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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북일기(赴北日記) ​1645년(을유년) ◈
◇ 1월 (正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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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박취문(朴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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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취문(朴就文) 일기>
2
​을유년(인조 23년, 1645년)
 
 
 

​1월 (正月)

 
 

1월 1일

5
여전히 강릉부에 머물렀다. 숙회(叔晦)는 기생 가지개(加之介)를 품었다. 관노 최억신(崔億信)이라는 자가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해주었다.
 
 
 

1월 2일

7
새벽에 비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최억신이 또 술을 가져와 대접해 주었는데 억신은 강릉부의 급창(及唱, 연락병)이다. 저녁에도 음식을 대접하니 얻어 먹기에 마음이 불편하여 (眞梳, 참빗) 하나를 주니 머리를 가로저으며 받지 않고 돌아갔다. 유명한 기생 건리개(件里介)에 대해 전해듣고 저녁에 눈길을 무릅쓰며 그 집으로 가서 동침하였는데 밤중에 서로 말과 시(詩)를 주고 받다가 나에게 묻기를,
 
8
“선달님, 기생 연향(蓮香)1)을 가까이 한적이 없습니까?”
 
9
​라 하였다. 그렇다고 하니 곧 말 없이 옷을 입고 일어나 앉아 대성통곡하였다. 그 어미와 남동생이 놀라서 나와 그 이유를 물으니,
 
10
“이 선달님이 지난 밤에 연향이를 가까이 하였다.”
 
11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어미도 역시 통곡하니 괴이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연향은 당창(唐瘡)2)이 있다고 하였다. 주객이 모두 낙심하여 걱정하며 밤을 새웠다.
 
12
이날 밤 언양(彦陽) 이 선달은 기생 대향(代香)을 품었고 사추(士推, 이석로)는 기생 막개(莫介)를 품었다. 막개는 허리가 굽은 여인으로 원래 도사(都事)3)의 방기(房妓)4)였다. 개골산(開骨山,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허리가 부러졌다고 하는데 틀림 없는 명기이다.
 
13
​건리개에게 약을 사라고 세목(細木) 1필, 중목(中木) 1필을 주니 말하기를,
 
14
“나는 전답을 팔아서라도 약 값을 마련 할 수 있으나 선달님은 3천리 밖으로 떠나 있어 약 값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15
​라 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1월 4일

17
눈이 그치자 출발하여 10여 리를 가다가 꿩 4마리를 잡았다. 30리를 가서 연곡역(連谷驛)에서 머물렀다. 집주인은 홍승립(洪承立)이었는데 매우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1월 5일

19
새벽에 흰죽을 따뜻하게 하여 좋은 술과 함께 상하 모두에게 대접해 주었다. 출발하여 15여 리를 가다가 또 꿩 5마리를 잡았다.
 
20
​복마는 먼저 가버려서 어디서 쉬어가는지 알지 못했다. 두 박 선달과 두 이 선달과 더불어 40리를 가서 동산역(洞山驛) 아래 뱃사람 집에서 밥을 얻어 먹었다. 생대구탕, 구이와 함께 기름진 밥을 먹었고 술안주로 콩을 많이 삶아서 주니 지극히 다행스럽다.
 
21
식후에 복마를 쫓아 40리를 가서 상운역(祥雲驛)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다. 주인 이름이 홍선립(洪善立)인데, 대하기를 마치 전부터 알던 친지처럼 해주었고 말먹이로 조(租) 1두, 콩(太) 1두, 말 먹일 죽과 좁쌀 5승을 주었다. 상하가 모두 잘 먹었고 술과 안주도 훌륭해서 감사하였다. 운이 좋게 질이 좋지 않은 무명(常木) 1필을 주고 좋은 흰 쌀도 5두 반으로 바꿨다.
 
 
 

1월 6일

23
20리를 가서 양양부(襄陽府)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밭두렁길을 따라 낙산사에 올랐다. 낙산사는 산불로 다 타버려 겨우 30, 40여 간만 남았는데5) 새로 조성하는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20리를 가서 강신역(强神驛)에 전억필(全億弼)의 손자 집에서 머물렀다. 억필의 손자와 손녀사위 그리고 강신역에 사는 황유신(黃有信)이라는 사람이 술과 콩, 양식을 가지고 와서 주니 매우 감사하였다. 용회(用晦)와 사추(士推)는 뒤쳐졌다.
 
