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 ~ 1924] 한말의 유학자· 의병. 충청 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89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사서에 임명되었고, 이어 성균관 대사성· 형조 참의를 지냈다. 그 해 일본 에 의하여 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세워지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5년 명성 황후가 일본 무뢰배들에게 살해당한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 내각은 우리 나라 전래의 상투 머리를 강제로 짧게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을 내렸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그는
이설·
안병찬 등과 뜻을 모아 홍주 목사
이승우를 권유하여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승우가 일제와 몰래 통함으로써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고종의 특별한 명령으로 석방되었으며, 성균관장· 중추원 의관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왜적과 역적을 토벌하지 못함을 들어 사퇴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이설 등과 함께 이완용 등의 매국노 을사 5적 처단을 상소하여 다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을사 5적이란 이완용· 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외무 대신 박제순과 일본 특명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사이에 맺어진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 찬동 또는 묵인하여 조약 체결을 용이하게 한 사람들을 말한다.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하는 을사조약은 대한 제국을 일제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약으로, 이 조약에 따라 서울에는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임하였다. 이 조약으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6년 김복한은 참판
민종식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과 맞서 나라의 권위를 되찾기 위하여 싸우다가 체포 된 그는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계속 을사 5 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1907년에는 의병을 숨겨 주고 민심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 압송 도중 일본 경찰에게 심하게 구타당하여 그 후유증으로 남은 생애 동안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하였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일제의 심한 감시 속에 집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유림 대표로 곽종석 등과 함께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발송하였다. 뒤에 발각되어 모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투옥되어 옥중에 갇혀 지내다가 중병으로 90여 일 만에 석방되었으며, 1921년부터는 인지사라는 배움의 단체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