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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지금의 나로서는 비평의 일은 하지 못할 위인인 것을 자백할 수밖에 없다. 10년 전 혈기에 넘쳐서 미술비평을 일삼아 보았을 때 선배 고희동 씨에게 기탄없는 폭언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동연(同碩)화우 제씨의 작화를 비난하여야 지성(志性)이 풀리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시의 혈기도 내지 정열도 가져지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이와 아주 딴 길을 걸어 보았으면 하여서 이 졸고도 사퇴하여 보자 하였으나 전(全) 문화 영역의 일년간 회고가 기재되는데 유독 미술계의 소식이 없을 수 없겠는가 하므로 이미 그렇다면 일년간의 동정을 재록하는 정도에서 집필하기로 하였으나 짧은 시일에 과거 일간(一間) 미술계 소식의 재조사도 어려운 바 있으니 대체로 기억에 나는 몇가지를 초하여서 그 책을 갚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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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의 미술계에 있어서 집단적 의미로 하나의 반가운 일과 섭섭한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할 것이니 조선미술원의 탄생은 우리 미술계의 반가운 소식일지나 이것은 동 원의 관계자인 내가 이 이상 더 말하기에는 자화자찬이 될 것이므로 생략하여 두고 모든 의미에서 근대 조선미술계의 모태인 서화협회가 금년도 전람회의 불개최는 짐짓 추풍막락(秋風莫落)의 느낌을 주고 있다. 연년히 미술의 가을이 협전의 불개최로 올에는 그저 단풍드는 가을을 천송(踐送)할 따름이니 고적한 마음 오죽 나만 갖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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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조선일보사 주최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의 불개최이다. 작년 동 전람회의 장내를 일별하고서 나는 나대로 이런 해석을 가져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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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미술계는 이제부터 태동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선배나 또는 정력적 화우 제씨의 노력이 노력이라느니보다는 미술가로서의 자기를 버리고서 오로지 미술교육가로서 구름을 만들고 분위기를 만들고 빛을 만들어 가지고 참된 의미로 장래 할 미술가를 제작하는 것이 또는 그 성과가 곧 학생전람회가 아닐까 하였다. 그리하여서 이런 전람 회가 회를 거듭하기를 마음으로 기대하였던 한 사람이었었다. 근대 조선미 술사의 전기적 존재인 우리는 이런 화학생(畵學生)의 미래에 거대한 희망을 가졌던 것이 개최 중지를 보았으니 어찌 섭섭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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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의 두 전람회는 사태가 바꾸어지는 때 자기의 힘이 축적된 대로 다시 우리를 반갑게 하여 줄 것이려니와 석양판 노구교의 한방 총소리로 하여서 골동 브로커에 의존하였던 미술가들이 급각도로 전향을 하지나 않을 까가 문제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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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아직 화상이 없고 무지한 골동상이 횡행하면서 있으나 이들의 요구에 따라 상품(화작(畵作))을 제작하던 화가들이 참락(慘落)하는 골동품과 같이 걸음을 같이하지나 않을까. 그리하여서 그것이 앞으로 오는 시대에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가 흥미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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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의 전향이 반드시 일률적으로 화단에 타격만을 주는 바 아니니 먼저 말한 바와 같이 미술 교육가로서 교편을 잡음도 불가한 바 없을 바이며 순수미술에서 삽화에로 자리를 옮기어 가지고 화단을 측면 옹호함도 또한 불가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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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삽화의 말이 났으니 금년도에 있어서 우리의 삽화계는 그 제판술의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진경을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의 김규택, 정현웅 양씨와 동아일보의 홍득순, 매일신보의 이승만 씨의 연속적 노력은 급기야 의연 우열한 제판술로 하여금 실력 이상의 명예를 갖게 하였고 조선 인물 내지 조선 의복에 대한 새로운 정형을 세워 주려는 또는 거의 정형화의 공작(工作)을 대체로 한 김규택, 정현웅 양씨의 공적에 나는 많은 감사를 가지며 더욱 잡지『소년』지상에서 정현웅 씨의 삽화를 대할 때에는 가끔 미소를 나는 가져 볼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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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전람회를 중심으로 하여서 약간의 기억을 살리어 본다면 금년 화단 활동의 제일보로서 조선미술원 낙성기념 전람회가 4월 벽두에 있었으나 이것은 미술원의 창립자의 일원으로서 자찬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겸신(謙愼)하는 나머지 도리어 솔직한 논의를 피하거니와 그렇다고 하여서 조선미술원 총수이며 현재 동양화단의 거봉 김은호 씨의 15,6점의 근업(近業)을 일당에 모은 위관을 잊을 수 없고 허백련, 박광진 양씨(兩氏)의 부단의 연마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수십 점의 고심작을 볼 때에 동인의 하나로서 자연 머리가 숙여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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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관재 이도영 씨 이후의 동양화는 근대적 음향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김은호 씨, 이상범 씨, 노수현 씨, 허백련 씨는 각기 영역을 달리하면서도 그러나 근대를 동경하는 특이한 4기수이다. 