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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랑(安東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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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기찬(東廂紀簒)》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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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랑(安東郞)
 
 
3
김안국(金安國)은 판서(判書)에 대제학(大提學) 숙(淑)의 자제다. 그 3, 4대 선조 적부터 다 문장과 재망(才望)으로써 대대 문형(文衡)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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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은 태어나서부터 미목이 수려하고 용모가 훤칠하여서 판서 대감이 애지중지하였다.
 
5
"애가 참으로 우리 집 자식이로다."
 
6
안국이 말을 막 배우자 문자를 가르쳤더니 석 달이 지나도록 하늘 천(天) 따지(地) 두 글자도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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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가 용모와 미목이 저만하고서 총명이나 재분이 이다지 멍청할 수 있을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재주구멍이 미처 열리지 않았는가. 몇 년 지나서 가르쳐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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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대감은 안국에게 다시 글을 가르쳤으나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전과 매일반이었다. 마음에 적이 근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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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가 끝내 이런다면 저 일신의 불행일 뿐 아니고 우리 지체를 떨어뜨리는 것이 이보다 더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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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주야로 가르치고 때때로 꾸중하였다. 글을 깨우칠 도리를 천만가지로 차려 보았으나 종내 '하늘천, 따지' 두 글자도 해득하지 못하였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한 해 두해가 흘러서 안국의 나이 어언 14세가 되었다. 대감은 한숨을 쉬며 탄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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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것이 아직 어려서 그러는 줄로만 여겼더니 이제 이미 14세인데 저 지경이니 세상에 어디 저런 물건도 다 있을까. 우리 선조의 혁혁하신 명성이 장차 저 물건에 이르러 떨어지겠구나. 조상을 욕되게 하는 자식을 두느니 차라리 자식이 없어 제사를 철하게 되는 편이 나으리라. 게다가 저 물건만 대하면 벌써 분통이 터지고 머릿골이 아파 오니 사세가 도저히 저것을 집에 둘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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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안국을 없앨 도리를 찾았으나 차마 죽일 수는 없는 일이고 어딘가로 쫓아 버리고 싶었으나 종적이 곧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손을 못 쓰고 우선 목전에 나타나지만 못하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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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의 동생 안세(安世)는 나이가 5세였다. 용모가 준수한 것은 안국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재질이 총명하기로는 안국보다 약간 나았다. 안세로 가통을 잇게 하고 싶어도 안국이 있는데 예법에 온당치 못하였다. 매양 어디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추방하려고 벌렀지만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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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대감의 종제 청(淸)이 안동(安東) 통판(通判)으로 나가게 되었다. 안동은 서울서 멀리 떨어진 고장으로 부호들이 많았다. 청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도임할 임시에 대감의 집을 들렀다. 대감이 안국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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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이 본디 이러이러하단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세 번이나 끓어오르는데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오래 전부터 쫓아 버리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다만 적당히 보낼 곳이 없어하던 차이다. 이제 군이 다행히 안동으로 내려가니 저것을 데리고 가서 아주 안동 백성을 만들어 세인이 알지 못하게 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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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반대하고 또 위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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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부터 이제까지 문장세가(文章世家)에 글 못 하는 자손이 한둘이었겠소. 그러나 아들을 내쫓았다는 말은 못 들었소. 형님이 그리하실 수 있소. 안국의 사람됨이 저같이 비범하니 설사 종내 글을 못 하더라도 능히 가업을 이어 선대의 제향을 잘 받들 것이오. 안세가 재주는 있다고 하지만 그룻이 작을뿐더러 차자인 걸 어떻게 안국을 버리고 안세로 세운단 말입니까? 형님의 처사는 윤리에 어긋난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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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일어서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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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이 손을 잡고 간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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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나의 청을 들어 주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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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계속 거절하다가 마지못하여 승낙하고 말았다. 대감이 안국을 불러 영결(永訣)의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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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나는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너도 나를 아비로 생각하지 말아라.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는 안 된다. 서울에 나타나면 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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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안국을 데리고 내려가서 부임을 하였다. 안국이 외양이 저만큼 범상치 않고서야 못 가르칠 이치가 있으랴. 내가 반드시 가르쳐 보리라 하였다. 공무의 여가에 틈틈이 안국을 불러서 가르쳤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하늘천, 따지' 두 글자도 깨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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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과연 그렇구나. 판서 형님이 쫓아낼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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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안국을 불러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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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아, 네가 왜 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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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질(小姪)이 전에부터 무슨 설화를 들으면 정신이 맑아져 주야를 천언 만언을 들어도 죄다 또록또록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문자에 당대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해독이 안 될 뿐 아니라 글이란 말만 들어도 금방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두통이 벌써 일어납니다. 아저씨께서 죽으라면 저는 죽겠습니다. 다만 문자에 이르러서는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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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별도리가 없을 줄 알고 안국을 책실(冊室)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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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본읍(本邑) 좌수(座首) 이유신(李有臣)이 집이 부유한데 당혼한 딸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안국으로 그 집 사위를 삼으려 하였다. 유신을 불러 책실에 낭재(郎材)가 있음을 말하고 혼담을 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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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실의 낭재라니 누구 댁 낭재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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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우리 판서 종형의 큰 자재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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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돌아와서 생각하니 의심이 들었다.
 