 
 

1월 7일

25
30리를 가서 청간역(淸干驛)에 도착하여 역 아래 사는 뱃사람 박언부(朴彦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기름진 밥을 지어 상하 모두에게 대접하였고 말에게도 먹이를 주었다. 40리를 가서 간성(杆城) 동문 밖에서 머물렀다. 청간정(淸干亭)을 지날 때 시(詩) 한수를 지었다.
 
 
 

1월 8일

27
20리를 가서 아침밥을 먹는데 두 선달이 도착했다. 40리를 가서 간성 경계의 막금촌(漠今村)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월 9일

29
40리를 가서 고성 경계의 대강역(大强驛) 아래에서 아침을 먹었고 30리를 가서 고성(高城) 동문 밖에서 머무르는데 추워지기 시작했다.
 
 
 

1월 10일

31
30리를 가서 양진역(兩津驛)에서 아침을 먹고 도질별로(都叱別路)를 지나 50리를 더 가서 통천(通川) 경계의 교진역(交津驛)에서 머물렀다. 집주인 이름은 김득춘(金得春)인데 매우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1월 11일

33
25리를 가서 통천 경계의 동자원진(童子院津)에서 아침을 먹고 20리를 더 가서 통천군 아래 이춘(李春)의 집에서 머물렀다. 엄동설한에 어렵게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술을 상하 모두에게 대접해주니 참으로 고마웠다.
 
 
 

1월 12일

35
새벽에 출발할 때에 또 따뜻한 술을 상하 모두에게 대접해주었다. 30리를 가서 흡곡현(歙谷縣)에서 아침을 먹고 들어가서 현령(縣令)을 뵈었는데 현령의 이름은 유경소(柳景紹)였는데 종성 부사 유경집(柳景緝)의 동생이다. 대접이 은근히 좋았고 우리들 네 사람에게 쌀 8말, 콩 8말, 좁쌀 8말, 은어 40동음(冬音) - 이름하여 은어는 도을목어(道乙木魚)6)를 염장한 것이다 - 그 외 여러 해산물들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종성 부사(鍾城府使)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30리를 가서 안변(安邊) 경계의 학개촌(鶴盖村)에서 머물렀다.
 
 
 

1월 13일

37
날이 너무 추워 아침밥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비론치(飛論峙)를 넘어 들판에서 말을 먹였다. 10리를 가서 안변부 남문 밖에서 주탕 선생(先生)과 후생(後生)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겨우 해질녘에 어렵사리 도착하였다.
 
 
 

1월 14일

39
아침에 성 안에 들어가 성주(城主) 이후천(李後天)7)과 안변 부사 이후산(李後山)을 찾아뵈니 놀라고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40
곧바로 술을 내어 마시고 백미 10두, 콩 10두, 죽미(粥米, 말 먹이) 10두와 그 외 여러 가지 샐 수 없을만큼 찬꺼리들을 주었다. 부사의 안어른이 우리 일행에게 따로 약과(藥果) 20립, 약포(藥脯) 2첩, 청수리(靑水梨) 20개, 말린 꿩 2마리, 소금에 절인 연어 4마리, 소주 1병을 보내주니 대단히 감사하였다. 또 여자종을 보내 우리집 부인네들의 안부를 물었는데 이후천이 울산 부사로 재임 할 당시에 안어른이 우리 집에 1년간 피접하였던 까닭으로 안부를 물었다. 부사댁에 머물렀다.
 
 
 

1월 15일

42
새벽에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덕원 경계 원산촌(元山村)에서 아침밥을 먹고 25리를 가서 덕원부에서 말을 먹였다. 눈이 내리는 바람에 15리를 가서 북면의 촌가에서 머물렀다.
 
 
 

1월 16일

44
25리를 가 문천군(文川郡)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고원군(高原郡)의 주탕이 명창이라는 말을 듣고 박이돈, 장준민, 이확과 함께 먼저 말을 타고 갔는데, 고원군 앞 10리 정도 못 미쳐서 날이 이미 저물었고 일행과 복마가 뒤쳐저서 오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신산촌(薪山村) 아래 민가에 들어갔다. 집주인은 박애남(朴愛男)으로 동성(同姓)이라 하면서 매우 후하게 대접해 주었고 종과 말(馬) 넷에게도 모두 먹을거리를 베풀어 주었다.
 