김은호 씨의 우아, 이상범 씨의 정적(靜寂), 노수현의 강곡(剛穀), 허백련 씨의 활담(活淡)을 1실에 집중하여 볼 흥행적 가치도 생각되어지지마는 그보다는 한걸음 현재 조선 동양화의 전폭적 음미로서 이어지기를 갈망하는 바이다. 금번 동원 전람회에 비록 소폭일지나 이상범 씨를 제하고서 그 외 3씨가 출진하여 과연 서로 이채를 보여주어 더욱 4가의 종합전을 요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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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직 이상범 씨의 작품만을 찾아 5월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에 눈을 보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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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씨의 출품작은 씨로서 근래의 우작(優作)이었다고 기억되었고, 농(聾), 아(啞) 2중고의 화가 김기창 씨와 규수화가 정찬영 씨의 제작을 대할 때 전자의 생리적 신고와 후자의 가정적 번잡을 돌관(突貴)하는 지기(志氣)에는 자기 반성의 좋은 교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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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실의 서양화부에는 이인승(*이인성) 씨를 필두로 하고 김중현, 심형구,김인승 제씨가 전심 전력 전령(全靈)을 경주한 대작을 한가지로 보여 주어 동 전람회로서는 처음으로 현란한 호화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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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람회를 본 후 우연히 춘원을 만나서 한담을 하던 기억이 지금 우러난다. 서진달 씨의 작품<실제명(失題名)*실내>을 가지고 그는 회심의 가작이라고 칭찬을 한 듯 하다. 황의의 조선 여성과 조선식 청동 화로를 통하여 소위 조선적 정서를 영묘하게 표백(表白)한 화재(畵才)에 놀랬다고 말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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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으로 미술감상의 태도는 미술의 기본적 요소를 탐색 완상하기 전에 그 ‘작용’ 을 감상자 자기류의 문학적 해석을 부치어서 보는 것이 통례일 것이다. 춘원 역시 이 파에 소속하였으나 ‘작용’ 을 잃은 회화도, 예술도 없을 것이니 서진달 씨의 작품은 유창한 일품이므로 감상 태도를 달리하면서 나도 그에게 동의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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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조선에서는 염두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나니 연년히 총독부 미술전람회에서 가장 그것을 느끼게 한다. ‘조선적’ ‘향토적’ ‘반도적’ 이라는 수수께끼를 가지고서 미술의 본질을 말살하는 모험을 되 풀이 하고 있는 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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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예로서 동 전람회에 출진한 수많은 공예품에서 제저(題著)이 보는 것이니 이것은 지나가는 외방인사의 촉각에 부딪치는 ‘신기’ ‘괴기’에 그칠 따름이고 결코‘조선적’이나‘반도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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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향토적 의미는 미술 소재의 지방적 상이와 종족의 풍속적 상이와 각개 사회의 철학의 상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의연 미술의 본질은 그 구성 요건은 별립(別立)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 미술전람회의 수다한 공예품과 또는 조선적 미각을 가졌다는 우수한 회화는 통틀어서 외방인사의 향토 산물적 내지‘수출품적’가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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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전람회의 뒤를 이어 목시회의 전람회가 그러니 금년도의 도미(掉尾)의 전람회가 되었다. 장발, 이종우, 길진섭, 김용준, 구본웅 씨 등이 어깨를 같이 하고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려는 정의(情意)에 감격을 가졌으며 종말로 아직 사회적으로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외우 이여성 씨가 장대한 계획 밑에 조선 역사의 회화화를 비롯한 것을 소개하여야 되겠다. 이여성 씨 의 박식과 천학과 윤필은 세칭 범속된 전문가의 지위를 뛰어났으며 또 동일이 논할 비례를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 나는 생각하기를 씨의 성공은 곧 씨만의 영예가 아니라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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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찬 씨로부터 이송령 씨에 이르기까지 제씨의 개인 전람회가 있었으나 씨명, 장소, 시일 등 통틀어 망각하였으므로 재록이나마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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