 것이나 그들이 이러한 가치론으로부터 분배의 원칙을 정하려함을 우리는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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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핍이 되도록 분배를 고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정한 분배의 “원칙이 될 가치론을 수립하기 위하여 오류된 가치론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결핍가치론을 보좌하기 위하여 노동가치론이 발생한 후 자본주의의 경제학자는 물론 공산주의의 경제학자까지도 노동가치설에 의하여 분배의 원칙을 오해하고 있는 이상 가치의 검토는 절대 필요를 아니 느낄 수가 없다.”
 
 
 

8. 가치설과 분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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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무한한 욕구와 무한한 결핍에 의하여 인생을 가치하여 일종의 세계관을 수립함으로써 민중을 기만하려한다. 욕구가 무한이라는 단정이 오류인 것은 전장에서 지적하였다. 여기서는 결핍이 인생을 가치 한다는 이 마술사적 논교(論敎)를 타파하려고 한다. 그들은 욕구 무한설에 의하여 자본가의 무질서한 대량생산을 시인하고 결핍가치론에 의하여 민중을 결핍 속에 안도하게 하여서 빈핍선(貧乏線)을 사회생활의 적도(赤道)로 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설은 곧 그들의 분배론을 산출하는 것이니 착취적 기술의 졸교(拙巧)에 의하여 생산품의 분배가 결정하게 되므로 교활한 인간만이 다대(多大)히 고득(古得)하고 노동자는 빈핍선(貧乏線)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가치설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9. 결핍가치설로서의 종극 가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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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가치의 모(母)라는 설은 누차 수정되었으니, 즉 효용가치설이 되고 획득가치설이 되고 생산가치설이 되고 끝으로 종극가치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일일이 검토하려면 다대한 지수(紙數)를 요하게 되므로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다만 결핍가치의 최고 발달 형태의 하나인 종극가치설만을 설하여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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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극가치설에 의하면 여기에 수 개 수통에 물이 들어있다고 한다. 즉 제1통의 수는 탕용수(湯用水), 제2는 요리용수(料理用水), 제3은 세안용(洗眼用), 세면용(洗面用) 제4는 우마용(牛馬用), 제5는 화분용(花盆用), 제6은 소제용(掃際用), 7은 용도 없는 즉 무용수 그리고 이것은 모두 동일한 청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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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제1통의 수의 가치가 최대하고 제2, 제3 이와 같이 차제로 나아갈수록 가치는 투감(透減)한다. 그리고 제1부터 제6에 이르기까지의 6통의 수로써 일체의 용도가 충족되고 제7의 수는 무용지수인 고로 제7에 이르러서는 가치는 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6통밖에 없어서 제6통의 수가 최후의 물이라고 하고서 차등수의 가치를 상밀(詳密)히 고찰하여 보면 제6의 수의 가치이상으로 타수(他水)의 가치가 앙등(昻騰)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수를 향락할 향락의 척도는 실로 이 제6의 수를 득하고 실함에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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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제1의 수통을 전복하여 수를 유진(流盡)하였다 한다. 그러면 탕요수가 없으므로 우리는 비상히 곤란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타의 수(水)로서 제1의 수(水)의 대용으로 한다. 그리고 이 대용은 긴절(緊切)치 않은 수(水)로서 할 것은 물론이다. 즉 제6의 수를 대용(代用)에 공(供)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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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제6의 수는 타수(他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이 경우에 제7의 수가 있다면 그것이 타수의 가치를 결정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제7의 수의 가치는 무용(無用)의 수인 까닭에 무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수의 가치는 제7의 수의 가치 즉 무가치한 것이다. 만일 제7의 수가 결핍한 경우에는 제6이 결정하고 제6이 결핍한 경우에는 제5가 결정하여 차제로 가치는 상앙(上昻) 하는 것이다―이것이 곧 종극가치설이다. 종극의 것이 전체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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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종극의 가치설은 종극이 가까울수록 가치가 상승하고 종극이 멀수록 가치가 하강한다는 것으로 그것을 환언하면 다량으로 있으면 가치가 하강하고 소량이면 가치가 상승하여 결핍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가치론 하에서 수(水)는 무가치한 것이 되고 「다이아몬드」는 최고가치의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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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전연(全然) 망단(妄斷)인 것은 관화 이상으로 명료한 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단일목이라도 불가결의 수(水)가 다량이라는 이유 하에서 무가치 되고 다이아몬드와 같은 불필한 것이 소량, 결핍을 이유로 하여 최고가치의 것이 된다는 데에 있어서는 현재의 가치조직이 틀렸다는 것을 노노(呶呶)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동취(銅臭)나는 가치조직 하에서는 귀중한 노동이라 평가되어 최하급의 가치가 부여되고 다이아몬드와 같은 외관만이 번질번질한 무용무능(無用無能)의 것들이 최고의 생활 조건을 독점하게 됨에 지(至)하여는 가치설도 별 문제는 없다. 아무리 열악한 가치설이라고 고성대호(高聲大呼)할지라도 ‘현실’은 이 열악한 가치설 하에 평가되어서 분배의 원칙이 결정되어 다량의 노동자는 수와 같이 다량이라는 의미에서 경멸과 빈핍을 보수로 받게 되고 소수만 되면 백치든지 허재비든지 자본가라는 명목 하에서 다이아몬드와 같이 최고의 보상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의 가치설이 부당하다는 것을 논하여 마지 않는다.
 