 
 

1월 17일

46
길가에서 복마와 뒤쳐진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10리를 가서 고원군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명창이 있었다는 말은 헛소문이었으니, 가히 우스웠다. 집주인 박영순, 여순, 사순 형제 등이 동성이라 칭하며 형제들이 쌀과 콩 각 2두와 여러 가지 반찬, 생선 여러 마리를 모아 주었다. 그리고 따뜻한 술도 주었다. 35리를 가 영흥부 앞 역촌에서 머물렀다.
 
47
먼저 간 영장(領將)이 료미(料米)를 전부 받아 갔다고 하며 주지 않았다. 출발할 때 부사에게 따지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 동헌에 들어가니 부사 노효성(盧孝誠)은 병을 칭하여 나오지 않았지만 료미는 사람 수에 따라 지급해 주었다.
 
 
 

1월 18일

49
35리를 가서 정평(定平) 초원역(草院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35리를 가서 정평부에서 머물렀다.
 
 
 

1월 19일

51
아침밥을 먹었다. 45리를 가서 만세교를 건너 함흥부 남문 밖 정오장손(鄭吾莊孫) 집에서 머물렀다.
 
 
 

1월 20일

53
그대로 머물렀다. 앞서 갔던 이민달(李敏達)과 영장(領將)들을 만나 지나가는 각 관마다 우리들의 급료를 모두 받아간 짓을 크게 꾸짖자 양식을 얻을 길이 없어 부득이 음식을 받아 먹었는데 할 말이 없다며 매우 미안해 했다. 함흥부 아전 윤신길(尹莘吉)을 불러 안변 부사의 편지를 전했다.
 
 
 

1월 21일

55
윤신길이 이른 아침에 방문했다. 기천(岐川) 정자(正字)8)의 아들 한희주(韓希注)가 들렸다. 식후에 천총(千摠)9) 이집을 만났다. 집주인이 나를 위해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주니 여러 동료들을 청하여 함께 먹었다. 매우 감사하였다. 저녁에 기생 4, 5명을 불러보았다.
 
 
 

1월 22일

57
함흥부(咸興府)에 들어가 감영의 중군(中軍)10)을 뵙고 부(府)의 천총 이집을 만났다. 순찰사 심정(沈珽)을 뵈오니 곧바로 술을 내어주었고 바로 점고를 하고 마필은 모두 반납하였다. 병영 군관 장우한(張遇漢)을 방문 하였고 윤신길이 방문하였다. 저녁에는 이집이 술과 말먹이 콩 1두와 쌀 5되를 가지고 왔다. 향소(鄕所)11)에 들어가 술을 얻어 마셨고 한희주가 또 방문하였고 김익휘(金益輝)를 방문하였다. 밤에 장준민이 무명베 1필을 내어 술을 사고 꿩 2마리를 삶아 일행이 함께 먹었다.
 
 
 

1월 23일

59
병영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방(同榜) 급제자 김찬(金贊)이 술을 가져와서 마셨다. 정오에 홀로 향교에 갔는데, 훈장 문일장(文日章)과 유사(有司) 이정겸(李廷謙), 원기(元琦)가 명륜당 위로 맞이하여 술상을 차려주어서 크게 마시고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또 향청에 들어갔는데, 좌수 주대건(朱大乾), 별감 한홍술(韓弘述)과 주후철(朱後澈), 성조 도감(成造都監) 이익겸(李益謙), 문과 급제자 박정(朴靖) - 박정은 자칭 동성이라고 하였다. - 등이 모두 향당에 모여 술상을 베풀어 주었다. 언양의 이, 장 두 선달과 함께 활과 화살을 가지고 나아가 양무당(養武堂)에서 5순을 쐈다. 이집은 25발, 나는 23발, 장(張)은 21발, 이(李)는 20발을 명중 시킨 후 함께 술을 얻어 마시고 돌아왔다.
 
60
​날이 어두워질 때 사향소(四鄕所)12), 향교의 사임(四任)13) 한희주(韓希注), 주목(朱楘)14)등 이 술과 안주를 성대히 준비해서 대접해 주어 이 때문에 머물러라 잤다.
 
