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 ~ 1922]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독립 운동가. 본관은 안동이며, 아버지는 예조 판서 응균(應均)이다.
1877년 문관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인 문과에 급제하여, 역대 임금의 글씨나 글 등을 보관하는 규장각의 참서관이 되었다. 1880년에는 삼사의 하나인 사헌부의 감찰이 되었다. 사헌부는 당시의 정치에 관한 논의와 모든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며 풍기와 풍속을 바로 잡고, 백성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이 없나 살피어, 그것을 풀어 주는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1881년에는 장례원 주부가 되었다. 그 뒤 인천항의 통상 사무 아문 주사를 지냈으며, 부수찬·주차 일본 공사관 참찬관·장령·사복 시정·동부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부터는 주일본 판사 대신으로 4년 동안 도쿄(東京)에 머물렀다. 귀국하여 1891년부터는 안동 대도호부 부사를 지냈다.
1894년에는 군국 기무처회 의원이 되어 내정 개혁에 참여하였다.
갑오개혁 이라고도 하는 이 때의 내정 개혁은,
동학 농민 전쟁과
청·일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일본이 동학 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하여 개혁 조치를 진행하자, 이에 대응하는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흥선 대원군을 옹립하여
김홍집 등이 새 정부를 조직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실제로는 친청 세력인 민씨 정권을 해체하여, 청나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새 정부에 참여하였던
김홍집 등 개화파는 입법권을 갖는 초정부적 기관인 국군기무처를 설치하여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제1차 갑오개혁이라고 하며, 노비법 혁파· 화폐 제도 개편 등이 실시되었으며, 2차 갑오개혁 은
박영효가 주도하여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일반적으로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병조 참의·외무 독판 서리·전우국 총판·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는 농상공부 대신이 되었으며, 1896년 중추원 1등 의관을 지냈다.
갑오개혁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 협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897년에는 신구법을 절충하기 위한 교전소의 지사원과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1900년 중추원 의장, 1902년 궁내부 특진관, 1906년에는 충청도 관찰사 를 지냈으며,
대한 자강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규장각 제학을 지냈으며, 1909년에는 대한 자강회 를 계승한 단체인
대한 협회의 회장으로서 친일 단체 일진회 를 성토하였다.
1910년 일본의 국권 침탈로 국권을 빼앗긴 뒤, 일본 정부로부터 주어진 남작 작위를 받았다가 곧 반납하고,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 민족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 운동을 펴 나갔다. 이 해 3월에 대동단 총재의 이름으로 일본에 대한 포고문·통고문 등을 배포하였으며, 대동단 단원이었던
박용만·
나창헌·
손영직 등과 함께 독립 운동을 위하여 성의껏 돈을 내도록 하자는 갹금 권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한 단원의 체포로 대동단이 해체된 뒤, 그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다 병사하였다.
한학에 능통하였으며,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