 
 

10. 노동가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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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어서 결핍가치설을 전복하고 무산계급의 경제학으로부터 노동가치설이 발생하였다하면 크게 반가운 소식 같으나 기실 노동가치설은 무산계급의 적밖에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이 가치설은 사유재산제도의 기초를 견고히 하는 학설로서 죤로크가 창도한 것이니 즉 봉건제도의 왕신권설을 전복하고 자본주의의 기초인 사유재산신성설의 근거를 작하였음으로서이다. (이것은 1691년 아직 산업혁명에 의하여 생산양식이 일변하기 전에 일이다) 그리고 이 노동가치설을 계승한 일인지라는 아담ㆍ스미스요, 이것을 다시 역설하여 한계 노동론을 창도한 자는 리칼드로 모두 자본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노동가치설을 일층전개하여 중흥의 조(朝)가 된 것은 칼·맑스이다. 맑스의 경제학은 그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아담·스미스와 소호(少毫)의 차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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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자연은 자연 그대로 가치가 없다. 자연이 재(財)(가치의 구상체)가 되려면 그 자연에 노동을 가하여야 한다. 즉 재의 창조력은 노동이다. 그리고 노동에 의하여 조출(造出)된 가치(또는 그 구상체인 재)는 당연히 노동한 자에게로 돌릴 것이다. 토지는 그것을 경작한 자에게로 돌리고 상품은 그것을 노동한 자에게로 돌릴 것이다. 많이 노역한 자는 많이 받고 적게 노역한 자는 적게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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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고찰한 범위 안에 의하면 노동가치설은 극히 간단하면서도 노동계급을 위하여서는 진가 있는 학설 같으나 현실에 당면하면 불연(不然)하여 정반대의 형태밖에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즉 노동가치설은 노동자 및 무산계급자의 반려자가 아니라 그 적임을 우리는 조그마한 고찰로써 능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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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언(試言)하면 여기에 갑을 2종의 토지가 있는데 갑지(甲地)에는 경작함에 10일을 요하고 을지(乙地)는 경작함에 20일을 요한다. 즉 갑지는 비옥하여 을지를 경작하는 이분의 일의 노력으로서 족한 것이다. 그러고도 취득하는 수확은 동일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경우에 갑지로 부터 수확한 일석(一石)의 미(米)와 을지로부터 수확한 일석의 미와는 가치가 동일할 수 없다. 왜 그러냐하면 갑지는 을지의 이분지 일에 해당하는 적은 노력으로 수확하였음으로서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곤란한 노동’이 아니면 아니 된다. 즉 갑지의 배의 노력을 요하는 을지의 경작이 미(米)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이 리칼드의 한계노동설의 주안점이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고만 하여서는 곧 공론(空論)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곤란한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 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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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기에 발명가가 있어서 연년고심 참담한 연구의 결과로 일대 경작기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작기를 사용하여 경작을 할 때에는 경작기를 사용하지 않고 경작하는 십분지 일의 노력으로 동일한 수확을 취득하는 것이다. 그러면 경우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경작한 노력은 기계를 사용한 노력의 십 배이니까 수공 경작지는 기계경작지의 미(米)보다 십 배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리칼드의 한계노동설에 의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혹은 가사(假使)발명가의 노력을 경작 노력 중에 가산한다 할지라도 양적으로 그 노력을 측정할 수는 없다. 우발적으로 대발명이 되든지 초년고심(梢年苦心)에 의하여 대발명이 되든지 대발명의 가치는 발명에 요한 노력의 양에 의하여서는 결정이 되지않는다. 발명의 가치는 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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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서 노동가치설은 일대 ▣란에 조우(遭遇)한다. 노동은 양에 있어서는 의의가 있으나 질에 있어서는 막연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노동을 질에 의하여 논할 때에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이 되고 만다. 여기서 노동가치설은 일편(一片)의 공리(空理)가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양에 있어서만 의의를 가지는 노동은 양적으로 계상(計上)하여 비로소 가치의 창조력이 되는 것이므로 경제학적 개인주의에 떨어지고 만다.(인격적 개인주의는 아나키즘의 반려이나 경제적 개인주의는 아나키즘의 적이며 개인의 차치를 멸각하는 것이다) 즉 개인이 자기의 노동량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가치를 축적할 수가 있게 되는 것으로써 사유재산제의 인정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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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어서 칼ㆍ맑스는 노동가치론을 경제학적 개인주의에서 구출하려고 가치의 측정을 생산에 요하는 집합적 노동(또는 사회적 노동)의 양에 의하여 하려하며 생산에 요하는 사회적 노동의 양을 시간으로 표시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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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생산에 요하는 사회적 노동은 그 양에 있어서 무한한 것이므로 측정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방적(紡績)의 생산은 그 생산이 사회적으로 공헌한 노동은 여공의 노동만은 아니다. 