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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인조 22년, 1644년) 12월 10일 <나의 부방 일기(自己赴防時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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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와 울산 부사(府使)1)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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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상 좌병사는 임충간(仕忠幹), 울산 부사는 도신수(都愼修), 병마 우후(虞侯)2)는 신유(辛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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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다. 반구정(伴鳩亭) 삼촌댁에서 인사를 한 후 좌수(座首) 이시복(李時馥)을 뵈었다. 선달(先達) 이확(李擴) - 초명은 확(擴)이었으나 후에 개명하여 석로(碩老)가 되었고 자는 사추(士推)였는데 후에 공망(公望)으로 고쳤다. - 과 더불어 사청(射廳)에 있는 처가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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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 칠촌숙인 좌수(座首) 이득훈(李得塤)댁에 도착해서 칠촌숙인 좌수 이득곤(李得坤)댁에 함께 갔다. 농소(農所)에 여러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팔촌 형 이명(李蓂), 이래(李萊), 이규(李葵) 삼형제와 여러 연소배들이 모여서 전별연을 열어 주었다. 용당(龍塘)에 사는 선달 박이명(朴而㫥), 신경(新庚, 울주군 온산 근방) 사는 선달 박이돈(朴而暾)이 다 도착하여 하루종일 전별연을 하고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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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연찮게 좌수댁의 계집종 통진(通眞)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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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 입곡(入谷)에 있는 삼촌댁에 들러 인사를 올린 후에 신원(新院)에 도착하였다. 입곡에 사는 황윤엽(黃允燁), 황윤욱(黃允郁) 등 여러 벗들과 개곡리(開谷里)에 사는 오필창(吳必昌), 최수곤(崔秀坤), 견수도(堅守道)등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들판에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해질녘에 능지(陵旨)에 도착하였는데 임적(任勣) 형제도 우리를 위로하고 전별연을 벌여 주었다. 점고 날짜가 가까이 닥친 까닭으로 할 수 없이 해 진 후에 길을 떠났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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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당(王哥堂)에 도착하였는데 상하가 크게 취하여 길을 나설 수 없어서 노숙하였다. 박이돈의 사내종과 말은 뒤로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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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화역(阿火驛)에서 아침을 먹었다. 복마(卜馬)3) 한 필이 발을 절뚝거려서 취순(就淳)의 암말(자마, 雌馬 암말)과 바꾸었다. 취순과 사내종 기수는 울산집으로 돌려보냈다. 도촌(道村)에 들어가 처삼촌인 생원 박창호(朴昌昊)를 뵙고나서 영천(永川)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이경(二更, 밤 10시쯤)에 출발하여 신령역(新寧驛)에 도착하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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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義興)의 삽척촌(揷尺村)에서 아침을 먹었다. 용당(龍塘) 박 선달(박이명)이 갑자기 곽란(霍亂)4)을 일으키며 통증을 호소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에 약간 차도가 있어 40리를 더 가서 청로역(靑路驛)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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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길을 따났다. 아침 먹기전에 35리를 가서 의성현(義城縣)에 도착하였다. 병마 우후를 뵙고 언양(彦陽)의 선달 장준민(張俊敏)과 선달 이득영(李得榮)과 함께 점고를 받고 머물렀다. - 장준민은 나중에 두민(斗敏)으로 개명하였다. - 의성현의 소목장(小木匠)5)인 검동(檢同)이라는 사람 집에서 머물렀다. 우연찮게 주인집의 계집종 분이(粉伊)를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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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달(박이명)의 인마를 기다리기 위해 머물렀다.6) 반구정(伴鳩亭) 삼촌댁의 사내종과 말을 울산으로 돌려보냈다. 처음으로 급료로 쌀과 콩7)을 지급 받았다. 밤에 의성현의 주탕(酒湯) 춘일(春日)과 동침하였고 숙회(叔晦, 박이돈)는 주탕 매화(梅花)와 동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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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박선달의 사내종과 말이 도착하였다. 이확(이석로)이 주탕 옥춘(玉春)과 동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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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출발하여 울현(蔚峴)을 넘어 25리를 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35리를 가서 안동(安東)의 산다리촌(山多里村)에서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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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출발하여 35리를 가서 청송부(靑松府)에서 아침을 먹었다. 주인은 관비(官婢) 향환(香環)이었는데 서매(庶妹)8)의 사촌이라면서 극진하게 접해주었다. 사내종 수남(水男)을 울산으로 돌려보고 30리를 가서 진보현(眞寶縣)에서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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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리를 가서 영해의 경계에 있는 광제원(光濟院)에서 아침밥을 먹고 10리를 더 가서 큰 고개 아래의 협저촌(俠底村)에서 말을 먹였다. 초료(草料)를 받기위해 사내종을 보냈는데 진보 현감이 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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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지나간 경상우도 출신들이 아울러 모두 받아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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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며 끝내 지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선달과 이선달이 진보 현감에게 따지기 위해 현에 들어가는 통에 일행과 뒤쳐졌다. 