61
​향교의 계집종 옥환(玉環)을 가까이 하고자 하였는데 주인 오장손(吾莊孫)이 큰소리로 금하게 하였다. 주인의 말이 옳기느 하나 그녀의 자색이 심히 아름다워 몸에 큰 병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장 선달이 몰래 데리고 가서 동침하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주인이 크게 책망하며 말하길,
 
62
“그녀가 비록 자색이 아름답긴 하나 당창(唐瘡)이 있는 사람이다. 내말을 믿지 않았으니 가련하고도 가련하도다.”
 
63
​라면서 한탄해 마지않았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찌 할 수 가 없었다.
 
 
 

1월 24일

65
순찰사에게 하직한 후에 양무당(養武堂) 활터를 바라보니 역풍이 크게 불어 이공(李公)의 쏘는 화살이 크게 약해보였다. 급히 세 친구와 함께 나아가서 활쏘기 5순을 겨루었는데 이공은 모두 명중했고 우리들은 혹 1발, 2발, 3발, 4발씩 못 맞추었다. 멋쩍어하면서 돌아왔다.
 
 
 

1월 24일

 
67
15)
68
숙회(叔晦)의 생일이라 머물렀다. 먼저 온 영장(領將)인 현풍 사람 곽삼립(郭三立)이 영(營)에서 방수하다가 관직에 임명되어 가는 길에 들렸기에 바로 찾아 만나 보았다. 김찬도 찾아 왔다. 전 날 잡았던 꿩을 삶아 간략하게 술과 안주를 준비했고 김찬과 곽삼립도 역시 술을 가지고 와서 기생을 불러 밤늦도록 술을 마신 후 각자 인사하고 헤어졌다. ​밤에 공망(公望, 이석로)는 기생 귀비(貴妃)와 같이 잤는데 기생 중에 제일 늙었다.
 
69
​향소와 향교, 윤신길, 한희주, 주목, 이집, 성청소(星廳所, 향리들의 집무장소) 등에서 보내온 쌀, 콩, 좁쌀이 총 2석에 이르렀다. 네 사람이 각각 나눈 후에 언양의 세 벗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70
​저녁에 의흥(義興) 도내유(都乃兪)의 딸 기생 고온(古溫)16)이 말미를 얻어 정평의 친척집에 왔다가 아침에 내가 전했던 그녀의 아버지 편지를 보고 급히 이곳으로 왔다고 하면서 그 어미와 더불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와서 밤이 되어 통곡하고 돌아갔다.
 
 
 

1월 25일

72
새벽에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덕산역에서 아침을 먹고 20리를 가서 고개 아래 기동촌(基洞村)에서 머물렀다.
 
 
 

1월 26일

74
공망(公望)의 종 간생(間生)과 용회(用晦)의 종 봉상(奉上)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아침에 눈이 잠시 내려 아침을 먹은 후 눈길을 무릅쓰고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35리를 가서 홍원(洪原) 경계의 함원참역(咸原帖驛)에서 말을 먹이고 25리를 가서 홍원현(洪原縣)에서 머물렀다. 이날 저녁에 주탕 조생(趙生) 등 4, 5명을 불러 보았다. 두 박 선달과 장 선달이 뒤쳐졌다.
 
 
 

1월 27일

76
아침을 먹으니 뒤쳐졌던 세 사람이 모두 도착하였다. 눈이 내리다가 잠시 뒤 그쳐 45리를 가서 홍원 경계의 평포역(平浦驛)에서 머물렀다.
 
 
 

1월 28일

78
북청(北靑) 경계 쌍고개(雙古介) 아래 수철점촌(水鐵店村)의 안국택(安國澤)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25리를 가서 북청 서문 밖에서 머물렀다. 북청에서 부방하고 있는 동방(同榜) 급제자 한양 사람 정기창(鄭驥昌)과 박득윤(朴得允)이 찾아왔다.
 
 
 

1월 29일

80
아침을 먹고 35리 정도를 가서 들판에서 말을 먹이고 20리 정도를 가서 거산역(居山驛) 이연정(李蓮丁)의 집에서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에 술 대접을 해주었다.
 
