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 ~ 1454] 조선 시대 전기의 문신. 판중추 부사
이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이다. 자는 자유 이고 호는 애일당이며, 시호는 충장이라 하였다.
공신의 후손이나 궁정의 친척 관계 따위의 특별한 연줄로 관직을 주는 제도인 문음으로 벼슬에 나아가서 경승부승에 이르렀고, 1416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다음에는 학식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이 하던 규장각· 홍문관· 선전 관청 등의 벼슬인 여러 청환직을 거쳤다. 1421년에는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1422년에는 사간원 우헌납으로 재직하였다. 1425년에는 병조 정랑이 되었고, 그 뒤로 좌헌납· 병조 정랑· 의정부 사인을 역임하였다. 1428년에는 의정부의 정4품 벼슬인 사인으로서 함길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홍수로 인한 피해 상황을 살피고 수재민을 구호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429년에는 사헌부 집의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1430년 집의로서 성개의 노비 사건에 대한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지 않은 죄를 범하였다 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어 먼 지방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아버지의 소청에 의하여 양주로 옮겨졌다. 1432년에 풀려 나와 다시 승정원 우부 대언에 발탁되었고, 그 뒤 좌부 대언·우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올랐으나, 부상으로 인하여 곧 그만두게 되었다. 1436년에는 다시 충청도 감찰사가 되었고, 1438년에는 이조 참판과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 그 이후 1443년에는 공조 참판으로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1444년에는 예조 참판·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447년에는 좌참찬으로
숭례문을 건축하는 공사를 감독하였고, 1449년에는 전제 상정소 제조를 지내면서 세종이 옮겨 살 영녕 대군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1450년에는 우찬성이 되었으나, 판이조사도 겸임하였고,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의 성터를 관리하였다.
1451년에는 좌찬성·호조 판사를 겸임하였고, 이듬해인 1452년에는
김종서·
황보 인과 함께 문종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고명 대신으로서, 병조 판서를 거쳐 김종서의 추천에 의하여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인 1453년에 수양 대군이 여러 고명 대신을 살해한
계유정난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단종을 충실히 보필하던 김종서·황보 인 등이 죽음을 당하였고, 당시 전라·충청·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충주로 향하던 정분도 낙안에 유배되어 갇히고 말았다. 그는 곧 조정에서 벼슬아치에게 내리던 임관 사령서인 고신을 빼앗기고, 국가에 속하는 노비가 되었다. 그 상태로 1년여를 보내다가, 1454년에 마침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1746년에 이르러 김종서·황보 인 등과 더불어 관작을 회복하였고, 1786년에는 장흥의 충렬사에 위패가 모셔졌으며, 1791년에는 장릉 충신단에 위패가 모셔졌다. 또, 1804년에는 충신이나 효자 또는 열녀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우는 붉은 정문을 그의 집 앞에 세워서 그를 기렸다. 또, 1808년에는 신창의 진사 이기선 등이 올린 상소에 의하여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는 부조지전의 특전을 받았다.
생전의 정분은 침착한 성격에 도량과 재간이 있었으며, 문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목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궁궐을 짓거나 성을 건축하는 일 또는 현릉( 문종의 묘)을 조성하는 일에도 관여하여,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