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62년] 고려 말기에 참지중서정사, 참지정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무신 · 공신. 본관은 탐진(耽津).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최영(崔瑩) 등과 함께 평정하였다. 이듬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원나라에 보내는 방물(方物)과 함께 황후 탄생일을 축하하는 예물을 바치고 돌아왔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의주(義州) · 정주(靜州: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또한 소수의 기병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철주(鐵州: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 지역으로 추정)에 이르러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59년에는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 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다음 해 상원수(上元帥)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博州: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 영변(寧邊: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군)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나 절령(岊嶺: 지금의 황해도 황주군의 자비령)에서 패해 개성이 함락되었다.
1361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 하에
이방실 ·
김득배(金得培) ·
이성계(李成桂) ·
최영 ·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전했다.
적을 거의 섬멸하고 나머지 적까지 추격해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 때 재상(宰相)
김용(金鏞)과 함께 전공을 세운
정세운을 시기해 죽였는데,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장군들을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소환하자 그곳으로 가던 중 중문(中門)에서 김용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