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1867년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조선 시대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다시 지은 일.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태조가 390여 칸으로 지은 것인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타 버렸다. 그 이후 선조를 비롯한 여러 왕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 하였지만, 공사 규모가 워낙 큰데다가 나라 살림이 넉넉치 못하여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타서 없어진 지 약 270년 만인 1867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섭정 이 된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총 7,225칸의 대궁전이 지어졌다. 경복궁 중건은 흥선 대원군의 여러 가지 개혁 사업 중 하나로, 조선 말기에 들어 외척의 세도에 밀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되찾기 위한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대원군은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고, 영건 도감을 설치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으나, 대원군은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재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왕실과 종친, 관리와 양반들로 하여금 고루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내도록 하였다.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는 일에도 신중을 기하여, 될 수 있는 한 원성을 사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도 이에 호응, 자진하여 부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원군은 농악대· 남사당 등을 불러다 음악과 춤 등으로 부역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1866년 3월 뜻밖에 불이 나서, 왕릉의 목재까지 베어다 쌓아 놓은 목재장이 다 타 버리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모두들 당연히 공사가 중단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대원군은 애초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강행하여 그 후로는 재정을 마련하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는 일에 무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목재를 마련하기 위하여 강원도· 함경도 등의 먼 지방에서 운반해 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중에는 서낭당이나 양반의 선산에 있는 나무까지도 베어 들여야만 했다.
또 공사비가 모자라, 될 수 있는 한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던 방침이 바뀌어
원납전을 받고 벼슬자리를 팔고, 도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그것도 모자라
당백전까지 발행하였다. 당백전은 원래 있던 엽전의 100배의 가치를 지닌 돈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채 20배의 가치도 없는 돈이었다. 따라서 물가가 치솟는 등 경제적으로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1867년 마침내 경복궁이 완공되고, 이듬해인 1868년에는 고종이 옮김으로써 경복궁은 비로소 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