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의 학자
권호문이 지은 노래. '독락곡'이라고도 한다.
율곡 이이의 제자인 그가 30세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낼 때 경기체가의 형식을 빌려 8연으로 지은 시가이다. 제목에는 8곡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곡만이 그의 문집인 《송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초야에 파묻힌 몸이 빈부 귀천을 하늘에 맡기고 유유히 한가롭게 지내는 멋을 나타낸 것이다. 이 독락팔곡은 1215년경 최초의 경기체가인 《한림별곡》이 지어진 이래 조선 시대까지 지속되어온 경기체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경기체가가 쇠퇴기 및 소멸기에 어떻게 형태가 변해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전통적인 경기체가 의 양식은 1연이 6행으로 되었으며, 각 연의 제4행과 제6행에 '경(景) 지 엇더하니 잇고'라는, 구절이 반드시 놓인다. 또 각 행의 음보 수에 있어서도 제1~3행까지는 3음보격으로, 제4~6행까지는 4음보격으로 되어 있고, 각 연은 전대절과 후소절로 크게 나뉘어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독락팔곡은 각 연이 전대절·후소절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행수도 6~10행, 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으로 길어지고, 음보격에서도 4보격이 압도적으로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 '경(景) 지 엇더하니 잇고'라는 구절도 각 연의 맨 끝에 한 번씩만 들어가 있다. 이처럼 경기체가 고유의 전통 양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가사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의 서문에서 작자는 "옛 사람이 말하기를 노래라 하는 것은 흔히 시름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는데, 이 노래 또한 나의 불평에서 나온 것이니, 한편으로는 주자의 말처럼 노래함으로써 뜻을 펴고 성정을 기르겠다."고 했다.
이 글로 볼 때 작자는 강호 자연에서의 자유로운 정서적인 생활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성정을 닦고 기르는 계기로 받아들였으나, 그 이면에는 외로움과 불평이 서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작자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으며, 산과 물을 찾아 노닐며 노래로서 시름을 달래었다. 그의 어머니가 천한 노비였다는 사실은 벼슬길에 장애가 되었을 것이며, 높은 학문을 가지고도 뜻을 펼쳐보지 못한 데서 오는 소외감이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