이날 오후에 현에 도착하였기에 할 수 없이 하루 머물러 잤다. 숙회(叔晦, 박이돈)와 함께 주인집 술을 훔쳐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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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현령(蔚峴嶺)을 넘어 40리를 더 가서 비소원(飛所院)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40리를 가서 영해의 병곡역(丙谷驛)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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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추(士推, 이확)와 용회(用晦,박이명) 두 사람이 해가 질 무렵 말을 타고 달려와서 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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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역장(驛長)이 민가의 야사(野祀)9)을 하는 곳에 나아가 말 먹이도 주지 않고 우리에게 접대의 뜻도 없으니 처음 역로에 반드시 따끔하게 다스려 놓아야 앞으로 각 역에서도 소문이 퍼져 접대를 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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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달이 박숙회(叔晦, 박이돈)가 머무는 주인집 손님방에 와서 앉아 각자 사내종 한명씩을 보내어 역장을 끌고와 거꾸로 매달려고 할 때 나와 숙회(叔晦)는 금하도록 하였으나 두 사람은 사내종을 시켜 역장(驛長)을 거꾸로 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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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역장의 족속과 자질(子姪, 아들과 조카) 수십 명이 혹은 반취하고 또 크게 취한 상태로 소리를 크게 지르며 뛰어들어 매달아 놓은 새끼줄을 끊었고 이 때문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반취하거나 크게 취한 사람들이 잇달아 도착하였는데 거의 백여 명에 달하였다. 날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졌는데 돌멩이나 몽둥이를 들고 와 필히 박, 이 두 선달을 잡아 갈 것이라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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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히 소란이 일어나서 하는 수 없이 나와 숙회(叔晦), 숙회(叔晦)의 사내종 춘립(春立) 세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가서 크게 대항하여 이들과 크게 싸웠다. 언양 출신 세 명의 선달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왔지만 역리들의 무리에 막혀 들어올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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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달은 울타리 밖을 빙 돌아 들어오려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 옷이 다 젖어 버렸고 선달 이득영(李得榮)의 사내종이 들어와 싸우다가 역인에게 머리를 맞아 크게 다쳐 유혈이 낭자하였는데 끝끝내 죽을 것 같이 보였다. 저들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사내종을 끌고 나가는데 그 가는 방향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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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달을 내어 주면 우리도 그들을 거꾸로 매단 연후에 그만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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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내며 들어오려고 창문과 방 벽을 부수니 어쩔수 없이 주인집 안방으로 들어가서 겨우 화를 모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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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동하려 할 때 또 싸움이 벌어졌는데 용회(用晦, 박이돈)가 갑자기 역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 나가게 되었다. 이를 숙회(叔晦, 박이돈)가 구하려 할 때에 그도 역시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면서 망건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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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과 저집에서 머무는 두 사람은 애당초 이 일을 금지하려 한 자들이므로 이들은 욕되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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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과 저집이라고 칭해진 사람은 나와 숙회(叔晦)를 가리킨 모양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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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추(士推, 이확)가 용회(用晦)를 구하고자 뜰로 나갔다가 역인들에게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간신히 도망갔고 용회(用晦)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꿇어 앉혀 이루 말할 수 없는 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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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회(叔晦)는 부중(府中)에 들어가 이 사실을 알렸고자 하였는데 부사(府使)는 한양에 가고 없고 형방(刑房)인 김유성(金有聲)이 와서 타이르기도 하고 때려서 내쫓아 버리기도 하였다. 역인 등이 겨우 잠잠해졌으나 이 일을 한 두 마디로 기록 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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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기 전에 김유성은 부중으로 돌아갔다. 새벽에 우리는 출발하려고 하니 이선달과 박선달의 사내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역인들은 이 날이 샐 무렵에 이 선달과 박 선달이 머무는 집을 둘러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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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놈들을 거꾸로 매달고자 하였으나 형방이 못하게 하니 시행하지는 않겠다. 