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미국 영화(美國映畵)
미국 영화
자 료 실
▶ 지식지도
원문/전문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about 미국 영화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미국 영화 (美國映畵)
미국에서 발명된 이후 오늘날까지미국 사회에서 제작되고 발전해 온 거듭하며 제작되고 영화의 총칭.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미국 영화 (美國映畵)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 참조 원문/전문
아메리카 영화 시론 근/현대 수필 박인환 (12) 아메리카 영화에 대하여 근/현대 수필 박인환 (8) 전후 미ㆍ영의 인기배우들 근/현대 수필 박인환 (7)
▣ 참조 카달로그
◈ 주요 언급 키워드
박인환 (3) 백과 1948년 (2) 백과 신천지 (2) 영화평론 (2) 평론 (2) 백과
▣ 백과사전
미국에서 발명된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에서 제작되고 발전해 온 거듭하며 제작되고 영화의 총칭. 영화의 기원은 1889년 T.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이 발명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키네토스코프'는 '요지경'과 같은 방식으로 한 번에 한 사람씩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에디슨이 연구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영화처럼 스크린 에 화상을 확대 영사하는 '바이스타코프'를 발명함으로써 엄밀하게 말해서 미국 영화의 원년을 이 때로부터 계산한다. 초기의 영화는 유치한 실사와 촌극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15~30m 정도의 1권짜리로서 입장료 5센트를 받는 싸구려 흥행장에서 상영되었지만 서민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 20세기를 여는 벽두에 탄생한 영화는 급속한 기술의 축적을 이루며 상영 시간이 길어지고 표현 방법도 다채로워졌다. E.S. 포터는 《미국인 소방수 생활》(1902)에서 ' 편집 기법'을 최초로 선보였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화면을 이어 맞추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어 서부극의 효시인 《대열차강도》(1903)에서 표현 수단의 하나인 ' 클로즈업'화면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미국 내 굴지의 영화사이며 세계적인 제작사로 명성을 누리는 메이저급 영화사들의 창업자들은 대부분 유대계였다. 그들은 대개 동유럽으로부터 이민해온 이민 1세, 또는 그들의 2세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리우드에 영화사들을 세웠다. 패러마운트의 A. 주커는 가죽 제품 장사꾼이었고, J. 라스키는 뜨내기 연예인이었으며, MGM의 L.B. 메이어는 넝마 장수, M. 로는 신문팔이, S. 골드윈은 장갑 장수였다. 20세기 폭스사의 창업자 W. 폭스는 밑천이 늘 달랑거리는 소규모 옷감 장수, 유니버설의 K. 렘리는 싸구려 의복을 파는 옷장수, 워너브러더스의 J. 워너는 만담가였으며, 콜럼비아의 H. 콘은 거리의 연예인 출신이었다. 미국 영화가 빠른 시일내에 국제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이 외국 이민자들이 미국 영화계를 평정하다시피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감독·배우·기술자 등이 미국 영화계로 대거 유입되어 미국 영화에 힘을 합류한 것도 그 이유다. 감독으로는 독일의 E. 슈트로하임·F.W. 무르나우, 랑사크·시오드 마크· 스웨덴의 M. 스틸레르, 헝가리의 M. 커티스 감독 등이 있었고 연기자로는 스웨덴 의 그레타 가르보, 독일의 폴라 네그리·마를레네 디트리히· 체코슬로바키아의 헤디 라마르 등이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 2세인 존 포드 감독은 가장 미국 영화다운 서부극 을 만들어 냈으며, 아메리칸 로맨스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카사블랑카》(1942)를 연출한 헝가리 출신의 M. 커티스 감독은 가장 미국적인 애국 정신을 이 영화에 담았다. 미국 영화 업계의 초창기 선두 주자들은 트러스트를 형성하며 뒤늦게 뛰어드는 신규 사업자들에게 가혹한 조건을 부여하였다. 이에 돌파구를 찾고 있던 신규 사업자들은 서부의 캘리포니아 가 거의 일 년 내내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영화 촬영에 가장 적당한 지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1911년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할리우드에 촬영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수년 사이에 할리우드에는 많은 촬영소들이 세워졌다. '할리우드 영화가 곧 미국 영화'로 통하는 할리우드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또한 출연 배우의 인기를 최대한 관리하고 제작과 흥행에 이용하는 '스타 시스템'도 이 무렵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을 펼친 영화인은 D.W. 그리피스 감독이다. 그리피스는 상영 시간 3시간에 달하는 미국 최초의 장편 영화 《국민의 창생》(1915)과 《인톨러런스》(1916) 등의 작품에서 컷백·페이드인·페이드아웃 등의 영화 기법을 창안하였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세계 영화 시장의 90%를 장악한 것은 프랑스 영화였다. 세계 대전을 알리는 포성과 동시에 유럽에서 제작되던 영화는 중단되었다. 반면에 전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은 미국 영화는 정체된 유럽 영화의 수준을 앞지르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영화 장르도 분화하여 서부극 · 슬랩스틱 코미디·연속 활극 등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20년대 후반에 걸쳐서는 무성 영화의 전성기였다. C. 채플린은 독특한 분장을 하고 엎치락뒤치락식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관객을 사로잡았으며, 자신이 직접 연기하고 연출도 겸하여 《황금광 시대》(1925) 등 고전 명작을 남겼다. 서부 개척극에서는 J. 크루스의 《포장마차》(1923), J. 포드의 《철마(鐵馬)》(1924) 등이 영화사에 빛나는 우수작이다. 1920년대 후반에 도래한 세계적 경제 불황은 미국 영화계에도 위기감으로 닥쳐왔다. 영화 업자들은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영화에 소리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돈 후안》(1926)은 토키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사운드 영화 이며, 《재즈 싱어》(1927)는 음악 장면을 동시에 녹음한 작품이다. 