33
'김대감은 서울의 귀족 아닌가. 대대로 문형(文衡)을 잡아 전국의 양반들이 누구나 우러러보는 터에, 그의 소생 적자(嫡子)라면 안동으로 구혼할 이치가 아니겠느냐. 서자(庶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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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아가 물었더니 고 상국(故相國) 허연(許捐)의 외손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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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또 의심해서 '서자가 아니라니 그럼 병신이겠지. 봉사일까. 벙어리일까. 아니면 고자일까.' 하고 다시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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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병신인가 의심하는 줄 알고 안국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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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척 신장에 미목이 그림 같고 음성이 청랑(淸朗)하여 참으로 서울 미소년이 아닌가. 유신은 마음 속에 탄복을 하면서도 고자가 아닌지 미심쩍었다. 묻고도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청은 이 눈치를 차리고 안국에게 명하여 바지를 벗어 보게 하였다. 고자도 아니었다. 유신은 안국이 서자가 아니며 병신도 아닌 줄 알고 더욱 의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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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씨 대감은 서울의 귀족이신 터에 저렇게 기특한 자제를 두고 굳이 천리 밖의 안동땅에 구혼을 하시다니, 무슨 연고인지 궁금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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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끝까지 숨기다가는 필경 성사가 안 될 줄 생각하고 글을 못 하여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다. 유신은 속에 치부하기를 '안동좌수의 딸이 시임 대제학의 아들에게 시집가면 대만족이지 글까지 잘 하기를 바라오. 제가 비록 쫓겨났다지만 내가 거두어 살리면 또 안될 게 무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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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허혼(許婚)을 하였다. 청은 유신이 가산이 유여하여 족히 한 근심을 잊게 될 줄 믿었지만 문벌도 얌전한 사족임을 탐문하고 과망(過望)함을 기뻐하였다. 곧 택일하여 성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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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청은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갔다. 대감에게 안국이 장가든 말을 하였다. 대감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을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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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었다, 잘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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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은 처가의 별당에 틀어박혀 석 달 동안 호정(戶庭) 밖도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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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가 조용히 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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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가 허구헌 날 방구석에만 계시다니 답답하지도 않으셔요. 그리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영광스럽게 할 도리는 문자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방구석에 3개월이나 계시도록 글이라곤 전혀 읽으시지 않고 문 밖 출입도 않으시니 웬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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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은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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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내가 처음 말을 배우자부터 아버지가 나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4세가 되도록 '하늘천, 따지' 두 글자도 깨치지 못했다오. 아버지는 내가 집안을 망칠 물건이라고 죽이려까지 하였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시고 이곳으로 내쫓으신 것이오. 종신 부모님의 목전에 보이지 말라 하셨으니 나는 실로 죄진 사람이오. 무슨 낯짝을 들고 하늘의 해를 바라보리오. 나는 비단 글자만 깨치지 못할 뿐 아니라 '글'이라는 한 소리만 들려도 두골이 빠개지니 이제부턴 나의 귓가에서 제발 글에 대한 말은 말아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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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한숨을 쉬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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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장인은 제법 문명(文名)이 있어 향리에서 치는 사람이었고 두 아들도 다 문장이 넉넉하였지만 안국의 사정을 들었던 까닭에 애당초 글을 가르쳐 볼 상의도 하지 않았고 대면하는 일도 드물었다.
 
50
신부는 장성한 사람이 하릴없이 지내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다시 말을 꺼냈다.
 
