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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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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가요 (大衆歌謠)
일반 대중이 즐겨 부르는 노래. 유행가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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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가요 (大衆歌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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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이 즐겨 부르는 노래. 유행가라고도 한다.
 
예술 가곡의 상대적인 말로 예술 가곡이 예술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대중 가요는 감각적인 대중성·오락성·통속성·상업성을 가지고 있고, 민요와도 구분된다.
 
우리 나라에서 대중 가요의 시작은 19세기 말 서양 음악이 들어오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1885년에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가 교육과 선교를 위해 배재 학당과 이화 학당을 설립하여, 찬송가와 창가가 보급하면서 널리 불려졌다. 즉, 선교사 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찬송가를 널리 알리면서 서양 음악 이 퍼지자, 그 노래들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부르기 쉽도록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서양 음악의 형식을 빌어서 간단하게 지은 노래를 '창가(唱歌)'라고 하였고, 1895년에는 일본식 노래가 들어 있는 15가지 종류의 창가집이 나왔다. 이 때부터 1910년경까지는 대부분 서양의 민요나 찬송가를 고쳐서 부르거나 일본 노래를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1910년에는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인 학부에서 《보통 교육 창가집》을 펴냈는데, 내용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펴낸 《소학 창가집》의 곡들을 실었다. 이 때까지는 창가와 대중 가요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1913년에 《유행 소가집》이 나오자 창가는 유행 소가· 유행 잡가·통속 잡가라고 불렀고, 1930년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민간에서는 1909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출신인 이상준이 일본의 창가와 유행가가 여러 곡 실려 있는 《신유행 창가집》과 《조선 속요집》을 펴내며 서양식의 대중 가요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카츄사의 노래》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는데, 이 노래는 당시 연극으로 공연 중이던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부르던 일본의 대중 가요를 우리 나라 말로 고쳐서 부른 것이었다. 이 때까지 대중 가요는 주로 연극 공연 중에 무대에서 부르던 노래였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는 주로 레코드를 통하여 널리 유행하였다.
 