여공도 먹지 않고는 노동할 수 없는 이상 여공에게 식물을 공급한 농부, 운반부 등등의 노동도 사회적으로 방적의 생산에 포함되는 것이다. 방적회사의 화부(火夫)와 각 기계의 종업원만이 여공과 사회적으로 노동을 집합한 것은 아니다. 횡(橫)으로 사회적 노동을 계량하면 현사회의 만인은 모두 일개의 생산에 연결된 것으로 만인의 노동량이 일개의 생산에 주입된 것이 되며, 생산에 요하는 사회적 노동량은 무한한 것이 되어 측정하지 못한다. 종으로 고찰하여도 이와 동일하다. 남북전쟁의 병사는 미국 남부의 면산(綿産)에 다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기계의 발명자는 상호 연락하여 방적의 생산에 대 공헌을 하고 있다. 횡으로나 종으로나 생산에 요하는 사회적 노동을 어떠한 특정된 사람들의 노동에 귀속시킬 수는 없다. 이점에 대하여는 크로포트킨의 『빵의 약취』 제3장 및 제13장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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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은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모순된 천박 불철저한 것이라고 박▣하였다. “잉여의 가치가 누구의 손에 돌아갈 것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크로포트킨은 말하였다. 즉 크로포트킨에게 있어서는 이 맑스와 같이 비율이 되어 결과할 것이 아니라 C+V가 크로포트킨에게 있어서는 무한가치로서 결과하는 것이므로 0+V=∞(∞는 무한의 부호)가 되며 따라서 m / c+v = 0이되여 잉여가치의 소멸한 진정한 공산주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맑스가 노동가치설의 포로가 된 까닭에 심대한 모순과 불철저에 떨어지고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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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노동은 양에 있어서 의의를 가진다 하면 착취를 멸각할 것 같기도 하나 기실은 만인 노동의 결과를 어떠한 특정자의 노동 중에 병합케 되므로 의연히 착취행위는 계속되는 것이다. 노동가치설은 일방으로는 사유재산의 기초를 작하며(존 로크) 타방으로는 임은(賃銀)제도의 제정(스미쓰와 맑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가치설은 진정한 의미의 무산계급의 해방을 흥하는 분배법을 안출(案出)할 수 가 없다. 환언하면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취하는 한에 있어서 그는 자본주의의 근본원리로부터 이탈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일방으로는 집단적 개인주의(일산업에 종사하는 집단이 동사회에 의하여 조출(造出)된 가치를 점유한다)가 되어 진정한 공산주의로부터 이탈하게 되고 타방(他方)으로는 국가 또는 일소(一小)사회를 자본주로 하고 민중을 모두 노동자로 하는 일대(一大)임은 제도를 확립하여 민중을 영구한 철쇄(鐵鎖) 중에 대규모적으로 속박하고 만다. 여기에 우리는 새로운 가치설을 제창하여 진정한 해방의 원리와 분배법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11. 크로포트킨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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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의 생산을 소수 특정인의 노동에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사회에 생활하는 만인의 노동복합에 귀속시킬 것이라고 제창한 크로포트킨은 자본의 총화 C+V를 무한이라고 잉여가치를 제한하는 이상 m / c+v = 0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역설하여 그는 맑스의 노동가치설을 근저로부터 전복하였다. 크로포트킨은 맑스의 학설을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았다. 독일 깐듸 카리스트 협회에서 강연한 필기를 보면 좌기(左記) 맑스의 3대 학설에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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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물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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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본집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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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급투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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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상 3학설을 비판하며 한 개의 결정론으로써 자유주의를 방해하는 마물(魔物)이라고 논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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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유물사관과 자본집중설과 계급투쟁설은 모두 한 개의 가치설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현실과는 비상히 격리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학설을 취하는 자들은 실제를 떠난 공론만으로써 사회문제를 취급하려하며 소위 과학적 운운하나 기실은 철학자와 마찬가지의 관념론자이며 이데올로기스트가 아닐 수 없다.
 
