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 ∼ 1669]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김장생,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신독재
김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 사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절친한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적 문제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산다. 그 뒤
예송 논쟁 직후에도 양자의 의견을 조정하려다가 송시열에게 윤휴와 결별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송시열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혼자 피신한 것과, 예송 논쟁 당시 그가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죽은 후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윤증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나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이 싸움을 벌여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당했다가 1722년(경종 2) 복관되었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재서원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이후 산천재서원은 영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 훼철되었다.
저서로 <노서유고>, <노서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