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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태종대(太宗臺)
태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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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太宗臺)
부산 영도구 동삼동(東三洞)에 있는 명승지이다. 영도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는 해발 고도 200m 이하의 구릉 지역으로, 부산 일대에서 보기 드문 울창한 숲과 기암 괴석으로 된 해식 절벽 및 푸른 바다 등이 조화를 이룬다. 맑은 날에는 일본 쓰시마섬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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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太宗臺) 영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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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구 影島區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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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구 동삼동(東三洞)에 있는 명승지이다. 영도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는 해발 고도 200m 이하의 구릉 지역으로, 부산 일대에서 보기 드문 울창한 숲과 기암 괴석으로 된 해식 절벽 및 푸른 바다 등이 조화를 이룬다. 맑은 날에는 일본 쓰시마섬도 볼 수 있다.
 

개요

부산 태종대는 아름다운 암석의 단애로 이루어진 절승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해안경관지로서 울창한 해송 숲과 함께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왕성한 해안침식에 의한 해식동굴, 해식애 등 아름다운 지형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부지역의 임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곰솔군락, 팽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경관도 경관적으로 매우 뛰어나다.
 

 

유래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태종무열왕이 활을 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에서 유래된다. 또한, 태종이 일본을 토벌하기 위해서 태종대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정확하게 검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태종대가 고대 사회부터 지역적으로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 '태종대(太宗臺)'라는 이름에 관한 내력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래부지』(1740년)에 의하면, 신라(新羅)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이곳에 와서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이곳 이름을 '태종대'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또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임금이 거둥하는 중간에 어가를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던 일) 하였던 곳' 이라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안정복은 신라의 태종이 대마도를 칠 때 태종대에서 머물렀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태종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조선 제3대 태종(太宗)이 그 치세 말년인 1419년에 큰 가뭄이 들자, 그 해 5월에 태종대를 찾아 비 내리기를 빌어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로부터 음력 5월 초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르게 됐고, 가뭄을 만나면 비 오기를 이곳에서 빈다고 했다. 『동래부지』에서 말한 대로 가뭄이 닥치면 태종대에서 비 내리기를 빌었는데, 동래 지방에 가뭄이 닥치면 동래부사는 태종대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 절영도 신사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돌로 단을 만들었으며 옛날에는 비를 빌어 징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시기가 중종 25년(1530년)이니, 그 책이 편찬되기 이전까지 영도 태종대에 신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동래부읍지』 「고적조」에 태종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래부 남쪽 30리의 절영도 동쪽에 있다. 바닷물이 둘레를 돌고 서쪽으로 한 석교가 있어 간신히 사람이 지날 수 있다."
신라의 태종이 대마도를 칠 때 태종대에서 머물렀다거나, 태종무열왕이 활을 쏘아 포장과녁을 맞힌 곳이라 하여 태종대라 하게 되었다거나, 조선 태종이 치세 말년에 큰 가뭄이 들자 비 내리기를 빌어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는 모두 태종대가 국가 안녕을 비는 기원의 성소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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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