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진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과, 이로 말미암아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및 아랍계 제국 간에 일어난 분쟁.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라고도 한다.
1948년 이스라엘은 영국의 위임 통치 종료와 더불어 유태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태 민족 국가인 이스라엘 공화국이 수립을 선언하였으나, 아랍 제국은 즉각 공격에 나서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였다.
약 2만의 아랍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전세는 아랍측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거듭 패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1948년 9월, 아랍 피난민들을 이스라엘 국가로 되어 있는 그들의 지역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고 제안한 국제 연합 팔레스타인 조정관인 스웨덴의 백작 베르나도테 아프 비스보리(1895~1948)와 감시관 A.P. 세롯이 유대인 과격파에 의하여 암살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제 연합의 직원이 국제 연합에서 근무 중에 입은 손해의 배상에 대하여 국제 연합이 그 청구권을 가지게 되는가의 여부가 문제되기도 하였다. 국제 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1차 중동 전쟁은 휴전에 들어갔다.
이 전쟁의 결과로 10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였고, 이들에 의하여 아랍 게릴라가 조직되었다.
제2차 중동 전쟁과 제3차 중동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인구와 면적이 확장되었다. 3차 중동 전쟁에서는 아랍 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수에즈·골란 고원·시나이 반도 의 점령지 일부에서 철수하였다.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 건국과 제l차 중동 전쟁 이래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최초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즉,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J.E. 카터를 입회인으로 하여 이집트 대통령 M.A. 사다트와 이스라엘 총리 M. 베긴 사이에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 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에 따라 시나이 반도 대부분에서 철수하였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은 단독 평화 회담 시작 후 16개월, 캠프데이비드 협정 후 6개월 만에 타결되어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 4월 25일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발효하였다. 이 조약의 성립으로 이집트는 아랍의 대의를 배반하였다는 규탄 아래 아랍 제국의 정치적·경제적 제재를 감수하여야 하였다.
이로써 이집트 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는 회복되었으나, 팔레스타인 자치권 교섭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대표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거점인 베이루트를 공격하여 1982년 8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베이루트를 철수하였다.
그러나 1993년 9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이스라엘이 상호 승인을 교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타협안을 마련하여 전세계인이 지켜 보는 가운데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양측 수뇌가 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