영화에 소리를 접목시킨 것은 획기적인 기술 혁신이었으며 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영화 의 토키화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영화 자본과 금융 자본이 결탁되는 현상을 낳았고 할리우드는 월가의 지배를 받게 됐다. 1928년에는 미국 영화가 세계 영화 시장의 85%를 석권하게 되었다. 1929년 몰아닥친 경제 대공황에서 영화 산업만은 불황에도 굳건히 버텨 유망 산업으로 지목되었으며 대자본이 영화 산업으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미국 영화는 유럽 영화들이 예술주의적 전통을 고수한 것과는 달리 오락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정착되었다. 미국 영화와 유럽 영화의 뚜렷한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토키의 접목과 풍부한 자본으로 미국 영화는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을 거듭하며 음악 영화· 서부극·갱 영화· 전쟁 영화· 만화 영화 ·사실적 영화 등, 여러 장르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영화로는 L. 마일스턴의 《서부전선 이상없다》(1930), J. von 슈테른베르크의 《모로코》(1930), F. 카프라의 《어느 날 밤의 살인 사건》(1934), J. 포드의 《역마차》(1939), W. 와일러의 《공작 부인》(1936) 등이 있다. 또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클라크 게이블·비비안 리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는 할리우드 대작주의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O. 웰스가 주연·감독을 겸한 《시민 케인》(1941)은 미국 영화가 지닌 예술성의 정수(精髓)를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에 활약한 스타로는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그레타 가르보·마들레네 디트리히·존 크로포드·험프리 보가트· 헨리 폰다·바바라 스탠윅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미국 영화 는 주요 산업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인력이 24만 명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 4만 명의 인원이 전선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거나, 또는 기록 영화· 선전 영화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영화인들도 국책에 동조하여 병사들과 국민들의 사기 를 드높이는 오락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 멜로드라마· 서부극· 희극· 뮤지컬 등, 대전 중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25%가 이러한 목적을 가진 오락 영화였다. 르네 클레망·장 르누아르·쥘리앵 뒤비비에·장 가뱅 등의 영화인들이 나치즘을 피해 미국 땅에 안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전후에도 오락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시대의 아픔과 인간 의 감정을 솔직하게 다룬 진지하고 리얼리스틱한 경향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만들어진 명작으로는 B.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1945) 《선셋 대로》(1950),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 J. 맨키위츠의 《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1949) 《이브의 모든 것》, E. 카잔의 《워터 프론트》(1952) 등이 있다. 이 작품들에는 전후 미국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해피엔딩을 구가하던 할리우드 영화도 점점 변해 갔다. J. 포드는 《황야의 결투》(1946)에서 서부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서부극이 누리던 영화(榮華)도 1950년대 들어서는 퇴조의 기미를 나타냈다. 전후에 떠오른 남자 배우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말론 브랜도·K. 더글러스·버트 랭커스터 등 개성이 뚜렷한 스타들이 인기를 모았다. 여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오드리 헵번 등 미녀 배우들이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마릴린 먼로를 위시하여 성적 매력을 풍기는 여배우들이 대거 활약하였다. 경제 공황에도 끄떡없는 미국 영화는 텔레비전의 급격한 보급, 레저 활동의 다양화, 영화 제작비의 앙등으로 불리해진 제작 여건, 할리우드 독점 자본의 해체, 관객들의 기호 변화 등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텔레비전 의 대응책으로 3개의 필름을 가로로 잇대어서 영사하는 시네라마, 입체 영화 등이 선보였고, 20세기 폭스사·패러마운트사·MGM사 등에서 '시네마스코프'·'비스타비전'·'파나비전' 등을 개발해 화면의 대형화를 시도한 끝에 60년대에는 70㎜ 영화가 개발되었다. 1930년대부터 컬러 영화가 산발적으로 만들어졌지만 196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컬러 대작 영화 가 흑백 텔레비전을 압도하여 관객들을 일시 나마 극장 으로 불러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데이비드 린이 연출한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R. 와이즈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텔레비전과 무대 연출 경험이 있는 A.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배우 출신 데니스 호퍼가 감독한 《이지 라이더》(1969) 등은 아메리칸 뉴시네마 시대를 연 작품으로 꼽힌다.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종래의 할리우드 영화의 방식과는 달리 현실 감각에 의한 표현과 반체제와 반전을 주제로 하여 새 바람을 일으켰다. 또 이것은 할리우드가 당면한 영화 제작의 애로를 타개하여 미국 영화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F. 코폴라·조지 루카스·스티븐 스필버그 등을 선두로 한 신세대 감독들이 1970년대에 대거 등장하여 《대부》(1972) 《조스》(1975) 《스타워즈》(1977) 등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각각 공전의 히트로 여겨지는 흥행의 대성공을 거두었고 작품성도 인정을 받았다. 1980년대는 특수 효과와 카메라 워크의 기술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해 영화 의 표현력을 더욱 높였다.그 결과 속속 만들어진 《E.T.》(1982) 《플래툰》(1986) 《마지막 황제》(1987) 《레인맨》(1988) 《드라이빙 미스데이지》(1989) 《쥬라기 공원》(1991) 《쉰들러 리스트》(1993) 《영국인 환자》(1996) 등의 영화들은 세계 각처에서 거듭 성공적으로 관객들을 동원하였다. 상업주의의 틀 속에서 형성되는 미국 영화는 흥미 진진한 내용으로 관객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근래에 비디오 카세트와 유선 방송 등의 영향으로 미국 영화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였지만 단순 명쾌한 줄거리에 빠르고 경쾌한 진행, 화려한 액션, 상상을 초월하는 특수효과 등으로 시종 관객을 압도하며 전개된다.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