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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궁예(弓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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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弓裔)
[?~918] 후고구려를 세운 왕(재위 901~918년). 신라의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라고도 전한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궁예 (弓裔) [?~918] 후고구려를 세운 왕(재위 901~918년). 신라의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라고도 전한다. 한때 승려가 되었으나, 진성 여왕 6년(892년)에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양길의 부하가 됨 898년에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쳤고,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어 강원도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다. 세력을 넓혀 국력이 커지자, 사치스러운 생활과 횡포로 민심을 잃은 끝에 왕건에게 쫓겨 도망가다가 평강에서 백성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 지식지도 비교
궁예 (弓裔) 훈요 십조 고려 후고구려 후삼국 911년 904년 892년 898년 신라 918년 891년 895년 고려 태조 양길 경문왕 헌안왕 광종 혜종 경순왕 견훤 홍유 배현경 신명순성왕 태후 고려 의조 고려 국조 진성여왕 헌강왕 고려 세조 문성왕 체징
▣ 백과사전
[?~918] 후고구려를 세운 왕(재위 901~918년). 신라의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라고도 전한다.
 
한때 승려가 되었으나, 진성 여왕 6년(892년)에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양길의 부하가 되어 세력을 기르다가, 898년에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쳤고,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어 강원도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다.
 
세력을 넓혀 국력이 커지자, 사치스러운 생활과 횡포로 민심을 잃은 끝에 왕건에게 쫓겨 도망가다가 평강에서 백성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 참조 원문/전문
◈ 조회순
2024.10.20
【문화】 옛날에 왕은 부인을 여럿 두었다. 궁예가 왕이 되니 욕심이 많아져서, 또 한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몇 백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여우는 사람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러한 여우가 궁궐로 들어오니 그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비는 병이 나 드러누웠다. 왕이 용한 의사들을 다 불렀으나 병이 낳지 않았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0
【문화】 궁예가 가평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친 뒤 왕건의 공격을 막아내다 이 산에서 죽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궁예의 무덤은 철원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고 한다. 삼방역이라는 곳인데 궁예가 나무에 기댄 채 미동도 않자, 왕건의 수하들이 확인한 결과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죽음조차 서서 맞이한 그의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18 (+1) | 궁예, 설화, 포천시
2024.10.20
【문화】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자 미륵불이라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승복(僧服)을 입고, 맏아들을 청광(靑光)보살, 둘째 아들을 신광(神光)보살이라 불렀다. 그리고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 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200여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하였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궁예의 군사와 왕건의 군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때였다. 어느 마을에서 양쪽의 군사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의 나무마다 피가 묻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피나무골’이 되었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에 몇 백년 된 고목나무 옆에 서면, 고목에서 ‘아이구 아퍼. 아이구 아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아이들에게 그 고목나무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망봉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예전에 궁예가 왕건을 피해 도망한 곳이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에이, 미련한 놈! 소를 앞에서 몰면 되느냐 응? 뒤에서 몰아야지.” 이 말은 황희 정승이 맨 먼저 한 말이었다.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 보니 어느 미련한 사람이 소를 자꾸만 앞에서 몰고 있었다. 그래서 황희 정승이 그 미련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전투를 할 때,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짓고 대전하였다. 왕건이 반년간이나 치열하게 공격을 해서 결국 궁예가 현등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철원에 궁예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 옆에 ‘삼방역’이라는 조그마한 역이 있다. 그런데 그 역 앞에는 돌담이 하나 있고, 그것이 바로 궁예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옛날에 궁예 왕이 왕건한테 쫓기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 궁예 왕의 첫 도읍지가 철원이었는데 왕건에게 쫓겨나서 관인면 ‘고남산’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 왕건이 그 곳에까지 쳐들어오자 울음산으로 도망을 갔다. 도망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그 산에서 국수를 먹고 갔는데, 그 때문에 그 산봉우리에 ‘국수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3.12.26
【소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인물로 본래 신라의 왕자 출신이었다.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庶子)였다.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 최근등록순
2024.10.24
【문화】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전투를 할 때,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짓고 대전하였다. 왕건이 반년간이나 치열하게 공격을 해서 결국 궁예가 현등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철원에 궁예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 옆에 ‘삼방역’이라는 조그마한 역이 있다. 그런데 그 역 앞에는 돌담이 하나 있고, 그것이 바로 궁예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옛날에 궁예 왕이 왕건한테 쫓기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 궁예 왕의 첫 도읍지가 철원이었는데 왕건에게 쫓겨나서 관인면 ‘고남산’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 왕건이 그 곳에까지 쳐들어오자 울음산으로 도망을 갔다. 도망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그 산에서 국수를 먹고 갔는데, 그 때문에 그 산봉우리에 ‘국수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망봉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예전에 궁예가 왕건을 피해 도망한 곳이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에이, 미련한 놈! 소를 앞에서 몰면 되느냐 응? 뒤에서 몰아야지.” 이 말은 황희 정승이 맨 먼저 한 말이었다.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 보니 어느 미련한 사람이 소를 자꾸만 앞에서 몰고 있었다. 그래서 황희 정승이 그 미련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4
【문화】 궁예의 군사와 왕건의 군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때였다. 어느 마을에서 양쪽의 군사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의 나무마다 피가 묻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피나무골’이 되었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에 몇 백년 된 고목나무 옆에 서면, 고목에서 ‘아이구 아퍼. 아이구 아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아이들에게 그 고목나무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0
【문화】 궁예가 가평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친 뒤 왕건의 공격을 막아내다 이 산에서 죽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궁예의 무덤은 철원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고 한다. 삼방역이라는 곳인데 궁예가 나무에 기댄 채 미동도 않자, 왕건의 수하들이 확인한 결과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죽음조차 서서 맞이한 그의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18 (+1) | 궁예, 설화, 포천시
2024.10.20
【문화】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자 미륵불이라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승복(僧服)을 입고, 맏아들을 청광(靑光)보살, 둘째 아들을 신광(神光)보살이라 불렀다. 그리고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 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200여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하였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10.20
【문화】 옛날에 왕은 부인을 여럿 두었다. 궁예가 왕이 되니 욕심이 많아져서, 또 한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몇 백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여우는 사람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러한 여우가 궁궐로 들어오니 그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비는 병이 나 드러누웠다. 왕이 용한 의사들을 다 불렀으나 병이 낳지 않았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3.12.26
【소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인물로 본래 신라의 왕자 출신이었다.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庶子)였다.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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