81
유물사관이 역사와 사회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헤겔의 궤변철학인 변증법을 응용한 까닭이니 그것은 마치 고대중국의 음양도(陰陽道)라는 궤변철학이 모든 사상(事象)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정, 반, 합’의 방법이 사물의 생성원리와 그 발전 상태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비실제적이며 기계적인 까닭이다. 또 자본집중설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세계 금융시장의 최근 50년간의 통계가 충분히 설명하는 바이어니와 주식회사의 격증과 은행예금자수의 격증은 실로 숫자를 측정하기 어려울 현상에 이르렀으며(은행의 예금이 한두 개의 은행에 집중하는 것은 금융자본의 집중은 아니다. 예금의 집중과 금융자본의 집중과를 혼동하여서는 아니 된다) 더욱이 전기 동력이 증기 동력을 대하여 발전함에 따라 공업이 분산되고 있음은 맑스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하던 것으로 이것은 자본집중설의 공식인 ‘1인의 자본가는 타의 다수를 병탄(倂呑)한다’는 법칙에 일대 치명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물사관과 자본집중설이 도▣ 되면 그 결론인 계급투쟁설도 자괴되고 말 것은 당연한 일이니 생산기관의 소유자와 노동을 상품으로 팔고 있는 자와의 숫자적 비율이 사회문제를 결정하지 않는 것은 자본가도 아니요 무산자도 아닌 즉 맑스의 계급 분립상 어떠한 계급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다대수를 점유한 사회로부터 혁명의 봉화가 쳐들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82
이상 제설은 결국 모두 노동가치로부터 온 것이니 노동가치설을 버리면 이 제설도 폐기될 것은 물론이다. 크로포트킨이 이 제설을 취하지 않은 것은 그가 노동가치설을 취하지 않은 까닭이다.
 
 
 

12. 크로포트킨의 가치설

 
 
84
그러면 크로포트킨은 어떠한 가치설을 취하였는가. 그의 가치관념의 기준은 어떠한 것인가.
 