1925년 11월에 조선 레코드에서 발매한 '조선 소리판'이라는 레코드는 《시들은 방초》 《압록강 노래》 《이 풍진 세상》 《장한몽》 등 당시에 유행하였던 일본의 대중 가요를 우리 나라 말로 옮겨 부른 노래를 실었다. 이 때에는 명창들이 민요나 판소리를 일본에서 레코드에 녹음하였다. 《시들은 방초》를 부른 도월색이나 《장한몽》을 부른 김산월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1926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현해탄에서 투신 자살한 윤심덕이 외국 곡인 《도나우강의 잔 물결》에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발표하였다. 이 노래는 우리 나라의 가요 역사상 최초의 히트곡이었다. 그 뒤에도 많은 가요들이 발표되었지만, 창작곡이 발표되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에 창작된 대중 가요는 1927년에 김서정이 작곡하고 이정숙이 부른 《낙화유수》로 1929년에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되었으며, 같은 제목의 영화 에 영화 음악으로 쓰였다. 이 노래는 우리 나라의 5음 음계와 비슷한 형식으로 작곡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김서정은 그 뒤에도 《강남 제비》 《봄 노래》 《세 동무》 등을 작곡하였으며, 1928년에는 전수린이 작곡하고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 옛터》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때에는 가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연극 배우들이 불렀는데 이들을 '막간 가수'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이후에 레코드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자 이 연극 배우 출신의 막간 가수들이 많은 레코드를 발표하였다. 이 때에 막간 가수로 활동하였던 연극 배우들은 강석연·강홍식·김선영·김선초·김연실·나품심·남궁 선·복혜숙·이애리수 등이다. 또한 1930년대에는 민요 가락에 서양 악기로 반주를 한 민요풍의 노래들도 나왔는데, 《노다지 타령》 《노들 강변》 《능수버들》 《대한 팔경》 《맹꽁이 타령》 《오동나무》 《울산 큰애기》 《장기 타령》 《피리 소리》 등이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박부용· 선우 일선·왕수복·이화자 등 대부분 기생 출신이었다. 1931년에는 노래만 부르는 직업 가수로서 채규엽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1932년에는 ' 신인 가수 발굴 경연 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고복수가 손목인이 작곡한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을 OK 레코드사에서 취입하여 인기 가수가 되었다. 한편 이 때까지의 작곡가들은 거의 악단에서 연주를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김교성·김서정·김용환·김준영·이용준·문호월·박시춘·손목인·이기영·이봉룡·전수린·형석기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한 작곡가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축음기가 널리 보급되어, 리갈·빅타·시에론·태평·콜럼비아·포리돌·OK 등 각 레코드 회사들이 레코드를 본격적으로 제작하여, 1936년경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레코드들이 많이 나왔다. 그 종류로는 가곡·동요· 민요· 판소리 등과 주로 미국 의 재즈와 팝송을 연주한 경음악, 찬송가, 서양의 고전 음악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러나 대중 가요 레코드가 가장 많았으며, 대부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이 때의 인기 가수로는 강석연·강홍식·김복희· 김정구· 남인수·백년설·이난영·이애리수·장세정·채규엽 등이 있었다. 1931년에는 일본의 유행가인 《술이란 눈물 이냐 한숨이냐》를 채규엽이 우리 나라 말로 불러서 인기를 모으자, 이를 계기로 일본의 대중 가요들을 우리 나라 말로 많이 부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우리 나라 가요도 대부분 일본에서 녹음을 하고 일본인이 편곡하였기 때문에, 일본 가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30년대 후반에는 강제로 노래를 일본어로 부르게 함으로써 점점 일본의 가요와 비슷해졌다. 이 때에 각 레코드 회사의 문예부에서 가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강사랑·고려성·김능인·김상화· 김안서·박영호·왕평·이부풍· 이서구· 이하윤·조명암 등이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일본 가요를 고쳐서 부르거나 일본 가요에 우리 나라 말 가사 를 붙여서 불렀기 때문에, 일본의 대중 가요인 '엔카'와 비슷한 《고향설》 《망향초 사랑》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연락선은 떠난다》 《코스모스 탄식》 등이 인기를 얻었다. 1933년에 《봉자의 노래》 《어느 여급의 자살》이 나온 후에 대중 가요는 사랑이나 이별과 눈물, 그리고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통속적인 가사가 늘어났다. 한편, 1941년 말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일본은 모든 외국 노래를 금지시키고 일본 군가와 애국 가요나 국민 가요만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그래서 우리 나라 학도병의 출정을 아름답게 묘사한 《아들의 혈서》나 《너와 나》 《우리는 제국의 군인이다》 같은 노래 들을 매일 방송하기도 하였다. 이 노래들은 모두 일본어 로 1절 이상씩 불러야 하였고, 공연도 일본식으로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시대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중 가요 는 6·25 전쟁 후에는 전쟁의 슬픔이 담긴 노래들이 많이 나왔다. 《가거라 38선아》 《달도 하나 별도 하나》와 《신라 의 달밤》 《울고 넘는 박달재》는 당시 최고의 인기 가요였다. 또한 6·25 전쟁 중에 부르던 군가의 영향을 받은 《전선 야곡》 《전우가》와 피난민들이 부르던 《굳세어라 금순아》 《꿈에 본 내 고향》 《이별의 부산 정거장》 《한 많은 대동강》 등도 많이 부르던 인기 가요였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 많은 가수들이 희생되었고 납북되기도 하였다.
 
1955년 이후에는 예전과는 다른 가요들이 만들어졌고, 방송을 통하여 건전 가요를 만들고 보급하였다. 《고향에 찾아와도》 《고향초》 《꽃 중의 꽃》 《목장의 노래》 《소녀의 꿈》 《아내의 노래》 《청운의 꿈》 《청춘 목장》들이 바로 이 때에 부르던 건전 가요이다.
 
한편 미국의 팝송과 재즈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노래로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당시의 인기 가요로는 《고향 만리》 《럭키 서울》 《명동 야곡》 《백팔 염주》 《비 내리는 고모령》 《선죽교》 《울어라 은방울》 《저무는 충무로》 등이 있다. 1956년에 드라마의 주제가 《청실 홍실》이 크게 히트하자, 그 후로는 드라마 주제가나 영화 주제가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주제가로 발표하여 인기를 얻은 노래로는 《꿈은 사라지고》 《꿈이여 다시 한 번》 《나 하나의 사랑》 《노란 샤쓰의 사나이》 《딸 7형제》 《맨발의 청춘》 《비극은 없다》 《빨간 마후라》 《산장의 여인》 《카추샤의 노래》 《호반의 벤치》 등이 있다.
 
