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4 ~ 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菴). 상영(尙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霔)이고, 아버지는 장령(掌令) 정수(廷秀)이며, 어머니는 박윤손(朴潤孫)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뒤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1513년에 지평(持平)으로 일시 경기도도사에 임명되어 진상(進上)의 전결분정(田結分定)에 따른 폐단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 뒤 장령을 거쳐 1519년 7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대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했을 때, 사헌부집의로서 조광조 일파가 득세할 때 심히 교만하고 방종했다고 비난하고, 현량과(賢良科)의 폐지와 그 급제자의 파방(罷榜)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공격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참찬관·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 등을 거쳐 1525년 12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이어서 우부승지·병조참판 및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고, 예조판서·우참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재직 시에는 간신인 병조판서
이기(李芑)의 비행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후일 이기의 모함을 받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우찬성·좌찬성에 올랐고 1541년 11월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중원(中原)에서 오랑캐[㺚子]의 침입과 같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중신을 파견해 축성(築城)·입거(入居) 문제의 처리와 사신 왕래에 따른 폐단 제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 뒤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이기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尹任)·
유인숙(柳仁淑)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았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絶島流配刑)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 온양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1570년(선조 3) 신원되었으며, 1577년 복작(復爵)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