85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유로운 사회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요, 결코 국가로부터 개인에 천강(天降)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방식을 취하는 것이니 즉 개인의 욕구를 연구하여 이것을 만족하게 할 수간을 토구(討究)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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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제군이 경제학자의 저서를 들쳐본다면 그 학자가 반드시 생산으로부터 시위(始爲)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칼 맑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학자는 이 방식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생산을 지도할 것은 욕구의 연구에 있지 않으냐” “생산을 가지고 말한다면 엄밀한 의미의 가치의 척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은 그 결과로 계량한다는 것은 일대배리(一大背理)에 유도하는 것이다. 전체의 노동을 분할하여 그 분수를 노동에 비(費)한 시간 수로 계량한다는 것은 우리를 큰 배리에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우리가 취할 길은 곧 욕구를 노동 위에 상치할 일이다. 그리고 먼저 제일로 생존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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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에 의하면 경제과정의 제일 출발점은 소비요, 생산이 아니다. 소비가 경제활동의 근본원리를 정하는 것이요, 생산이 근본원리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생산이 근본원리가 된다하면 그것은 개인의 욕구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개인보다도 추상적인 어떠한 가공의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된다. 개인의 욕구는 개인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장 직접 된 경험이요 기타의 것은 모두 간접 된 경험이다. 그러므로 만일 개인의 욕구를 경제활동의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그 경제활동은 간접경험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기준으로 할 것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직접 되는 경험일수록 기준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니 직접으로부터 간접에 나아가는 것은 정당한 일이나 간접으로부터 직접에 나아가는 것은 반드시 허위를 낳는 까닭이다. 그리고 직접경험은 개인이 자기 자신 중에서 경험하는 것이니 그것은 개인의 욕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에 반하여 개인이 자기 이외에서 경험하는 것이 간접경험이니 이것은 직접경험에 종속은 할지언정 결코 주위(主位)에 설 수 없는 것이다. 즉 크로포트킨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유로운 사회에 도달하려는 것이요, 국가로부터 개인에 천강(天降)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인의 욕구를 경제활동의 기준으로 함에 있어서는 소비로부터 생산에 나아가는 과정을 경제활동이 취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종래의 경제학자에 있어서는 (스미스로부터 맑스까지) 생산―분배―소비 이러한 순서로 되어있으나 크로포트킨에 있어서는 소비―생산―분배 이와 같은 순서로 경제과정이 진전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된다. ‘개인의 욕구가 경제과정의 출발점이 될 때에는 가장 철저한 경제적 방식에 의하여 만인의 욕구를 만족하게 할 조직 즉 공산제도에 도달함에 실패하지 않는다.’ 고 그가 말한 것은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온 말이다. 만인의 민족이라는 것은 만인의 욕구를 평균하는 것도 아니며 만인의 욕구를 다수로 하는 것도 아니다. 만인의 욕구라는 것은 만인의 일인 일인의 욕구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개인의 욕구의 만족을 기도(企圖)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산제도의 근본원리가 있는 것이다. 개인의 욕구의 만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진정한 공산제도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한 크로포트킨의 말을 실로 명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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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입장에서 가치의 문제를 논한다면 ‘생산을 가지고서 하며 엄밀한 가치 척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빵의 약취』 228항 참조―영문 런던판) 그러면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크로포트킨의 입장에서 말하면 노동량, 생산관계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관계, 개인의 욕구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된다.(크로포트킨에 여기에 대하여 명언(明言)하지 않은 것은 크게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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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비관계 개인의 욕구가 가치를 결정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주관적이어서 가치의 계량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가치를 계량하느냐하는 반문이 여기에 두 번째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왜? 가치가 계량되지 않으면 아니되는가 그 이유를 우리는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13. 불가계량(不可計量)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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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계량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생산품이나 노동이 교환되는 경우에 한하여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생산품이나 노동의 교환이 필요치 않는 분산 제도(지방분산적 공산제도)에 이르러서는 가치의 계량은 필요 없는 것이다. 즉 가계량의 가치는 일체 멸각되고 불가계량의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경제학에는 자연과 재(財)가 구분되어 있으나 크로포트킨의 사회생리학에 있어서는 자연과 재의 구별은 없다. 스미스와 맑스에 의하면 공기는 무가치한 것이나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공기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미곡, 주류, 포목, 연초 등도 균일히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가치는 불가계량인 것이다. 가계량의 가치가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사회는 절대로 공산제가 아니 된다. 자본주의와 집산주의가 계속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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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현재의 생산방식에 의한 수득(收得)과 잉여가치를 검토하여 개인의 욕구의 만족과 생산이 일치하는가 아니하는가를 판지(判知)하지 않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도달하며 잘 가야 집산주의에 밖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빵의 약취』 24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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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관찰에 의하면 가치는 결핍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자본주의) 노동량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맑스주의) 가치는 실로 개인의 욕구에 의한 응불응(應不應) 여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즉 가치에는 보편적 타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는 그 자체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타당한 것으로 절대로 계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치는 결핍의 정도에 의하여 측량 할 수도 없고 또한 노동의 양에 의하여 계량할 수도 없다. 그러면 이미 가치가 불가량인 이상 거기에 가치를 소유할 수는 없다. 즉 완전한 공산제가 되는 것이다.
 
