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삼국 시대의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적성산성은 성재산 봉우리와 남쪽 비탈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 1979년 8월 1일 사적 제 265호로 지정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호서읍지 단양군지 위지 표기로는 주 1,768척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산성은 신라 진흥왕 때(545~551) 쌓았으며, 성의 전체 규모는 주변 둘레가 총 922m이다. 산성의 기초 공사는 토석으로 단단하게 다져 놓았고, 건물은 주로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다. 특히 성의 외벽 등은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흔적이 보이고, 자연석도 매우 고르게 쌓았으며 색다른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단양 적성은 남서쪽 끝의 산봉우리를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쯤에 성의 바깥 측면이 놓이게 하였다. 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은 대부분 밭인데, 산의 능선을 따라 남쪽에는 거의 낮고 평평한 농토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 주변에는 그 성의 구조와 건물 양식, 시대상 등을 예측할 수 있는 유물 등이 남아 있는 것에 반해 많은 손실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 중 성벽의 상태가 가장 좋은 곳으로는 북동쪽 끝으로부터 윗쪽으로 약 0.6m, 안쪽으로 약 1.8~3.3m, 바깥쪽으로 2.0~4.3m 정도로 이 부분은 원형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문 이 있었던 흔적도 몇몇 군데에서 차례로 발견되었으며, 남서쪽 끝에서부터 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쪽, 그리고 남동쪽의 성터 3곳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또한 1978년에 발견된 적성비의 비문에는 신라 법흥왕,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 상류 지역 까지 진출하였다는 것과 북진 정책에 대한 상세한 기록 이 있어 신라 시대의 발전상과 함께 정치적·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단양 적성은 비문을 통해 그 시대의 굵직한 정치적 이념과 함께 신라 고유의 문장법에 대한 연구도 가능하게 하였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군대의 주요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적으로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을 때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진흥왕 이 신라의 북진 정책에 큰 도움을 준 야이차라는 주민에게 포상을 내렸다는 것과 왕이 고급 관리 10여 명에게 직접 야이차를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북쪽 진출이 얼마나 중대한 국가 정책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비문의 현존 높이는 93㎝ 윗나비 107㎝, 아랫나비는 53㎝이다. 자연석인 화강암의 표면을 다듬어서 글자를 새겨 넣었으며, 윗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손상된 부분을 포함하여 비문에는 총 21행에 430자 정도의 글자 가 새겨졌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