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 통일로 나라가 안정되자 당나라와의 무역이 점차 늘게 되었고, 왕래가 빈번하자 일반인들의 거래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780년(선덕왕 1)에 민간 무역을 금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신라 말기에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다시 민간 무역이 활발해졌다. 당시 당나라 연안 지대에 세웠던
신라방(新羅坊)은 상인과 유학생들이 모여 스스로 동네를 이룬 곳인데, 이 곳에 살던 신라인들 가운데에는 장사를 하는 사람, 양주·소주 따위에서 아라비아의 상인 과 무역하는 사람,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국제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보고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며, 아울러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국제 무역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이렇게 활동하는 가운데 해적이 신라인을 잡아다 노예로 사고 파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장보고는 서남 해안에 나타나는 해적을 없애기 위하여 흥덕왕에게 아뢰어,
828년(흥덕왕 3)에 해상 교통의 관문인 완도(莞島)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만 명이나 되는 해군을 거느리고 해안 지대를 경비하여 해적을 완전히 몰아내고 뱃길을 확보하여 황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차지하였다.
당시의 무역 형태는 780년부터 개인적인 무역, 즉 사무역(私貿易)이 일체 금지되었기 때문에, 장보고는 당에 견당 매물사를 보내 이들로 하여금 무역선인 교관선(交關船)을 이끌게 하여 나·당 무역을 혼자 차지하였다.
무역의 형식은 사무역 이외에,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무역을 하고자 하는 나라의 통치자와 예물을 주고받는 방식을 띠는 공무역(公貿易)과 이를 위하여 보내어지는 사신이 몸에 지니고 가는 협대 무역(夾帶貿易)의 길 밖에 없었으므로 교관선을 보낸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신라의 공무역이 장보고 의 민간 무역에 의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아닌 장보고가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을 개인적으로 뽑아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장보고의 세력이 컸음을 말하며, 동시에 나라에서도 그에게 그런 권리를 준 것으로 미루어 그가 주도한 무역은 민간 무역인 점도 있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공식적인 무역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