대신 너희 종놈들을 거꾸로 매달아서 곤장을 때린 뒤에야 너희들을 보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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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끝내 포위를 풀지 않았고 실랑이 끝에 박 선달의 종 시남(是男)과 이 선달의 종 경립(竟立)을 붙잡아 곤장 10대를 때린 후 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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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크게 때리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신출신(新出身)으로 부북(赴北)10) 하러 가는 길임을 만분 참작한 것이니 다음부터는 이와 같이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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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죽고 싶을만큼 부끄러워 이루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으니 백골이 되어도 어찌 잊겠는가. 5리, 혹은 10리를 가니 이 선달과 박 선달의 도망갔던 종들이 숲이나 산자락에서 나타나오니 참으로 가소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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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리를 가서 촌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30리를 가서 평해(平海)군에 도착해 머물렀다. 밤에 우연찮게 주탕 향환(香環)을 품었고 숙회(叔晦)는 귀익(貴益)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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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리를 가서 평해의 경계인 전명촌(典明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길가에 망양정(望洋亭)이 있어 정자에 올라 구경하고 45리를 가서 울진의 경계인 남면(南面) 마야을촌(馬也乙村)에서 머물렀다. 종 정복(鄭卜)을 울산(蔚山)으로 돌려보내는 편에 병사(兵使)에게 병곡(丙谷)의 역인들을 조사하고 엄중히 다스려 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써 보내고, 영리(營吏), 영노(營奴) 등의 처소에도 역시 통지하게 했다. 박숙회(朴叔晦)는 갑자기 가슴 통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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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 올 무렵 길을 떠났다. 정복(正卜)11)을 울산으로 돌려보내고 40리를 가서 울진(蔚珍) 서면 산성(西面山城) 아래 민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우연히도 임기업(林起業)과 애영(愛英)을 만났는데 이 둘은 전에 우리 집 근처에서 수년 동안 같이 살던 사람이었다. 술을 끝도 없이 대접해주고 또 콩 3두, 쌀 1두 반을 우리에게 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 40리를 가서 나곡(羅谷)의 바닷가 마을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집주인이 상하 모두에게 술을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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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치(加乙峙)를 넘어 25리를 가서 오원역(五院驛) 아래 귀신당촌(鬼神堂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아침 무렵 언양 김, 이 두 선달의 복마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숙회(叔晦)의 가슴 통증은 차도가 없었다. 소공대(小功臺)12) 고개와 인현(釼峴)을 넘어 30리를 가서 용화역(龍花驛)에서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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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리를 가서 교개역(交介驛) 역리(驛吏) 이지훈(李枝薰)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는데 집주인이 매우 후하게 대접해 주었고 역리 김종민(金宗敏), 이여성(李汝誠)등 이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해주었다. 세 사람 등이 병곡역의 사건에 대해 상세히 듣고 나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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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이 억센 무리들이 술기운을 빌어 떠드는 것이 그와 같고 욕을 보는 그 상황에서 선달 두 분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들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릇 길을 감에 있어서는 반드시 순순한 것이 상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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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들고보니 매우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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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리를 가서 삼척부(三陟府) 동문 밖 김팽남(金彭男)의 집에 머물렀는데 대접에 매우 좋았다. 그의 딸 주탕 예현(禮賢)은 나이 20살인데 자색이 빼어나고 거문고와 노래에도 능하여 그녀와 어울리다가 같이 잤다. 숙회(叔晦)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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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회(用晦, 박이명)는 자칭 ‘인색대장군(忍色大將軍, 여자를 멀리한다는 뜻)’이라 말하였는데 이날 밤 주탕 도선(道仙)에게 훼절(毁節, 절개를 꺾음)하고는 날이 새기도 전에 서둘러 떠나가 버렸으니 가히 우습다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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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삼척부에 도착하여 좌수 김기건(金起鍵)과 별감 홍응부(洪應簿)를 만나고 술을 얻어 마셨시고 괴화(槐花)13)와 진애(陳艾)14) 등을 얻었다. 죽서루(竹西樓)에 올라 둘러보고 아침밥을 먹었다. 30리를 가서 평해(平海)역에서 머무르는데 종 울생(蔚生)이 비로소 병이 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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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울생을 울산에 돌려보냈다. 아침밥을 먹고 30리를 가서 우계(遇溪)역 아래의 해변 마을에서 말을 먹였다. 율현(栗峴)을 넘어 25리를 가서 경동촌(景東村)의 뱃사람 집에서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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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비을치(火飛乙峙)를 넘어 20리를 가서 강릉(江陵) 시동촌(時同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그 마을 양반인 생원(生員) 심지하(沈之河)의 집에서 술을 얻어 마시고 그의 아들 심집(沈揖)을 보았다. 15리를 가서 강릉부 동문 밖에 사는 관노 말선(末仙)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대접이 은근하였다. 중등 무명 1필을 주고 좋은 쌀 4두와 콩 5두로 바꾸니 주인이 술대접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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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렀다. 