한편, 1955년 후반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맘보 음악이 인기를 얻자 《도라지 맘보》 《아리랑 맘보》 등이 발표되었고, 그 뒤에도 계속 맘보나 트위스트 리듬의 노래들이 발표되었다.
 
또한 195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 미국 팝송의 영향으로 방송국에서 팝송 프로그램이 방송 되고 DJ라는 새로운 인기 직업이 생겼으며, 주한 미군 부대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김수연·박형준·유주용·최희준 같은 학사 가수들이 나왔으며, 김시스터스·블루 벨스·이시스터스·자니 브러더스 같은 남녀 중창단도 등장하였다.
 
1962년에는 민간 방송국 이 생기게 되어 가요계는 더욱 발전하였다. 그러나 옛날을 그리워하는 복고풍의 가요는 다시 일본 노래와 비슷하다는 시비가 생겨, 1965년에 방송 가요 심의 전문 위원회에서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후에 유행한 일본풍의 노래를 금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가 크게 히트하였고, 1970년을 이으며 나훈아·남진·하춘화 같은 가수들은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때는 한편으로 이탈리아의 대중 가요 인 칸초네와 미국의 로큰롤을 포함한 팝송 등이 젊은이들의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는 포크송이라는 새로운 대중 가요와 통기타 가수들을 등장시켰다. 이 때 활동한 통기타 가수들로는 김민기·박인희·송창식·양희은·윤형주·이필원·조영남 등이 있다. 특히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과 김민기가 부른 《내 나라 내 겨레》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얻었지만, 운동권 가요로 몰려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를 위한 위문 공연이나 동남 아시아와 미국 등 외국 무대에서도 활동한 곽순옥·김성옥·김 시스터스·로라 성·윤복희·이연옥·패티 김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1970년대는 우리 나라의 대중 가수들이 각종 국제 가요제에서 상을 받아, 우리 가요의 우수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같은 해 11월에 ' 도쿄(동경) 국제 가요제'에서 정훈희가 이봉조가 작곡한 《안개》를 불러 최우수 가창상을 받았으며, 그 뒤에도 계속 김상희·박경희·정미조·혜은이 등 여러 가수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가요제에서 상을 받아 우리 나라의 가요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우리 나라에서도 1977년부터 서울에서 국제 가요제와 세계 가요제를 열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 가수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로 발전하였다.
 
1980년에는 일본 방송사가 주최하여 우리 나라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 5개국에서 1명씩 참가하는 '아시아 뮤직 포럼'에 출연하였던 조용필이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된 후에, 그가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일본의 가수 15명이 경쟁적으로 레코드를 발표하여 수백만 장이나 팔렸다.
 
이 밖에도 1977년에는 'MBC 대학 가요제'가 열리기 시작하여 통속적인 가요계에 대학생 가수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에도 'MBC 강변 가요제'나 'KBS 대학 가요 축제' 등을 통하여 대학생들이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가 인기를 얻었다. 한때는 가수가 되는 등용문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하였던 '강변 가요제'와 '대학 가요제'는 지금도 계속 열리고 있는데, 이 가요제를 통하여 등장한 심수봉·노사연·박미경·신해철·유열·이선희 등은 지금도 활발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1980년대에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 텔레비전으로 바뀌면서 방송을 통해 듣는 노래에서 보고 듣는 노래로 변하게 되어, 이른바 오디오 가수와 비디오 가수가 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소위 X 세대를 대표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여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시작된 랩을 국내에 소개하여 새로운 음악 세계를 소개하였다. 이 그룹은 우리 고유의 가락을 음악에 삽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또한, 10대의 댄스 가수들이 등장하여 같은 10대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우리 나라의 가요계는 10대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10대의 가요와 기성 세대들이 즐겨 듣는 전통 가요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 나라의 음반 시장은 LP 레코드보다는 청소년이 즐겨 듣는 콤팩트 디스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영상 기술의 발달과 비디오의 보급, 그리고 케이블 텔레비전 의 영향으로 뮤직 비디오 등 영상 위주의 가요가 점점 중요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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