51
"저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모두 글을 잘 하시니 사랑에 나가서 글을 배워 보셔요."
 
52
안국은 성을 불끈 내어
 
53
"먼저 내가 글 말만 들어도 두통이 난다고 하지 않았소. 나에게 글 말은 다시 꺼내지 말아야 옳거늘 왜 그런 말을 또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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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골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55
신부는 낙심하여 물러났다. 그리고 글말만 꺼내면 상처를 입히는 줄 알고 다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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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이씨는 원래 여자 중의 문장이었다. 시서(詩書) 육예(六藝)의 글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무불통지하였지만 천성이 온유하고 또한 사리의 의당함을 알았던 것이다. 문장은 여자의 종사할 바가 아니라 여기고 속에 넣어 두어 일체 표를 내지 않아서 부모 형제도 문장인 줄을 막연히 몰랐다. 매양 안국이 부친에게 득죄한 것을 슬퍼하여 글을 가르쳐 보고도 싶었지만 여자로서 남편을 가르친다는 것이 예법이 아니고 또한 안국이 글이라면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하여서 한 번 재주가 어떤지 시험해 보려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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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돌부처도 나무인형도 아닌데 진종일 입을 봉하고 가만히 계실 수 있어요?"
 
58
"말을 하자니 누굴 붙들고 해?"
 
59
"저와 더불어 옛날 얘기나 하실까요?"
 
60
"그래 주오."
 
61
이씨는 천황씨(天皇氏) 이래로 역사를 풀어서 이야기하니 안국은 귀를 기울여 듣고 매우 재미있어하였다.
 
62
책 한 권을 다 풀어서 들려 준 연후에
 
63
"이런 한담 설화도 따라 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려요. 한 번 외어 보셔요."
 
64
하니 안국은 들려 준 이야기를 쭉 외는데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65
이씨는 내심 매우 대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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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가 탁월한 재주를 지녔는데 무엇인가 질곡(桎梏)이 있어서로구나. 내가 반드시 총명을 살려서 통달하게 만들어야겠다.'
 
67
이씨는 주야로 이야기를 해 주고 모두 외게 하였다. 처음 역사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마침내는 성경현전(聖經賢傳)에 이르기까지 천언만어를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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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안국이 이씨에게 묻기를 "여보, 우리가 왼 이야기들은 과연 어떠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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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름아니고 다 글이라오."
 
70
안국은 펄쩍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71
"아니 정말 글이란 말이오? 글이 그토록 재미있는 것이라면 내가 왜 머리가 아프지?"
 
72
"글이란 본래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지요. 머리 아플 까닭이 있나요."
 
73
"그렇다면 이제부터 전에 소위 문자라는 것을 배워 보겠소."
 
74
이씨가 이에 {사략}(史略) 초권을 펼치고 천황씨 이하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전에 왼 이야기가 어느 대목의 말인가를 가르쳤다. 그리고 본문을 읽게 하였더니 첫쨋권 둘쨋권이 지나서부터는 능히 스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안국은 일평생 깨치지 못하던 것을 그만 일조에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도 소홀히 보낼 수 없다고 낮에는 식사도 잊고 밤에는 취침도 않고 날마다 책자를 모두 해독하였다. 이씨는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법까지 가르쳤다. 이에 안국이 정신을 집중시켜 짓고 쓰니 사상이 구름처럼 풀리고 묘법이 물결처럼 펼쳐져 단가(短歌)와 장문(長文), 초서(草書)와 해자(楷字)에 두루 구비하게 되었다.
 
75
이씨는 바깥 출입을 시키려고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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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에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하지 않았어요? 문장과 도덕이 이치가 다르지 않은데 당신은 십년 동안이나 고립하여 붕우상교(朋友相交)를 못 하셨으니 이제부터라도 사랑에 나가셔서 이택(麗澤)의 유익함을 취함이 어떠하실런지요?"
 
77
안국은 드디어 목욕하고 의관을 차리고서 사랑으로 나와 장인에게 인사를 드렸다. 장인은 딸이 글을 잘 하는 줄 전혀 모르는 터에 더구나 안국을 가르쳐 문장이 된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안국이 사랑에 발을 끊은 것이 십여년이었다. 제 발로 걸어나와서 절을 하다니 한편 놀랍고 한편 반가왔다. 두 처남도 어리둥절해서 말을 하였다.
 