무명 2필을 좋은 술 4동이와 바꾸어 2동이는 노비들을 주고 2동이는 기생들과 즐거이 나눠 마시고 놀다가 기생 연향(蓮香)을 품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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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사(府使) : 울산은 원래 경상 좌병사가 부사직을 겸직하고 따로 판관을 두었으나 광해군 때 판관이 혁파되고 다시 부사의 자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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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후(虞侯) : 조선시대 서반 무관 외관직이다. 각 도에 두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兵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水使) 밑에 두었던 부직(副職)으로, 병마우후(兵馬虞候)는 종삼품(從三品)으로 병우후(兵虞候)·아장(亞將)이라고 하였고, 수군우후(水軍虞侯)는 정사품(正四品)이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병마도절제사의 막료로 있던 도진무는 병마우후로, 수군도안무처치사도진무(水軍都安撫處置使都鎭撫)는 수군우후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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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마(卜馬) : 짐을 싣는 말, 혹은 다 자란 수말. 뒤에 동생의 암말과 바꾸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수말로 보는 것이 문맥상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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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곽란(霍亂) :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는 증세. 급성위장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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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목장(小木匠) : 나무를 다루어 가구(家具)ㆍ문방구(文房具) 등(等)을 짜는 목수(木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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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날인 15일 곽란을 일으킨 박이명을 청로역에 두고 점고를 위해 나머지 일행은 의성현에 도착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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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쌀과 콩 : 쌀과 콩은 군역을 수행 할 때 나오는 급료 성격의 곡식이다. 이중 쌀은 사람들이 먹는 양삭으로 쓰이고 콩이나 좁쌀 등은 말먹이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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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매(庶妹) : 서매는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가 다른 누이로 정실이 아닌 첩에게서 태어난 누이를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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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야사(野祀) : 민간에서 농사나 어업이 잘 되도록 비는 무속신앙. 보통 무당굿이 펼쳐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금하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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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북(赴北) : 북쪽 변경에 종군(從軍) 하러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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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복(正卜) : 23일 일기에는 정복(鄭卜)으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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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공대(小功臺)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에 있는 대(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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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항(臨院港)에서 서쪽 산의 능선을 타고 2㎞ 올라간 지점의 소공령(召公嶺)에 돌을 모아 돋아놓은 대이다. 소공대는 1423년(세종 5)에 황희(黃喜)를 중국의 소공(召公)과 같은 정도의 은인이라 하여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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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관동지방에 식량이 크게 부족하여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었는데 당시 관찰사의 비행이 많아 이를 바로잡고자 황희가 부임하여 백성들을 잘 구호하고 이 고개에서 쉬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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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중종 11) 황희의 현손(玄孫: 4대손) 황맹헌(黃孟獻)이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소공대의 사실을 적은 소공대비(召公臺碑)를 세웠으나 훗날 비바람에 쓰러져 부러지고 말았다. 현재의 소공대비는 1578년(선조 11) 황희의 6대손 황정식(黃廷式)이 삼척부사에 임명되었을 때 옛 터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소공령은 현재의 국도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어야만 인마(人馬)가 내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와현(瓦峴)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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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소공대(小功臺)로 표기하였으나 실제 명칭은 '召公臺'이다. 저자의 표기 오류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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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괴화(槐花) : 회화나무의 꽃. 치질(痔疾)ㆍ혈변(血便)ㆍ이질(痢疾) 치료(治療)에 쓰며, 살충제로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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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진애(陳艾) : 뜸 뜰때 쓰는 오래 묶힌 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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