 

 
81
1) 연향(蓮香) : 전 해 12월 30일 동침한 기생이다.
82
2) 당창(唐瘡) : 성병인 매독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에는 치료제가 없었고 이름난 주탕이라도 성병에 걸리면 찾는 남자가 없기 때문에 굶어 죽어야 하거나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모르는 남자들과 관계를 하여 양식이나 옷감 등의 댓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주탕으로써는 사형선고인 셈이다.
83
3) 도사(都事) : 팔도(八道) 감영(監營)의 종오품 관직으로 감사(監司: 觀察使, 從二品)의 다음 관직이며 정원은 1원이다. 지방관리(地方官吏)의 불법(不法)을 규찰(糾察)하고 과시(科試)를 맡아보았다.
84
4) 방기(房妓) : 주탕과 비슷하나 주탕은 애인이나 하룻밤 정을 나누는 사이 정도이고 방기는 외방에 나간 관원의 수발은 물론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주는 현지의 첩 역활의 성격이 강하다. '방직이'라고도 한다.
85
5) 임진왜란 때 다 타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86
6) 도을목어(道乙木魚) : 도루묵을 가리키는 듯한데, 도루묵은 농어목 도루묵과의 바닷물고기이다. 도루묵이라는 이름의 유래로 정조 때 이의봉이 편찬한『 고금석림』에 의하면“ 고려의 왕이 (東遷)하였을 때 목어를 드신 뒤 맛이 있다 하여 은어로 고쳐 부르라고 하였다. 환도 후 그 맛이 그리워 다시 먹었을 때 맛이 없어 다시 목어로 바꾸라 하여, 도루묵[(還木)]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의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주에 피신하는 과정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 전설도 있다.
87
7) 성주(城主) 이후천(李後天) : 이후천이 인조 15년(1637)경에 울산부사로 재직한 바 있었기 때문에 박취문이 성주라고 표현하였다. 울산에 재직하고 있을 때 박취문 집안과 각별히 가깝게 지낸 듯하다. 이후천은 울산부사로 있을 시에 선정을 베풀었으나 사감을 가진 어사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이 때는 동생인 이후산이 수령으로 있는 안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1646년에 다시 종부시정으로 관직에 복귀하여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따라서 박취문이 부방을 마치고 돌아갈 때 안변에 다시 들렀을 때는 이미 이후천은 한양에 올라가고 없었다.
88
8) 정자(正字) : 조선시대 홍문관·승문원·교서관에 속한 정9품 벼슬, 또는 그 벼슬에 있던 사람을 가리킨다.
89
9) 천총(千摠) : 조선 후기 각 군영에 두었던 무관직으로 중군의 지휘를 받는 고급지휘관이었다.
90
10) 중군(中軍) : 조선시대 각도에 배치된 정 3품의 무관직인 순영중군(巡營中軍)을 가리킨다. 관찰사를 보좌하면서 모든 실무를 총괄하였다.
91
11) 향소(鄕所) : 조선시대 각 고을 수령의 자문 기관으로서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 잡고 향리의 부정을 규찰하던 자치기구로 임원으로는 좌수와 별감이 있었다. 향청, 유향소라고도 하였다.
92
12) 사향소(四鄕所) : 유향소에 직을 둔 품관, 혹은 품관이 근무하는 장소를 일컺는 말. 부는 4인, 군은 3인 등으로 일기에는 함흥부의 향소를 지칭하므로 향소의 4인들도 접대에 참여하였다는 말이다. 4인의 구성에는좌수·별감·창감(倉監)·감관(監官) 등 이 있다.
93
13) 사임(四任) : 향교의 4가지 직책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 청금장의(靑衿掌儀), 전곡장의(典穀掌儀), 과자장의(科資掌儀), 학고장의(學庫掌儀) 등 이 있다.
94
14) 주목(朱楘) : 조선 인조 때 문관. 자 司文(사문). 호 雪峰(설봉). 인조 때 문과 급제하여 郡守(군수)를 역임했다.
95
15) 원문에 24일이 두번 나온다.
96
16) 원문은 '夕 義興 都乃兪女 妓 古溫'
97
'저녁 의흥 도내유녀 기생 고온'인데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지 확실치 않다.
【원문】1월 (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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