78
"오늘 밤이 웬 밤인고? 김서방이 사랑에 나올 날이 다 있고."
 
79
"자네들이 글을 짓는단 말을 듣고 나도 초나 해 볼까 하고 나왔네."
 
80
장인 처남 모두 허허 웃으며
 
81
"전에 못 듣던 말일세. 좌우간 뜻이 가상하니 시험삼아 해 본들 어떻겠나."
 
82
하고 글제를 분판(粉板)에 썼다. 안국은 글제를 보고 즉시 붓을 들어 일편의 문장을 지어 놓았다. 그야말로 문사(文辭)는 호방하고 필법은 정교하였다. 모두 대경실색했다.
 
83
"이는 옛 문장가의 수법이다. 안국이 이걸 하다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84
장인은 단걸음에 안으로 들어가서 딸을 불러 물었다.
 
85
"얘야, 김서방이 본래 글 못 한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대단한 문장명필이로구나.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86
이씨는 아버지 앞에 전후의 일을 아뢰었다. 이에 모두들 탄복해 마지않았다.
 
87
이로부터 안국의 문장과 학업은 일취월장해서 비록 영남의 노대가들이라도 그의 웃길에 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에 나라에서 왕자의 탄생을 경축하는 별시(別試) 과거를 보였다.
 
88
이씨가 안국에게 권하기를
 
89
"이번 별시를 당하여 국중의 글하는 선비들은 다투어 응시한답디다. 대장부로서 아예 글을 못 하면 모르거니와 당신의 문장이 이만큼 성취되셨으니 어찌 좋은 시절을 허송하고 아주 안동의 촌사람이 되고 말겠습니까? 그리고 아버님이 이곳으로 내쫓으신 이유도 단지 글을 못 했던 때문이었지요. 이제 문장이 대진(大進)하였으니 이 때를 타서 귀성(歸省)하심이 좋을까 합니다."
 
90
안국은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고 대답했다.
 
91
"나 역시 답답하게 여기 오래 있고 싶겠소? 내가 처음 여기 내려올 적에 아버지께서 다시 서울에 올라오면 죽이겠다는 막말씀을 하셨다오. 내 어찌 죽음이 두려워 안 가겠소? 자식을 죽인 아버지가 될 것이 두려운 것이오. 또한 자식 된 자 어버이께 죄를 얻으매 마땅히 문을 닫고 머리를 숙이고 종신 근신해야 도리거늘 어찌 유유히 과장(科場)에 들어가 임금을 섬길 뜻을 두겠소."
 
92
"의리야 그렇지요만 권도(權道)도 쓸데는 써야지요. 이제 당신이 먼저 과거를 보시어서 이름을 금방(金榜)에 올리면 글을 못 하셨던 발명(發明)이 안 되겠습니까? 그런 연후에 부모님 슬하에 나아가시면 어찌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마음이 없으시겠어요?"
 
93
안국은 이씨의 말을 옳게 여기고 즉시 과거길을 떠났다. 천리 먼 길을 필마단동(匹馬單 )으로 터덜터덜 올라갔다. 간신히 서울에 도착해서 자기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부친을 뵙기가 두려웠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모두 낯이 설어 방황하였다. 어디로 갈까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들를 곳은 유모의 집뿐이었다.
 
94
이에 말을 채쳐 찾으니 유모는 안국을 보고 깜짝 놀라 반겼다. 문 밖으로 뛰어나와 손을 잡고 맞아들였다.
 
95
"나는 서방님이 벌써 돌아가신 줄 알았다우. 오늘 이렇게 뵐 줄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런데 대감님께서 만약에 서방님이 오신 줄 아시면 큰 풍파가 납니다. 우선 저 골방에 들어가 계셔셔 남이 모르게 해야 해요."
 
96
밤에 유모가 몰래 찾아가서 안국의 모친에게 아뢰었다.
 
97
"안동 서방님이 쇤네의 집에 와 있사옵니다."
 
98
모친은 여자인지라 안국을 떠나보낸 이후로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안국이 왔단 말을 들으매 버선발로 달려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대감이 아실까 두려워 귀엣말로 유모에게 분부하기를
 
99
"대감께서 취침하신 연후에 아무도 모르게 데려오게."
 
100
유모가 분부대로 거행하여 모자간에 상봉하게 되었다. 모친이 울먹이며 안국에게 말하였다.
 
