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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마자랭(Jules Mazarin)
마자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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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마자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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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랭 (Jules Mazarin)
1602~1661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재상이자 추기경.
▣ 지식지도
◈ 요약정보
마자랭 (Jules Mazarin) [1602 ~ 1661]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재상이자 추기경. 어린 국왕 루이 14세를 대신해 재상으로 임명 리슐리외의 정책을 계승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1644년 4월 10일, 베스트팔렌에서의 평화 협상을 추진 그의 많은 노력으로 1648년 10월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짐 30년 전쟁 종결
◈ 지식지도
마자랭 (Jules Mazarin) 낭트 칙령 부르봉가 종교 전쟁 신성 로마 제국 카페 왕조 1661년 1648년 1630년 1635년 1627년 1614년 627년 루이 14세 드 리슐리외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2세 루이 13세 루이 15세 아카데미 프랑세즈 삼총사 베스트팔렌 조약 파리 조약 (1763년) 7년 전쟁 30년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베르사유 궁전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루이 13세 (5) 백과 1614년 (2) 백과 1648년 (2) 백과 30년 전쟁 (2) 부르봉가 (2) 백과 신성 로마 제국 (2) 백과 종교 전쟁 (2) 백과
▣ 백과사전
[1602 ~ 1661]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재상이자 추기경.
 
이탈리아의 로마 근처에 있는 페스치나에서 출생하였는데, 교황의 영토였던 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가톨릭적인 기질과 사고 방식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가톨릭에 귀의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토스카나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이들에게는 마자랭을 포함한 2남 4녀의 자식이 있었다.
 
6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그의 아버지는 마자랭을 로마의 예수회 부속 학교로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다. 이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마자랭은 다시 에스파냐의 마드리드 대학(당시 알칼라데에나레스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였다.
 
1623년에는 교황청의 군대에서 대장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외교 사절이 되었다. 1628년에는 밀라노 주재 교황 특사의 비서로 임명되었고, 1630년 1월에는 프랑스에 파견되어, 만토바 공국 계승 문제를 둘러싼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대한 협상을 리슐리외 추기경과 벌이게 되었다. 이 때 마자랭은 리슐리외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630년 10월 26일에는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전투를 막기 위해 양 진영을 오가며 노력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전쟁을 방지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마자랭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632년에는 로마에서 미술가·음악가들의 모임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교황의 특사로서 파리에 파견되었으며, 그 곳에서 루이 13세의 재상이던 리슐리외 및 실권자들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다시 아비뇽으로 갔다가 1636년 12월에 다시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로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편지 왕래 등으로 계속 프랑스 정치 에 관여하였다.
 
교황청 내에서 프랑스 편의 추기경을 모아 세력을 형성한 마자랭을,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는 추기경 으로 추천하였고, 1639년에는 마자랭에게 프랑스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문서를 전달하였다.
 
마침내 1640년 1월 5일, 파리에 도착한 마자랭은 프랑스에 귀화하여 프랑스 정부의 관리가 되었다. 1641년 12월 16일에는 그 동안의 업적을 인정 받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942년 12월 4일, 리슐리외가 죽고, 이듬해인 1943년 5월에 루이 13세마저 사망하자,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는 자신이 신뢰하던 마자랭을 어린 국왕 루이 14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어 갈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성품이 부드럽고 사교적이며 재주와 기질이 뛰어난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정책을 계승하여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1644년 4월 10일, 베스트팔렌에서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였고, 외교적 자질을 충분히 갖춘 외교관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으며, 명성 있는 훌륭한 군인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결국 그의 많은 노력으로 1648년 10월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게 되었다. 이 조약은 유럽 각국들이 30년 동안 싸운 30년 전쟁을 끝나게 했다. 또한 유럽의 대표적인 국가들을 모아, 봉건적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황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부정하고, 근대적 주권 국가 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1658년 8월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힘이 약한 것을 기회로, 독일 연방들과 방위 동맹을 맺었고, 1657년에는 영국과도 동맹을 맺었으며, 1959년 6월에는 스페인의 한 요새를 빼앗아 영국에 넘겨 주기도 했다. 이 해에는 또한 오랫동안 싸우던 스페인과의 평화 교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60년의 올리바 조약코펜하겐 조약 그리고 1661년 2월에 맺어진 파리 조약을 통해 평화 교섭이 마무리 되기에 이르렀다.
 
마자랭은 대외적으로는 독일이 서로 분리되어 대립하는 상태를 지속하도록 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절대주의 노선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파리의 유력 인사 에게 부과한 새로운 세금이 불만을 일으키게 하여, 국민의 저항을 자초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프롱드의 난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 와 마자랭은 두 번이나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다가 1653년에 난을 수습하였으며, 1954년,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재상의 실력을 발휘하여 1959년,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가 피레네 조약을 승인하도록 함으로써 프랑스의 국위를 높이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질서 유지에 성공하였으며, 예술을 애호하여 작곡가 J. 륄리 등의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한편 훌륭한 예술품들을 많이 수집했으며,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자신의 저택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오페라를 프랑스에서 공연시키기도 했고, 왕립 미술 학교를 창설했으며, 현재 프랑스 학술원으로 불리는 마자랭 도서관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마자랭은 자신이 재상으로 있을 때 프랑스의 영토 가 된 알자스·루시옹· 플랑드르 아르투아·피네롤로 등의 4개의 주 지역 청년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4개국 대학'으로 불리는 학교를 세웠는데, 마자랭 도서관은 이 학교를 세운 궁정에 남아 있다. 이 곳에는 마자랭의 도서를 포함한 막대한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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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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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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