 
 

14. 신분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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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계량의 가치는 분업이 행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분업이라 칭하는 것은 생산 상의 분담작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개인이 모든 생산을 독담적(獨擔的)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사회생활을 하는 한에 있어서 생산상의 그 방식을 분담적으로 하는 것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생산방식에 의한 소위 분업이라는 것은 생산상 분답방식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좌(左)와 여(如)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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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자를 기계화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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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생산에 종사하는 자는 타 생산에 대하여는 책임과 이해와 흥미를 갖지 못함.
98
3. 분화되는 생산을 종합하기 위하여 초월적 종합기관을 필요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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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특징을 분업은 구비하고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분업제도 하에 있어서는 개인의 욕구를 생산에 표현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산을 위한 생산 밖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의 이해를 타산하게 되는 즉 가계량의 가치가 필요적으로 정하게 되는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욕구를 생산에 표현하기 위하여는 “자기 혼자만이 필요한 것은 자기 혼자서 만들고 여러 사람과 함께 필요한 것은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든다.” 이것을 가능케하는 경제조▣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니 이것은 분산제도 밖에는 없는 것이다. 만일 개인의 욕구를 생산에 표현할 수 없는 경제조직 하에서 생활을 한다면 그 조직 하에 있는 경제과정은 필연적으로 생산으로부터 소비에(간접으로부터 직접에) 나아가게 되며 노동량에 의하여 가치를 계상(計上)하게 되므로 진정한 공산제는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분업제도에 있어서는 소비로부터 생산에 향하는 경제 과정을 취함으로 개인의 욕구는 그것을 생산에 표현하게 되며 그 가치는 노동량에 의하지 않고 개인의 욕구에 의하여 법정(法定)되는 불가계량의 것이 되는 것이니 즉 ‘필요에 의하여 향수하는’ 제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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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의하여 향수하는 분배법 이외의 분배법은 약탈법(掠奪法)이 아니면 보수법(報酬法)이다. 착취법(搾取法)은 약탈에 의하여 생산품을 수득(收得)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노동량에 의하여 분배되는 임은제도(賃銀制度) 밖에는 될 수 없다.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여온 우리는 노동량에 의하여 분배되는 것이 가장 정당한 분배법이라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고찰하여 보면 이러한 분배법이 부정당한 것은 노동가치설을 비판할 때에 약술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중복하지 않거니와 흔히 개인의 욕구라 하면 방종 무질서한 것처럼 생각하나 개인의 욕구같이 정확하며 타당적인 것은 없으며 노동량이라 하면 참으로 정확하며 타당적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노동량같이 부정확 무계량한 것은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인간이 기계에서 기계적으로 노동을 한다면 시계와 같은 것으로 계량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생물임으로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특이한 점이 존재 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열심과 불열심 동▣와 태만 피로와 상쾌 건강과 불건강 등등의 특이한 사정은 일일이 그 사람의 노동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생활 전체 개성 전체가 노동위에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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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노동을 시간에 의하여 계량한다면 그 모든 특이한 작용을 재단하여 버리고 인간을 동일형으로 취급하여야만 비로소 성립될 것이니 가치를 노동량에 의하여 계량하려면 인간이 기계가 되기까지는 절대로 정확히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개인욕구는 개인 생명의 욕구와 동일한 것이므로 그 사람의 생명의 필연적 작용 이외에는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생명의 필연적 작용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욕구는 없는 것이니 생명은 자연이며 그 필연적 작용도 자연이므로 거기에는 광인상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욕구처럼 정확하며 타당한 것은 없는 것이다. 식욕, 성욕, 지식욕 등의 모든 것은 생명의 필연적 작용이니 개인의 생명 중에 ‘예정’된 그대로 유로(流露)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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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인간은 그릇된 욕구 쓸데없는 허욕을 일으키고 있는가. 왜 인간은 부정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개인의 욕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병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개인의 욕구를 기준으로 하지않는 사회조직 하에 있어서는 개인의 욕구는 무시되므로 거기에서 병리학 발생하는 것이니 이 병리에 의하여 제종(諸種)의 죄악이 따라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욕구가 부자연한 사회로부터 해방될 때에 비로소 그것은 자연의 약속대로 움직일 것이니 이와 같이 개인의 욕구가 자연의 약속대로 움직이어서 그것이 만족하게 되는 곳에 자유가 있게 되며 이러한 경제조직은 지방적 분산제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상 가치론의 연구를 마치고 조직론에 나아갈 약속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조직론의 이에서 약하기로 한다) (終[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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