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돌아가고 나서 헌강왕 9년(883) 3월15일에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기 시작하여 그 해에 이를 끝마쳤던 듯, 비석은 그 다음해(884) 9월19일에 세워진다. 이때 그의 벼슬은 조청랑수변부사마사비어대(朝淸郞守邊府司馬賜緋魚袋)였다. 6년이 지난 뒤인 진성여왕 4년(890) 9월15일에 세워지는 (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에서는 조청랑수금성군태수(守金城郡太守)사비어대로 벼슬이 올라 있다. 조청랑과 사비어대는 당나라와 관계 있는 벼슬이니 변동이 없고 수변부사마에서 금성군태수로 바뀌었으니 그 동안에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변부사마나 금성군태수가 모두 청해진 부근인 서남해안 지방을 다스리는 벼슬이름이라, 김영이 청해진세력과 선종세력에 밀착된 당나라 유학생 출신의 신진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