101
"내가 너와 이별한 지 십여년에 소식이 이승과 저승처럼 돈절하였으니 문 밖에 나가 멀리 떠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매 매양 나의 간장이 끊어졌더니라. 이제 너의 얼굴을 대하니 일변 슬프고 일변 기쁘구나."
 
102
안국도 우러러 모친을 바라보니 주름진 얼굴, 흰 머리가 옛날의 자태를 찾을 길이 없었다. 마음이 격해져 눈물을 뿌리며
 
103
"불초 소자가 아버지께 득죄하고 먼 시골로 쫓겨나 어머니를 상심케 하였으니 이 어찌 자식 된 도립니까?"
 
104
하며 서로 눈물 섞인 이야기를 나누는 즈음에 밖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모친은 안세가 들어오는 줄 알고 안국의 귀에다 대고
 
105
"너희 아버지가 만약 네가 온 줄 아시면 필야 너를 죽이려 하실 것이다. 네 동생도 보지 말아야 하겠다."
 
106
하고 안국을 방 한구석에 이불을 씌워 두었다.
 
107
안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108
"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운 게 누구야?"
 
109
모친은 끝내 숨기기가 어려울 줄 알고 안세를 불러 앉히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110
"네 안동 형이 왔단다."
 
111
안세는 박수를 치고 하하 웃으며
 
112
"옳지, 안동 형이 여기 와 있었구나. 아까 아버지께서 꿈에 안동 형을 보고 시방 두통이 대단하시길래 어머니께 말씀드리려고 들어오는데, 정말 안동 형이 여기 와 있었구먼."
 
113
모친이 쉬 하고 말렸다.
 
114
"안세야, 아버지께서 만약 이 일을 아시면 큰 변이 난다. 사랑에 나가서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라."
 
115
안세도 원래 형 안국의 일을 들어서 아버지가 아시면 곧 죽이려 하실 줄 알고 입을 다물었다.
 
116
안국은 모친께 하직하고 유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은 곧 과거를 보는 날이었다. 안국은 과장을 찾아가려 하였으나 십여년 집을 떠났다가 이제 서울에 와서 사방이 생소하여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다. 단신으로 올라왔으니 누구 하나 벗하여 갈 사람이 있겠는가.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한 소년이 잘 차리고 과장을 향햐여 가고 있었다.
 
117
"저 서방님을 따라가셔요."
 
118
안국은 유모의 말대로 소년을 따라갔다. 그 소년은 곧 아우 안세였는데 그의 동접들은 모두 재상가의 자제였다. 안세는 안동 형이 글도 못 하면서 따라온 줄 알고 부끄럽게 여겨 혹 누구냐고 물으면 형이라 않고 꼭 시골 손님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119
글제가 걸리는데 책문(策問)이었다. 서로 지필묵을 들고 요란을 떨며 다투어 글제를 베껴 오는 것이었다. 안국은 빈 손으로 나아가 잠깐 글제를 외워 와서 조금 생각하더니 시지(試紙)를 펼쳤다. 먹을 갈아서 붓대를 놀이더니 한 번 읽어 보고 맨 먼저 제출하였다. 안세는 속으로 경탄하였다.
 
120
"누가 우리 안동 형이 글을 못 한다 하였던고?"
 
121
안국은 과장을 나와서 유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122
시관(試官)이 심사를 끝내고 보니 장원은 김 숙의 아들 안국이었다. 친구의 자제가 장원을 한 것이 기뻐 축하하려고 달려갔다. 문전에 당도하기도 전데 신은(新恩)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대감은 안세로 생각하고 기쁨에 넘쳐 방목(榜目)을 보았다. 10년 전에 안동으로 쫓아낸 안국이 아닌가. 노발대발해서 소리쳤다.
 
123
"이놈은 안동 구석에 엎드려 있는 것이 제 분수거늘 감히 아비의 명을 어기고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하다. 또 이놈이 급제를 하였다지만 필시 차작차필(借作借筆)이리라. 김 숙의 집안에 차작급제한 놈이 나오다니."
 
124
당장 박살을 하려고 종들을 호령하였다.
 
125
"속히 안동놈을 잡아오너라."
 
126
안국은 황망히 달려와서 뜰 아래 엎드렸다. 대감은 대노하여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여러 종들을 명하여 중장(重杖)으로 맹타(猛打)하라 하였다.
 
127
이때 시관이 들어와서
 
128
"신은이 어디 있소?"
 
129
하고 물었다.
 
130
"지금 그 놈을 때려 죽이려 하는 중이오."
 
131
"그게 무슨 말씀이오?"
 
132
대감은 이러저러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133
"그렇지만 잠깐 그 차작(借作)인지 여부를 시험해 본 연후에 임의대로 처결해도 늦지 않으리라."
 
134
시관의 말에 대감은 냉소를 하였다.
 
135
"원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저놈이 나이 14세가 되도록 '하늘천, 따지' 두 글자도 못 깨친 하우(下愚)인데 십년 사이에 어떻게 문장을 성취해서 급제를 하겠소? 그럴 이치가 만무하니 시험해보고 말 것도 없소."
 
136
하고 급히 매를 치라고 명했다.
 
137
기관은 만류할 수가 없어서 몸소 마루에서 내려가 안국을 붙들고 올라왔다. 대감은 시관에게 화를 내었다.
 
138
"내가 내 자식을 죽이는데 그대가 왜 나서는가? 또 나는 저놈을 보기만 해도 그만 두통이 대발한다고. 아이구 골치야."
 
139
하며 이불을 덮어쓰고 눕는 것이었다.
 
140
안국은 부친의 노염이 풀리기 어려운 것을 보고 스스로 죽게 되리라 생각하여 숨을 죽이고 꿇어 엎드렸다.
 
141
시관이 안국 앞으로 가서
 
142
"여보게, 잠깐 일어나서 나의 물음에 대답하게."
 
143
하고 묻기를
 
144
"이번 과거의 글제를 기억하겠는가?"
 
145
안국은 일어나 앉아 글제를 한 자의 차착도 없이 외는 것이었다. 대감이 누워서 들어 보니 하늘천, 따지 두 글자도 종내 못 깨치던 위인이 책문의 글제를 쭉 외는 것이 아닌가. 몹시 의아스러웠다.
 
146
시관이 다시 묻기를
 
147
"이번 자네가 지은 글을 기억하겠는가?"
 
148
안국은 또 자기가 지은 책문을 줄줄 외는 것이었다. 그 문장은 실로 무변대해(無邊大海)에 파도가 일고 천리장도(千里長途)에 준마가 내닫는 형세였다.
 
149
대감은 듣기를 다하자 일어나서 안국의 손을 잡고 부르짖었다.
 
150
"이게 꿈이냐 생시냐? 네가 이런 문장이 되어 오다니. 십여년 타관의 등잔불 밑에서 서울을 그리는 마음인들 오죽하였겠느냐? 아아! 우리 선조의 혁혁하신 명성이 너에 이르러 다시 떨치는구나. 나의 이제까지 골머리않던 증세가 지금 낭랑한 네 글소리에 가시고 말았구나. 부자불책선(父子不責善)과 역자교지(易子敎之)라는 옛 말씀이 지언이로다."
 
151
안국은 무릎을 꿇고 글을 잘 하게 된 경과를 아뢰었다. 대감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152
"하인들은 얼른 가마를 준비하라. 그리고 가서 안동 며느리를 맞아 오너라."
 
153
그리고 시관을 돌아보고 감사해하였다.
 
154
"어진 벗이 아니더면 우리 문장 아들을 죽일 뻔하였네."
 
155
청이 밖에서 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국의 글을 보니 희대의 문장이 아닌가.
 
156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우?"
 
157
"제 처가 가르쳤다는구나."
 
158
청이 대감을 바라보며 경탄하기를
 
159
"형님, 우리 형제가 평생 가르치지 못한 것을 저의 처가 가르쳐 놓았습니다. 사내 대장부가 일개 아녀자에 미치지 못하였소그려."
 
160
이씨의 신행이 올라오자 대감은 크게 잔치를 열어 일가 친척과 빈객을 초청하였다.
 
161
"나의 큰 자식이 문장이 되어 와서 선조의 유업을 빛내는 것은 모두 신부의 공입니다."
 
162
모두들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안동에 이런 현부인이 있을 줄 누가 생각했겠는가.
 
163
이씨는 시가에 와서도 시부모를 효도로 모셔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며 일찍이 자신의 공치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시부모의 더욱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164
안국의 문명(文名)과 재망(才望)이 날로 떨쳤으니 처음에 한림(翰林)·옥당(玉堂)으로부터 마침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한다.
【원문】안동랑(安東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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